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의 초대/영화음악

James Dean을 기억하시나요?

까까마까 2014. 1. 11. 17:40

 

 

  어떻게 단 3편의 영화에서만 주역을 맡았던

고작 24살의 나이로 요절한 한 청년이 세대를 넘어 그리고 

시대를 넘어 계속 불멸의 존재로 남을 수 있었는가 하고 생각하던 터에

 마침 친구가 여행을하던 도중에 "제임스 딘의 묘를 보고서" 에

적은 글을 함께 올립니다.

 

 

 

 

 

 

 

 

 

 

 James Dean을 기억하시나요?

 

 

 

 

 

 

 

 

 

생전의 애마

 

그의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애마 포르쉐 550 스파이더와의 만남도 이루어졌던 것이죠.


 

포르쉐 550 스파이더는 포르쉐 최초로 DOHC엔진을 장착한 모델입니다.

 

뿐만 아니라, 스페이스 프레임 섀시, 알미늄 바디 등 당시로써는

이름도 생소한 새로운 기술들로 경량화를 이룩해냈죠.


덕분에 550 스파이더는 1953년 파리모터살롱 데뷔 이후,

각종 서킷이나 로드 레이스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재임스 딘 을 기억하시나요?

 

 

그리고 그를 아끼는 원로 배우의 예언을 믿어야 하나?



 

 

인디아나州에서 태어나고 UCLA를 졸업 후 영화 "자이언트","에덴의 동쪽"

"이유 없는 반항" 단 3편에 출연하고도 그 명성을 떨친 James Dean의 눈빛과 미소.

 

 



 

 

6월 1일 부터 일 주간 요세미티에서 지내고 내려가는 길을 41번을 택했다.

 

몇 년에 한 번쯤은 이 도로를 지나는데 매년 주위의 야산들이 포도밭으로 변해간다.

 

 
 
 
James Dean - The 50s Rebel by noeling
 
 

                       
46번과 교차하는 지점이 바로 James Dean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곳이라 

 

자연히 그를 생각게 된다.

사고 지점에서 10여m 떨어진 곳 Cholame 작은 상점(커피,샌드위치,식품,술)

 

주차장에 세워진 그를 기리기 위해

일본인 사업가 S.OHNISHI가 세운 조형물이 고목을 감싸고 있다.

 

 

 

 

 

JAMES DEAN

 

1931 Feb 8 - 1955 sep 30 pm5;59

 

*1955년에서 9,5자를 누가 떼어 갔다.

 

사고의 전말을 이렇다.

 

1955년 6월 30일(금) 오후 3시 반경 스피드를 즐기는 James는
 
직접 운전 하고 옆 자석에 친구이자

 

motor mechanic 인 Rolf Wurtherich를 태우고 시속 86 마일로 달리고 반대편에선

이 지방 농부인 Donald Turnupseed가 낡은 트럭을 몰고 오는데
 
납작한 James의 차를

 

전혀 보질 못했다고 한다.

 

정면으로 충돌한 두차에서 James는 인근 Paso Robles 병원에서
 
2시간 후 사망을 발표하지만

 

다른 두 사람은 가벼운 찰과상만 입고 곧바로 걸어서 퇴원했을 정도로 경미했다.

 

 

 

 

James dean의 나이는 불과 24세였다.
          * James Dean가 사망 하기 일 주일 전 마침 Hollywood을 방문 중이던 영국 원로 배우
                       Sir Alec Guinness (1914-2000)을 Los Angles 한 식당에서 대접코저 만났다.
Sir Alec Guinness는 자서전 "Blessings in Disguise (전화위복)"에서

                                                                         
            James는 새로 구입하고 한 번도 타보지 않은
Porsche Spyder sports car를 보여 주기 위하여 나를 파킹장으로 안내했다

나는 이 차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알 수 없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 차 절대로 타지마! (Please,never get in it)
그 시각이 1955년 9월 23일 밤10시였다.
"만약에 네가 이 차를 탄다면 일주일 안으로 넌 죽음을 맞이 할것이다.
"농담이시죠" 하며 James가 웃어 넘기면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다.
그러나 일주일 후 Alec Guinness의 예언은 적중했다.

 

 

 

 

 

 

Sir Alec Guinness (1914-2000)

 

 

Alec가 말한 일주일이란 기간에서 4시간 1분만 이 차를 타지 않고 넘겼더라면

James는 살아 우리에 멋진 모습을 계속 보여 주었을까?

지금 그는 고향 인디아나주 Fremont에 잠들어 있다

여담으로 사고 난 Porsche를 고친 후 이 차를 타는 사람마다 사고로 죽어 폐차 처분한

이 차의 부속품으로 고친 차마저 운전자를 죽음으로 몰아 Porsche의 저주라고들 한다.

 

 

 

 

바람처럼 빨리 가버린 제임스 딘

 

Photo of James Dean

 

 

 

 

 

 

 

 

     오래된 제임스 딘

 

 

    

 

 

 

 

James Dean by artofmoore

 

 

    

 


 

만화가 오경이 씨가 그린

모던타임즈 7월호 부록에

     

 

 

    


     음...사인한 날짜에도 나와있듯이 무려...1989년 6월에 그렸습니다.
여러분들 저때 뭐하셨나욤..ㅋㅋ

이중에 뭐가 인쇄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는데 아마 아래쪽이었을듯.     

르네상스에 이어 두번째로 창간된 순정만화 월간지 '모던타임즈'를 혹시 기억하시나요.

 2호만에 폐간되고 그다음엔 격주간지로 재창간을 했었죠.

그 잡지 이름은 또 뭐였더라...-_-a (10분쯤 뒤에 겨우 생각났는데 그 격주간지 이름은

 '로망스' 였죠. 역시 4호만에 폐간;;)



이 제임스딘 컷은 일러스트 책자에 들어간 컷입니다.

왜 쓸데없이 남의 얼굴을 그려오라고 했는지 그 편집장의 취향을 그때도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암튼 제임스딘을 그려오래서 별로 많지도 않은

제임스딘 사진을 찾아서 그린 게 이 두장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만화가'라고 하면 뭐든지 다 잘그린다고 생각하는지

이쪽에서 '만화가입니다' 라고 소개하는 순간 '나 좀 그려주세요'가 자동으로 튀어나오곤 하죠.

아니 내가 당신을 왜? 만화가는 그런 말 들으면 몹시 기분 나빠집니다. ㅋㅋ


물론 코앞에서 '난 댁을 그려주기 싫어요' 라고 하지는 않지만

가급적 그런 인사는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혹시 '가수입니다' 라고 하면 '노래 좀 불러봐요' 라고 할 건지 매우 궁금하단 말이죠.

 


아무튼 저 역시 만화를 그리긴하지만 제 만화주인공 말고 실존하는 인물을

압축해서 잘 그리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그래서 이렇게 유명인의 캐리커쳐를

그려달라고 하면 몹시 곤란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지못해 괴발새발 그려다 주긴했는데 이건 뭐...캐리커쳐도 아니고 그냥 복사도 아니고 참;;
암튼 제임스딘 사진 보고 그린 두 장입니다.



평소 사용하던 원고지(아마...종이가게에서 '도화지' 라는 이름으로 팔던

180g 짜리 종이였을듯)에 펜터치로만 완성했습니다.

붓질 좀 해주고 화이트로 대충 마무리. (참 쉽죠? <-ㅎㅎㅎ)

 

 

 

 

 

 

 

 

언제던가 나는 “바람처럼 빨리 살고, 아직 젊을 때 죽어서, 아름다운 시체를 남기고 싶다. 그것이 나의 소망이다.”라고

일기장에 그렇게 적었던 적이 있다. 그 무렵의 나는 스스로 막장(漠場)이라 이름 붙였던 연립지하 단칸방 벽에

리바이스 청바지 회사에서 나온 제임스 딘의 커다란 포스터를 붙여 놓고 살았다.

그 방을 찾은 친구들은 종종 내 뜻밖의 취향에 놀라곤 했다. 그 시절엔 코카콜라를 마시는 일조차

미국으로부터 무슨 대단한 뇌물이라도 받아 챙긴 양 비판받곤 하던 시절이었으므로….

할리우드가 제작해낸 젊은 청춘스타의 대형 브로마이드, 그것도 미제 청바지 회사의 광고 사진을

방에 붙여 놓은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었으리라.

그 무렵엔 그가 나와 비슷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다만 그의 상처받은 듯 보이는 눈빛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을 뿐이었다.

 

 

 

dean10.jpg

니콜라스 레이 감독의 <이유없는 반항> 중 한 장면

 

 

 

 

 

도널드 스포토가 지은 『반항아 제임스 딘』(한길사, 1999)을 읽다가 문득 평전에는

대개 필수적으로 딸려 있기 마련인 흔하디흔한 약력 한 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1931년 2월 8일 태어나 1955년 9월 22일 오후 5시 59분, 하이웨이 46과 41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24살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젊은이에게 별도로 소개할 만한 약력 같은 건 애초부터 필요 없었을 지도 모른다.

 

 

제임스 딘이 영화배우로 활동한 기간은 불과 2년 남짓이었고, 그가 출연한 영화는 단 3편이었다.

그나마도 그의 생전에 개봉된 영화는 단 1편 <이유 없는 반항> 뿐이었다.

그의 나머지 대표작들 <에덴의 동쪽>과 <자이언트>는 그가 죽은 뒤에야 개봉되었다.

에드가 모랭은 『스타』(문예출판사, 1997)에서 대개 “할리우드 스타들의 신화적인 실제 생활의 절정기는

스크린에서의 그들의 절정기와 일치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임스 딘의 신화는 제임스 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즉, 제임스 딘의 절정은 죽음 이후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스물 두 살의 신랑과 열아홉 살의 신부

 

 

1930년 7월 26일. 인디애나 주 매리언의 지노 던 목사는 예정에 없던 결혼식을 갑자기 진행하게 되었다.

신랑 윈튼 딘은 스물 두 살이었고, 신부 밀드레드 윌슨은 열아홉 살이었다.

두 사람이 급작스럽게 결혼하게 된 것은 그들의 결혼만큼이나 예정에 없던 신부의 임신 때문이었다.

그녀는 결혼 당시 이미 임신 2개월째였고, 아직까지 청교도적인 기풍이 남아있던 미국 중동부의 분위기 탓에

윈튼은 밀드레드를 책임지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메리언에서 18km 정도 떨어진 페어마운트의 친척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는데, 얼마 뒤 메리언으로 돌아왔다. 이들 부부가 살았던 이스트포스가 430번지 ‘

세븐게이블스’라는 작은 하숙집은 밤낮으로 길고긴 화차를 끄는 기관차가 지나는 곳이었다.

 

 

 

1931년 2월 8일, ‘세븐게이블스’에서 산파만 홀로 지켜보는 가운데 밀드레드는 3.6kg의 건강한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당시 제임스 딘의 아버지 윈튼은 리언 재향군인 관리국 메디컬 센터의 치과에서 치과 기공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 제임스 에믹과 바이런 파이스트의 이름을 따 아들의 이름을 “제임스 바이런 딘”이라고 지었다.

일설에는 어머니가 영국의 시인 바이런을 좋아하여 그 이름을 따 왔다고도 한다.

윈튼은 이들 부부가 혼전 관계로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부끄러워 증명서의 결혼 연도를 1929년으로 바꿨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 결혼했다. 윈튼은 분명 하룻밤 풋사랑으로 여겼을 여인과의

하룻밤 섹스가 제임스 딘을 잉태시켰고, 아버지의 재혼에 화가 나 집을 뛰쳐나온 밀드레드도 우연히

하룻밤을 보낸 윈튼과 결혼할 계획은 없었다. 두 사람은 사랑하지 않았지만 결혼했고,

어울리지 않았지만 이혼하지 않았다

 

 

 

dean09.jpg

스티븐스 감독의 <자이언트> 중 한 장면 -

 

 

 

제임스 딘의 사후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 록 허드슨과 제임스 딘이 각기 남우주연과 조연상에

노미네이트되었으나 결국 감독상만 수상한다. 제임스 딘의 출연 장면을 늘려달라는 팬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스 감독은 꿋꿋하게 영화적인 작업에만 충실했었다.

 

 

 

 

1935년 네 살 무렵의 제임스 딘

 

 

제임스 딘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연기자의 자질이 있었다면

잘 생긴 외모는 아버지로부터 예술적 기질은 어머니로부터 온 것일 것이다.

아버지는 잘 생겼지만, 정기적인 돈벌이가 가능하다는 것으로 족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영화관에 가거나 문화 행사 참여, 독서를 즐겨 했다.

두 사람은 기질적으로도 잘 어울리지 않았으나 이들 부부가 이혼하지 않은 까닭은

대공황이란 사회적 상황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나 도로시아 랭의 사진작품들에서 잘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수백만의 파산자들이 굶주리며 일거리를 찾아 방랑하던 시대에 아버지 윈튼은 재향군인 관리국 직원으로

고정 수입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 밀드레드는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을 견디기 위해 아들에게 늘 책을 읽어주었고,

축음기로 음악을 들려주거나 직접 노래를 불러주었다. 아버지로서 윈튼은 가족에 대해 의무적이었을 뿐이므로

아들 지미(제임스 딘의 애칭)는 어머니와 정신적으로 깊이 연루되었다.

그러나 열 살 무렵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기억은

 평생을 두고 제임스 딘에게 깊은 상처로 남겼다.

 

 

버림받은 소년 - 제임스 딘

 

 

아버지 윈튼은 제임스 딘의 다섯 살 생일에 야구공과 포수 미트, 야구 방망이를 사다 주고

함께 야구를 하려고 했지만 지미는 어려서부터 지독한 근시였기 때문에 솜씨가 별로 좋지 못했다.

아버지는 지미에 대해 더욱 관심을 잃게 되었다. 훗날 제임스 딘은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목표가 무엇인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수 없었죠.

아버진 내 입장이 되어보려고 노력하지 않았죠. 어린 내가 보는 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어요.

나는 늘 어머니와 함께 있었고 매우 가까웠죠. <도널드 스포토,1999, 반항아 제임스 딘, 30쪽>

 

 

 

지미가 열 살 무렵이던 1939년 가을, 어머니 밀드레드의 몸무게가 급속히 줄어들면서,

이따금씩 구토를 하며 복통을 호소했다. 처음 얼마간 견디던 그녀가 다음해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난소암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결국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병원 측에서는 퇴원을 권유한다.

하지만 밀드레드는 퇴원할 수 없었다. 그녀는 1940년 7월 14일 오후 3시경,

제임스 딘의 어머니 밀드레드 윌슨 딘은 불과 스물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지미는 어머니를 잃은 충격을 안고, 할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시신을 기차로 옮겼다.

장례식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제임스 딘은 열차가 정거장에 설 때마다 어머니의 시신이 놓인 화차로 달려가곤 했다.

그런 제임스 딘에게 또 한 가지 충격이 더해졌다. 아버지 윈튼이 아내의 장례식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제임스 딘을 조부모에게 맡겨두고 캘리포니아로 떠나버렸다.

 

 

아이 때문에 원치 않는 결혼을 했던 그에게 아들 지미는, 아내 밀드레드와 함께 그의 자유를 감금한 족쇄였다.

제임스 딘은 고모인 오텐스 딘 윈슬로와 마커스 윈슬로 부부가 대신 양육하게 되었는데,

제임스 딘은 종종 어머니의 묘지에 가서 묘비를 붙들고 울거나 해서 가족이 데려오려 해도

말을 듣지 않아 억지로 떼어놓곤 해야 했다.

 

학교에서도 종종 멍하게 딴 생각을 하던 지미를 선생님이 불러 야단을 쳤다.

어린 지미는 갑자기 반 아이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고아 다름없게 된 조카 지미의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 이들 부부는 지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주려 했고,

그 결과 지미는 고집 센 응석받이가 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이 어린 지미에게 커다란 슬픔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보다 제임스 딘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긴 것은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아내 밀드레드의 죽음과 함께 자식을 팽개치고 떠나버린 아버지로 인해 제임스 딘은 큰 상처를 받았고,

 사람들을 믿지 않게 되었으며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는 고집불통의 아이가 되었다.

고모 가족과 살아가면서 지미는 종종 자신이 바라는 것을 강요함으로써 양부모 역할을 하던 고모 부부를 시험했다.

지미는 고모 부부도 언제든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마치 한 번 주인에게 버림받은 개는 영원히 주인을 믿지 않는다는 말처럼 말이다.

그러나 고모 부부의 노력 덕인지 1942년 무렵이 되어서는

고모 부부를 어머니, 아버지라 부르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재학 무렵의 제임스 딘

 

 

관객을 의식하는 조숙한 소년과 매카시즘

 

 

지미는 자신이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이를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다.

그는 조숙한 어린 아이들이 가질 법한 영리함과 더불어 가족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있는 상처 받은 짐승의 경계심,

간교함을 함께 터득했다. 그는 타인에게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할 때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적절히 활용했고,

남들이 지켜보는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정반대의 행동을 취하곤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늘 늘 관객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칭찬 받는 일에 익숙했고,

좀 더 많은 칭찬을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페어마운트 고등학교 재학 중

 과거 아버지의 실망이 조급했었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거의 모든 운동에 재능을 보였다.

그는 야구, 육상, 농구, 미식 축구 등에서 뛰어난 재질을 보였고, 농구부 주장을 맡기도 했으며,

장대높이뛰기에서는 고교생 기록을 갱신하기도 했다. 또 모터사이클 경주에 출전해 종종 우승하곤 했다.

많은 여학생들이 그를 추종했지만 지미는 그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지미는 자신이 만든 견고한 틀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고교 시절 제임스 딘은 스포츠에 열중했고, 만능 스포츠맨이었으나 그보다 좀 더 열중한 것은 연기였다.

그는 페어마운트 고등학교 연극부를 지도하고 있던 애들라인 놀과 만나면서 자신의 재능에 눈 뜨게 되었고,

놀 선생의 사랑은 무엇보다 그가 애타게 갈구했던 것이기도 했다. 제임스 딘의 이런 성장 과정들은

비슷한 성장 배경을 지녔던 시인 랭보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아버지 프레데릭에게 버림받은 시인 아르투르 랭보는 어린 시절부터 조숙했고,

고등학교에서 문학 선생이었던 이장바르를 만나면서 시적 재능을 만개하게 된다.

놀 선생은 제자인 제임스 딘의 연기 재능을 북돋아주고 그로 하여금

콜로라도 주 롱몬트에서 열리는 연극 낭독 콘테스트에 출전시켰다. 비록 제임스 딘은 아깝게 우승을 놓쳤지만,

제임스 딘 자신이 배우의 길을 걸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제임스 딘이 페어마운트를 떠날 무렵의 미국은 전후 세계 최고의 생활수준을 누릴 만큼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사람들은 더 많은 물건을 구입했고, 더 많은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었다. 이제 과거의 사치품들은 필수품이 되었고,

더 많은 여가를 즐겼다. 1948년 맥도날드 형제들은 간이식당을 셀프서비스 레스토랑으로 바꾸고

“맥도날드”란 이름을 프랜차이즈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1950년 2월 22일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는 의회연설 가운데

“여기 내 손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빨갱이인 주제에 정부에 반대하고 존경받으며,

고위 관직에 앉아 있는 공산당원 2백5명의 명단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라는 폭탄선언을 한다.

1948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주의 정권이 중국에 수립되고, 1949년엔 소련이 원자탄 실험에 성공한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조시프 매카시의 폭탄선언 이전인 1947년 무렵부터

활동한 반미활동조사위원회(HUAC)는 할리우드의 유능한 영화인들을 반미활동 혐의자로 몰아 추방하고 있었다.

 

 

 

1949년 6월 제임스 딘은 가족을 떠나 할리우드에 도착해 아버지 윈튼과 계모 에설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아버지는 불쑥 찾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고, 새 어머니는 너무 낯설었다.

아버지 윈튼은 그에게 부자가 되고 싶다면 변호사가 되고, 재미있게 살고 싶다면 농구 감독이 되라고 조언했지만

아들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 지미는 산타모니카 시립대학 드라마 클럽에서 연기자가 되기 위해 공부했지만

흡족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집을 나와 UCLA에 입학한다.

제임스 딘은 서부 지역의 요란한 대학 캠퍼스 기숙사에 적응하지 못했고,

연극을 전공하는 친구 윌리엄 버스트(훗날 제임스 딘에 대한 회상록을 썼다)와 함께 조그만 아파트를 얻어 독립한다.

이때부터 그는 직업적인 배우로 성공하기 위해 강의를 빼먹으며 오디션에 참가했다.

1951년 봄 제임스 딘은 TV드라마 <제1의 언덕(Hill Number one)>에서 세례자 요한 역을 맡게 된다.

그러나 할리우드 시스템은 그에게 맞지 않았고, 좋은 배역도 주어지지 않았다.

 

 

 

<에덴의 동쪽> 촬형 현장을 찾은 말론 브랜도(좌로부터 엘리아 카잔, 말론 브랜도, 줄리 해리스, 제임스 딘)

 

 

 - 제임스 딘은 비슷한 성장 환경을 가진 말론 브랜도와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존경했고, 따르고 싶어했다.

당시 제임스 딘은 종종 말론 브랜도의 연기 스타일을 흉내낸다는 비평을 받기도 했으나

말론 브랜도와 제임스 딘은 다른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로 하여금 할리우드 시스템에 대한 경멸로 나타난다.

결국 제임스 딘은 다시 가난한 학생으로 돌아가 CBS 방송국에서 안내와

주차장 정리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할리우드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고 있는 테드 아윌리와

라디오 프로듀서였던 로저 브래킷을 만나게 된다. 테드의 소개로 제임스 딘은 1

951년과 52년 사이에 3편의 영화

<Fixed Bayonets>, <Sailor Beware>, <Has Anybody Seen My garl?>에 단역을 맡았고,

친구 버스트와 헤어져 브래킷의 아파트로 옮겨 생활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때로 동성연인의 그것이긴 했으나 제임스 딘의 주요 관심은 동성애에 있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우선 배우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결국 브래킷을 떠나게 된다.

지미가 브래킷을 떠나게 된 데에는 지미에게 할리우드의 인간관계로 재능을 허비하지 말고

뉴욕 액터즈 스튜디오에 들어가 연기 공부를 하라는 브래킷의 충고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할리우드에 실망한 제임스 딘은 뉴욕으로 옮겨 그곳에서 다시 연극에 몰두한다.

그리고 메소드(method) 연기법으로 유명한 뉴욕 액터즈 스튜디오의 최연소 단원이 되었다.

 

 

영화 - 제임스 딘의 유일한 가족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액터즈 스튜디오의 메소드 연기법은 제임스 딘의 연기자적 자질을 한껏 끌어내주는 것이었다.

딘은 뉴욕에서 연극을 하며 점차 연기자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관객 가운데 낯선 인물이 찾아왔다.

그는 마론 브랜도와 함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비바 자파타>, <워터프론트>를 만든 감독 엘리아 카잔이었다.

그는 존 스타인벡의 소설 『에덴의 동쪽』을 영화로 제작할 생각이었고, 동생 캘 트래스크 역에 가장 적합한 배우를 물색 중이었다.

카잔은 제임스 딘을 선택했지만 많은 이들이 딘의 불안정한 성격을 염려했다.

하지만 카잔은 딘에게 무서운 재능이 숨겨져 있음을, 아니 무엇보다 <에덴의 동쪽>에서 그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배우임을 알아챘다.

엘리아 카잔 감독의 예측대로 <에덴의 동쪽>에서 제임스 딘은 첫 주연으로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고,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그의 최고작으로 손꼽게 되었다.

8월 <에덴의 동쪽>을 찍던 마지막날, 줄리(에브러 역)는 세트에 있는 지미의 트레일러를 찾아갔다.

그녀가 몇 번 두드리고 나서야 그는 문을 열었다.


 

 

“그는 슬픔에 몸을 떨며 서 있었죠.”
그녀는 회상한다.
“가엾게 흐느끼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계속 소리쳤죠. ‘끝났어! 다 끝났어!”
“하지만 지미, 이건 너한테는 시작일 뿐이야!”
그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이건 끝났잖아!”
그녀는 지미에게는 영화가 유일한 가족이고,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널드 스포토,1999, 반항아 제임스
딘,255쪽>

 

 

 

<에덴의 동쪽>에서 제임스 딘은 오로지 형 아론만을 사랑하는 아버지 아담의 사랑을 갈구하는 동생 캘 역을 맡아 열연한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캘은 지미 그 자신이었다. 캘은 아버지에게 사랑받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마치 성서에 등장하는 카인이 아벨에게 가하는 복수처럼

 캘은 아론에게 매음굴의 포주로 있는 어머니를 소개한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아론은

술에 취한 채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해버리고, 아버지는 충격으로 쓰러져 버린다.

병상에 누운 아버지는 그제야 “캘, 네가 날 돌봐줬으면 좋겠구나.”라며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캘은 아버지의 병간호를 맡으며 속죄한다. 캘 역의 놀라운 연기 덕분에 제임스 딘은 미국의 관객들에게

말론 브랜도와는 성격이 다른 새로운 반항아의 출현을 알게 되었다.

 

 

 

<에덴의 동쪽>의 한 장면 - 캘(제임스 딘)은 형의 애인 에브러(줄리 해리스)에게 연정을 품는다.

 

 

돈과 명성을 얻게 된 제임스 딘은 알파 로메오와 포르쉐 등 스포츠카를 구입했고,

그의 빠른 유명세를 능가할 만큼 놀라운 속도로 질주하곤 했다. 이 무렵 그에게 새로운 사랑의 대상 피어 안젤리가 나타났다.

제임스 딘의 평전을 쓴 도널드 스포토는 안젤리와 제임스 딘의 관계에 대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사실을 드러낸다.

이전까지는 제임스 딘이 안젤리를 열망했으나 안젤리 부모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져 왔었다.

그러나 스포토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고 말한다.

제임스 딘은 잠시 안젤리를 좋아하긴 했으나 지미는 근본적으로 누구에게도 정착할 수 없었다.

그는 금세 안젤리를 실망시키는 행동들, 다른 여배우들에게 관심을 쏟았고,

질주와 방황이란 불안정한 생활을 지속했다. 결국 제임스 딘과 맺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안젤리는

빅 데이먼과 결혼하여 불행한 결혼 생활 끝에 39세의 나이로 마약 중독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이제 영화사마다 제임스 딘을 주연으로 삼고 싶어 했고, 제임스 딘은 <이유없는 반항>에서

유약한 아버지와 권위적인 어머니 사이에서 방황하는 짐(제임스 딘)으로 등장한다.

그는 고통과 혼란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정으로 떠는 젊은이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제임스 딘은 마치 연기를 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연기했고, 십대들은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제임스 딘은 두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고, 연이어 만난 감독 카잔과 레이는 제임스 딘의 섬세하고 예민하며

불안정한 성격을 자신의 영화 속에서 어떻게 다듬고, 배우를 다독여줘야 할지 잘 알았다. 그러나 <자이언트>는 달랐다.

우선 이전의 영화에서 사실상 단독 주연과 다름없었던 대신에 이 영화에서 그는 먼저 명성을 얻고 있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록 허드슨과 연기해야 했고, 제트 링크 역도 중요하긴 했지만 조역이었다.

스티븐스 감독은 또 권위적인 연출 스타일로 유명했다.

그는 배우가 제멋대로 구는 것을 원치 않았고, 오로지 감독의 지시대로 움직이길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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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 카잔 감독의 <에덴의 동쪽> 

 

 

캘(제임스 딘)은 아버지 아담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아버지가 망친 상추 농사를 대신해

전시작물인 콩을 미치 사들여 큰 이익을 남긴다.

그러나 아버지는 캘의 돈을 거절하여 캘에게 큰 상처를 준다.

 

 

석양을 보기 전에 떠나버린 청춘

 

 

 

영화사측은 제임스 딘의 불안정하고 막무가내인 성격에 제동을 걸어둘 필요가 있었다.

제임스 딘 자신도 할리우드 시스템보다는 뉴욕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그리웠다.

하지만 이미 계약은 맺었고, 그는 좋아하는 자동차 경주를 금지당한 채 연기에만 몰입했다.

그는 계약 당사자인 워너 브러더스의 사장 잭 워너와도 몇 차례 충돌직전까지 가곤 했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국가안전협회 광고의 출연제의를 거절한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은 풍요를 만끽하고 있었기 때문에 십대가 소유한 차들이 엄청나게 늘어나 교통사고가 빈발했다.

국가안전협회는 자동차광이자 십대들의 우상이었던 제임스 딘을 출연시켜 주의를 주는 역할을 해주길 원했다.

워너 브러더스의 여러 영화 관계자들이 그를 설득하려 했으나 제임스 딘은 끝까지 거절하려 했다.

 

 

 

“잘 들어, 이 자식아! 너는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못되게 굴었어.

하지만 이 나라 국민 전체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어. 어서 가서 이 염병할 사회봉사 광고를 해.

아니면 네가 하겠다고 할 때까지 여기 서 있을 테니까.”

 

 

 

결국 지미는 그런 말까지 들은 뒤에야 광고에 출연했다.

광고 마지막에 제임스 딘은 관객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구한 생명은 내 생명일 수도 있으니까요.”1955년 9월 30일.

<자이언트>의 마지막 촬영이 마무리되고, 후반부 작업만 남아 있었다.

제임스 딘은 은색으로 반짝이는 새로 구입한 포르셰 550 스파이더를 타고 쏜살같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구입한 포르셰 스파이더는 르망 대회를 비롯해 각종 경주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차로,

시속 240km까지 속도를 내기 위해 차체는 얇은 철판으로 무게를 줄이고,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았다.

그의 차는 466번 주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교차로에서 그는 다른 편에서 달려오는 차를 발견했지만

자신의 차가 우선권이 있었기에 상대방의 차가 속도를 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임스 딘은 가속 페달을 밟았다. 그러나 그 순간 상대방도 가속 페달을 밟았고,

제임스 딘과 자동차 정비공 롤프를 태운 포르셰는 순식간에 묵직한 중형 세단과 충돌해버렸다.

포르셰는 순식간에 박살났고, 롤프의 몸은 차체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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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상대방 차문이 열리며 스물 세 살의 도널드 턴업시드가 걸어 나왔다.

그는 사고로 약간 놀라긴 했지만 온 몸에 타박상을 입은 정도로 멀쩡했다.

롤프 역시 수많은 골절상과 타박상을 입어 수술을 해야 했지만 생명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제임스 딘은 턱과 팔에 수많은 골절상을 입었고, 여러 군데 내상을 입었다.

 파고든 운전대가 그의 몸을 짓눌렀고 가슴은 운전대의 압력에 부서져 버렸다.

그리고 목뼈가 부러져 그의 머리는 뒤로 젖혀져 있었다. 앰블런스가 도착하고

그의 몸을 차체에서 빼내 구급실로 달려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초 후 제임스 딘은 죽었다.

영화배우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지 16개월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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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스탁이 촬영한 제임스 딘의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 -

매디슨 스퀘어를 걸어가는 제임스 딘

 

 

 

청춘의 아이콘으로 불멸을 얻은 제임스 딘

 

 

제임스 딘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1952년에서 이미 그가 사라지고 없었던 1962년 사이에

할리우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변했거나 혹은 변화를 강제 받았다.

영원히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꿈의 공장(dream factory) 할리우드에 위기의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 중요한 변화는 1952년에 시작되었다.

 이 해 미국 전역에는 최초로 텔레비전 네트워크가 1년 내내 방영되기 시작했다.

이 해는 또한 “와이드 스크린과 스테레오 사운드, 보다 실용적이고 값싼 (이스트만) 컬러가 등장한 해”이기도 했다.

1952년 이전까지 영화는 극장을 찾는 고정 관객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경제적으로 좀 더 풍요롭고,

좀 더 많은 여가 시간을 가진 이들이 가정에서 TV를 시청하거나 실제 스포츠를 즐기고 관람하거나

스테레오 음악을 감상하는데 할애하게 되었다. 영화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영화를 누리지 못했고,

영광스러웠던 과거는 이후 단 한 번도 반복되지 않았다.

 

 

1946년 영화관 수입은 미국 내 전체 오락 지출액의 거의 20%에 달했으나

1962년경에 이르러서는 약 4.5%로 떨어졌다. 영화는 TV와 경쟁하기 위해 세 가지 강력한 무기를 도입한다.

그것은 와이드 스크린과 스테레오 사운드, 그리고 컬러 필름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3D영화와 좀 더 넓은 스크린인 시네라마 등도 도입되었으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일반적인 기술로 정착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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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는 이전에 무성영화가 라디오와 경쟁하기 위해 1927년 무렵부터

 도입되기 시작(좀 더 자세한 내용은 영화 <Singin in the rain>에서 다루도록 하겠다)했지만

하이파이 스테레오, 마그네틱 사운드 시스템(초창기엔 4본 트랙)은 TV와 경쟁하기 위해

와이드 스크린(1.33:1에서 2.55:1로)과 함께 사용되었다.

엘리아 카잔 감독은 이런 기술을 1955년에 제작된 “에덴의 동쪽”에서 극적으로 사용했다.

 

 

 

자신의 애마와 함께 한 제임스 딘

 - 그는 여러 차례 자동차 경주에 출전했고, 나름대로 괜찮은 성적을 내기도 했다.

 

많은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독립 제작사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그저 대중(mob)에 불과했던 관객층이 여러 부류의 관객들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과거 메이저 스튜디오의 가족 관객들은 월트 디즈니가 특별 관리해야 할 관객으로 분류되었고,

젊은이들, 지식인들, 흑인 등 새롭게 분화되기 시작한 관객들은 예전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제작하던 보편적인 내러티브,

장르적 특성에만 충실한 이야기와는 다른 영화를 선호하게 되었다.

각각의 메이저 스튜디오는 오늘날까지 어느 정도 이어지는 그들만의 개성적인 스타일과 스타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파라마운트는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캐롤 롬바드, 프레데릭 마치, 매 웨스트, 캐리 그랜트 등의

스타를 이용해 코미디를, 워너브라더스는 제임스 캐그니, 폴 무니, 험프리 보가트 같은 스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들을 이용해 주로 도시풍의 멜로물들, MGM은 가장 많은 스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당대 최고의 육체파 여배우들이었다. TV라는 강력한 경쟁매체의 출현과 더불어 이 무렵(1940년대 말)

영화 제작부터 상영관에 이르는 영화산업의 모든 분야를 독점하고 있던 메이저 스튜디오(파라마운트)들과

정부간의 오랜 법정 소송 끝에 메이저 스튜디오의 영화관 소유를 독점 금지 조항 위법으로 보는 판결로 인해

더 이상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제작과 배급은 할 수 있으나 영화관은 소유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무렵 영화계에는 새로운 신성(新星)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말론 브랜도와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그들이었다

 

 

 

<이유없는 반항>

중에서 좌로부터 샐 미네오, 제임스 딘, 나탈리 우드

- 색채가 도입되어 반항의 상징이 말론 브랜도의 검은 가죽 재킷에서 제임스 딘의 붉은 재킷이 되기도 했다.

 

 

 

메이저 영화사들은 독점 금지 판결 이후 더 이상 스타의 경력을 키워줄 수 없었고, 그럴 여력도 없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과거의 위대한 영웅들이 사라지고 등장한 새로운 스타들은 그런 굴욕을 견뎌주지 않았다.

20세기 폭스사의 마릴린 먼로는 메이저 스튜디오의 스타 시스템이 제조해낸 히로인이자 최후의 희생자였다.

새로운 스타들은 메이저 스튜디오 스타시스템을 조롱하는 인물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당시의 청춘 아이콘이었던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몽고메리 클리프트 3인방이었다.

이들은 영화 연기가 연극의 연기만 못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영화와 연극 양쪽을 오가며 활동했고,

양쪽에서 모두 성공했다. 이제 스타는 단순히 잘 생긴 외모를 지닌 것 이상을 해내야만 했다.

도리어 폴 뉴먼과 엘리자베스 테일러같이 과거 시대라면 응당 잘 생긴 외모만으로 스타가 되었을 법한 배우들은

자신들의 이미지를 기존의 스타 이미지와는 다른 좀더 거친 이미지로 치장해야 했다.

이제 전형적인 캐릭터는 파괴되었으며 전형적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는 스타가 될 수 없었다.

이들 뒤에 출현한 배우들이 바로 로버트 드 니로, 더스틴 호프만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험프리 보가트는

"제임스 딘은 제때에 죽었다. 그가 살았더라면 평생 가도 절대 이런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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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제화되고 부르주아화된 사회의 어른이란, 많이 죽지 않기 위해 조금밖에 살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러나 청춘의 비밀은, 산다는 것이 죽을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산다는 것에의 열중은,

산다는 것의 불가능성을 체험하는 것이다. 제임스 딘은 이 모습을 체험하였으며,

자신의 죽음 속에서 그 모순을 확인하였다. <에드가 모랭, 『스타』, 202쪽>

 

 

원시사회든, 고대 사회에서든 성인이 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시험 혹은 고통을 통과하는

일정한 통과의례(성인식)를 거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자본주의 사회의 청소년들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었고,

 좀더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런 힘든 과정(병역이든, 대학이든, 결혼이든)을 거쳐

성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가 행복하고, 조화롭기까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합리적인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의

거짓말에 승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청춘은 이런 이데올로기의 거짓말을 수용하기 보다는

다른 곳(제임스 딘처럼 스피드의 세계 혹은 방랑의 세계, 저항의 세계)으로 도피하며 그

곳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 낸다.

그 비밀은 바로 여기에 숨어 있다. 요절한 한 명의 청년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보편적인 청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 역할은 이제 리버 피닉스로 넘어간다. < 2005. 11. 19. 리뉴얼>

 

 

 

 

영화배우 제임스 딘의 러브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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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살 것 처럼 꿈을 꾸고, 내일 죽을 것 처럼 살아라."

제임스 딘 (James Byron Dean) 1931년 2월 8일 - 1955년 9월 30일

청바지, 담배, 반항아 하면 떠오르는 영화 배우 제임스 딘.

24살의 젊은나이로 죽기전까지 그가 영화배우로 활동한 기간은 고작 2년이였으며,

그가 출연한 영화는 단 세편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의 팬은 늘어만 가는듯 하기도 하다.

혜성처럼 나타나 긴여운을 남기고 멀어져 가버린 제임스 딘. 그리고,

길잃은 짐승 같은 그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은 그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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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인생의 전부였어. 어느날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내 앞에 나타난 천사였지."

 

 

 

제임스 딘과 피아 안젤리의 사랑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 이다.

그의 대표작인 "에덴의 동쪽" 촬영 중 지인의 소개로 만난 두사람은 빠른 속도로

사랑에 빠져 들었지만 피아 안젤리의 모친이 종교문제로 반대하여 헤어지고 만다.

그뒤 피아 안젤리는 집안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빅 데이먼과 서둘러 결혼을 하게 된다.

그전부터 제임스 딘은 스피드광이기는 하였지만,

그녀의 결혼이후 더더욱 스피드에 빠져들게 되었으며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녀의 결혼식날 그는 광적인 레이싱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래켰다.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져 하고 싶지 않은 결혼을 한 피아 안젤리 역시 그를 잊지 못했고...

결국 질투에 가득찬 피아 안젤리의 남편이 제임스 딘을 찾아오게 된다.

빅 데이먼은 피아 안젤리가 자신의 아내이니

그녀를 잊는것이 그녀를 위한일이라 당부 하였다.

제임스 딘은 그런 빅 데이먼에게 그녀를 행복하게 해달라고 부탁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0분뒤, 빅 데이먼과의 만남 이후 차를 끌고 고속도로를 달리던 제임스 딘은

충돌사고로 죽고만다... 이렇게 제임스 딘이 죽은 후,

빅 데이먼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은 피아 안젤리는

그와 이혼하고 39살의 나이로 약을 먹고 자살하고만다.

죽기전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사람은 오직 제임스 딘 뿐이였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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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딘과 피아 안젤리)

 

이렇게 제임스 딘이 죽었지만 팬들은 그의 죽음을 믿지 못하여

"그가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어딘가로 떠났다"라든지

"그차에서 발견된 시체는 차를 얻어탄 히치하이커이며

제임스 딘은 팔이나 다리를 잃고 재활센터에 들어갔다"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의 집에는 연일 그의 팬들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미국에서는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10대 소녀가 자살을 하였고,

이탈리아에서는 여대생들이 집단 가출을 하여 거리의 여자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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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 안젤리를 바라보는 제임스 딘

영화에서 그려지는 제임스 딘의 모습이 항상 반항적인 모습이였던 것 처럼

그는 실생활에서도 상당히 반항적이였다고 한다.

지각이 잦았으며 감독들과 큰소리로 싸우기 일수 였다.

불면증 탓에 늘 잠이 모자라 아무곳에서나 잠들곤 했다고 한다.

어린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어린나이에 "잃는다"는 것의 슬픔을 알고만 그는

과묵하고 항상 고독했다. 이런 그는 피아 안젤리에게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라고 얘기했다.

메마른 가슴에 너무나도 촉촉하게 스며들었던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뺏기고,

해지는 붉은 고속도로 위를 미친듯이 달리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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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제임스 딘 사망 66주년

 

 




지금으로 부터66년 전인 1955년 9월 30일.

당시 미국 최고의 배우 제임스 딘(James Dean)이

 

캘리포니아 중부 해안 지역에서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제임스 딘의 사망 소식을 전하고 있는 LA 타임스 1면의 모습.

 

 

 

 

 

 

 

 

 

 

 
 

 

 

 

 

 

 

편집=씨밀래

일부출처=설대홍삼,문화 망명자,오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