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림제(義臨堤)...♡
♡.의림제(義臨堤).♡
우리 나라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저수지로 손꼽힌다.
제천의 옛 이름인 내토(奈吐)·대제(大堤)·내제(奈堤)가 모두
큰 둑이나 제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이 제방의 역사가
서력기원 전후의 시기까지 오르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세종실록≫에는 의림제(義臨堤)라고 표기하였다.
낮은 산줄기 사이를 흐르는 작은 계곡을 막은 제방은 길이가 530척(尺)이며,
수위는 제방 밖의 농경지보다 매우 높아서 관개면적이 400결(結)이나 되었다.
못의 둘레는 5,805척이나 되고 수심은 너무 깊어서 잴 수 없다고 하였다.
상주의 공검지(恭儉池)나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김제의 벽골제(碧骨堤)와 같은 시기의 것이지만
제방의 크기에 비해 몽리면적이 큰 것은 제방을 쌓은 위치의 수위가 높기 때문이다.
현재는 물의 주입부에서부터 토사(土沙)가 쌓여 작아진 것이다.
제방은 산줄기 사이의 낮은 위치에자갈과 흙과 모래·벌흙을 섞어서 층층으로 다지되
제방 외면이 크게 단(段)을 이루도록 하였다.
단면이 이중의 사다리꼴을 이루고 외면은 석재로 보강하였다.
출수구는 본래의 자리가 원토인 석비레층으로 그 위에 축조되었던 것이나
지금은 원형(原形)이 사태로 말미암아 없어지고 패어나간 흔적만 남아 있다.
이 제방은 신라 진흥왕 때 우륵(于勒)이 처음 쌓았다고 하고
그 뒤 약 700여 년 뒤에 박의림(朴義林)이 쌓았다고 한다.
문헌에 기록된 바로는 세종 때 충청도관찰사였던 정인지(鄭麟趾)가 수축하고
다시 1457년(세조 3) 체찰사가 된 정인지가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의 단종복위운동에 대비하여 군사를 모으면서
호서·영남·관동지방의 병사 1,500명을 동원해서 크게 보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뒤 1910년부터 5년 동안 3만여 명의 부역에 의해 보수하였던 것이
1972년의 큰 장마 때 둑이 무너지자 1973년에 다시 복구한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다.
현재의 의림지는 호반둘레가 약 2㎞, 호수면적은 15만 1,470㎡,
저수량은 661만 1,891㎥, 수심은 8∼13m이다.
현재의 몽리면적은 약 300정보에 이른다.
수리관개뿐만 아니라 유서깊은 경승지로 이름이 있으며,
충청도지방에 대한 별칭인 ‘호서(湖西)’라는 말이
바로 이 저수지의 서쪽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제방과 호수주변에는 노송과 수양버들이 늘어섰고
1807년(순조 7)에 세워진 영호정(映湖亭)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鏡湖樓)가 있으며,
이곳 특산물로는 빙어가 유명하다.
안개 속에 숨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 감을 두려워한다
안개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
처럼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