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건물의 정초석(定礎石)은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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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건물의 정초석(定礎石)은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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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건물의 정초석 글씨를 이토 히로부미가 쓴 것이라는 사실은 진즉에 파악할 기회가 있어서
이걸 발굴기사로 삼아 발표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였는데,
알고보니 떠들썩하게는 아닐지라도 이미 연전에
몇몇 신문(경향신문 1992년/국민일보 2009년)에서 언급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자료발굴에 열중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솔직히 좀 김이 샌다 ~~~
어쨌거나 개략적인 사실부터 아래에 정리하고 나서, 차차 기회봐서 보충자료를 여기에 소개할 작정이다.
▲ 사적 제280호 한국은행 본관 (서울 중구 남대문로 3가 110번지)의 정초석이다.
그런데 이 글씨가 이토 히로부미가 쓴 글씨란다.
여기에는 '융희 3년 7월 11일'이라는 표시만 나와 있을 뿐 글씨를 쓴 이에 대한 표시는 나와 있지 않다.
[한 가지 주의사항은 이 때 이 정초석은 한국은행의 건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일제의 강요에 의해 중앙은행격인 되어버린
'제일은행 한국총지점'의 건물에 대한 것으로 쓰여진 것이다.
한국은행이 정식으로 출범한 것은 이보다 약간 시기가 늦다.]
▲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의 접견실 풍경이다. 위의 사진설명문에도 그렇게 나와 있거니와 이 사진은
이토 히로부미가 이 글씨를 썼다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이 공간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사진도 버젓이 걸려있다.
이 모든 게 다 통감부시절부터 한국은행의 설립을 구상한 장본인이 바로 이토 통감이라는 데서 출발하였다.
▲ 정초석 관련부분만 확대하였더니, 현재 남아 있는 '정초(定礎)'라는 글씨와 동일하며
그 왼쪽에는 '명치42년 7월 11일', '공작 이등박문(公爵 伊藤博文)'이라고 쓴 부분이 또렷하다.
여기에 나오는 날짜인 명치 42년(즉 1909년) 7월 11일은 그가 통감에서 물러난 상태로 퇴임인사차
다시 서울로 들렀던 시점에 해당한다.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황제 앞에서 이완용과 더불어 '감우초래점만인이요 ....
' 어쩌구 하던 댓구를 읊은 것이 그해 7월 9일이고,
통감관저에서 마지막으로 '남산각하녹천정 .....
' 어쩌구 하면서 자신의 감회를 담아 시 한 수를 뽑아내던 때가 그해 7월 14일이었으니
그가 '정초석'에 휘호한 때의 상황이 절로 상상이 된다.
▲ 위의 정초석과 현재 남아 있는 정초석의 가장 뚜렷한 차이는 '명치 42년 7월 11일'과 '공작 이등박문' 부분이 사라지고
'융희 3년 7월 11일'이란 것으로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여기에 무슨 연유가 있나 싶어 궁금하던 차에, 여러 번 현장에 가서 살펴보다가 드디어 그 비밀을 알아냈다.
바로 위의 사진부분에 살짝 손을 대어보았더니 원래 글자가 미세하게나마 남아 있던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해방 이후의 어느 시점엔가 한국은행 건물을 보수 내지 복원하면서
이 정초석 부분 가운데 그냥 남겨두기 껄끄러운 '명치 연호'와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부분은 깎아내고
그 자리를 '융희 연호'로 살짝 대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 부분은 어떤 식이든 조금 더 기록을 찾아보면 해방 부분에 대한 사실유무는 저절로 드러날 일이다.
[정초석 부분을 파낸 부분의 테두리선을 따라 여러 개의 홈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 걸로 보면 원래는
이것과는 약간 다른 형식으로 정초석이 부착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덕수궁 대한문 기와지붕에 늘어뜨린 저 쇠사슬(連鎖)의 정체는 무엇일까?
▲ 덕수궁 대한문의 기와지붕을 올려다 보면 용마루에서 기왓골을 타고 내리면서
쇠사슬이 몇 가닥 늘어뜨린 채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오래 전부터 저게 무슨 용도인가 궁금했으나 그 정체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상태였는데,
오늘에사 그 궁금증을 해소하게 되었다.
알고봤더니 저 쇠사슬은 '화재진압용 쇠사슬'이었다.
[철쇄(鐵鎖), 장쇄(長鎖)라는 표현으로도 사용한다.]
불이 났을 때 불을 꺼기 위해 지붕위에 올라간 사람이 저 쇠사슬을 잡고 올라갈 수 있고,
또 지붕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붙잡을 수 있는 용도로 설치한 것이었다.
(이건 그냥 짐작이지만 지붕을 수리(기와교체, 수리, 잡초제거, 풀뽑기 등)하거나
살펴보려 올랐을 때에도 미끄럼 방지용 손잡이로 사용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다.)
▲ 여기에서 표시해 놓았듯이 대한문 기와지붕에는 세 가닥의 쇠사슬이 설치되어 있다.
이런 시설은 궁궐 전각의 몇 군데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간혹 궁궐 건물이 아니면서도 제법 규모가 있는 기와집의 용마루에도
저런 시설되어 있는 곳도 본 적이 있다.
▲ 지난 1970년 당시 대한문을 원래에 자리에서 뒤로 물리는
공사를 벌였을 당시에 촬영한 사진자료이다.
여기에도 지붕에 세 가닥의 쇠사슬이 가지런하게 늘어뜨려놓은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고 보면 이 쇠사슬은 한쪽 지붕에만 설치된 것이 아니라
용마루를 가로질러 양방향으로 가지런히 걸쳐놓은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쇠사슬을 처음 설치하도록 만든 사람은 바로
세종대왕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는 쇠사슬을 처마(簷下) 아래로 늘어뜨리도록 하였다고 했으나
지금은 기와지붕 위에 크게 드러나지 않은 상태로 설치되어 있는 상태인데,
시대가 흐르면서 구체적인 용도나 쇠사슬의 모양도
조금씩 변해왔던 것이 아닌가 짐작할 따름이다.
세종 51권, 13년(1431 신해 / 명 선덕(宣德) 6년) 1월 2일(정묘) 3번째기사
근정전 등에 화재시 사용할 쇠고리를 만들게 하다
승정원에게 전지하기를, “근정전(勤政殿)이 높아서 만일 화재(火災)가 있다면
창졸간에 오르기가 어려울 것이니, 쇠고리를 연쇄(連鎖)하여 처마 아래로 늘여 놓았다가,
화재가 있으면 이를 잡고 오르내리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또 옥상(屋上)이 위험하여 불을 잡으려던 자가 미끄러질 경우 잡을 만한 물건이 없으니,
역시 긴 쇠고리를 만들어서 옥상에 가로 쳐 놓는 것이 어떤가.
총제(摠制) 이천(李蕆)과 더불어 이를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이천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실로 지당하옵니다” 하므로,
드디어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근정전·경회루(慶會樓)·사정전(思政殿)·
문무루(文武樓)·인정전(仁政殿)·광연루(廣延樓)·
모화관(慕華館)에 사용할 쇠고리를 만들어 바치게 하였다.
傳旨承政院: 勤政殿高峻, 如有火災, 倉卒難登, 作鐵鎖垂簷下,
有災則攀援升降若何? 且屋上危險, 救火者蹉跌, 則無可攀之物,
亦用長鎖橫施屋上何如? 其與摠制李蕆議啓。
蕆等曰: “上敎誠然。” 遂命繕工監, 造勤政殿、慶會樓、
思政殿、文武樓、仁政殿、廣延樓、慕華館鐵鎖以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