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혜경의 슬프도록 진솔한 이야기-piano동영상
다 읽으신 후 서혜경씨가 연주하는 Hungarin Rapsody #6를 들으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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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경님 카페에서 퍼 왔습니다.
다음달에는 그녀의 연주를 우리 객석에서 만날수 있다지요?
그녀에 대한 글을 아주 천천히 한번 읽어 보세요.
찰칵. 열쇠를 돌려서 문을 연다.
언제나 그렇듯 어두운 정적뿐이다. 텅 빈 현관을 지나 거실 스위치 앞에 선다.
이제 불을 켜면 거대한 물체가 88개의 이빨을 드러내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피아노라는 거대한
산이 말이다.
세계 3대 피아니스트로 불러지던 나 서혜경.
다섯 살 때 피아노를 시작했다. 그 때부터 난 항상 피아노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각종 콩쿠르에서 1등을 했었다.
국제무대에서도 영 아티스트 콩쿠르, 쇼팽 콩쿠르, 줄리어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메노그 국제 콩쿠르 등
수많은 콩쿠르에 입상을 했고
스무 살 때인 `80년에는 세계적 권위의 부조니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자가 됨으로써
일약 내 이름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대열에 끼이게 되었다.
이어서 스물다섯 살 때 링컨 센터가 수여하는‘윌리엄 퍼첵’상을 받았고
세계 굴지의 매니지먼트사인 ICM과 전속계약을 맺었다.
스물아홉이 되던 해인 `88년에는 카네기 홀에서 선정한 '세계 3대 피아니스트'중의 한 명으로
특별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서른을 갓 넘긴 그때 나는
너무나 불행했다. 그토록 바라던 세계 정상의 자리에 섰으나 나는
그런 나 자신이 비참하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려서 피아노를 칠 때면 항상 어머니가 옆에 계셨다. 마당에서는 동생들이 그네를 타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달려가서 같이 놀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내게는 피아노만이 세상의 전부였다.
놀 수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고 사생활도 없었다. 오직 피아노, 피아노뿐이었다.
화장실에 가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인 아이. 그것이 어린 시절의
나였다.
난 만화책이나 동화책을 가지고 화장실로 들어가 엄마가 소리지르기 전까지는 나오지를 않았다.
웅크리고 앉아 책을 들여다보는 그 시간이 내게는 피아노 아닌 다른 것에 한눈을 팔 수 있는 유일한 휴식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던 콩쿠르. 하지만 난 포기할 수가 없었다. 엄마의 열성이 문제가 아니었다.
승부욕. 나 자신의 열망이 문제였다.
난 항상 인정 받고 싶고 특출나게 살고 싶었다. 최고가, 세계 최고가 되고 싶었다.
불을 켜고 커튼을 열어 뉴욕의 야경을 바라본다. 차량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
한적함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대강 샤워를 마친 나는 젖은 머리를 말리며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았다.
방금 전까지도 무대 위에서 베토벤을, 브람스를, 무소르그스키를 두드려 대던 내가
또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제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 또다시 다음 날 연주를 위해 연습을 해야 한다.
돌연 전화 벨소리가 피곤한 심신을 가르듯이 울려퍼졌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분명 엄마일 것이다.
엄마가 미국에 와 있다는 것은 알지만 나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아마도 내일 아침에 이곳에 들르시리라.
그러나 나는 그전에 연주 여행을 떠나 버릴 것이다. 난 엄마와 부딪치기도 싫었다.
'왜 엄마는 나를 남보다 유명하게 출세시켜서 이렇게 불행하게 만든 것일까?'
그 당시 나는 엄마가 내 인생을 망쳐 버렸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내게서 청춘을 앗아간 장본인.
나를 피아니스트로 세워 주었고,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80년
그때에도 그 절망의
심연에서 나를 건져 주었던 어머니였는데도 말이다.
1980년
부조니 콩쿠르에서 우승한 직후였다.
영국 BBC교향악단과의 협연을 앞두고 팔이 뻣뻣하게 굳어지면서 가해지는 통증으로 건반을 두드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근육 파열'. 지나친 연습으로 오른쪽 팔이 왼쪽 팔보다 둘레가 5센티미터나 더 굵어져 있었다.
난 어려서부터 하루 8시간씩 강행군을 했었다.
하도 앉아서 피아노만 쳤기에 방석을 두세 개씩 깔고 앉아도 내 엉덩이는 계속 짓물렀다.
남들보다 더 빠르게, 남들보다 더 완벽하게 치려고 방 안의 불을 다 꺼 놓고 건반을 두드린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부조니 콩쿠르를 앞두고는 더욱 무리한 연습을 했었다.
"피아노를 그만둘 순 없어요!" 나무토막처럼 굳어지는 팔을 싸안고 나는 엄마 품에서 흐느꼈었다.
어머니는 병원에서도 방도가 없다는 나를 고치기 위해 직접 지압을 배웠다.
여섯 달을 배워 지압사 자격시험까지 합격한 어머니는
곧장 줄리어드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며 도서관에 파묻혀 지내는 내게로 달려왔다.
그리곤 매일 한 번에 세 시간씩 초주검이 되면서까지 내 팔을 주물렀다. 피아노를 치다가 팔이 아프다고 하면
언제든 달려와 지압을 해주던 엄마의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속에서 점차 내 근육은 회복되어 갔다.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다시 화려한 날개짓을 하며 치솟아 오른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은 엄마로 인해, 아니 엄마의 땀방울과 함께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점차 그런 어머니의 땀방울이 싫어졌다. 항상 하나님께
모든 감사를 돌리는 엄마의 태도도 싫었다.
이 모든 것을 이뤄 낸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이지 않는가? 내가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는데.
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가슴 조여야 하는데…… 그리고 얼마나 외로워야만 하는데.
쉬지 않고 이어지는 연주회마다 “역시 서혜경”이란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는 중압감.
결코 추락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강박감.
난 마릴린 먼로처럼 증발해 버리고 싶었다. 최고 정상에 달한 이 모습 이대로 죽어 버리고 싶었다.
그토록 원하던 정상의 자리에 올랐건만
그러나 그런 성취가 행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서른이 되어서야 깨달은 것이다. 나도 여자이고 싶었다.
더 이상 연주만 하면서 이렇게 늙어 가고 싶지는 않았다. 평범한 삶이 주는 아늑함과 행복을 나도 누려보고 싶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다들 편안하게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에
왜 나는 가족 모임 한 번 제대로 참석 못하고 잔뜩 긴장한 채 관중 앞에 나서야 한단 말인가.
가슴이 답답해 거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결심했다. 하나님께 감히 도전장을 내밀기로 말이다.
"하나님, 정말 주님께서 살아계시다면 평범한 삶을 저에게 주십시오.
저도 남들처럼 아들, 딸 낳고 평범하게 살게 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주님을 제대로 믿겠습니다."
오래 전에 사주팔자를 본 적이 있었다. 큰 인물이 되겠지만 내겐
남편도 아이도 없는 팔자라고 했다.
사주팔자를 바꿔 줄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든 나는 감히 그런 기도를 드린 것이다.
그러자 기도를 드린 지 2년도 안 되어 내게 평범한 남편과 평범한 가정이 주어졌다.
딸과 아들도 태어났다. 더불어 평범한 이들이 저마다 겪는 삶의 고통도 함께 주어졌다.
결혼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저녁 찬거리를 위해 할인
티켓을 꼬깃꼬깃 모아 장을 보고 있었다.
진열대에서 가장 값싼 재료만을 골라 담고는 카운터에서 할인 티켓을 내미는데
저쪽에서부터 나를 힐끔 힐끔 쳐다보던 한국인이 서혜경 씨가 맞느냐고 물어 왔다. 너무나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내가 10달러짜리 옷 단 한 벌로 일 년을 버틸 때였다. 항상 5천 달러나 7천 달러짜리 옷만 입고 무대에 섰던 서혜경이
10달러짜리 옷을 입고 싸구려만 파는 가게에서 할인 티켓을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스트레스에다 미국에서는 기름진 음식이 값싸기에 그런 음식만 먹어 댔더니 몸은 또 얼마나 불어났던지.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나는 울지 않았다. 울 힘도 없었다.
그저 변해 버린 내 인생이 너무나
황당하다는 느낌, 그것뿐이었다.
난 재벌가의 혼담도 마다하고
우연히 믿음이 있는 남자와 만나, 사귄지 한 달 만에 결혼을 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당연히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비록 친정이 경제적으로 풍족했지만 워낙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검소하게 살도록 단련시켰기에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해 솔직히 겁이 없었다. 그러나 유학 시절, 아버지의 후원 없이
자립하기 위해 굶기까지 하며 식비를 아껴 모으던 그 자부심 가득한 가난과 결혼 생활의 어려움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결혼이 주는 말할 수 없는 행복감도 맛보고 살았지만 그러나 난 정말이지 평범하게 되기 위해
사람들이 그토록 고생을 한다는 것을 결혼 전에는 생각도 못했었다.
그저 세계 최고를 추구하는 내 인생만 어렵고 힘든 줄 알았다.
난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고 살림을 하면서도 피아노를 쳤고 돈을 벌어야 했다.
다른 모든 이의 결혼이 그렇듯, 우리의 결혼 생활에도 헤쳐 나가야만 하는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아마 서혜경의 남편이라는 사실이 남편에게는 무의식적으로라도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남편은 어떻게든 사업을 일으켜보려 하였고 그럴 때마다 우리의 소망과는 달리 매번 좌절이 찾아 들었다.
게다가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가 없었다.
반대하는 결혼을 한 터에 친정에 우리 상황을 알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서혜경이 이렇게 어려우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할 사람들에게 어떻게 도와 달라는 말을 꺼낸단 말인가.
속도 모르는 친정 동생들이 우리를 보고 지독하다고들 했지만 그때 우리에게는 정말 돈이 없었다.
게다가 계속되는 실패로 인해 힘겨워 하는 남편을 지켜보는 것 역시 아내인 나로서는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렇게 이어진 8년의 결혼 생활.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한때나마 우리 부부에게 주어진 이런 시련들이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것 같다.
비록 다른 이들의 삶에 비하면 아주 작은 고통일지도 모르지만, 피아노 치는 것 외에는 곱게만 자라온 나였기에
그 어려움들이 내게만 주어진 고통마냥 힘겹기만 했었다.
하지만 그런 힘겨움이 있었기에 나는 비로소 인생을 알게 되었다.
인생의 참 뜻과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결혼 전 나는 너무도 나 자신을 높게만 보고 뽐내려고만 했었다. 다른 이의 삶을 은연 중에 무시하며
고상한 척,
나만이 뛰어나고 나만이 노력하며 살아온 양 교만했었다.
그러던 내가 평범한 삶이 가지는 행복과 고통을 겪게 되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사람이 될 수 있었고 더불어 내 음악도 온전해질 수가 있었다.
10달러짜리 옷을 입은 채 가슴 깊이 많은 것들을 참아 내며 연주하는 음악은 그전과는 완전히 다른 깊이로 다가왔다.
그토록 지겹던 음악이 어느새 기쁨으로 변했다.
음악으로 인한 고통은 내가 원했던 고통이기에 선택 받은 고통이자 기쁨임을,
주님이 내게 주신 너무도
고마운 축복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2000년 1월 25일,
나는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열린 '팜비치 초청 국제 피아노 경연 대회' 에 참가했다.
국제무대에서 전문 연주자로 활동하는 30세 이상의 피아니스트만이 참가해
각각 1시간씩 독주회 형식으로 진행되는 경연 대회였다.
난 피아니스트로서의 더 깊은 성장을 하기 위해 자극을 받고자
대회 사흘 전까지도 맨해튼 더킨 콘서트 홀에서 독주회를 가져야 하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참가를 하게
되었다.
그날 나는 슈만의 '로망스 제2번' 과 '아라베스크',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등을 연주하며
관객과 함께 음악이 주는 감동을 나누었다.
이제 내게 있어 피아노는 더 이상 기교가 아니라 삶을 아는 이들과의 교감인 것이다.
그리고 그 깊은 교감을 통해 난 다시금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1위가 내게 교만도, 최고를 향한 압박감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금 서울과 미국을 오가며 아이들의 엄마이자 극히 서민적인 한 남자의 아내로서의
삶을 영위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 남편은 뉴욕에서 생활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고 나는 그런 평범한 한국인의 아내이다.
4년 전부터 내가 해외 순회 연주를 허락하는 경희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연주 활동을 하고 있기에
우리 부부와 아이들은 각기 떨어져 지낼 때가 많지만, 팩스로 전화로 내게 사랑을 전하는 남편이 있어,
그리고 아이들이 있어 나는 참 행복하다.
우리가 이처럼 평범한 가정을 안정적으로 꾸리게 되기까지 8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아니, 사실 난 결혼 9년째인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같이 평범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힘든 일을 이겨 나가야 하리라는 것을 현실로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이 인생이니까. 그리고 그 인생을 통해 내 음악이 달라질 수 있었으니까.
지난 8년간의 삶을 통해 나로 하여금 평범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나로 하여금 화려함 속에 갇혀 삶의 참 모습을 모르는 피아니스트가 되지 않게 하신 하나님께,
나를 낮추고 연단하사 찬란한 빛과 기쁨으로 내 음악을 승화시켜 주시는 하나님께 진정 감사를 드린다.
엄마가 옳았었다. 내 인생의 모든 영광은 주님으로 인함이었다.
또한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으로서 나를 도구 삼아 주시기를 오늘도 나는 소망한다.
"토크토크"에서 대담
독주회를 앞두고 그는 체력 관리에 들어갔다.
걷기와 자전거 타기는 무리해서는 안 되는 그녀에게 딱 맞는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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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엔 차를 타고 다니던 집과 스튜디오를 걸어서 다니고 있어요. 30분 이상의 거리죠.
뉴욕 리버사이드 파크를 따라서 매일 1시간 정도 걸어요.
주말엔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어요.
그 외엔 먹을거리에 신경 쓰고 식사도 제때 하면서 건강 관리를 하고 있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부르는 피아니스트로…
5세에 피아노를 시작해 9세에 한국국립교향악단과의 협연으로 데뷔했고,
서울교대 콩쿠르 1위와 이화·경향 콩쿠르 전체 특상을 수상한 서혜경(경희대 교수).
그는 윌리엄 퍼첵상을 수상하며 세계 굴지의 매니지먼트사인 ICM과 전속 계약을 맺고
카네기홀 선정 세계 3대 피아니스트에 이름을 올린 한국을 대표하는 최초의 피아니스트였다.
서혜경은 많은 음악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근육마비의 고통과 유방암이라는 고통에도 굴하지 않는 열정으로
지금도 새로운 음악 역사를 써 가고 있는 연주자로
이제는 그 아픔들을 음악을 통해 새로운 희망으로 승화시켜가고 있다.
이날 토크토크는 경희대 이경은(4학년)과 김해인(2학년) 학생이 함께 했다.
많은 피아노학도들이 교수님을 보며 자라고 꿈을 키우는데요. 어렸을 적 존경해오던 음악가나 멘토는 누구였는지요?.
제가 어렸을 때에는 우리나라의 교육방식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좋은 음악을 많이 듣고 책도 많이 읽혀야 하는데 그런 여유를 주질 않았습니다.
오직 테크닉 위주로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다보니 실제로 꿈을 생각하고 할 여유조차 없었지만,
처음에는 막연히 쇼팽, 리스트나 파가니니 같은 최고의 연주가가 되겠다는 소망과 각오를 가졌었죠.
그 후, 정열적인 마르타 아르헤리치, 블라드미르 호로비츠, 귀족적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나이가 60세가 넘어서도 기막힌 테크닉으로 낭만을 표현하는 셔라 체르커스키,
절제 안에서 낭만을 표현하는 알프레드 브렌델 등의 연주가 제 음악 발전에서 멘토였습니다.
다른 연주자들이 많이 연주하지 않는 곡들을 연주하시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전문 연주가들은 나름대로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 곡이나 하고 싶고 욕심나는 곡들이 있습니다. 그
러나 저는 내 자신의 예술적 도전도 중요하지만 들어줄 청중도 생각합니다.
청중을 몰입시키고 감동과 만족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찾다보니 그런 곡들도 연주하는 것이지요.
교수님과 특별히 친하게 지내시는 음악가는 어떤 분이 계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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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연주가들과는 친한 사람들이 많지만 외국 연주가들과는 교류를 가질 시간이 별로 없네요.
연주자들 보다는 오히려 지휘자 샤를르 뒤트와·리카르도 무티·
프란츠 뫼스·알렉산드 드미트리예프 등과 교류가 많답니다.
암 투병중 너무나 힘드시고 괴로우셨을 텐데 피아노를 그만두고 싶지는 않으셨는지요?.
항암 치료 중에는 너무 힘이 들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피아노를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단 한 번도 없었답니다.
오히려 반드시 살아남아 다시 피아노를 치겠다는 일념으로 그 힘든 투병생활을 이겨냈지요.
세계최초 여류 피아니스트로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집을 내셨는데 앞으로 더 도전하실 시리즈가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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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9월에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전집에 도전합니다.
라흐마니노프 전집은 수십 명의 남성 피아니스트들이 레코딩을 했지만
차이코프스키는 남성 피아니스트들도 전집을 낸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지요.
단기간에 다른 곡들로 많은 연주들을 소화해 내시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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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곡을 배울 때마다 반드시 버티기 힘든 고비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더 많은 레퍼토리를 배우고 싶은 욕심으로
한 곡 한 곡 배워가는 성취감이 나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원동력도 된답니다.
그런 고비는 피할 수가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아프지만 않았어도 더 많은 도전을 했을 겁니다.
교수님 연주는 많은 음악학도들뿐만 아니라 환우분들에게도 큰 희망을 주고 계시는데요.
교수님께서 경희의료원 홍보대사나 서울대병원 암센터 이사님으로 계신데...
그 덕분에 저도 병원 연주회를 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환우분들이 음악을 듣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면서도 보람이 느껴지고,
또 이렇게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교수님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는 음악이 우주에서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파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파동을 통해 치유의 음악으로 승화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아노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끌어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한답니다.
제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여섯 분의 의사가 앞으로 피아노는 칠 수 없다고 단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드시 나아서 피아노를 칠 것이라는 생각을 놓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희망과 긍정의 힘을 저의 연주를 듣는 모든 청중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많은 연주로 피로와 긴장감이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연주를 하시는데
연주 전 컨디션 조절은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수영으로 자주 근육의 긴장을 풀 때도 있습니다만 사실은 컨디션 조절을 할 시간의 여유도 없을 때가 많답니다.
외국과 비교했을 때 지금 한국의 커리큘럼에서 개선할 점은 무엇일까요?
.
커리큘럼의 차이보다는 음악 기초교육에서 개선되어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을 대하는 시각이 달라져야 하고
아이들이 싫증을 내지 않는 방법으로 교육을 시작해야 합니다.
음악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도록 교육을 시작해야 합니다.
다른 분야의 독서도 많이 시켜 지독한 연습을 하는 동안의 회의감과 싫증,
고독감 등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기초를 다져주어야 하고요.
무대에서 긴장하지 않고 여유로운 연주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희극 배우가 먼저 웃어버리면 청중은 황당해지겠지요? 연주가가 긴장하면 청중은 불안해집니다.
또 긴장하면 부드럽고 아름다운 소리도 낼 수 없지요
그 전에는 누구나 긴장하지만 무대에 서는 순간부터는 절대로 긴장해서는 안되고 음악에 몰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습이 최고지요. 연습량이 적으면 아무래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답니다.
군인이 훈련에서 흘리는 땀 한 방울이 전투에서 피 한 방울을 적게 흘리게 해주듯이
연주는 연습의 연장이 되어야 합니다.
충분한 연습과 몰입하는 훈련 외는 어떤 방법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요 무대 직전에 적당한 무대연습도 매우 중요합니다.
협연하실 때 오케스트라에 맞추시나요, 오케스트라를 어떻게 이끄시나요?
.
먼저 지휘자와 음악적 대화를 통해 곡에 대한 견해를 교환하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고요.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는 맞춘다, 이끈다 하는 표현이 필요가 없지요. 서로가 서로를 바로 알아본답니다.
조금 수준이 떨어지는 교향악단에게는 저의 열정과 감정을 리허설 중에 이입시켜야 합니다.
지휘자와 단원과 템포와 프레이즈와 음악적 긴장감에 대하여 리허설 중에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매번 다른 상태의 피아노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아름다운소리로 연주해 주시는데
피아노에 어떻게 적응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참 좋은 질문입니다. 피아니스트에겐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이런 질문을 몇십 년 동안에 처음 받아보네요.
콩쿠르에서 좋지 않은 피아노와 마주쳐 애를 먹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만
피아노 종류와 관리 상태, 조율사의 능력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있고
심지어는 연주홀의 음향 상태와 습도에 따라서도 소리가 달라지지요.
적응의 문제는 말로써는 설명할 수 없고 그 피아노의 상태를 재빨리 파악하여 몸으로 조절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랫동안 저의 연습과 연주를 곁에서 지켜본 저의 매니저는
제가 피아노의 특성을 빨리 파악하는 감각이 있을 뿐만 아니라
몇 시간 만에 그 피아노의 상태를 좋게 만드는 파워와 기(氣)를 가졌다고 말하더군요.
교수님께 음악(피아노)이란 무엇인가요?.
나의 존재의 이유지요. 존재의 이유이고 인생의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물이나 공기처럼 없이는 살 수 없는 내 삶의 필수요소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미 많은걸 얻으시고 이뤄내셨지만 더 이루고 싶은 꿈이 있으신지요?
.
있지요, 꿈은 죽을 때까지 갖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벽을 넘어서 전설적으로 동양인 최초의 피아노를
제일 감동을 주는 피아니스트, 피아노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던 피아니스트로 남는 것이
마지막 꿈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