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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애환이 서려있는 청령포

까까마까 2012. 8. 8. 20:05

 

 

 

단종의 애환이 서려있는 청령포

 

 

 

 

 

 

 

 

단종의 애환이 서려있는 청령포를 돌아보고

장릉으로 향한 발길은 여전히 슬픔이 가시지를 않더군요

삼촌인 수양대군에 의하여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이곳 영월 청령포에 머무르다

끝내 사약을 받고 죽은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가 궁금한데

단종이 죽고 아무도 시신을 거두어가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영월 호장 엄흥도가 충절을 지켜

눈 내리는 밤에 몰래 시신을 거두는데 가다 보니

노루 앉은 자리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 것을 보고

기이하다 여겨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들어 단종을 뉘인 곳이 장릉이랍니다

오늘은 어제 청령포에 이어 슬픈 단종이 묻혀있는

장릉을 돌아보겠습니다

 

 

 

 


 

 

 

 

 

 

단종 무덤이 있는 길을 걸어가는데

눈 앞에 저렇게 구불구불한 길이 보입니다

바라보는 내 눈은 왜 그리 마음이 쓰리던지요...

어린 단종의 살아있던 날들의

굴곡이 저렇게 순탄하지많은 않았다는 사실이

무덤으로 가는 길이

무척 애잔하더군요...

다른 곳에서 이런길을 만났다면

나는 좋아서 펄쩍 뛰며 걸었을텐데.....

 

 

 

 

 

 

 

 

 

 

역사상 가장 슬프고 애환이 서린 무덤이 이곳 장릉이 아닌가 싶습니다

임금의 무덤인 능이건만

어느 임금과 달리 단종의 무덤은 지방에 모셔진 유일한 왕릉이라 할 수 있답니다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첩첩산중 영월에 위치한 능이 바로 ‘장릉' 입니다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를 뺏기고

끝내 17살의 나이에 목숨까지 잃은 단종(端宗)이 잠들어 있는 곳 ,,

비운의 왕 단종이 묻힌 ‘장릉’은 능의 형태도 다른 왕릉과는 다르답니다

터를 잡아 왕릉을 조성한 것이 아니라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호장 엄흥도가 수습해 선산에 몰래 암장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장릉’의 봉분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묘역도 왕릉답지 않고 좁다고 하더군요

단종무덤은 다른 왕릉에 다 있는 무인석이 없답니다

문인석은 세우고 무인석을 세우지 않은것은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의 칼에 왕위를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덤을 바라보니.. 또 애잔함이 묻어나고...

다른 왕릉답지않게.... 소박한 느낌마저 들던 단종의 무덤...

그곳에 서있는 내 앞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데...

슬픈 마음이 더해진 비가되어 내렸다...


 

 

 

 

 

 

 

 

 

 

 

나는 이 벤치에 앉아 비맞는 단종의 무덤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왜 그리 마음이 애잔하던지요..

누구나 여길 다녀가는 사람은 느끼는 것이겠지만

이미 흘러간 역사속으로 들어가 슬퍼지는 마음은 모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되었던 이야기는

풍수지리학상 조선시대 수많은 왕릉중 최고로 손꼽히는 능은

세종의 영릉과 이곳 장릉이라고 하니

억울하고 비통한 죽임을 당한 단종의 한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싶더군요...

단종 무덤도 방치되어 오다가 선조 때 이르러 상석, 표석,장명, 망주석을 세웠고

숙종 24년에 복위시켜 이름을 장릉이라고 하였답니다

 

 

 

 

 

 

 

 

 

 

 

 

 

 

 

 

왕릉 가는길에 내려다본 정자각이 있는 모습...

 

 

 

 

 

 

 

 

비가내리고 산허리를 휘감는 구름도

어쩐지 쓸쓸히 지나가고....

 

 

 

 

 

 

 

 

 

 

 

 

 

 

 

 

 

 

 

 

 

 

                       

 

 

 

 

 

 

 

 

 

 

 

정자각:

이 건물은 영조 9년에 건립하였으며 단종대왕 제향시

제를 올리는 곳으로

집의 모양이 정(丁)자 모양으로 건립된 제전이므로 정자각 또는 배위청이라 합니다.

 

 

 

 

 

 

 

 

 

 

 

 

 

 

 

 

 

 

 

 

정자각 내부 모습입니다...

 

 

 

 

 

 

 

 

 

 

 

 

 

 

 

 

 

 

 

 

 

 

 

 

 

 

 

 

 

 

 

 

 

 

 

 

 

 

 

배식단:

이곳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조사위, 환자군노위, 여인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단종제향을 올린 후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하고 있답니다..

올라가지 마시오... 란 안내가 없더라면

누구나 올라가 볼것 같은....

절대 올라가면 안된다는....

 

 

 

 

 

 

 

 

정려각 아래서 왕릉가는길을 바라보니

비가오는데도 많은 여행객이 찾는 모습이 보여

단종임금에 대한 많은이들의 마음을 보는것 같더군요....

 

 

 

 

 

 

 

 

 

홍살문과 신도..

 

 

 

 

 

 

 

 

 

신도: 신만이 다니는 길이랍니다.

아래 사진처럼 안내가 있더군요...

 

 

 

 

 

 

 

 

 

 

 

 

단종 능이 있는 위에서 내려다본

느릅나무 보호수와 영천이 어우러진 풍경입니다...

 

 

 

 

 

 

 

 

 

 

기와얹힌 돌담이 영천 둘레를 감싸안고 있더군요...

 

 

 

 

 

 

 

 

                  

 

 

 

 

영천:

이 영천은 장릉 서쪽에 있는 우물로써

정조 15년에 어명으로 영월부사 박기정이 수축하여 한식때 제사우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보통때는 조금씩 샘물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때 제향을 지낼때에는 물이 많이 솟았다고 합니다

우물의 깊이는 1.5m정도이며 하부는 화강석 돌담으로 둥글게 쌓여있고 상부는 정방형이랍니다

지금 우물안을 들여다보니

물속에 여행자가 던저놓은 동전만 자리하고 있더군요...

 

 

 

 

               

비를 맞고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의 연한 새순을 바라보는데

단종의 여린마음같은

가냘픈 모습에 마음이가서 담아보고....

 

 

 

 

 

 

 

 

 

 

 

장릉을 돌아보면서 내 눈에 띈 나무들...

나무 목이 부러져 있는 모습이 왜 단종애사와 연관되어 바라봐지는지...

나무 가지가 한바퀴 돌아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듯한....

신기함에 담아보고....

 

 

 

 

 

 

 

 

단종비각:

영조 9년(1733)에 어명으로 단종대왕릉비와 비각이 정자각,

수복실과 함께 건립되었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더군요...

장판옥: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 186인, 환자군노(宦者軍奴) 44인,

여인위(女人位) 6인을 합해 총268인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곳입니다

                   

보호수: 370년 된 느릅나무

오랜세월 이곳을 지키고 있는 든든함으로 보여지고..

 

 

 

 

 

비가 내려 장릉을 돌아보는데

시원하고 좋았습니다..

 

 

 

 

 

 

 

 

비가와서 인지 장릉안에 수목이 모두 푸르고 예뻐 보이더군요..

 

 

 

 

 

 

 

 

 

재실:

이 건물의 처음 건립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2년에 중건하였다

이곳에는 능을 지키는 참봉 1인과 수호군 9인이 기거하였으며 매년 단종제향을

지낼 때 이곳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를 비롯한 각종 사용 기구를 보관해오던 곳이다

1997-1998년 재실 지붕 및 배수로를 보수정비 하였다

-안내문 발췌-

 

 

 

제실안을 돌아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단종의 슬픔을 대신하여

준비하고 마음으로 올리는 제를 위해

수고하는 분들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당가운데 화단이 멋스럽게 보여 담아보고...

 

 

 

 

 

 

 

 

 

 

 

 

 

 

 

 

엄흥도 정여각:

장릉 안에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지 말라는 세조의 어명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입니다

엄흥도:

본관은 영월(寧越). 영월의 호장으로 단종이 세조에 의하여

상왕(上王)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안치되었다가 시해되자,

그는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신을 수습하였다.

단종이 승하한 이튿날 옥가(獄街)를 오가며 통곡하고 관을 마련하여

아전과 백성들을 모아 영월의 북쪽 5리쯤 되는 동을지(冬乙旨)에 장사지냈다.

1585년(선조 18) 종손인 정병(正兵) 엄한례(嚴漢禮)에게

호역(戶役)을 면제하고 노산군의 묘역을 수호(守護)하게 하였고,

현종 때 송시열(宋時烈)의 주청으로 자손을 등용하게 하였다.

숙종 때 공조참의에 증직(贈職)되었고, 영조 때 정문(旌門)을 내렸다.

뒤에 공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네이버발췌-

 

 

 

 

 

 

단종이 세조에 의하여 죽자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않았는데,

관까지 준비하여 장례를 치렀다는

엄흥도의 충정이 고마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누구나 느끼는 마음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왕릉을 내려오는 길에 다시 담아보고....

저 작은 돌을 아슬아슬하게 쌓아놓은 모습이 보여 눈길이 가고...

 

 

 

 

 

 

 

 

 

 

 

 

 

                      

 

 

 

 

 

여기 장릉에도... 청령포와 같이

무척 오래된 소나무가 많았습니다..

소나무 숲을 걸어 왕릉으로 가는 길이 무척 아름답긴 하였어요...

 

 

 

 

 

 

 

 

 

 

 

 

 

 

오래된 소나무가 한결같이... 밑둥이 구불구불하여 눈길이 가고...

한많은 단종임금의 애환처럼... 곧게 자라지 않은 모습과... 오버랩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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