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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장안문 그 우람한 예술을 본다

까까마까 2013. 12. 5. 22:27

 

 

 

 

1794년 정조의 명으로 준공하여

1796년 다산 정약용의 거중기를 이용하여 완공하였다는

동영상을 밑에 올렸으니 영상을 다 보신 후 재생해서 보세요.

 

 

 

 

 

중국 자금성처럼 우진각지붕을 가진

수원 장안문 그 우람한 예술을 본다

 

수원 장한문

 

 

 

화성(華城)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4킬로미터성곽이다.

1963년 사적 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 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추어 한국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

 

 

 

 

조선 후기 정조때인 1794년 착공하여 1796년 9월 10일에 준공되었다.

기존에 화강암으로 쌓았던 방식을 버리고 벽돌로 쌓는 축성 공사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사용되었다.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를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시안)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아마 수원화성에서 가장 편하게 산책할수있는 성곽길을 걸을수 있는곳이 아닌가 생각될것 입니다.

북동포루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성외부길을 걸어야 됩니다.

성벽 내부로 걸어보면 그냥 지붕이있고 문이있는 시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북동포루를 보고 흥미를
끌지 못한 사람들중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북동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중 북동쪽 장안문과 화홍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루는
 치성과 같이 성벽을 돌출시켜
검정 벽돌로 쌓았으며 나무 마루판을 이용 3층으로 구획하였다.

벽면에 포를 쏠수있게 구멍을 내어 화포를 두고 위에는  담장을 둘러  

적을 위와 아래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이다.

 수원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정조18년(1794)에 건축되었으며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뜻에서 장안문이라 하였다. 

이 문은 홍예문 위에 2층의 누각을 설치하였으며,

한국전쟁때 문루가 불타고 구조물이 파괴된 것을 1976년 복원하였다고 한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반으로 쪼갠 독과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역할을 한다.

 

 문의 좌우에는 옹성을 공격하는 적을 격퇴할 수 있도록 만든 적대가 있으며, 이것은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시설로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성곽 대문길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걸어보니  
      바라보는 경치도 좋을뿐 아니라 천정의 문양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정조가 그의 아버지의 묘를 수원에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 받는다.

 

 

 

 

 

 

 

 

 

 

 

 

 

 

 

 

장안문 위, 아래, 외부,내부, 멀리서 가까이서 보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어두운 새벽녘에는 야경사진 찍는  한가지 일만 하는 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장안문은 4대문 가운데 가장 아픔이 많은 문이다. 6,25 한국전쟁 때 장안문은 반파가 되었다.

그리고 성문에는 무수한 파편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려온다.

 

 

 

 

 

 

 

 

 

폭격을 받았는데도 반파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장안문이 견고하다는 뜻도 된다.

정조 당시의 화력으로는 아마 적들이 장안문 인근에도 근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안문 옆에는 유명한 보영만두 집이 있었지만 이른 새벽이라 맛 볼수는 없어,

오후 늦은 시간 다시 찾은 곳입니다.   

세세한 구경은 날 밝으면 둘러보는것이 좋을것 같은 곳입니다

 

 

 

 

 

 

 

수원 화성 장안문에 성혈이 있다고?

 

 

장안문은 우리나라의 성곽의 문 중에서는 가장 큰 성문이다.

정조가 장안문을 이렇게 크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장안’이라는 말은 나라의 도읍을 의미한다.

아마도 화성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정조로서는,

이곳 화성을 도읍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나 아니었을까?

그런 장안문은 참으로 견고한 성문이다.

 

 

 

장안문의 안쪽 좌측 기단석에 파여진 성혈

 

 

 

이 한마디가 당시의 장안문의 위용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다.

「성서에는 지금의 성은 화살과 탄환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비록 창이나 선으로 위로 찌른다 해도 전체 높이가 여유가 있고,

대의 양쪽 가장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적이 곧 바로 성 아래로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또 포물선으로 날아오는 화살이나 비스듬히 날아오는 탄환도

대위에 있는 사람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 했다.」

 

 

 

 

 

 

 

 

 

 

 

 

 

 

 

 

편집과음악=씨밀래 

출처=바람이 머무는곳.신한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