함양 개평 한옥마을과 일두 산책로 걷기- 양반고을 `개평마을`
산골 마을 한옥 꼭 가보고 싶은 곳..
사진만 봐도 설래이고 정감이가는 풍광이다.
혹시 중복이 된 부분이 있을지 모르니 양해를 바랍니다.
함양 개평 한옥마을과 일두 산책로.
고택을 중심으로 대물림해온 양반고을 `개평마을
이번 함양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었다
양반 고장을 말할 때면 늘 '좌 안동, 우 함양'이란 말이 먼저 떠오른다
함양은 안동 못지않게 양반의 고장으로 손꼽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 개평마을은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향이자
500년이 훨씬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개평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정말 오래된 양반 마을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두 고택을 중심으로 마을 골목마다 유서 깊은 고택이 여러 채 남아 있었다
개평마을 골목길을 거닐어 보고 사진에 담은 풍경들이다.
나는 여행을 여러 곳 다니면서 오래된 마을을 많이 돌아보고 다녔지만
이곳 개평마을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마을 전체가 기품이 있고 오랜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느낌과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말끔한 고택들이 더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함양은 특히 양반의 고장으로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고
선비의 기개와 가문, 학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고
뿌리 깊은 양반의 전통이 그대로 내려오는 곳이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곳이었다
이 마을은 수백 년 동안 대물림해온 유서 깊은 고택이 정말 많았다
일두 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을 필두로 오담 고택(경남 유형문화재 제407호),
풍천 노씨 대종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56호),
노참판댁 고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60호), 하동 정씨 고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61호)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마을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숨어 있는 보물을 찾듯 만날 수 있는 유서 깊은 고가들이 즐비했다
이들 가운데 오담 고택, 풍천 노씨 대종가, 노참판댁 고가는 사람이 실제 거주하는 주거공간이라서
쉽게 집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하여 아쉬움도 남았지만,
겉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멋스럽고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고택들이었다
개평마을
함양의 중심에 위치한 개평마을은 '좌 안동 우 함양' 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유학자를 배출한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선비마을로 조선조 오현 중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동정씨와 풍천노씨 그리고 조계정씨 3개의 가문이 오래도록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면서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일두 정여창 선생, 옥계 노진 선생 등 역사적 위상이 높은 선생을 배출하였다
개평마을은 일두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을 비롯한 많은 전통가옥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선조들이 풍류를 즐겼던 교수정(문화재자료 제76호), 일두선생의 명상의 장소였던 개평리 소나무군락지
(도기념물 제254호) 등 조상의 의식주와 생활풍습 등을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자원이 많이 남아있어 민속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안내문-
개평이라는 이름은 마을 입구에서 보면 두 개울이 하나로 합쳐지는 그 사이로
개평마을이 들어서 있어서 내와 마을이 끼어 있다는 뜻으로 낄 '개(介)'자처럼 생긴데서 유래되었단다
또한 마을과 잇닿아 넓은 들판이 펼쳐져 '개들'이라 불리기도 한단다.
여기서 일두 정여창 선생에 대해 잠시 알아보면
정여창은(1450~1504)은 조선 성리학 사상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하여 조광조, 이언적 , 이황, 조식 등과 같은 성리학자들의 배출을 가능케 한 인물이다
일두 정여창 선생은 조선조 오현의 일인으로서 조선왕조 이후 세인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며
그의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자세는 길이 후세인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고 있는 인물이다.
마당에 들어서면 다른 고택과는 다르게 높은 축대 위에 사랑채가 앉아 있는 모습이 먼저 눈에 띄었다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충효절의(忠孝節義)'라는 글이 사랑채 벽면에 붙어 있었고
한지가 겹겹이 붙어 있어 오랜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한지에 쓰인 글자가 바래거나 해지게 되면 그 위에 다시 한지를 덧대어 똑같이 필사한다고 한다.
일두 고택의 가장 큰 특징은 집 안에 석가산을 조성해놓았다는 점이다.
사랑채 누마루 앞에 조성한 석가산은 돌을 쌓아 만든 산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산에 흙과 돌, 물과 나무가 있듯이 마당 안으로 산을 끌어들여 자연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정원을 만든 것이란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개천
함양 일두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
조선 오현 중의 한 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1450~1504) 선생의 고택으로
현재의 집은 그가 죽은 후 선조 무렵(1570년)에 건축된 것이다
10,000㎡정도의 넓은 집터에는 솟을대문, 행랑채, 사랑채, 안사랑채, 중문간채,
안채, 아래채, 광채, 사당 등의 여러 채의 건물
등이 서 있어 양반 대가로서의 면모를 고루 갖춘 경남 지방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안내문-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정말 오래된 양반 마을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두 고택을 중심으로 마을 골목마다 유서 깊은 고택이 여러 채 남아 있었다
이 마을은 수백 년 동안 대물림해온 유서 깊은 고택이 정말 많았다
일두 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을 필두로 오담 고택(경남 유형문화재 제407호),
풍천 노씨 대종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56호),
노참판댁 고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60호), 하동 정씨 고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61호)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마을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숨어 있는 보물을 찾듯 만날 수 있는 유서 깊은 고가들이 즐비했다
이들 가운데 오담 고택, 풍천 노씨 대종가, 노참판댁 고가는 사람이 실제 거주하는 주거공간이라서
쉽게 집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하여 아쉬움도 남았지만,
겉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멋스럽고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고택들이었다.
솟을대문에는 5개의 충신. 효자의 정려패가 걸려 있어
조선시대 사회제도의 일면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본보기가 된다
이 집은 공간구획 배치가 가장 최적화되어 있고,
세간 살림살이들이 비교적 예스러운 대로 제자리에 보존되고 있어서
당시의 생활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풍수지리상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심었다는 소나무군락,
수령 300~400년생이로 100주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하동정씨와 풍천노씨 그리고 조계정씨 3개의 가문이 오래도록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면서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일두 정여창 선생, 옥계 노진 선생 등 역사적 위상이 높은 선생을 배출하였다.
개평마을
함양의 중심에 위치한 개평마을은 '좌 안동 우 함양' 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유학자를 배출한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선비마을로 조선조 오현 중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개평마을은 일두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을 비롯한 많은 전통가옥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선조들이 풍류를 즐겼던 교수정(문화재자료 제76호), 일두선생의 명상의 장소였던 개평리 소나무군락지
(도기념물 제254호) 등 조상의 의식주와 생활풍습 등을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자원이 많이 남아있어 민속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안내문-
골목길을 걷다가 만난 능소화가
담장 위에 붉게 피어 나를 반겨준다
반가운 마음에 담아보고....
함양 일두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
조선 오현 중의 한 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1450~1504) 선생의 고택으로
현재의 집은 그가 죽은 후 선조 무렵(1570년)에 건축된 것이다
10,000㎡정도의 넓은 집터에는 솟을대문, 행랑채, 사랑채, 안사랑채, 중문간채,
안채, 아래채, 광채, 사당 등의 여러 채의 건물
등이 서 있어 양반 대가로서의 면모를 고루 갖춘 경남 지방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솟을대문에는 5개의 충신. 효자의 정려패가 걸려 있어
조선시대 사회제도의 일면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본보기가 된다
이 집은 공간구획 배치가 가장 최적화되어 있고,
세간 살림살이들이 비교적 예스러운 대로 제자리에 보존되고 있어서
당시의 생활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안내문-
위에 사진에 보는 것과 같이
고택 입구 솟을대문 안쪽으로 홍살문과 함께 붉은색 목판에 흰 글씨가 쓰여 있는 5개의 편액이 있다.
이 편액은 나라에서 하사한 충효 정려(旌閭, 충신, 효자, 열녀가 살던 고장에
붉은색을 칠한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로
집안의 자랑이자 자부심을 표현하는 하나의 징표란다
일두 정여창의 조부를 비롯하여 후손이 하사받은 정려가 무려 5개나 되는데
한집안에서 정려를 5개나 받은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하였다.
여기서 일두 정여창 선생에 대해 잠시 알아보면
정여창은(1450~1504)은 조선 성리학 사상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하여 조광조, 이언적 , 이황, 조식 등과 같은 성리학자들의 배출을 가능케 한 인물이다
일두 정여창 선생은 조선조 오현의 일인으로서 조선왕조 이후 세인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며
그의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자세는 길이 후세인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고 있는 인물이다.
마당에 들어서면 다른 고택과는 다르게 높은 축대 위에 사랑채가 앉아 있는 모습이 먼저 눈에 띄었다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충효절의(忠孝節義)'라는 글이 사랑채 벽면에 붙어 있었고
한지가 겹겹이 붙어 있어 오랜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일두 고택에는 원래 17동의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12동의 건물만 남아 있단다
사랑채와 안채는 조선 후기에 중수되어 현재까지 지켜가고 있는데
건물이 있는 곳곳을 둘러보는데 참 깨끗하고 말끔한 느낌이 들었고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개평이라는 이름은 마을 입구에서 보면 두 개울이 하나로 합쳐지는 그 사이로
개평마을이 들어서 있어서 내와 마을이 끼어 있다는 뜻으로 낄 '개(介)'자처럼 생긴데서 유래되었단다
또한 마을과 잇닿아 넓은 들판이 펼쳐져 '개들'이라 불리기도 한단다.
일두 고택의 가장 큰 특징은 집 안에 석가산을 조성해놓았다는 점이다.
사랑채 누마루 앞에 조성한 석가산은 돌을 쌓아 만든 산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산에 흙과 돌, 물과 나무가 있듯이 마당 안으로 산을 끌어들여
자연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정원을 만든 것이란다.
일두 고택을 돌아보고 개평마을 전체를 돌아보았는데
이곳 개평마을은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좋았다
따로 순서를 정하지 않아도
골목마다 예쁘고 오래된 고택이 정말 많은 마을이었다
마을 골목길을 거닐어 보고
일두 선생의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서 거닐어 보기에 좋았다
일두 선생 산책로를 정일품 농원으로 올라가 보면 마을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개울 건너편으로 낮은 언덕을 따라 소나무 군락이 있었는데
이 소나무 군락은 풍수지리에 따라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심었다고 전해진단다
3~400년 된 적송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언덕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언덕에 올라 바라보는 마을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고
마을과 들판이 어우러져 남덕유산 능선까지 멋지게 다가왔다.
일두 선생 산책로를 따라 언덕 위에서 담은 마을 풍경들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만 봐도 기와지붕이 즐비한 마을은
오래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마을이었다
고택 주변 곳곳에 푸른 나무들과 어울려 멋진 마을 풍경이었다.
푸른 하늘과 살랑이는 바람이 있었지만, 날씨는 무척 더웠다
더운 여름 날씨지만 개평마을을 돌아보는 시간은 더위를 잊게 했다
아름다운 풍경과 옛 선비의 아름다운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더위를 이기는 방법이 아닐까 싶었다.
여름이면 우리 곁에 늘 서성이는 꽃 능소화...
애잔한 전설이 아니더라도 바라보면
어쩐지 마음이 아련해지는 꽃이 아닌가 싶다
나에게만큼은....
양반 마을 개평마을을 거닐어보고
돌아보면서 마음마저 맑아지는 느낌이 들어 좋았던 시간이었다
옛 선비의 세상을 잠시나마 들어가 본 시간이어서 감동이었던 여행,
더운 여름을 이기는 방법의 하나는
이렇게 무작정 떠나보는 여행도 의미가 있다 하겠다.
함양에서 만나본 양반의 고장 개평마을은
참 반듯하고 예스러운 마을이었다
글
내 영혼이 아름다운 날에,너와.
편집과음악=씨밀래
일부출처=내영혼이아름다운날에,가딩,너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