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역사적 인물의 재조명

애국가, 작곡에만 6년 걸려-안익태 선생님

까까마까 2012. 6. 15. 18:19

ㄴㅂㄷ

 

정명훈씨가 지휘하는 비디오가 음악적으론 이 것 보다는 질이 훨 좋으나 버퍼링이 문제도 있고해서 이것으로 보내오니

자제분들과 같이 들어 보시면 뿌듯할 것 입니다. 보통은 좋은 영상에 끼워넣어 올리는데

KOREA FANTASY는 직접 보시는 것이 예의일 것 같습니다. 웅장함도 볼 만한 동영상 입니다.

읽을 거리가 좀 길지만 한국인의 자부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어보시면 아주 유익한 시간 되시리라 믿습니다.

 

 

 

 

 

 

 

“예술적 음악을 듣고 즐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음악 그 자신이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우리 음악하는 사람의 임무입니다.

좋은 음악, 위대한 예술은 사랑과 화합입니다.” (안익태)

 

 

 

 

 

 

 

 


이 곡은 일종의 대규모적인 서사음악입니다. 교향적 환상곡 <한국>은, 작곡자가 이 작품에 쏟은 집념과 정열,

그리고 오랜 착상과 구상, 또한 작곡에 소요된 오랜 시간적 흐름, 여기에 이 작품이 지닌 방대한 규모와 편성,

작품의 기조를 이룬 작곡자의 역사관과 민족관의 집대성이라는 점 등으로 보아 명실공히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루도 한국인임을 잊은 적 없어" 안익태선생.

 

 

 

 

 

 

 

 

애국가, 작곡에만 6년 걸려”


유가족들 “안 선생, 74개 國歌 연구해 ‘애국가’ 만들어” 육성 공개

올해(2005년)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1906~1965) 선생이 타계한 지 40년이 되는 해다. 내년은 그의 탄생 100주년이다. 지난 3월 말 스페인 발레아르스주 마요르카섬의 팔마시를 찾은 기자는 안익태 선생이 말년을 보낸 자그마한 이층집에서 그가 애국가를 작곡한 과정의 일부를 보여주는 자료를 발견했다. 자료에 따르면 안익태 선생은 그동안 알려진 것처럼 ‘순간적인 감흥’이 아니라 치밀한 준비와 여러 차례의 개작 과정을 통해 애국가를 작곡한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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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선생의 미망인 로리타여사와 가족, 그리고 손학규경기도지사 
왼쪽부터 외손자 미구엘, 아내 롤리타 안과 두 딸.

 

 

 

 

 

 

 

 

 

개화기 여러 종류의 ‘애국가’ 불려..

“1930년 제가 처음으로 미국 상항(桑港·샌프란시스코)에 내렸을 때 우리 한인 동포가 그날 밤 환영회를 해주었습니다. 우리나라 회관에서 그 때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았습니다. 많은 기쁨과 감사를 가지고…. 그 후에 우리는 같이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애국가를 불렀는데 그 곡은 졸업식할 때 부르던 스코틀랜드의 것이었습니다. 내가 먼저 할 일은 국가(國歌)를 짓는 것이라 생각했죠. 그래서 74개 국가를 공부했습니다. 1936년에 독일에서 (애국가를) 작곡했고, 그것이 어떻게 돼서 미국으로 가고 중국 중경(중칭)으로 가서…, 전쟁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독립이 되자 악보가 우리나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1960년대 초 일시 귀국한 안익태 선생의 라디오 인터뷰를 녹음한 것으로 추정되는 육성 테이프 중)

                                                  LA PHIL 지휘ㅡ1943




Los Angeles Philharmonic Orchestra conducted by Ahn, Eaktay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1930년 9월 선편(船便)으로 상항에 내렸을 때 한교회(韓僑會) 사무실에서 태극기를 생전 처음 대했습니다. 그 때 홀연히 영감에 사로잡혀 애국가의 악상을 얻었지요. 그 후 곡을 다듬고 가다듬는 데 5~6년이 걸렸지요….”

(‘애국가가 표절이라고요?’란 제목으로 동양통신의 칼럼니스트 심연섭(沈鍊燮)씨와 인터뷰 내용이 기록된 자료 중)

 

 

 

 

 

 


‘애국가’라는 이름의 가사에 곡조가 붙여져 나타난 것은 조선 말 개화기 이후부터다. 1896년 ‘독립신문’ 창간을 계기로 여러가지의 애국가 가사가 신문에 게재되기 시작했지만 당시 이 노래들이 어떤 곡조로 불렸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대한제국이 서구식 군악대를 조직해 1902년 ‘대한제국 애국가’라는 이름의 국가를 만들어 나라의 주요 행사에 사용했다는 기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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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환상곡Symphonic Fantasia Korea은 우리 민족의 영광과 수난을 함께묘사한

대 서사시는 4부분으로 나뉜다.

 

첫번째는 한국의 전통음악을 토대로 한 서정적인 부분으로,

서두에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전 관현악의 울림으로
장엄한 고조선의 개국을 알리고,
이어서 아름다운 조국 강산을 묘사하는 서정적인 멜로디가 흐르고
거기에 우리의 민요가락이 여러가지 악기소리로 나타나
평화를 사랑하는 순박한 한민족의 심성을 묘사한다.
때때로 타령조의 멜로디가 섞이면서 농민들의 춤사위를 표현하기도 한다.

 

 

 

 

 

 

 

 

 

두번째는 일제의 압제하에서 신음하는 조국의 암울한 모습을 묘사한 부분으로,
이토록 평화롭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을 이 강산을 침노한 일제에게 짓밟혀,
곡상은 무겁고 침통하게 흐르고 만다.
평화롭던 민족의 가락은 끊어지고 일제에 항거하는 투쟁은 계속되나

수많은 애국 지사들의 죽음으로 진혼의 슬픔이 계속된다.

 

 

 

 

 

 

 

세번째는 드디어 광복의 기쁨을 맞는 애국가의 합창부분으로,
이 부분에서 안악태선생은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를 1절부터 4절까지

합창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애국가가 조를 달리하며 소리 높이 울려 퍼질 때
그 감격은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네번째는 6.25 동란으로 인한 처절한 동족간의 싸움을 묘사한 부분으로
한반도는 6.25 동란으로 인한 전화에 휩싸이게 되고

선율은 또다시 슬픔으로 바뀐다.
전통 아악의 정취가 울려 퍼진 뒤에 드디어

"무궁화 삼천리 나의 사랑아, 영광의 태극기 길이 빛나리.

금수강산 화려한 나의 사랑아"하고 외치면서
만세 소리와 함께 한국환상곡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한국환상국은 안익태 선생이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착상하기 시작했고
필라델피아 음악학교를 졸업할 때(1932년) 1부가 완성되었지만
연주되지 못했고, 독일로 건너가 (1936년)애국가를 작곡한 후
후반부에 애국가를 합창으로 삽입하여 에이레의 더블린에서
비로소 초연(1938년) 되었다.

 

 

 

 

한국환상곡에는 선생의 스승인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의 조언이 많이 포함되어있고,
해방까지는 합창부분까지만 연주되어 오다가 6.25 동란이후 제4부(전쟁부분)를

추가시켜 현재의 곡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1938년 "더블린"에서 초연한 이래 선생은1939년 로마교향악단 연주에서 역시
한국환상곡을 공연했고 같은해에 베오그나드 라디오 교향악단,
불가리아 필하모니에서도 연주했는가 하면
1940년에는 부다페스트 필하모니, 1941년에는 쥬리히와 하노버,
1942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니와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필하모니,
1943년에는 다시 베를린 필하모니와 마드리드 심포니,
다시 1944년에는 로마와 파리등에서 총 15회에 걸쳐
한국환상곡을 무대에 올린바 있다.

 

 

 

 

 

 

 


오늘날 불리는 애국가의 가사는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던 1907년을 전후해 조국애와 충성심, 자주의식을 북돋우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알려졌다. 노랫말에 붙여진 곡은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곡을 애국가로 채택해 사용, 해외에서 널리 퍼졌고 국내에서도 광복 이후 정부 수립 무렵까지 여전히 스코틀랜드 민요에 맞춰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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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국내에 알려진 애국가 창작과정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유럽을 향한 안 선생이 1936년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일본 붐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불현듯 6년 전 미국에서 적어둔 가사를 펴놓고 감격 속에서 애국가의 선율을 완성했다’는 것. 안익태 기념재단 홈페이지의 ‘선생이 걸어오신 길’ 부분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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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자료에는 ‘(1936년 미국에서 베를린으로 건너가는 선상에서) 하늘의 계시처럼 뇌리를 스치는 애국가의 가락을 신들린 것처럼 오선지도 없이 테이블 크로스(식탁보)에 적어나갔다. 이 때가 1936년 8월로 그 때 독일은 나치스 히틀러가 득세하여 일본과 공수동맹을 맺고 국위선양을 위한 올림픽 붐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는 등 구체적 상황까지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에 안 선생의 육성 자료를 통해 이같은 내용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너무 당혹스럽고 속상해”


육성 자료에는 “음악가의 의무는 만인에 사랑과 기쁨을 나눠주는 것”이라는 그의 음악가적 신념도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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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화합을 위해 애국가를 작곡했지만 유족들은 지난 3월 ‘저작권 논란’을 겪으며 마음에 적잖은 상처를 받았다. 한국을 찾아 애국가의 저작권을 정부에 무상양도하고 마요르카로 돌아간 지 2주일. 안익태 선생의 외손자 미구엘(28)씨는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인터넷을 통해 찬반 논란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애국가의 저작권을 한국 국민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뜻을 밝혔는데 한국에서는 여러가지 좋지 않은 의견이 올라오더군요. ‘안익태 선생의 유족이 스페인에 사는 것도 한국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유족이 다른 뜻을 품고 흥정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고, 심지어는 ‘이번 기회에 애국가를 바꾸자’는 극단적인 의견도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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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할머니 롤리타 안(89) 여사에겐 한국의 분위기를 단 한마디도 전할 수 없었다고 했다. 남편과 한국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할머니가 얼마나 속상해할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왜 한국민이 우리 가족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까, 저작권에 대한 불만은 정부에 제기해야 하는 것 아닐까. 뒷짐지고 있는 정부에 대해서도 화가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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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60년대에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국제음악제를 개최할 때 국내 음악계의 몰이해에 부딪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40년이 지난 뒤 우리 가족이 또 다시 그와 비슷한 입장에 마주친 셈”이라고 했다. “애국가 저작권을 놓고 국민의 의견이 나뉘는 것은 온국민을 하나로 만들고 화합시키기 위해 애국가를 작곡한 할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난번에 한국을 찾은 것은 ‘2005 경기 방문의 해’ 홍보대사직을 수락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더 이상 이 문제 때문에 국민이 분열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작권 양도에) 깨끗이 서명한 것입니다. 당시 여러 경로를 통해 연락이 닿은 한국 언론도 결국은 ‘무상(for free) 양도냐 아니냐’는 부분에만 관심을 집중하더군요. 씁쓸했습니다.”

 

 

 

 

 

 

 

 

 

 

 


“마요르카 집을 ‘안익태 기념박물관’으로”


사실 안익태 선생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태가 아니다. 안익태 재단에서 매달 보내주는 2500달러가 이들 수입의 전부다. 부쩍 오른 마요르카의 물가도 이들의 삶을 쪼들리게 하고 있다. 미구엘이 최근 3년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안 선생의 셋째딸 레오노르(53)씨가 어머니 롤리타 여사를 돌보기 위해 집으로 들어와 있고 현재 다른 벌이는 없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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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선생 집에 걸려 있는 사진들.

미구엘이 들고 다니는 검정색 손가방에는 ‘안익태’라는 이름이 노란색 실로 새겨져 있다. 그 위에는 태극기가 붙어있다. 그가 사용하는 이메일 주소는 ‘koreame’와 ‘ahneaktai’로 시작한다. 8년 전부터 그의 휴대전화 벨소리는 애국가다. 법학을 전공한 미구엘은 “안익태의 후손으로 한국과 스페인을 잇는 다리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꿈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현재 할머니·어머니와 함께 ‘2005 경기 방문의 해’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것이 전부다.

 

 

 

 

 

 

 

 


그가 살고 있는 마요르카 집의 소유권은 한국 정부에 있다. 1990년대 초반 현지에서 원양업체를 운영하던 권영호씨가 사재를 털어 매입한 뒤 정부에 기증한 것이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갈 때 그곳에서 첫 번째 ‘내 집’을 마련하겠다”던 안 선생의 뜻에 따라 유족은 수십 년간 집을 갖지 않고 전세살이를 했다. 미구엘의 소망은 할아버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마요르카의 집이 ‘안익태 기념박물관’으로 거듭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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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친필 악보를 얇은 종이로 감싸 보관하고 있지만 군데군데 곰팡이가 피었습니다. 체계적인 관리가 절실합니다. 거실 장식장에 빼곡한 각종 안 선생의 유품이 언제 도난당할 지 모릅니다. 불안할 따름입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이웃 건물 탓에 집 주변은 예전의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담 한쪽이 무너지기도 했다. 집 바로 옆의 건물이 언제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 헐린 뒤 그 자리에 아파트 건물이 들어설지도 걱정거리다.


“가능하다면 주변의 건물을 구입해서 아름다운 한국식 정원으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많은 한국 동포와 외국 관람객이 이곳을 찾아 애국가와 그것을 작곡한 안익태 선생을 기억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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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안 여사가 지난달 29일 스페인 마요르카 팔마시 자택에서 안익태 선생의 유품인 기념 지휘봉을 들고 활짝 웃고있다. 채성진기자

“1930년 미국 상항(桑港·샌프란시스코)의 한인 동포 환영회에서 함께 부른 애국가는 스코틀랜드 곡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이 우리의 국가(國歌)를 짓는 것이라 생각했고 이후 74개 나라의 국가를 공부했습니다.”


 

 

 

 

 

3월 29일 오후 스페인 발레아르주(州) 마요르카 섬 팔마시(市)의 안익태 선생 집. 낡은 녹음 테이프를 통해 40여년 만에 안 선생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부인 롤리타 안(89) 여사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1960년대 초 일시 귀국한 안 선생의 라디오 인터뷰를 녹음한 것으로,

겉면에 ‘안익태 선생 육성 테이프’라 쓰여 있었지만 유족들이 한글을 읽지 못해 40년 넘도록 듣지 못했다고 한다.


롤리타 안 여사와 셋째 딸 레오노르(53), 외손자 미구엘(28) 등 안 선생의 유족들이 애국가 저작권을 한국 국민들 품에 안겨주고

마요르카로 돌아온 지 2주일. 지금도 남편과 아버지, 할아버지를 ‘안익태 선생’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애국가 작곡자의 후손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버텨 왔다”고 말했다.


하얀색으로 벽을 칠한 아담한 2층짜리 집. 현관문 옆에 ‘안익태 선생 유택’이라는 푯말이 선명하다.

“1946년 7월 신혼여행을 왔다가 동양적인 분위기에 이끌려 살게 됐죠. 당시 집값은 비싸지 않았지만 안익태 선생은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갈 테니 첫 번째 ‘내 집’은 한국에 마련하자”며 이곳 스페인에선 전셋집을 고집했습니다.


수십 년을 불편하게 살아왔지만 이 집이 기념박물관으로 쓰일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건물에 손댈 수 없었습니다.”


거실 정면엔 태극기가 붙어있었다. 장식장엔 한국환상곡 LP앨범, 기념 지휘봉, 만년필, 사진기 등 롤리타 여사가 평생을 간직해온 안 선생의 유품들이 보였다.

음악서적과 앨범, 각종 신문 자료와 음악회 프로그램 모음도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얇은 종이로 감싼 친필 악보는 군데군데 곰팡이가 핀 상태.

‘동해에 특수한 나라 나의 사랑 한반도 너뿐일세, 역사가 오래된 나의 한반도…’로 이어지는 가사가 적힌 미완성 악보도 보였다.

일제시대에 ‘일본제국 외무대신’이 발행한 제047813호 낡은 여권엔 ‘안익태(安益泰)’란 이름이 선명했다.


 

 

 

 

 

 

 

‘애국가가 표절이라구요?’라는 제목의 자료에는 “1930년 9월 상항(桑港) 한교회(韓僑會) 사무실에서 태극기를 생전 처음 대했다.

그때 홀연히 영감에 사로잡혀 애국가의 악상을 얻었고, 곡을 다듬고 가다듬는 데 5~6년이 걸렸다”는 안 선생의 인터뷰 내용이 적혀 있었다.

1936년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일본 붐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불현듯 애국가를 작곡했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선생이 오랜 기간 치밀하게 애국가 작곡을 준비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다.

안익태 선생이 세상을 뜬 1965년 이후 롤리타 여사는 40여년 동안 남편과 함께 지냈던 그 방에서 같은 침대와 장롱·화장대를 쓰며 살고 있다.

방 곳곳에는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있었다. 당시 안 선생이 즐겨 사용했던 커프스 버튼의 진주는 지금 롤리타 여사의 귀걸이로 반짝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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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선생은 하루에 양말을 세 번이나 갈아 신던 깔끔한 성격이었죠.

단원들에게는 호랑이 같았지만 외국 여행 때면 ‘롤리타, 나를 기억해 줘. 응?

(Lolita, Remember me, eh?)’이란 글귀를 사진 위에 써서 보냈습니다. 그는 천사였습니다.”

 

 

 

 

 


롤리타 여사는 요즘 남편에 관한 두 번째 책을 쓰고 있다. 전동 타자기를 두드려 한 자 한 자 쳐 내려간 원고는 A4 용지로 200여쪽의 분량.

지우고 덧붙인 흔적이 가득한 원고를 매일 읽고 또 읽는 것이 롤리타 여사의 낙이다.

그는 “한국에 시집온 나는 영원한 한국인”이라며 “안익태 선생의 나라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


올해는 안 선생이 타계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고, 내년은 탄생 100주년이다. 마요르카의 한 방송사는 기념 다큐멘터리를 기획 중이고,

주정부에서는 기념 조형물을 건립할 계획이다.


외손자 미구엘은 “얼마 전 한 음반사에서 연락을 취해온 것 외에는 한국에선 아직 특별한 행사 계획이 없는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딸 레오노르는 “그의 꿈과 음악세계, 그리고 그가 얼마나 고국을 그리워하고 사랑한 애국자였는지 한국 국민들이 기억해줄 것”을 당부했다.


 

 

 

 

 

 

팔마(스페인)=채성진 조선일보 전국뉴스부 기자 (dudmie@chosun.com) <주간조선 2005.4.18>


**우리나라 음악계의 현재 실력으로 보면, 아마도 훌륭한

국가를 작곡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난의 시절,

애국자였던 음악가가 작곡한 국가가 더 가치있지 않을까.

“사랑하는 나의 조국 우리 정부가 채택한 애국가는 본인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본인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우리 동포에게 전달한 것 뿐입니다. 이 아름다운 선물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일을 하렵니다.”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가 대한민국의 국가로 정식 채택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안익태가 이승만 대통령 앞으로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는 코리아환타지’의 애국가 합창을 반드시 우리말로 부르도록 고집하였다.



 

 

 

 

 

 

 

 

 

 

코리아 환상곡 감상하기는 아래 주소,비데오는 요 밑에..
http://jnjmuse.cnei.or.kr/ahn_korea_Fantasia.htm

 

 

 

 

안 선생이세계 유명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했고
세상 떠나기까지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다거나 또는 후원자의 덕택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선은 그 자신이 결단을 내린 것과 같이
역시 그는 연주가보다는 지휘자로서의 능력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으며
이러한 잠재 능력을 그는 세계 최고의 지휘자이며 스승들인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를 비롯해서
'프리츠 라이너', '바인가르트너', '코다이', '도나니' 그리고
'리하르트 쉬트라우스'를 통해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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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가 저작권을 기증하는 고 안익태 선생의 유족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