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역사적 인물의 재조명

성삼문=매죽헌 성삼문 (1418~1456)

까까마까 2012. 12. 12. 18:12

ㅈㄱㅇ

 

 

 

어렸을 때 종로에서 한강을 가기위해 전차를 타면 그 끝이 노량진역 이였기에

노량진 언덕의 사육신 묘는 항상 지나치며

한 번씩 철문을 어루만지며 써있는 비문을 읽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성삼문의묘(成三問의墓) 에서

(2012/05/01 현재)

 

 

 

 

 

 

 

 

 

성삼문의 묘는 논산 일지묘와 서울 사육신 공원에도 있습니다.

노량진 언덕의 사육신 묘는 성삼문의 사위 박임경(臨卿)이 의인들과 같이 몰래 장하고 석표했다고

박임경 아들 즉 성삼문 외손자 박증(增)의 [암천선생실기-국립중앙도서관]에 전해옵니다.

또 유허는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446-2 한양말에도 있고요,

1673년 송시열 찬, 김비 서, 김만기 전으로 [창녕성선생유허비]가

유허지에서 5리 동쪽 충곡서원터로 옮겨져서 현존합니다.

 

 

 

 

 

 

 

 

 

 

 

 

 

 

 

 

 

 

 

 

 

 

 

 

 

 

 

 

 

 

 

제13회 매죽헌 성삼문 문화제 행사에 참여한 관람객들이 서예작품을 보고 있다.

 

세종시 금남면 문절사에서 매죽헌 성삼문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제13회 매죽헌 성삼문 문화제 및 문화축제’가 지난 9일 성황리에 개최됐다.

이날 행사는 유한식 세종시장을 비롯해 유환준 세종시의회 의장, 신정균 교육, 주민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가 진행됐으며,

매죽헌 성삼문 선생 숭모의 글을 출품한 성낙희씨가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행사가 열린 문절사는 1903년 고종의 어명으로 성주영이 건립해

성삼문 선생의 영정과 유품, 친필 등이 소장되어 있으며 지난 1984년에 도지정문화재 40호로 지정됐다.

성삼문선생(1418~1456)은 본관은 창녕이고 호는 매죽헌, 시호는 충문이다.

홍주 노은동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막 나려고 할때에

공중에서 낳았느냐 하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들려 삼문이라 이름을 지었다고한다.

 

 

 

 

 

 

 

 

 

 

 

성삼문의묘(成三問의墓) 에서

(2012/05/01 현재)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58에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매죽헌(梅竹軒)
성삼문(1418∼1456) 선생의 묘소 입니다. 단종 1년(1453)에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자, 아버지인 성승,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미리 발각되어
한강가(지금의 서울 노량진)에서 끔찍한 처형을 받았습니다. 그의 묘소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으며,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는 한쪽 다리가 묻혀있다고 합니다.
매년 음력 10월 그믐에 선생의 위덕을 기리는 묘제 행사가 거행되며, 장릉(莊陵:단종의 능)
충신단에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성삼문 선생이
태어난 외가 집터에 성삼문선생유허지 (成三問先生遺墟址)와
성삼문선생유허비 (成三問先生遺墟碑) 가 있습니다 


 

 

 

 

 

 

 

 

 

 

최근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 KBS 2TV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의 중의 한명인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1418~1456) 선생의 충절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제12회 성삼문 문화제’가 오는 9일 금남면 달전리 문절사에서 열린다.

 

충문공성삼문선생 숭모회(회장 장좌진)가 주최하는 이 문화제는

공식행사로 대회사, 축사, 전통제례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또 공식행사가 끝난 뒤 문예행사로 문절사 앞마당에서 서예대전심사와 시상도 펼쳐질 예정이다.

 

 

 

 

 

 

 

 

 

 

 

 

 

 

 

 

 

 

 

 

 

 

 

 

 

 

 

 

 

 

 

 

 

 

 

 

 

 

 

 

 

 

 

 

 

▲ 성삼문(梅竹軒 成三問:1418∼1456)

 

 

 

 

 

 

 

 

 

 

조선 초기 문신이자 사육신이었던 매죽헌 성삼문은 서기 1418년(태종 18년)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고 묻는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렸다 하여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지었다고 한다. 당시 언어학 분야의 탁월한 학자였던 성삼문은 <직해동자습>의 교정과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훈민정음 창제의 기초적인 연구를 위해 요동을 13번이나 왕래하며 음운연구에 심혈을 바쳤다. 또한 선대 임금 때부터 승문원(承文院)을 두어 이문(吏文)을 맡게 하고, 사역원(司譯院)을 두어 통역을 맡게 하는 등 그는 훈민정음 창제의 기초적 연구에 크게 공헌했다. 또한 성삼문은 충절과 의리의 삶을 본보기로 보여준 선비였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불의로 규정하고 단종의 왕위 회복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마침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충절과 의리를 끝까지 주장하다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달 26일 오후 2시 대우학술재단에서 ‘기념 학술발표회’가, 10월 23일에는 ‘성삼문문집 한글번역출판기념회’와 ‘논문학술발표회’가 각각 충남대학교 대강당, 충남대학교 세미나실에서 열린다

 

 

 

 

 

 

 

 

 

 

 

 

 

 

 

 

 

 

매죽헌 성삼문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당시 성삼문도 수양대군에게 협력을 했더라면 부귀영화가 보장되고 자신의 인생도 순탄대로의 행복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성삼문은 수양대군의 행위를 정권의 도둑질로 보고 이에 협력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올바름이라는 가치, 정의라는 가치를 위하여 한 목숨을 바친 것이다.

 

 

 

 

 

 

 

 

 

 

 

 

 

 

 

 

 

 

 

또한,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바친 그의 학문적 업적을 들 수 있다. 성삼문이 쓴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 서문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언어가 중국과 달라 역관(譯官)이 있어야만 서로 의사 소통이 가능했다. 선대 임금 때부터 이를 위해 승문원(承文院)을 두어 이문(吏文)을 맡게 하고, 사역원(司譯院)을 두어 통역을 맡게 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해왔다.

 

 

 

 

 

 

 

 

 

 

 

 

 

 

 

 

 

 

 

 

 

또한 왕명에 의하여 성삼문은 신숙주와 함께 중국에 가는 사신을 따라 요동에 가서 황찬을 만나 음운에 관하여 질문을 하고 배웠으니, 이후 요동을 왕복한 것이 무려 13회나 되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성삼문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위하여 바친 열정과 노력이 어떠한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기에 앞서 한글로<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만들어서 실제로 시험해 보았다. 세종은 1446년(세종 28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 한자음을 정확히 알아야 훈민정음을 바로 쓸 수가 있으므로 신숙주를 비롯한 최항, 성삼문 등에게 <동국정운>을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기에 앞서 한글로<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만들어서 실제로 시험해 보았다.

세종은 1446년(세종 28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 한자음을 정확히 알아야 훈민정음을 바로 쓸 수가 있으므로

신숙주를 비롯한 최항, 성삼문 등에게 <동국정운>을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즉 <동국정운>은 한자음을 어떻게 훈민정음으로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 해결의 연구였다. 이 <동국정운>이 만들어짐으로써 처음으로 한자음을 우리의 한글로 나타내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성삼문은 당시 언어학 분야의 탁월한 학자였던 것이며, <직해동자습>의 교정에 참여하였고, <동국정운>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의 기초적인 연구를 위해 요동을 13번나 왕래하며 음운연구에 심혈을 바쳤던 것은 그가 남긴 큰 발자취라 하겠다

 

 

 

 

 

 

 

 

 

 

 

 

 

 

 

 

 

 

 

 

 

 

 

 

 

 

 

 

 

 

 

훈민정음 창제의 주도자는 비록 세종이라 하더라도 이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고 도와준 것은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이라고 볼 때, 이들의 한글창제에 바친 공헌은 민족사에 길이 남게 될 것이다

 

 

 

 

 

 

 

 

 

 

 

 

 

 

 

 

 

 

 

 

 

단종 1년(1453)에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을 잡으면서 그에게 내린 정난공신의 3등 칭호를 사양하였다. 1454년 집현전 부제학과 예조참의, 1455년 예방승지 등의 직책에 올랐다. 아버지인 성승,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미리 발각되어 한강가(지금의 서울 노량진)에서 끔찍한 처형을 받았다. 그의 묘소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으며,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는 한쪽 다리가 묻혀있다고 한다. 매년 음력 10월 그믐에 선생의 위덕을 기리는 묘제 행사가 거행되며,

장릉(莊陵:단종의 능) 충신단에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전설 ]


1456년 세조는 성삼문을 극형에 처하고, 그 육신을 팔도에 조리 돌리개 할 때 선생의 한지체(一 肢體)를 지고 여름철에 현재의 성삼문재 (구리개고개)를 넘게 되었다. 무덥고 귀찮은 생각에서 시체에게 독설을 퍼붓자 "아무데나 묻어라" 하는 소리가 나서 현 재의 자리(구리개 고개)에 묻었다고 한다.

 

김한(金閑)이란 사람이 이 고개를 넘어 근처에 있는 쌍계사에 서 자는데 꿈에 한 장부가 나타나 "내가 있는 곳이 어찌 더러운 지 모르겠다."고 하기에 잠이 깨어 승려에게 묻자 성삼문의 묘소 가 근처 옆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같이 가보니 백골이 드러나 있었 다고 한다. 적삼을 벗어 백골을 싸고 묻고 봉분을 다시 했다고 한다.

 

 

 

 

 

 

 

 

 

 

 

 

 

 

 

 

 

 

 

 

 

 

 

 

 

 

▶사송치 어귀의 하마비(下馬碑)

 

가야곡면 양촌리 성삼문묘 입구에 하마비가 있다.

옛날 어느날 길손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데 갑자기 말다리가 부 러지더니 그 자리에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려 면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서 걸어가야만 했다.

그 후 사송치 어귀 에 하마비를 세웠는데 그 뒤부터 이 하마비 있는 곳에서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걸어가

화를 면했다고 한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기에 앞서 한글로<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만들어서 실제로 시험해 보았다.

세종은 1446년(세종 28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 한자음을 정확히 알아야 훈민정음을 바로 쓸 수가 있으므로

신숙주를 비롯한 최항, 성삼문 등에게 <동국정운>을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동국정운>은 한자음을 어떻게 훈민정음으로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 해결의 연구였다.

이 <동국정운>이 만들어짐으로써 처음으로 한자음을 우리의 한글로 나타내게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의 주도자는 비록 세종이라 하더라도

이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고 도와준 것은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이라고 볼 때,

이들의 한글창제에 바친 공헌은 민족사에 길이 남게 될 것이다

 

 

 

 

 

 

 

 

 

1455년 수양대군의 단종의 왕위를 찬탈할 당시 예방승지로 국쇄 를 안고 통곡하였으며,

그 이듬해 좌부승지로서 아버지인 승,

박 팽년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미리 발각되어 한강가(지금의 노량진역 부근)에서

다리를 꿰뚫고 사지를 찢는 처형을 받았다.

시호는 충문공이다. 유림들은 선생의 위덕을 기리기 위하여 매 년 음력10월 그믐에

선생의 묘전에서 묘제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성삼문의묘 (成三問의墓)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1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58
-소유자(소유단체) 창녕성씨종중
-관리자(관리단체) 성하진

 

 

 일부출처=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