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모마리아의 집과 성 요한 교회
홍성봉
섬모마리아의 집과 성 요한 교회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한복음 19장 25 - 27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임종하기 바로 직전에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잘 모시라는 부탁을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12사도들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고 성령이 강림한 이후에 그는 시몬 베드로와 함께 교회를 세우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서 선교 활동을 벌이며 예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사도행전 12장 1 – 3 절)
사도 요한의 형인 야고보가 헤롯 아그리파에 의해 처형 당하면서 사도들은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부탁한 대로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에페서스로 온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살았던 집으로 알려진 성지까지는 에페서스에서 차를 타고 코레소스 산의 꼬불꼬불한 도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 가야 했습니다. 그 곳에 당도하니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서 있는 성모 마리아의 동상이 마치 두 팔을 벌리고 당신의 집에 방문한 저를 환영해 주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계단 초입엔 성모 마리아의 집의 유래를 소개하는 간판들이 여러 나라의 언어로 작성되어 몇 개 서 있었는데, 그 중 우리말로 되어 있는 설명문도 있었습니다:
“ 이 곳은 성모 마리아께서 당신 생애의 마지막 해를 보내셨던 곳이다.
요한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돌아 가시기 전 요한을 가리키며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다시 성모마리아를 카리키시며 요한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 어머니라” 하셨다. 그리하여 요한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로 오게 되며, 에베소 3차 종교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기를 요한이 성모 마리아께 산 위에 집 한 채를 지어 드렸다고 하였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집의 장소는 잊혀지고 폐허가 되었다.
1878년 캐더린 에미리히 (Catherine Emmerich) 라고 하는 독일 수녀가 꿈 속에서 계시 받은 내용을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펴 냈는데, 이 책 속에 성모 마리아의 집 위치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수녀는 자기가 태어난 고장을 한 번도 떠난 일이 없었으므로 1891년 나자렛 신부가 탐사반을 조직하여 오늘날의 성모 마리아 의 집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집터 모양은 캐더린이 계시 받아 기록한 모습과 정확이 일치하였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 정교도들이 해마다 8월 15일 (마리아 승천일)에 이 집에서 순례 행사를 가졌었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성모 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분쟁을 종식시키고 이 곳을 성지로 공식 선포했다”
한글 간판엔 여기까지 적혀 있지만 그 후에도 여러 교황이 이 곳을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1967년 7월 26일에 교황 바오로 6세가 이 곳을 방문했고, 1979년 11월 30일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그리고 2006년 11월 29일엔 현재의 교황인 베네딕트 16세가 이 곳을 방문하여 미사를 드렸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집에서 기도를 드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방문한 베네딕트 16세가 환영하는 인파에 손을 흔드는 모습
성모 마리아의 집 안에서는 사진을 찍는 것이 허용이 되질 않아 위 사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미사를 드리는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포르투갈에 있는 천주교 성지인 파티마에 들렀을 땐 어마어마하게 지은 큰 교회와 10만명도 넘게 수용할 수 있는 광장의 규모에 놀랐는데, 에페서스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집은 천주교의 공식 성지로 지정 된 곳이지만 돌을 쌓아 지은 소박한 규모의 집만 달랑 하나 있는 것이 오히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집 안을 둘러 보다 보면 벽 한 쪽에 물이 스며들어 얼룩이 진 곳을 볼 수 있는데, 흡사 성모 마리아의 얼굴 모습처럼 보이는 신기한 곳도 있습니다. 집에서 나오면 바로 옆에 초를 밝히고 기원을 하는 단들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저도 순례를 마친 사람들 틈에 끼어 촛불을 하나 밝히고 세계의 평화를 기원해 보았습니다. 저 같은 비신도의 기원도 하나님이 받아 주실래나요?
병 고침의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샘엔 많은 순례객들이 가지고 온 물통에 물을 가득 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냥 목만 축이는 정도로 한 모금 마셔 보았습니다. 이 곳엔 천이나 종이에 소원을 적어 붙여 놓는 판이 담벽에 붙어 있었는데, 이미 빽빽하게 꽉 차서 새로 써서 붙일 자리가 전혀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래도 순례객들은 무언가의 소망을 적어 매달아 놓으려고 빈틈을 찾아 애쓰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펜던트엔 기독교의 성화 밑에 나자르 본죽이라 불리는 흉안을 물리치는 파란색 눈의 부적을 매달아 놓은 것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과 이교도의 미신이 조화를 이룬 기념품이라고 할까요?
앞의 성모 마리아의 집을 소개하는 한글 안내문에서 에베소 3차 종교회의란 말이 언급되었는데, 이 종교회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간단히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과 사도
바울의 전도 활동으로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져 나가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로마, 그리고 콘스탄티노플등을 중심으로 보편적
교회의 윤곽이 드러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의 신성문제로 여러 신학자들이 자기 주장을 내세워 혼란이
거듭되고 교파가 대립하게 되자 이런 신학적인 문제를 이들 대관구의 대표들이 모여 논의하고 교리를 확정지은 것을 일컬어 에큐메니칼
공의회 (Ecumenical Councils) 라고 합니다. 이들 공의회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 (AD 325),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 381), 에베소 공의회 (AD 431), 칼게돈 공의회 (AD 451),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 553),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680~681), 제2차 니케아 공의회(AD 787)를 일컫습니다. 그 중
1차 니케아 공의회와 에베소 공의회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AD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를 정식 종교로 공인하였고, 예수님의 신성문제로 교회가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자 교리의 확립을 위해 325년 5월에 니케아 공의회 (First Council of Nicaea)를 소집하여 성부 성자 성신의 동일 본질에 따른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였습니다. 이 니케아 공의회에선 또한 부활절 (the Easter) 날짜를 춘분후 첫 보름이 지난 주일에 지키기로 결정 했습니다.
431년에 소집된 에베소 공의회는 안디옥 신학의 대표자였던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 (Nestorius)와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대표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시릴 (Cyril) 사이에 예수의 인격에 대한 기독론 논쟁에서 기인하였습니다. 이 공의회에선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는 이성설을 주장하였던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을 정죄하고 예수의 한 위격 안에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이 함께 있음을 주장한 시릴의 기독론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와 같이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결정된 내용들은 초대 교회의 교리를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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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에페서스에 도착한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된 기간을 제외하곤 줄곧 에페서스에서 살다 죽었는데, 그가 묻힌 언덕은 ‘거룩한 신학자’란 뜻의 아야술룩 (Ayasuluk)이란 이름으로 불리웠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페서스에 있었던 기간이 AD 55년에서 58년 사이인데, 그의 사도행전에 성모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도 요한이 마리아와 에페서스에 온 것이 그 후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사도 요한이 묻힌 자리에 커다란 교회를 짓도록 명했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기존의 사도 요한 교회를 확장하여 더욱 큰 교회를 짓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위에서 보시듯이 이 교회는130미터 x 65 미터의 크기로 십자가의 형태로 지어 졌고 교회의 한 가운데에 사도 요한의 묘를 모시고 있습니다. 이 교회를 오늘날 다시 6세기 때 모습으로 복원하여 짓는다면 세계에서 7번째로 큰 성당이 된다고 합니다.
교회로 들어 가는 입구
1365-1370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무너진 교회의 전경. 이 사진은 교회의 서쪽 방향인 입구에서 본당쪽을 바라 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교회의 한 가운데 있는 사도 요한의 묘
사도 요한의 묘엔 대리석 판들이 정사각형으로 깔려 있고 네 귀퉁이에 기둥이 하나씩 서 있습니다. 묘지의 앞 쪽에는 사도 요한의 묘지석이 있고, 뒷쪽에는 무슨 환기통같은 구멍이 하나 나 있습니다. 가이드 티젠의 말에 의하면 이 곳에 오는 순례객들 중엔 이 구멍에 얼굴을 들이대고 사도 요한의 기를 받아 보려는 사람들도 있다고 귀띔을 했습니다.
세례를 주는 곳인 Baptistry라는 곳입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말기에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인해 사도 요한은 로마로 잡혀 갔고 몇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밧모 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 밧모섬에 1년 6개월 정도 있으면서 남긴 것이 요한계시록 입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죽은 후 밧모섬에서 풀려 난 사도 요한은 다시 에페서스로 돌아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전하면서 사역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 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전하게 되느니라.” (요한1서 4장 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