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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하-영혼을 일깨우는 유달산 정상 일등봉

까까마까 2013. 11. 1. 12:57

 

 

 

 

 

 

 

 

 

 

2년전에 남도를 돌 때 보성 녹차밭, 소쇄원 등등을 다녀와서

자료를 올렸었는데 이곳 유달산은 못 올려서 오늘은

" 내 영혼의 아름다운 날들"의

 잘 찍은 영상들과  시인인 초희 님의 여행후기 글을

몇몇 찍은사진을 겸해서 올려봅니다.

유서깊은 역사 이야기를 곁들인 글 이라 아주 유익합니다.

산 정상에서 보는 시내는 그림같은 풍경이였는데

오늘 이렇게 최근사진을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유달산은 예부터 영혼이 거쳐 가는 곳이었다  
 
 
목포 유달산 

 

 

한국관광공사에 따옴

 

 

유달산

 

 

 

 

 

 

 

 

 

 

 

 

 

 

 

 

 

 

 

 

 

 

 

 

 

 

 

 

 

 

 

 
 

 

영달산이라 불리던 목포의 상징, 유달산 노령산맥의 큰 줄기가

 무안반도 남단에 이르러 마지막 용솟음을 한 곳,

 유달산은 면적140ha, 높이 228.3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노령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끝인 산이다.

 유달산은 옛부터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이라 불리웠으며

 도심 속에 우뚝 솟아 목포시와 다도해를 한눈에 굽어보며

 이곳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예혼을 일깨우고 있다.

 

 

 

 

 

 

 

 

 

 

목포 8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꼽히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유달산은

목포시와 다도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높이 228m의 목포 뒷산이다.

기암절벽이 첩첩하여 "호남의 개골" 이라고도 하며

노적봉을 비롯하여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 하여 이름 붙여진

해발 228m의 일등바위(율동바위)와 심판 받은 영혼이 이동한다 하여

이름 지어진 이등바위(이동바위) 로 나뉘어진 유달산은 갖가지 기암괴석과

병풍처럼 솟아오른 기암절벽이 첩첩하며 그 옛날 소식을 전하기 위해

봉수를 올렸던 봉수대와 달성사, 반야사 등의 전통사찰을 볼 수 있다.

 

정상에 올라 서면 다도해의 경관이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오고가는 크고 작은 선박들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대학루, 달성각, 유선각등 5개의 정자가 있으며, 산 아래에는 4.19 기념탑,

충혼탑, 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기념비 등과

조각작품 100점이 전시된 조각공원과 난공원이 있다.

 

 

 

노적봉

유달산전체 보다 더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노적봉이 산초입에 자리잡고 있다.

유달산 입구 도로 건너편에 일부러 가져다 높은 듯 서 있는

큰 바위덩어리 하나가 보이는 데 그곳이 바로 노적봉이다.

 

노적봉은 해발 60m의 바위산으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적은 군사로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이 봉우리를 이엉으로 덮어

멀리서 보면 군량미를 쌓아놓은 큰 노적처럼 보이게 했는데,

이를 본 왜적들은 저렇게 많은 군량을 쌓아두었으니

군사는 얼마나 많겠느냐며 지레놀라 도망쳤다 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로 이 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유달산을 들어서기 위해서는 이 노적봉을 거쳐야 한다.

노적봉을 건너면 유달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이자 유달공원이다.

노적봉 아래 속옷을 입지 않는 여인이 있다.

 다산목이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는 툭 터진 길옆에 민망스런 자태로 앉아있다.

 

 

 

 

목포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말이 있다.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유달산이 있다. 이런 말이 먼저 떠오르는 곳 목포 유달산은

목포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산으로 해발 228m로

높지 않은 산이지만 굉장히 높게 생각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목포 사람들의 자부심 때문이다. 유달산에 오르지 않고는

목포에 다녀왔다 말하지 말라고들 한다.

나는 정말 수없이 유달산을 다녀왔던 기억이 있다.

청소년기를 광주에서 보내면서

친구들과 바다가 보고 싶으면 가장 먼저 달려갔던 곳이 목포였고,

이곳 유달산을 정말 여러 번 올랐던 기억이 있다.

그때를 추억하며 다녀온 유달산은 이렇게 중년이 되어

다시 오르니 무척 감회가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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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의 회상

 

 

유달산은 높지 않으나 산세가 험하고 층층 기암과 절벽이 많아

호남의 개골(皆骨)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산이다.

유달산은 예부터 영혼이 거쳐 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이라 불렸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 그 햇빛을 받아 봉우리가

마치 쇠가 녹아내리는 듯한 색으로 변한다 하여 유달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후 구한말 대학자인 무정 정만조가 유배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유달산에서 시회를 열자 자극을 받은

지방 선비들이 유달정 건립을 논의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산 이름도 유달산이 되었단다.

 

 

 

유달산은 노령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끝에 자리한 산이다.

유달산 전체가 화강암이며 경사가 급하지만 일주 도로를 따라 일부 완만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유달산의 대표 수종은 소나무이며 왕자귀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들이 자생하고 있다.

나는 일주도로를 따라 차를 타고 돌아보았는데 중간마다 내려 목포 시내를 내려다보고

유달산을 올려다 보았다. 여유롭게 걷고 싶었지만

일주도로가 2.7km나 된다 하여 걷기엔 여의치 않았다.

 

 

 

 

 

유달산은 목포 시민의 공원일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명소로 알려져 있어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이 많다.

유달산 공원화가 추진되어 유달 공원, 난 공원, 달성공원, 조각공원을 품에 품고 있다.

유달산은 대학루. 달성각. 유선각. 관운각. 소여정 등의 정자가 있고 어린이 놀이터와

4.19 기념탑. 충혼탑 등이 있고, 산 중턱에는 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또 유달산에는 유달사, 관음사, 수도사 등의 사찰이 품에 안겨 있다.

유달산을 오르면 다도해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목포 시내와 어우러진 다도해 경관은 무척 아름답다.

노적봉 큰 바위 얼굴

학창시절에 배운 노적봉에 대해선 설명을 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다시 살펴보니 신비스럽고 그 유래도 감동적이다.

노적봉의 유래

해발 60m의 바위로 이루어진 이 봉우리에는 1957년 10월부터 1598년 2월까지

목포에 머물고 계시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슬기가 괴인 곳입니다.

충무공께서는 적은 군세로 많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이 봉우리를 짚 마름으로 덮어 군량미를 쌓아 놓은

노적봉처럼 꾸며서 우리의 군사가 많은 것 같이 속여 왜군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있는 뒤로 이 봉우리를 노적봉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유달산 정기를 이어받기 위해 찾아온 사람도 많다고 한다.

나는 유달산에 오르다 힘들면 잠시 쉬면서 내려다보이는 목포시가지와 바다 풍경이

가슴을 확 트여주는 느낌이 정말 좋았다.

 

 

 

 

유달산에 오르기 전에 이순신 동상도 무심히 보고 지나치곤 했었는데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이순신 동상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아계신 애국정신의 상징 이순신 장군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인 1597년 10월 29일부터 이듬해 1598년 2월 17일까지

107일 동안 목포 고하도에 머무르면서 군량을 모으고 군사를 훈련시켜 왜군을 막아내셨다.

장군의 뛰어난 전술과 용감한 기상은 유달산 노적봉과 고하도에 그 혼이 그대로 깃들어 있으며,

장군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고하도에는 이 충무공 기념비가, 유달산에는 충무공 동상이

그 얼을 되새기고 있다. 특히 이 동상은 전국에 있는 수많은 동상 중에 가장 동적으로 표현된

긴장감 넘치는 살아있는 동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노적봉과 함께 역사의 산 교육 공간이다.

-안내문-

전국에 있는 수많은 동상 중에 가장 동적으로 표현된

긴장감 넘치는 살아있는 동상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글을 보고 바라보니 정말 생동감이 넘쳐남을 볼 수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문득 바라다보이는 어린이 헌장이 있는 곳에 서 있던 동상.

 

 

 

 

 

 

 

 

목포의 눈물은 문일석(작사), 손목인(작곡)으로 1945년에 발표되었다.

1933년『조선일보』신춘문예의 향토가요가사로 당선된 노랫말에 일본식의 엔가풍(演歌風)으로 작곡되었다.

이런 이유로, 애상적인 이 곡은 일본인에게도 적지 않은 사랑을 받았다 한다. 모두 3절로 된 노랫말로 된 노래다

1.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2.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3.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 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지나
못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삼 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자취 완연하다…….”로 시작되는 2절의 가사가 문제 되어

한때 일제에 의하여 저항가요로 분류되어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작사자와 가창자가 모두 목포출신인 이 곡은 일본식의 곡풍을 지녔으나 지금도 끊임없이 불리고 있는 곡 가운데 하나이다.

이 곡을 기념하기 위한 한국 최초의 노래비(碑) ‘목포의 눈물’이곳 목포의 유달산 중턱에 세워져 있다.

이곳 노래비가 있는 곳에 서면 목포의 눈물을 들을 수 있다.

당시 스무 살로 이 노래를 불렀던 이난영 선생에게 이 곡은 <목포는 항구다>와 함께 그녀의 대표곡이 되었고

지금 와서는 <목포의 애국가>라고까지 불리고 있다. 이난영 선생만의 비음에

남도의 전통적인 가락이 들어간 목포의 눈물은

지금 들어도 참으로 명곡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애창곡이자 80~90년대

해태 야구의 응원가이기도 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목포의 노래만이 아닌 우리 겨레와 민족의 노래였던 <목포의 눈물 노래비>는 그

 역사와 가치에 비해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다.

되려 여러 번 손보고 고친 자국들이 많아 노래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더욱 애달프게 느껴지지는 것은

약간 지직거리는 노래가 더욱 구슬프게 들려왔다.

유달산에 있는 5개 정자 중 첫 번째인 대학루

 

 

 

 

 

 

 

 

오포대

오포대는 1909년 4월 목포시민에게 정오를 알리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이곳으로부터 약 200m떨어진

김대중 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진 "시민종각"이 위치한 곳에 있었다.

처음의 포는 조선식 선입포로 조선 현종 10년(1671)때 제작 되었으며 높이 5자 구경3치5푼, 중량 733근으로

1회 발사하는데 화약 30량이 소모되었다고 한다. 경기도 광주에서 옮겨와 천기산에서 시험발포 했는데,

발포때마다 뒤로 밀려나가는 구식이었다. 1913년 가격 160원에 일본식 야포로 대치되었고,

이전의 조선식 대포는 일제의 송도신사(목포시 동명동 소재)에 보관하던 중 일제말에 태평양 전쟁을 위해

일본정부가 공출해 가져가 버렸다. 예전에 이 오포는 포탄 없이 화약만 넣어 포를 쏘아 시민들에게 정오를 알리는

기능을 하였는데 전쟁도구를 생활도구로 이용했다는 점이 특이하며

지금도 목포 토박이들은 이 오포소리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1986년 지방문화재 자료 제138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이 오포는 같은 해에 현충사 박물관에 전시된

천자총통을 복제한 모형이다.

-안내문-

 

 

 

 

 

 

 

 

 

 

 

 

 

 

 

 

 

 

 

 

 

 

 

달선각

 

 

 

 

 

 

달선각에서 바라본 목포시 전경이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삼학도를 중심으로 보여지는 풍경이 정말 멋졌다.

유달산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 보인다.

발밑으로 펼쳐지는 시가지 중에는 일본의 흔적이 있는 거리도 있다.

그곳에는 일본의 침탈과 지배를 증거하는 영사관과 동양척식 건물 등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동양척식 건물은 역사박물관으로, 일본절(동봉원사)은 문화센터로 탈바꿈했다.

일본식 정원을 이어받아 가꾼 이훈동 정원은 진귀한 문화재와 정원을 무료 관람하도록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나는 다음날 이곳들을 돌아볼 계획이었다.


삼학도

목포시의 만호동에 속하는 하중도이다.

지금은 육지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옛날엔 배를 타고 건너갔던 항구의 섬으로, 목포 만호청의 땔나무를 구했던 곳이었다.

1897년 목포항이 일본인에 의해 개항되자 섬에도 사람이 들어가 살기 시작하였다.

1928년 유달산이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이 섬에 많은 관광객이 몰려와 낚시와 놀이를 즐겼다.

1950년대 목포항이 비좁아서 대형 선박의 정박이 어려웠기 때문에 신항 공사에 착수하면서 크게 변하였다.

1962년에는 이로면 입암리와의 사이가 매립되어 완전히 섬으로서의 모습을 잃어 버렸다
이 섬의 모습이 학처럼 보여 '삼학도'라 불렸다고 한다. 『1872년지방지도』(무안목포진)에 처음으로 지명이 나타난다.

섬에 무사와 그를 사랑했던 세 처녀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세 처녀가 그를 기다리다 학이 되었으나 이를 모른 무사가 쏜 활을 맞아 죽게 되었다.

학이 떨어진 자리에 세 개의 섬이 솟아나 삼학도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유선각

 

 

 

 

 

 

 

 

 

 

 

 

 

 

 

 

항구도시 목포는 어느 때나 다도해에 그린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다운데

특히 유달산이 봄을 맞으면 개나리꽃으로 유명하다.

유달산의 개나리꽃은 산을 한 바퀴 도는 순환도로를 노랗게 채색하는데

멀리서 보면 유달산이 노란 띠를 두른 것처럼 보이며,

노란 꽃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난 개나리꽃이 산자락을 타고 올라가는 풍경은

노란 치마를 입은 여인을 연상할 만큼 아름답다고 한다. 정말 개나리가 필 때쯤 다시 오고 싶어졌다.

 

 

 

 

 

 

 

정상에서 다도해와 목포 시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작은 산임에도 산의 기세가 병풍의 수폭처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병풍처럼 보이며,

일등 바위(유달산 정상), 이등 바위, 삼등 바위가 있다.

그리고 목포의 야경은 더욱 환상적이다.

또 밤에는 유달산 정상부터 각 봉우리에 조명이 켜져 경관이 환상적이란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그 광경을 직접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먹거리에 빠져 그 밤의 환상을 볼 수 없었다.

 

 

 

 

 

 

 

 

 

목포와 연결된 고하도는 일제가 미국산 육지면(면화)을 처음 들여와 경작 가능성을 시험했던 곳.

재배에 성공한 면화는 급속하게 퍼졌다고 한다

쌀과 면화, 소금이라는 '삼백(三白)'의 교역항이 바로 목포항이었다.

유달산을 내려와 목포 시가지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남도의 향기에 빠져들었던 시간이었다.

어느덧 해는 서산에 기울고....

붉은 노을이 고하도와 연결된 목포대교를 배경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목포의 밤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목포의 눈물처럼 애달픈 노을이 눈앞에 펼쳐지는 가을밤의 풍경과

쌀쌀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이었지만

유달산과 목포 시내를 돌아보며 잠시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던 시간이었다.

역시 '목포는 항구다'

역시 목포는 유달산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게 유달산에도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목포의 밤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목포의 눈물처럼 애달픈 노을이 눈앞에 펼쳐지는 가을밤의 풍경과

쌀쌀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이었지만

유달산과 목포 시내를 돌아보며 잠시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던 시간이었다.

역시 '목포는 항구다'

역시 목포는 유달산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게 유달산에도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편집과 음악=씨밀래

출처=내 영혼이 아름다운날들,진한솔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