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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천황의 고백-나는 한국의 후손이다

까까마까 2013. 12. 5. 14:35

 

‘일본천황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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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의 후손이다.

 

 

 

‘일본천황의 고백’

 

 

=2001 년 12월 일본천황궁에서 아키히토(明仁)
125 대 일본 천황이 한일고대사에 관해

 

 

 

"나 자신, 간무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자손이라고,
속 일본기에 기록되어
있 는 사실에서, 한국과의 인연을 느낍니다."
라고 인정하였다.=

 

 

그 동안 일본인들은 만세일계

(萬 世一系)라고 주장하며 천황가를 신성시해왔다.

만세일 계, 즉 대륙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일본인들만의 혈통이 대대로 이 어져 내려왔다는 것이다.

따 라서, 일본사회에서는 천황의혈통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물론,

언 급을 하는 것조차 금기시 되어 다.

그런데 최초로 일황자신이 일황가의 뿌리가 한국인과 관련이 있다고

공개석상 에서 밝힌 것이다.

 

 

 

*가야귀 족 일본 상륙 2 세기경 한국남부의 가야(伽倻)귀족 일부는 바다를 거쳐

가 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일 본열도의 구주 북부에 도착,

영 농과 금속기 기술을 전달하고

그 들의 야 요이문화(彌生文化)가 일어나도록 했다.

(이때의 일본은 거의 원시시대)

 

 

 

김해김씨 족보에 수로왕의 왕자 10명 중 7명이

하동 칠불사에서 수도한 후 구름을 타 고떠났다는 기록이 있으며

남 규슈 가고시마 유적에 

일본 최초의 궁궐 터가 남아있다.

이곳에서 세력을 강화한 가야인 후손이 일본 중심지역인

천황 신무천황이 되 었다고 전한다.

 

 

같은 시기인 2세기경 남규슈 가고시마 유적에

시치구마 라는 지명이 있으며

금 은 많이 파괴되었지만 7명의 지배자가 웅거했다는 유적이 있다.

가야신을 모시는 7개소의 신사도 있고 7왕자를 주신으로 모신다.

 

인근에는 가라구니우즈미네신사 등 ‘가라’명칭을 붙인 신사들이 많으며
이 지방 향토사학자들은
" 옛날부터 가야 국 7명의 왕자가 이곳에
군림하여 세력을 뻗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일본왕가 의 사학자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는

 "일본신화는 가야신화와 흡사하며 연고가 깊다"면서

가야인이 천황 가문의
조상임을 간접적 긍정한 바 있고 일 본 개국왕 진무천황의
증조부가 바로 수로왕의 왕자들인 것으로 비정(比定)하는

일본 사학자도있다.

 

 

*백 제귀족 일본 상륙

 

 

 

 

396 년~5세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도와 남부를 원정,
백 제를 정벌(396년)한
이 래,

백 제 왕족과 귀족일원 그리고 백성들이 대거 일본으로

이 주하게 되고 가 야세력과 경쟁 끝에

백 제계가 대신 일본을 제패(制覇)하게된다.

이때 백제의 문화와 기술,
한 자등이 건너가 아스카문화(飛鳥文化)가 태동되었다.

신 찬성씨록(新撰姓氏錄)은 815년,

간 무천황의 왕자가 편찬한 책으로,

고 대 일본의 황족과 귀족의 계 보가 적혀 있다.

그 중 황족의 계보에는 천황이 백제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기록되어 있다.

바 로 이 것, “민 달천황(敏達 天皇)의 손자인 백제왕(百濟王)”이라는 글귀다.

간무천황 때 처음으로 제기된

한일동족 론(韓日同族論)은 그 후 에도시대와 명치시대,

일제강점 기, 그 리고 현재까지도 계속 주장되어 온 이야기다.

말 그대로 한국과 일본이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이라는 이 한일동족론은,

그 뜻은 하나이지만,

그 동안 여러 개의 얼굴 을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교류와 협력차원에서,

때로는 침략의 명분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것이다.

 

 

 

*일본학자도 인정

 

 

 

 

(1)이에 광복 후 일본의 역사학계는 활기에 넘쳐 사실(史實)의 진실
여 부를 가리기시작하였다.
그 리하여 수많은 역작이 발표되었거니와,
그 중 최대의 역작이라 할 것은

학 계의 원로인 동 경대학의 교수 에가미나미오(江上波夫)에 의하여 주장된‘

기 마민족국가설’이다.

그에 의하면,

“3세기 경 북아시아에서 활동하던 기마민이 부여·
고구려를 거쳐 가야 방면에 정착하고
있 다가
4세 기 초 낙랑군(樂浪郡)이
멸망하고 백제·신라가 흥기함에 따라 압력을 받게 되자 바다를 건너

북구주로 이동 하였다.

그 뒤 다시 기나이(畿內,교토부 나라현) 지방으로 진출하여 장차
일 본열도를 통일하게 될 국가의 모체를
형 성하였다.” 고 했다.

이 때가 4세기 말엽으로 일본의 천황족(天皇族)이란 가야 출신이며,

천 손강림(天孫降臨)이란

가 야에서 북 구주로 옮겨온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는 동북아시아와 가야·야마토 지방에서 출토되는 무기·마구(馬具) 등
고 고학적 출토품의 유사성으로
보 거나,

일 본의 건국신화가

부 여·고구려·금관국(金官國)의 그것과 유사한 점으로 보거나,

5 세기경의 중 국문헌 등을 참고 로 할 때

실증 된다. 심지어 한국과 일본인들의 DNA까지도 서로 가깝다.

 

 

(2)일본신화 에 천손이 내려온 곳이 구시후루다케(久志布多氣)라는
전 승이 있는데,
이 는 가야의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
구지봉(‘구시’는‘구지’)이었다는 점에서 지 명의 유사성을 엿볼 수 있다.

또, 그 천손은 신성한 이불(眞床追衾)에 싸여 내려왔다고 하는데,
이 것도 수로왕신화와
동 일하고
교 토대 명예교수 우에다 마사아키
또한 일본 천손강림신화가 가야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구 지 봉우리라는 말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신 화에서 천손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천 강)과 그 산이 소호리산 혹은 구시후루 봉우리라고 명기되어 있는
것 에서
가 야의 신화 와 공통된다고 한다.

일 본의 최고의 역사서 일본서기(720)에는

일 본의 선조 니니기노니코토가 내려온 지역을

구 지후루다케 (후루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구지마을이라는 뜻이다.

다 케는 봉오리라는 뜻)라고 기 록하고 있는데

다 시말하면 구지마을 봉오리라는 뜻이다.

바로 가야의 건국신화가 시작된 김해지역의 구지봉과 일치함을 알수있다.

또한 제사를 모시는 신관도 9명이라는 점도 삼국유사에 보면
수 로왕을 맞이한 신관의
숫 자가 9명이라는 점과 놀랍게도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일본어는 한국어와 문법구조가 유사하여 가장 친연성이 있는
언 어로 분류되고
있 을
뿐만 아니라, 일본어의 어휘 중에
우리말과 공통되는 경우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일본서기는 삼류소설

 

 

 

가야계에 서 백제계로 전환한 이민단은 백제가 완전 멸망함에따라
새 국가의 개념을
정 립하여 자기네들 뿌리가 한국계임을 숨겨 완전
단절하려고 덴 무천황때 "일본서기"日本書記(720년)를 다시 쓰게 됐으며
(조작)
이 러한 역사서 찬술을 계기로 왜국은 "일본"으로
국호를 개칭하여 독자적인 체제로 전 환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과 중국 학자들은 일본서기를

“고대 한국인들의 일본열도 진출을 말살하기 위해 악랄하게 조작,
변조 투성이의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조작된 역사(僞史)의 표본이라고
지적하며 또 역사서가 아니라
삼 류 소설을 읽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라고 혹 평하기도 한다.

 

한국이 일본의 뿌리이자 선조임은 확고부동한 진실이다.

일본은 온갖 침략과 역사왜곡과 망언으로 자기네들의 열등의식을


잊 으려고 하고
있 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