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마까 2017. 8. 31. 14:17


카이사레아(Caesarea)



영어에서는 시저(Caesar), 독일어는 카이저(Kaiser) ,러시아어는차르(czar)로 음역했습니다.

지금은 황제를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습니다.


Cecilia Bartoli, Mozart, "Exultate jubilate"

12;30부터 보시면 기막힌 Coloratura가 나옵니다.




원래 이곳은 고대 페니키아인의 주거지였습니다.


Caesarea는 텔아비브 북쪽으로 45km 거리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고대 항구이자 행정도시입니다.

로마의 황제 Caesar Augustus (BC63-AD14)는 이 도시를 Herod the Great 에게

하사하였는데 헤로데 대왕은 12년에 걸쳐 아름다운  도시와 항구를 증축하여

 황제에게 헌정하면서 황제의 이름으로 도시를 명명하였습니다.

황제에게 도시를 바친다는 의미에서 Caesarea라 했습니다.

초대 황제이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아버지였던 Julius Caesar에서 따왔음을 알 수있습니다.




도시가 팽창하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방인과 유다인은 자주 부딪쳤습니다.

종교와 관습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죠.

Caesarea는 사마리아 북서쪽 지중해 연안에 건설된 항구 도시인데 베드로는 이곳에 살던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이방인을 할례 없이 교회로 받아들인 첫 사례입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결별하는 사건이 됩니다


율법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선포된 것입니다.
BC 13년경부터 로마 총독과 군대는 Caesarea에 거주하며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



기원후 66년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많은 유다인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실이 알려지자 예루살렘 주민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1차 독립운동(66~70)의 시작이 됬습니다.

70년 티투스 장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들을 제압했습니다. 포로들은 Caesarea로 끌고 가서 살해했습니다.

2차 독립운동(132~135) 뒤에는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고 카이사레아를 수도로 삼았습니다.

(내가 전에 올린 Massada 글과 사진 참조)


가이드가 설명허고 있는 상황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오로는 3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Caesarea에 머물렀습니다.

이후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갔다가 성전에서 붙잡힙니다.

유다인들은 바오로를 죽이려 Caesarea에 있는 총독에게 데려갔습니다.

2년간 구금되어 있으면서 총독 페스투스와 임금 아그리파 2세를 만났고 그들 앞에서 변론하였습니다.

바오로가 로마 시민임을 내세워 황제에게상소하자 로마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순교했습니다.

말 경마장 (밴허에서 본 경기장)


항구 건설에는 콘크리트를 이용한 수중공법이 동원되었습니다.
물위에 틀을 만들어 띄운 뒤 콘크리트를 채워 가라앉히는 방법이었습니다.

당시론 획기적 공법으로 세계 최초였다고 합니다.


이해를 돕기위해 구글에서 옮긴 사진

그림으로 그린 당시의 모습.

 옮긴 사진

드론으로 담은 전체 사진



Caesarea is a town on Israel's Mediterranean coast. It’s known for Caesarea National Park,
which includes a large Roman amphitheater and the historic port.
On the site is an archaeological park with pillars and sculptures,
and the remains of a hippodrome with frescoes and stone seating.
The ruins of the seafront Promontory Palace include the remains of a mosaic floor.


상단 왼쪽에 그당시 한국 어느 교회에서 단체로 오신 분들이 모여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 스탠드 전경-



로마의 집정자인 본디오 빌라도가 A.D.First C.에 나사렛 예수를 Trial한 비문이 이곳에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A.D.First C.에 나사렛 예수를 Trial한 비석이 있습니다.  

 BC 4세기에 그리스에 최초로 나타났던 코린트식 기둥 머리 장식이 이곳 카이사리아에서 발견됩니다.
이러한 경향은 비잔틴 시대 말까지 유행하였다고 합니다.

사이트에는 기둥과 조각이있는 고고학 공원이 있으며,
프레스코와 석조 좌석이있는 경마장의 유적.


코린토식의 기둥




출입구로 지중해가 내다 보이는 로마 원형극장(Roman theater

모형도 그 당시의 동전도 보입니다.

1959-1964년 사이에 대규모 발굴과 이스라엘 최초의 대규모 복원공사가 본래의 목적대로 이루어져

하계의 야간에는 야외 연주, 발레, 오페라 등이 공연되고 있습니다.


북쪽 방파제는 200m 남쪽 방파제는 500m에 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카이사레아는 물이 부족했습니다.

식수공급을 위해 9km에 달하는 도수교(導水橋)를 만들어 북쪽 산에서 물을 끌어와야 했습니다.

도수교는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물이 흐르게 하기 위해서 어떤 지역은 다리와 같은 모양으로 수로를 만들어 그 위로 물이 흐르도록 만들었으며,

바위가 있던 곳은 바위를 깎아서 수로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가나안 지방은 우기인 겨울에만 비가 오는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샘물을 비롯하여 항상 물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하여 도시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지중해 연안에 있었던 가이사레아 에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사용하기에

충분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샘이 없었습니다.

도시가 처음 건설되었을 때에는 빗물이나 작은 우물을 사용하여 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점차적으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물을 다른 지역으로부터 끌어오는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수원을 확보하기 위해 헤롯대왕은 로마식 물 공급 시설인

수로(도수교, Aqueduct)를 건설하였습니다.



타 사이트에서 옮긴 사진




수로가 처음으로 세워진 것은 예수님이 태어나실 당시에 유대의 분봉왕이었으며

BC 37부터 BC 4년까지 유대를 통치하였던헤롯 대왕 때였습니다.

그 때 당시 헤롯 대왕은 이 도시를 로마의 황제 Caesar Augustus의 이름으로 건설하고,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약 10 Km 정도의 거리가 떨어진 갈멜 산의 남쪽 기슭에 있었던 Tsabarim 샘으로부터

물을 Caesarea로 끌어들이는 수로를 건설하는 작업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옮긴 사진


수로는 마치 길고 좁은 다리를 연상케 하는 모양으로 건설되었습니다.

진흙벽돌을 쌓아 만든 다리는 아래 부분은 아치 형태로 연결되어 있고

윗부분은 현대의 수로처럼 물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거나

흙으로 빗은 다음 구워서 수도관을 사용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중력을 이용하여 물이 흐르도록 수로의 하향 기울기를 상당히 정교하게 계산하여 건설하였고

꽤 먼 곳까지 물을 흘러 보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헤롯 대왕의 수로는 갈멜산 기슭의 수원지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이사레아까지 21㎞에 걸쳐 이어져 있습니다.

이후 도시가 성장하자 주후 130년께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Jasser a-zarka의 북쪽에 있는 Tanninim (Crocodiles)강에서 시작하여 6㎞의 수로를 건설하였습니다. 

이곳에 있는 물의 높이가 낮아서 댐을 쌓아 호수를 만들어 수위를  높인 다음에 수로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수로를 낮게 만들었기 때문에 어떤 지역은 땅속으로 수로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곳보다도 더 먼 곳인 Shumi Spring으로부터 물을 끌어 올 수 있는 수로를 건설하여

헤롯대왕의 수로와 만나게 했고 수로의 폭을 2배로 확장시켰습니다. 

Cecilia Bartoli, Mozart, "Exultate jubilate"

12;30부터 보시면 기막힌 Coloratura가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