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음악
영화 "천일의 앤"주제곡을 붙쳤습니다.
음악재생은 제일밑에 다시 클릭하셔서 들으시길..
(서버가 막아놔서리..)
사진이 오래서인지 10번 이상을 올렸는데도 다음날 보면 또 배꼽으로 나오곤 합니다.
사진없이 그냥 읽기만 해도 좋은 글 이니 즐감하세요 !
전혜린씨가 번역한 글 입니다.
밑의 압록강은 "보라빛 하늘"에서 펌.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
언젠가 남부 독일의 바이에른을 '그리움으로 돌아보는 추억의 땅'이라고 묘사했던 것은 순전히 이미륵 선생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나이 스물에 상해로 망명하여 한국인 최초로 독일까지 흘러가게된 그의 인생역정은 남은 30년을 조국을 그리워하면서 살게 만들었다. 당시의 조혼 풍습으로 말미암아 10대 소년에 결혼하여 어린 자녀를 둔 상태에서 홀홀단신 머나먼 유럽땅에서 이방인으로 일생을 마치게 된 선생의 삶은 온통 그리움 그 자체였다. 나는 그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으며 그의 그리움에 전염되어버렸다. 이미륵의 숨결이 서려있는 뮌헨으로 출장을 떠나며 그 그리움의 실체를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뮌헨대학교 동양학부에서 한학과 한국학을 강의하던 시절의 이미륵 박사의 모습(사진출처: 이미륵 기념사업회)을 보면 그렇게 독일의 지식인 사회에서도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도 떨쳐버릴 수 없던 '그리움'의 실체가 가슴 아프도록 절절히 묻어난다. 다음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50주기가 되던 지난 2000년에 썼던 그에 대한 글의 일부이다.
"바이에른은 그 존재조차도 알려지지 않았던 아시아 변방에서 온 한 나그네에게 제2의 고향이 되어준 곳이기도 하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가담했던 스무살의 푸르디 푸른 청년 이미륵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중국을 경유 그 이듬해에 독일 최초의 조선인 망명자로서 발을 내딛었다. 바이에른의 주도 뮌헨에 정착한 그는 망명 1년만에 뷔르츠부르크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하고 다시 뮌헨 대학에서 동물학을 전공하여 7년만에 이학박사학위를 받는 등 경이로운 적응력을 보여주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뿌리의식을 잃지 않고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단편과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발표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갔고 전후(1946) 독일문단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sst)'를 발표하였는데 그 간결하고도 수려한 문장은 독일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삼십년간(1920~1950) 독일에 살면서 존경받는 학자요 훌륭한 작가로서 인정받으며 주류사회에 든든히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조국 땅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는 어찌 할 수 없는 그의 운명으로 죽을 때까지 그를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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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10대에 결혼해 고향에 두고 온 처와 두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을 언제까지고 떨쳐버리지 못하던 이미륵 선생은 그를 연모하던 독일 여인들의 사랑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평생 홀로 지냈다고 한다. 뛰어난 실력에 겸손하고 따뜻한 인간성까지 겸비한 선생의 주위에는 늘 그의 아름다운 성품을 흠모하는 많은 독일 친구들이 있었지만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그리움을 간직한 채 1950년의 3월 20일 눈을 감았다. 봄에 태어나 봄에 떠난 그에게 바이에른은 아마도 영원한 ‘고향의 봄'이었으리라. 어린이들을 유난히도 귀여워하던 그가 남긴 유품 중에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사진들이 많이 남아있었다고 하는데, 그 그리움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을 듯 하여 가슴이 아프다. 뮌헨 근교의 작은 마을 그레펠핑에는 이미륵 선생이 잠들어있는 묘지가 있다. 남부 독일을 여행하게 되면 꼭 한번쯤은 뮌헨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불과 30분 거리에 있는 이곳에 들러보실 것을 권하고싶다. 그에게 제 2의 고향이 된 뮌헨에는 그를 사랑한 수많은 친구들이 ‘이미륵협회(Mirok Li Gesellschaft)'까지 결성하여 그의 문학혼을 영원히 추모하고 있고, 그 동안 정작 그에게 무관심 또는 냉담했던 한국에서도 뒤늦게나마 이미륵 문학에 대한 재평가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니 반가운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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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이미륵 박사 흉상 제막식이 지난 10일, 독일 에센에 소재한 파독광부기념회관에서 열렸다. |
독일 땅에 우리나라의 정서와 문화를 알린 고 이미륵(李彌勒·1899∼1950)박사 흉상제막식이 지난 10일 저녁, 에센에 소재한 파독광부기념회관(재독한인문화회관)내 동포역사자료실에서 거행됐다.
유상근 자료실장의 사회로 진행된 흉상제막식에서 기념사업회 송준근 회장은 "3월에 태어나 3월에 작고하시고 또 같은 달에 흉상을 모실 수 있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며, 도도히 흐르는 민족 혼을 후세대들에게 비추고자 하는 박사님의 큰 뜻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송 회장은 "그동안 도움을 준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와 상설전시로 후손들에게 역사교육과 민족정신을 고양하는데 가치가 있다"며 흉상을 기증한 푸르메재단과 운송에 도움을 준 공관에 감사의 말을 전했다.
유럽총연 박종범 회장은 제막식 축사에서 "이미륵 박사는 일제치하 암울했던 시대에 경성의전에 재학중, 3.1 만세사건으로 일경의 수배를 피해 상해를 거쳐 1920년 독일에 도착했다"며 문학가로서,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과 공적을 소개했다.
박 회장은 특히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박사가 '세계피압박민족회의'(1927년 2월 브뤼셀)에 참석해 일본의 한반도 강점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고발한 일 등에 대해 높이 칭송했다.
이날 흉상제막식에는 기념사업회 송준근회장, 유럽총연 박종범회장, 재독한인총연합회 최병호 회장,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 고창원 회장, 한독간호협회 윤행자 회장, 민주평통북부유럽협의회 서성빈 회장과 유럽 18개국 동포사회지도자들이 참석해 이미륵 박사의 뜻을 기렸다.
▲ 이미륵 묘지(그래펠핑). ⓒ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http://mirokli.com/)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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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륵. 1933년 무렵.
이미륵의 본명은 이의경이다. 그는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경성의전에서 공부하던 중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쫓겨 상해로 망명했다. 1920년 프랑스를 거쳐 독일로 유학, 1928년 뮌헨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뮌헨대학에서 한국어, 중국문학과 역사를 강의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저술과 한국학 강의를 통해서 조국을 독일에 알리는 데 힘썼다. 그러나 조국을 떠난 지 30년, 그는 그토록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뮌헨 근교 그래펠핑에서 세상을 떠났다. 1950년 3월 20일이었다. 석 달 후에 일어난 한국전쟁을 모르고 눈을 감은 것은 다행이었을까.
언젠가 우편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알지 못하는 집 앞에 섰다.
그 집 정원에는 한 포기 꽈리가 서 있었고, 그 열매는 햇빛에 빛났다. 우리 집 뒷마당에서 그처럼 많이 봤고 또 어릴 때 즐겨 갖고 놀았던 이 식물을 내가 얼마나 좋아하였던가―. 나에겐 마치 고향의 일부분이 내 앞에 현실적으로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중략…)
얼마 후에 눈이 왔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자 나는 성벽에 흰 눈이 휘날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흰 눈에서 행복을 느꼈다. 이것은 우리 고향 마을과 송림만에서 휘날리던 눈과 같았다.
이 날 아침, 나는 먼 고향에서의 첫 소식을 받았다. 나의 맏 누님의 편지였다.
지난 가을에 어머님이 며칠 동안 앓으시다가 갑자기 별세하셨다는 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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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어판 <압록강은 흐른다.>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가 독일에 도착하고 5개월이 지난 때였다. 짧은 문장의 행간에 배어 있는 것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그 조바심 같은 것이다. 고향으로부터 소식을 듣고자 청년 이미륵은 날마다 우편국을 들렀다. 그러나 그가 받은 첫 소식은 어머님의 부음이었던 것이다.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는 ‘한국에서의 소년시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사촌과 누이, 그리고 동무들과의 소년 시절의 즐거움과 함께 부모님의 이야기, 일제의 침략, 민족의 저항, 조국을 떠나 낯선 유럽으로의 여로 등이 유려한 문체로 그려져 있다.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출판되었을 때, 독일 문단의 최대의 찬사를 그에게 바쳤다. 그 찬사는 초판의 매진으로 이어졌다. 독일에서의 서평도 찬양 일변도였다.
이 책의 초개인적인 문제는 동양과 구라파의 접촉에 있다. 그러나 독자전이고 내면적인 고상하고 고결한 문체 속에는 동서양의 접촉을 수행하려는 저자의 은밀하고도 겸손한 태도가 나타나 있다. 이것은 진정한 소설이다. 격렬한 점이 없이 조용히 흐르는 산문이다. 이 사랑스러운 책에 내포되어 있는 불변성과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한 균일성은 위안을 준다. 비록 슬픔이 어떤 사람의 영혼에서도 없어질 수 없을지라도.
― Wihelen. House stein
이미륵 씨는 어머님을 추모함으로써 그의 소년시대의 기록을 바쳤다. 초판은 1946년 파이퍼 출판사의 전후 최초의 출판물이었다. 이 제2판은 이 추억의 저자 이미륵 씨에게 바친다. 우리들이 만났던 가장 순수하고도 섬세한 사람이었던―. (…중략…)
<압록강은 흐른다> 신판에 있어서 우리들은 민족이나 인종차별 없이 인생의 최고의 정직과 선량이라는 것을 자신이 세계의 탁류 중에서 시범한 인간과 시인을 존경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방인인 그가 우리들에게 외계와의 이해에 있어서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 것을 더욱 더 깊이 파고 또 깊이 실천해 나가는 데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 Piper Verleg 후기
이미륵은 열렬한 반 나치스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히틀러에 저항하다 처형된 뮌헨대 후버 총장과 둘도 없는 친구였다. 지금도 가끔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그를 기억하는 일화는 그가 매우 속 깊은 사람이었음을 증명한다.
나치가 한참 득세하고 있던 시대에 그가 스웨덴에 여행 갔었다. 같은 기찻간에 탄 어떤 독일 사람이 이미륵 씨를 붙들고 맹렬히 히틀러 찬양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다 듣고 앉았던 그는 얘기가 끝나자 물었다고 한다.
“히틀러가 누구입니까?”
그 말에 그 독일 사람은 그를 마치 무슨 진기한 동물을 바라보듯이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니, 지도자 히틀러를 모른단 말입니까? 그 분의 위업은…….”
하고 또 약 반 시간 웅변을 한 후에
“도대체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히틀러 이름도 모르다니!”
하고 물었다. 그는
“독일에서 왔습니다!”
라고 서슴지 않고 대답하여 그를 죽음과 같은 침묵에 빠지게 했다고 한다.
― 전혜린 “이미륵 씨의 무덤을 찾아서”(목마른 계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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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딩거 맥주 양조장 투어를 마치고 조금은 특별한 독일여행~뮌헨여행~
독일 교과서에도 실린 "압록강은 흐른다" 저자이며 독일인에게 존경받는 자랑스런 한국인 이미륵 박사의 묘가 뮌헨 근교에 있어서
방문 하였다.
계단을 올라가거나 게이트가 있거나 하지 않고 그냥 도로 옆에 바로 지하철역이 있어 매우 신기하였다.ㅋ
표를 사서 들어가야만 지하철을 탈 수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그냥 도로 옆 평지에서 탈 수 있어 신기했던 것 같다.
보라빛 하늘
압록강 풍경
단동의 압록강가 아파트에서 본 압록강 건너의 위화도
강따라 수풍댐으로 가는 중도인 하구(河口)에 다리하나 있고 선유장이 있다. 압록강에 중국과 북한간에 놓인 다리는 20여개 그중 2개만 남겨 놓고 모두 이런 모양으로 끊어 놓았다. 북한이 귀찮은 중국 측에서.....
끊어진 다리 저쪽은 북한의 평안북도 청송 마을 흐린 날씨에 강가라 물안개가 있어 사진이 흐리다.
마을을 가까이 당겨 찍어 보았다.
옥수수 밭에서 마지막 가을 걷이를 하는 북한의 농부들 소달구지가 보인다. 압록강 지역은 북한이나 중국이나 주로 옥수수 농사를 짓는다.
압록강에서 배를 타고 바라본 북녘 땅
소달구지 와 집 한채, 이렇게 변경에 사는 사람들은 형편이 좋다고 한다. 집 뒤로 옥수수 밭.... 북한의 산들은 모두 나무를 잘라내고 옥수수 밭으로 개간했다.
수풍 발전소는 공사 중, 여기서 더 이상 갈수 없단다. 되돌아 나오면서 끊어진 다리위는 전시장으로 만들어 입장료를 받는다. 전시된 6.25 전쟁 이야기를 본다.
6,25 때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모택동의 장남의 흉상. 이 때 전사한 몇명 장교들의 흉상들과 전쟁 특히 6.25 전쟁에 관한 정보가 전시 되어 있다.
조선전쟁 개시. 1950년 6월 25일 조선 인민군 개시 남변(?) 朝鮮人民軍開始南邊 분명히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말이지?????
다시 단동시에서 만나는 압록강
위화도에 지어진 북한의 아파트.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고 한다. 해는 그곳에서 떠 올라 단동을 비추고 있는데.............
그리고 압록강변 풍경 참계 잡이 배들
참게를 파는 어부들
일요일 아침 강변은 빨래터
가장 좋은 압록강변 풍경이다. 이사람들은 매일 아침 7시에 모여서 압록강을 건너갔다 오는 수영동회원들이다. 봄, 여름, 가을 , 겨울, 사철 그렇게 수영으로 건강을 다진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 시간에 춤, 태극권, 제기차기, 연날리기 등 1시간 정도 운동을 한다.
야경
압록강에서만 잡힌다는 백어 요렇게 튀겨 먹는 거라네.
그리고 거리를 깨끗하게 청소해 주는 비 -대나무로 아주 조신하게 만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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