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김중태가 명쾌히 말한다- 무덤에 침을 뱉기 위해서 왔다는 그가...
정치문제를 가능한 한 피하려 했지만 꼭 나누고 싶은 동영상이 있어 올립니다.
제일 밑에 동영상 올렸습니다.
그동안 여러 체널을 통해 같은 재목의 다른 자료들도 보아 왔지만
이것은 정말 들어 볼 만 합니다.
한 번 시작하면 계속 보게 되는 이유는 이 양반의 달변 때문일 것입니다..
박정희 무덤에 침을 뱉기 위해서 왔다는 그 김중태가 명쾌히 또 말한다
자질구래한 글 읽기 귀찮으시면 밑에있는 동영상으로 직접 가셔서 한 번 보세요.
밑의 사진은 모두 미조 김중태 카페에서 가져옴
글은 고들빼기와 용팔이 에게서.
●검찰 공소장도 법원 판결문도 정보부에서 작성
●김형욱, “경상도 사람이 왜 경상도 출신인 각하를 반대하나”
●386운동권, 겸허하고 정직해야
6·3사태 주역 김중태가 털어놓은
1960년대 학생운동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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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6일 새벽,
나이방 낀 자 군복을 입고 혁명공약을 발표한다. 반공이 국시의 제 1위란다.
이틀 후, 5월 18일에 민족일보 조용수를 체포한다. 눈에 거슬린다면 탱크로 박살낸다, 알아서 기어.
10월 31일 변호인도 없이 조용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전세계적으로 조용수 구명운동이 벌어진다. 그러나 1961년 12월 21일 사형이 집행된다.
5.16 이후 대한민국은 조용하였다고 한다. 거의 1년 간 나이방을 낀 괴짜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나이방이 말한다. 1963년 3월 16일 군정 4년 연장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한다.
야당과 재야 정치인들 중심으로 군정 연장 반대 데모가 3월 20일부터 일제히 벌어졌다.
그동안의 침묵을 깬 이들은 대학생들이었다.
이들을 주도한 인물은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 재학 중이던 김중태(金重泰)였다.
1962년에 군정연장 반대 시위를 하였으며 1차 투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군정연장안을 발표한 일은 1963년의 일이므로 의아함이 남는다. 오타일까.
1963년 한미 행정협정 촉구 시위로 2차 투옥되었다고 하므로 1차 투옥이 오타일 수 없다.
필자는 근현대사 전문가가 아니다. 정확한 기록을 알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료를 검토해야 하리라.
김중태 사이트를 신뢰하자.
그렇다면 김중태는 군정연장안을 발표하기 이전에
군부가 군정연장 계획을 수립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김중태가 이를 알고 있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모
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아니라고 말하면서 학생 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주도한 한일협정 반대 시위를 6.3 사태라고 한다.
그는 투옥되고 6.3 학생 시위는 무려 7개월이나 지속된다. 12월 그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1964년 그가 회장으로 주도한 학생단체의 명칭은 ‘민족주의 비교연구회’였다.
무려 36년이 지난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내 가슴이 서늘해진다. 조용수는 민족일보 사장이었다.
‘민족’이란 말은 북한과 연계하여 빨갱이로 몰 수 있는 금기어였다.
그런데 그는 태연히 ‘민족주의 비교 연구회’ 회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1965년 내란 음모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다. 15개월 복역 후 석방된다.
1967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2년간 실형을 산다. 1969년 미국으로 강제 추방된다.
지금도 마로니에라는 드라마에서 이때의 상황을 전한다. 김중태는 사형 선고를 받을 때 태연히 웃었다.
이 모습을 보고 열 받힌 괴물은 2차 인혁당 사건을 만들어 사법살인을 자행하였다고 한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묻는다.
자네는 경상도가 고향인데 왜 박정희 정권에 투쟁하나.
김중태는 ,권력자를 노려보면서 눈도 깜박하지 않고 말했다.
부장님의 고향이 이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부장님은 왜 김일성에게 충성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분쇄기 넣어 갈아서 죽일 때였다.

미국으로 추방된 그가 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에게 기자가 왜 왔느냐고 묻는다.

민주화를 이야기 할 때 김영삼과 김대중을 말한다.
과연 그런가.
사형선고를 중심으로 비교해 보자. 김영삼은 빼고...
김중태 1940년 경북 의성 출신
1964년 4차 투옥 사형선고
1967년 5차 투옥 무기징역
1969년 강제 추방
1980년 5공화국 정치정화법 최종대상자 3년간 정치 활동 금지
1988년 국회의원 출마 낙선
김대중 1924년 전남 목포 출생
1963년 국회의원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출마 낙선
1981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
김지하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1964년 투옥 4개월
1974년 사형선고, 1주일 후 무기징역
김중태와 김대중 두 사람만 비교해 보자. 둘은 민주화 운동에 신명을 바친 점은 같다.
보이지 않는 시대의 기미를 알아채고 온 몸으로 바람의 흐름을 바꾸고자 애쓴 이는
뜻밖에도 김중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현해탄에서 받은 생명의 위협을 낮추어 보자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으며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터를 닦은 이는 김중태이고 김대중은 수혜자이다.
1960년대 초 김중태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이 없었다면 야당으로서
김대중의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10여 년간 학생운동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되찾은 10년을 잃어 버렸다.

김중태는 고향에서 낙선하자 책을 보면서 여생을 보낸다.
김대중이 나중에 대통령이 되어 민주화와 남북관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백이와 유하혜의 관계라고 보아도 좋을까.
《논어》와 《맹자》를 들추어 보자.
유하혜는 사법관이 되었는데 3번이나 쫓겨났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신은 어째서 이 나라를 떠나가지 않는가.
왈, 곧은 도로써 사람을 섬긴다면 어디 간들 3번쯤 쫓겨나지 않으리오.
도를 굽혀서까지 사람을 섬길라치면 굳이 부모의 나라까지 떠나겠는가
(柳下惠爲士師, 三黜. 人曰, “子未可以去乎?” 曰,
“直道而事人, 焉往而不三黜? 枉道而事人, 何必去父母之邦?” -
《논어》<미자>).
맹자는
공자의 말에 윤색을 가하곤 했다.
맹자가 이 재미 있는 이야기를 그냥 두겠는가.
백이는 눈으로는 사나운빛깔을 보지 않았고, 귀로는 사나운 소리를 듣지 않았고,
자기에 맞는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았고, 자기에 맞는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않았다.
다스려지면 나갔고 혼란해지면 물러났다.
횡포한 정치가 나오는 데와 횡포한 백성들이 머물러 있는 데는 차마 살지 못했다.
부도덕한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사는 것을 깨끗한 관복 차림으로 시커먼 진흙에 앉는 것으로 여기었다.
주(紂=박정희) 때에 북해의 변두리에서 천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래서 백이의 풍모를 들으면 완악한 사나이도 청렴하여지고
겁많은 사나이도 지조를 세우게 된다.
이윤은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겠는가?" 하고,
다스려져도 나갔고, 혼란해져도 나갔다.
그리고 "하늘이 이 백성들을 내어서는 먼저 안 사람을 시켜서 뒤늦게 아는 사람을 일깨우게 하고,
먼저 깨달은 사람을 시켜 뒤늦게 깨닫는 사람을 일깨우게 하였다.
나는 하늘이 낸 백성 중의 먼저 깨달은 자다.
나는 이 도를 가지고 이 백성들을 일깨우련다." 라고 말하고
온 천하의 초동급부들이 요 순 임금 베푼 은택을 받지 못하는 것을
자기가 떠밀어서 도랑 속에 빠뜨린 것으로 여겼으니,
그는 천하를 다스리는 중대한 사명을 자임하였던 것이다.
유하혜(柳下惠)는 더러운 임금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작은 벼슬을 사퇴하지 않았다.
나가서는 자기의 우수한 능력을 감추지 않고 반드시 정당한 방법으로 일하였고,
버려져도 원망하지 않았고,
곤궁 속에 빠져도 분해하지 않았다. 띠리띠리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너그럽게 굴고 그들에게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너는
너고 나는 난데 내 곁에서 벌거벗고 있은들 네가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느냐?"
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유하혜의 작풍을 들으면 쩨쩨한 사나이가 너그러워지고 박한 사나이가 후해진다.
공자께서 제 나라를 떠나실 때에는 일었던 쌀을 가지고 가셨는데
노나라를 떠나실 적에는 "내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부모의 나라를 떠나는 도리였다.
속히 할 만하면 속히 하고, 오래 있을 만하면 오래 있고, 머무를 만하면 머무르고,
벼슬을 살 만하면 벼슬을 산 것이 공자시다.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백이는 성인으로서 맑았던 사람이고, 이윤은 성인으로서 사명을 자임하였던 사람이고,
유하혜는 성인으로서 온화한 기질을 가졌던 사람이고, 공자는 성인으로서 때를 알아서 해나간 사람이었다.
공자 같으신 분을 집대성했다고 하는 것이다 - 맹자 만장 하)
맹자는 공자를 백이, 이윤, 유하혜 3사람의 덕을 함께 이룬 인물로 보았다. 다소 억지스럽다 하겠다.
공자는 백이처럼 극단적 상황에서 지조를 지킨 바는 없다.
이윤이나 유하혜처럼 벼슬살이의 기회가 많지 않았다.
단지 그들처럼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바는 지켰다 할 만하다.
위에 든 김중태, 김지하, 김대중을 3현인과 비교해 보자.
김중태는 이윤과 유하혜처럼 벼슬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니 백이의 모습이라 하겠다.
그가 굳이 이윤과 유하혜의 모습을 지닌다면 아픈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격렬하게 맞선 점이다.
김지하는 한때는 아픈 시대와 맞섰으므로 김중태의 풍모를 닮았으나
추한 말년으로 백이의 모습을 찾을 길 없다.
한시적으로 지킨 뜻은 지조와 거리가 멀다.
더구나 그는 국물에 집착하여 적의 편에 서서
어제의 동지를 비난하기까지 하니 거론할 바가 없다. 추하다.
김대중은 백이의 모습과 이윤 유하혜의 모습을 모두 지니고 있다.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해 어떠한 가시밭길도 달게 걸었다. 이는 이윤과 유하혜의 삶이다.
단지 개인적 삶에서 석연찮은 점이 있었으니 백이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가 지키고자 한 바와 살아야 했던 시대를 고려하면 백이가 아니다 할 수도 없다.
김중태가 이루지 못한 성취를 김대중이 이루었다 하면 어떨까 한다.
60년대의 학생 운동은 김중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선거에서 낙선되자 세상의 뜻을 받아들이었다.
국물에 입 다시는 추한 모습이 없었으니 현대에 살았던 뜻 높은 선비라 할 만하다.
그는 초나라의 굴원이었으며, 진(秦)나라의 상산사호(商山四皓), 위(魏)·진(晉)의 죽림칠현이었다.
수양대군이 부른다고 매월당의 뜻을 꺾을 수 있었을까.
둥둥둥 북소리 내 목숨 재촉하는구나 저승에는 여인숙이 없다고 하던데 서산에 해는 지려고 하네
오늘밤 누구 집에서 자고 갈까(擊鼓催人命 黃泉無一店 西山日欲斜 今夜宿誰家-성삼문).
미국으로 추방당하는 김중태의 가슴에 불붙는 조국애는 흐르는 눈물이 되었을 것이다. 한학에 밝았던 그다.
문천상(文天祥)처럼 육가(六歌)를 읊으며 부모보다 아내보다 정인보다 아들이며 딸보다
애틋하였던 동지들의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그는 허허롭게 떠났으며 어떤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다.
돌아와서 민주주의의 실현에 모둠발을 세우려 하였으나 낙선하자 향민들의 뜻을 받아들이었다.

김중태 연보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쿠테타
1961년 5월 18일 민족일보 조용수 체포, 10월 31일 변호인 없이 사형선고,
12월 21일 전 세계적 구명 노력에도 사형 집행.
1961년 김중태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정치학과 입학
1962년 군정연장 반대 시위로 1차 투옥
1963년 한미 행정협정 촉구 시위로 2차 투옥
1964년 -3월 24일 한일협정 반대 시위로 3차 투옥
-서울대 진보학생단체인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회장
-6월 3일 한일회담 반대 전국대학생 투쟁위원장으로 지명수배되어 4차 투옥
-육군보통군법회의와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죄"로 사형선고
-12월 계엄령 해제와 동시에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집행유예 출옥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제적
1965년 -조국수호국민협의회 상임위원으로 재직 중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어 5차 투옥
-"내란 및 선동", "내란음모" 죄명으로 무기징역 선고받았으나 이히 무죄 판결로 15개월 후 출옥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2차 제적
1967년 -1월 신민당(대표: 윤보선)에 백기완와 함께 운영위원으로 입당
-5월 3선개헌반대 투쟁위원회의 배후 조정자로 지목되어 6차 투옥
-2차 민비연사건, 1차 인혁당 사건, 동백림간첩사건 등에 조작 연류되어 대전교도소에서 2년간 실형
1969년 출감 후 중앙정보부에 의해 미국으로 강제 추방
1971년 일리노이 주립대학 졸업
1975년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철학박사 과정 수료
1980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귀국
-"자유와 정의를 위한 모임" 대표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5공화국 정치정화법 최종대상자로 분류되어 3년간 정치,사회적 활동 규제
1988년 -"분배와 형평"(동광출판사) 출간
-총선에 출마하여 낙선
1996년 경북지역 환경연합 "녹색물결" 대표
1997년 "원효결서"(화산문화사) 1, 2권 출간
2004년 -"대한민국 국회보"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정통성을 다룬 "대륙의 삼국" 연재 개시
-4월 4일 EBS 일요초청강연 "우리말로 풀어 본 우리역사"를 주제로 강연
2005년 우리 고대사의 정통성을 다룬 저서 집필 중

위의 사진은 모두 미조 김중태 카페에서 가져옴
당시의 동아일보는 위세가 등등하던 신문이었다.
그 신문에서 만화가 보이는 1면 또는 3면에 대문짝만하게 <김중태가 살아 있다>는 요즘 같으면
기사거리도 안 되는 특종을 띄운다.
율도국에서 홍길동이라도 찾았단 말인가. 김중태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반정부 활동은 학생운동 중심이었고 여론은 신문이 장악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새마울 운동이다 뭐다 하는 핑계로 마을마다 스피커를 달게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왕왕거리면서 국민들을 세뇌시킨다. 이어서 흑백 TV가 보급된다.
1988년
김중태가 고향에서 국회의원에 낙선하는 것을 나는 미디어의 변화라고 본다.
첨부물 참조
(군정 반대로 재판을 받고 나오던 동지들과 함께, 왼쪽부터 김중태, 김도현, 현승일.)
이들 중에서 김도현과 현승일은 공직에도 있었고 한나라당 어쩌고 위원장 운운이다.
환경운동을 한다면서 쓰레기 봉지를 들고 다니는 분은 김중태뿐이시다.
그가 6.3 운동을 주도할 때의 동지이자 후배들 중에서 나는 새도 떨러뜨렸다는
5공의 황태자 박철언이 있고,
내무부 장관 대구시장인 조해녕 등이 즐비하다.
그러나 그들의 형 김중태는 이들과 이름을 나란히 하지 않았다.
국물을 다시었다는 추한 이름을 세상에 걸지 않으셨다.
옛일을 되새겨 보라.
한 태조 유방이 나라를 창업하였을 때 1등 공신 장량은 구름 속에
몸을 숨기었다.
유방이 말고삐를 잡는데 뿌리칠 줄 알았기에 한신처럼 토사구팽이란 고사성어를 남기지 않았다.
동문수학하던 친구 유문숙이 후한의 황제가 되었을 때 황제는 옛 친구
엄자릉을 찾았다.
엄자릉은 코가 삐뚫어지도록 마시고 황제의 배에 다리를 올리고 잠을 잤다.
그래서 태백성을 범한 객성(客星)이 되었다. 후대에 객성을 기리는 시화가 넘쳐나지만
태백성은 그린 사람은 없다.
김지하, 그대가 형이라 따르던 김중태를 잊었다면 김대중은
알리라.
김대중은 영면하는 순간까지 취생몽사하지 않았다.
그대 같은 허튼 소리는 한마디도 없었으니 김대중의 삶은 더러운 자와 함께 하건
깨끗한 이를 가까이 하건 절개를 지킨 백이도 되고 유하혜도 된다.
그대는 어디에 이름을 걸
것인가. 국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도척이 되었으니
엄자릉이 낚시하던 여울을 엿보지 말라.
엄자릉이 낚시하던 여울을 그린 그림, 그를 기리는 그림은 지금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