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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감춘 또 하나의 악행-타이타닉보다 더 큰 참사가 있었다

까까마까 2012. 11. 28. 15:24

 

 

 

 

 

 

 

 

일본이 감춘 또 하나의 악행

"타이타닉보다 더 큰 참사가 있었다?"

 

 

 

 

 

 

 

 

비극의 우키시마호

 

 

 

 

 

 

 

 

 

 

"타이타닉보다 더 큰 참사가 있었다?"

 

일본이 감춘 또 하나의 악행

 

 

 

원자폭탁이 투하되어 일제가 패망한 것에 대하여

모토지마 히토시(本島等) 前나가사키 시장은 1998년 8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자폭탄은 당연히 투하됐어야 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저지른 범죄행위를 생각하면 천벌이었다.

일본은 화학.생물무기는 물론 학살.고문 등 씻을 수 없는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원자폭탄보다 더 참혹한 고문으로 살해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731부대나 난징대학살은 잔혹의 극치며 일본인의 비인간성.야만성이 그대로 드러난 범죄행위였다.”

 

 

 

일본 열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혼슈 북단. 일본이 패전을 선언한 지 꼭 1주일 뒤인 45년 8월22일 밤 10시께 4천7백30t짜리 화객선 1척이 아오모리 현 최북단인 시모키타 반도의 오미나토 항을 출발해 쓰가루 해협으로 향했다. 이 날 항구를 빠져나간 화객선은 37년에 건조된 뒤 규슈와 오키나와를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다가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일본 해군에 징발됐던, 당시로서는 대포와 각종 무기까지 장착해 군사 작전용으로도

손색이 없던 우키시마마루(浮島丸)였다.

출항하던 날 승선했던 사람은 승무원인 일본 해군 병사들을 빼고는 모두 한국인이었다. 일본측 공식 집계에 따르면,

당시 배에 탄 한국인 수는 3천7백50명(7천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배가 닻을 내리도록 예정된 곳은

부산(또는 원산)이었다.

말하자면, 우키시마호는 그 때까지 일본 북부 지역에서 강제 노역으로 혹사당한

한국인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일본측이 특별히 마련한 ‘강제 징용자 송환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귀국할 꿈에 부풀어 배에 오른 한국인 대부분은 살아서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당초 부산을 향해 출항했던 배가 항로를 바꿔 45년 8월24일 교토 근해로 들어가더니 그 곳 마이즈루 만 시모사바가 앞바다에서 원인 모를 폭발 사고를 당해 침몰한 것이다. 승선자는 거의가 배와 함께 바다에 수장됐다. 배 밑창 선실에 있다가 갑자기 변을 당하는 바람에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에 탔던 사람 가운데 5백50여 명만이 구조대의 손길에 목숨을 건졌다. 당시 사고 원인에 대한 조사 결과는‘미군이 매설한 기뢰에 부딪쳐 일어난 단순 해난 사고’로 나왔다.
50년 만에 진상규명위원회 발족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해난 사고인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이 다시 거론되는 까닭은 올해가 광복 50주년이기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당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생존자 중 일부가 고국에 돌아와 50년 가까이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최근 한자리에 모여 매우 충격적인 증언을 하는 등 진실을 규명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존자들은 12월2일 충남 천안시 시민회관에 모였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창립 대회를 가진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위원회’(회장 전재진)의 주선과 노력에 의해서였다.

충남 천안·충북 영동·전남 장흥·전북 진안·경기 안양 등 전국 곳곳에서 모여든 생존자 23명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침몰 사고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본 해군이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한, 한국인 강제 징용자에 대한 의도적인 학살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증언은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에 대해 일본측이 여지껏 공식으로 주장해온 촉뢰설, 즉 기뢰에 부딪혀 배가 침몰했다는 말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42년 4월 홋카이도로 끌려가 그곳 비행장에서 강제 노역에 종사하다가 우키시마호를 탔던 김종호씨(전북 진안군)는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일본 해군이 보트를 타고 배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역시 홋카이도 스미모토 탄광에서 일하다가 배를 탔던 주윤창씨(전남 여천시)는 “함께 구조됐던 헌병으로부터‘배 밑부분까지 전기선이 늘어져 있어 절단하려고 했으나 기구가 없어 절단하지 못했는데 잠시 후 폭발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생존자들은 모두 일본 해군이 일부러 사고를 계획했거나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45년 당시 시모키타 또는 교토에서 우키시마호 사건을 직접 목격했거나 풍문으로 들은 사람들로서,

처음부터 촉뢰설에 의심을 품고 사건에 접근했다. 이들은 곧 연구 모임을 만들어,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증언을 채록하는 등 의혹을 푸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우키시마호 사건은 한꺼풀씩 진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은 전후 평화 시기임에도 무력을 사용해 징용자들을 강제로 배에 태운 사실이 확인됐다.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물기둥’이 우키시마호 사건에서는 목격되지 않은 사실도 밝혀졌다. 우키시마호가 가라앉은 지 4개월이 지난 45년 12월 한국인 생존자 몇몇이 우키시마호 사건을‘일본군에 의한 계획적인 폭거’라고 주장하며 일본 정부를 진주군(미군) 사령관에게 고발한 문서까지 발견됐다. 더욱 의심스런 사실은 9년간 방치했던 문제의 배를 54년 갑자기 인양한 뒤, 세밀한 조사 없이 해체하여 하루아침에 고철로 처분해 버렸다는 점이다. 진상 규명에 나섰던 사람들은 사고 원인에 대해 ‘촉뢰’가 아닌 ‘자폭’일 가능성이 높다며, 이 사건이 철저히 은폐되어 왔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인에 의한 진상 규명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온 반면, 국내에서는 그동안 언론 보도를 통해 사건의 존재만 어렴풋하게 알려져 왔을 뿐 체계적으로 진실을 밝혀내려는 노력은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물론 이같은 상황에서도 일부 유가족들이 일본 법원에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등 부분적인 움직임은 있었다. 92년 일본에 거주하는 사고 유가족들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공식으로 사죄하고 배상할 것을 촉구하는 재판을 추진하는 회’(대표 송두회)를 구성해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 거주하는 사고 생존자가 일본에 직접 건너가 생생한 증언을 했지만, 재판부는 명백한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지금까지 재판을 끌어 왔다.


이같은 상황에 일대 변화가 오게 된 것은 현재 우키시마호 진상규명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전재진씨가 93년 일본을 방문했다가 일본 내에서 이 사건에 대해 가장 많은 자료를 갖고 있던 사이토 사쿠치씨를 우연히 만나면서부터였다. 전씨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국내에 남아 있는 우키시마호 사건 생존자를 찾아내 증언을 듣고 자료를 수집하면서, 이 문제를 더 조직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운동 단체를 꾸리는 작업을 시작했다(오른쪽 인터뷰 기사 참조).


12월2일 있은 진상규명위원회 결성 행사는 거의 전씨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뤄진 첫 성과이다. 대학 교수, 지역 언론인,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족회 대표 등 50여 명으로 구성된 진상규명위원회는 앞으로 일본 정부에 대해‘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운동을 벌여 나갈 계획이다. 전재진 회장은 “우키시마호 사건은 이미 일본에서조차 한국 징용자에 대한 대량 학살 사건의 하나임이 입증됐다. 남은 일은 일본 정부가 공식 시인하고, 더 정확한 조사를 위해 관련 자료를 공개하는 등 협조를 아끼지 않는 것뿐이다”라고 주장한다.

잊혔던 수난사의 한 토막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이 오랜 세월의 더께를 털고 한·일 양국간 ‘과거 청산’ 작업의 주요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우키시마호 폭침시켜라

 


19세기말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핍박 받아오던 하급무사들이 메이지 쿠데타라는 난(亂)을 일으켰다. 이 난으로 인하여 일본은 300여 년간 지속되어 오던 도쿠가와막부의 평화시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살육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난을 주도했던 철학의 깊이가 없는 3류 사무라이들과 일왕은 무엇이든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악마로 변하였다. 이들은 끊임없이 가지려고 하다가 마침내 1945년 8월 나가사키(長崎)와 히로시마(廣島)에 세계최초로 핵폭탄이 투하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이에 대규모 희생이 뒤따르자 일왕은 포츠담선언을 어쩔 수 없이 수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는 연합국 측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일제의 아시아 침략전쟁은 패망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원자폭탁이 투하되어 일제가 패망한 것에 대하여 모토지마 히토시(本島等) 前나가사키 시장은 1998년 8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자폭탄은 당연히 투하됐어야 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저지른 범죄행위를 생각하면 천벌이었다. 일본은 화학.생물무기는 물론 학살.고문 등 씻을 수 없는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원자폭탄보다 더 참혹한 고문으로 살해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731부대나 난징대학살은 잔혹의 극치며 일본인의 비인간성.야만성이 그대로 드러난 범죄행위였다.”

일제는 전쟁에서 패망하자 강제징용.징병된 재일 한국인들의 학대와 도쿄 전범재판에 따른 후폭풍을 염려하고 있었다. 이에 패망 사흘 뒤 1945년 8월 18일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리어 한국인 노동자를 강제 송환하라는 명령을 일본해군에 내렸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본정부의 유언비어를 조장했던 작태는 1923년 관동대학살 때와 똑 같은 전철을 밟고 있었다.

1945년 8월 22일 오후 10시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있는 아오모리(靑森)현 시모키타반도(下北半島)의 오미나토항(大溱港)에는 우키시마호(浮島丸 4,730톤) 일명 ‘떠있는 섬 같은 배’가 대기하고 있었다. 함장 도리우미 긴고(鳥海金吾) 중좌와 해군경비부는 일본군 군사요충지 시모키타반도 일대에 강제징용.강제징병된 한국인들에게 ‘한국으로 가는 배는 이 배편 밖에 없다‘, ‘배에 타지 않는 자에게는 배급을 주지 않는다’며 회유.강박하여 약1만2천 명을 그야말로 짐짝처럼 마구잡이로 배에 태웠다.

한편 우키시마호 승무원들은 전쟁이 끝났는데 한국에 가야 할 이유가 없고, 한국에 가면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의문을 가져 출항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자 오미나토 해군경비부는 승무원들에게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군법에 회부하여 처형하겠다고 위협하여 강제로 출항시켰다.

우키시마호(浮島丸)는 원래 오사카상선 소속으로 태평양항로나 오키나와항로를 주로 운행하던 화객선이었다. 그러나 우키시마호는 일제가 아시아침략전쟁을 태평양 전체로 확대하기 3개월 전 1941년 9월3일 군에 징발되었다. 이 배는 군 장비를 싣고 운반하는 해군 특별수송선으로 개조되어 주로 쓰가루해협(津經海峽) 일대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배는 쓰가루해협(津經海峽)을 빠져 나와 동해 니가타(新潟) 앞바다를 거쳐 쓰루가(敦賀)를 지나는 등 이틀 간의 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중이었다. 배 안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았다. 약 1만2천여 명 승선으로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콩나물 시루와 같은 배 속에서 먹고 자는 것과 배설 문제는 고통 그 자체였다. 하지만 승선한 한국인들은 배가 부산으로 가는지 진해로 가는지 혹은 원산으로 가는지 그 기항지(寄港地)는 정확히 모르지만 해방과 귀국의 기쁨을 만끽하며 모든 것을 참고 있었다.

 

 

 

 

 

 

 

 

 

 

▲1990.8.14 아사히신문이 제공한 침몰 장소

 

 

▲우키시마호 항해 현황

 

 

 

8월 24일 한반도로 향하던 우키시마호는 음료수 보급을 위하여 기항한다며 갑자기 방향을 돌려 일본 중부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배가 해군기지 마이즈루(舞鶴)항 인근에 이르자 승무원들은 갑판에 있던 한국인들을 모두 선내로 황급히 강제 이동시켰다. 그리고 배가 시모사바가(下佐波賀)마을 인근에 접근하자 일본 승무원들은 구명정으로 대거 탈출하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이 탈출한 직후 오후5시20분경 우키시마호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두 동강이 나면서 침몰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우키시마호는 수천 명의 한국인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했다.

이것은 뒤에서 밝히겠지만 일제가 의도적으로 우키시마호를 폭침시킨 것이다. 이러한 작태는 ‘역사조작’과 ‘야스쿠니신사’에서 밝혔듯이 영혼이 피로 물든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제가 패망하자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악우’로 여기던 한국인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는 황폐화된 정신에서 발로된 최후의 발악이었다. 비열한 사무라이 나라 일제는 악랄한 전쟁 죄상을 은폐하고 패전의 화풀이를 위해 한꺼번에 수천 명이나 되는 한국인들을 바다에 수장시킨 것이다. 이는 일본정부 주도하에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순간 가장 많은 사람을 살상한 희대의 홀로코스트였다.

마이즈루(舞鶴)는 멀리 북쪽에서 날아 온 학이 날개를 펴고 쉬는 모습이 마치 학이 춤을 추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곳이다. 마이즈루는 청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거점이었고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군항을 건설했다고 한다. 러일전쟁 때에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곳에 진을 치기도 했다. 마이즈루는 요코스카(橫須賀), 구레(吳), 시세보(佐世保)와 함께 일본 4대 군사항이다.

혼이 빠진 강제징용자 또 다시 학살하다
일제는 아시아침략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즈음 연합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시모키타반도에서 대대적인 철도·터널·부두.비행장 공사 등을 강행하고 있었다. 시모키타반도는 대부분이 산악 지대로써 해협이 험난하여 접근하기 힘들뿐 만 아니라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최악의 지형이다. 때문에 일본인들 조차 접근을 꺼려해 대부분 한국인들이 강제 동원됐다고 한다. 우키시마호의 폭침으로 희생된 이들은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령이 내려진 뒤 군사요충지 시모키타반도 일대에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서 강제 연행되어 온 힘없는 불쌍한 선량들이었다.

 

 

 

공사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은 굶주림, 중노동, 고문과 학대 등에 시달리는 지옥과 같은 노예생활을 하였다. 호박.무 한 조각이 반찬이었고 끓인 바닷물이 국이었다.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혹한기에는 담요 한 장으로 잠을 자야 했고 배가 고파 돼지 죽통을 훔쳐 먹어야 했다고 한다. 지옥과 같은 생활을 견디지 못해 탈출하다 잡혀온 이들은 감독관들이 천장에 매달아 놓고 장작불을 피워 천천히 태워 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또 항의하는 자들은 북방지역으로 강제 축출 또는 혀를 자르거나 칼로 베어 죽였다고 한다. 일하다 쓰러지면 몽둥이나 삽자루로 내리쳐 살해했다고 한다.

죽으면 그 자리에서 묻어버리거나 터널 속에 시체를 유기했다고 한다.

 

 

 

 

이들은 가족을 울부 짖으며 불렀고, 터널 돌 벽에는 부모의 이름과 배고픔을 호소는 글귀를 손톱으로 새겼으며, 고향을 그리워하다 피눈물을 쏟으며 숨져갔다. 해방으로 겨우 고기덩어리 하나에 불과한 육신을 건진 이들이었지만 영혼이 피로 물든 일제는 우키시마호 푹침을 통하여 또 다른 죽음을 던져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 아니라 피에 굶주린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제에 의해 혼이 빠진 육신을 차디 찬 바다 속에 내동댕이친 것이다.

 

우키시마호 사건을 단순한 해난 사고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60년대 말부터 사이토 사쿠치(齊藤作治·시모키타지역문제연구소장), 아키모토 료지(秋元良治·전 아오모리 대학 조교수), 와시오카 코쇼(鷲岳公彰), 나루미 겐타로(鳴海建太郞) 등 일본의 몇몇 양심적인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을 진행해 왔다.

 

일본의본 모습! (펌)

비극의 우키시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