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여류운동가 밎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과 그 아들의 용서
나혜석의 작품을 멏 점 안 되지만 이렇게 많이 접하기는 처음이라 흥분되서 올립니다.
일 년여 전에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스크랩해서 올린적이 있어
낮설지 않은 이름일 것입니다.세여인과 세남자의 소설같은 관계 즉
김일엽,나혜석, 박귀옥(이응로 화백의 본 부인)과
송만공 스님,이응로 화백,깁태신(김일엽과 일본인 사이에서 난 사생아)들이
그 주인공 이였는데
오늘은 나혜석에 대해자료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털어 놓는 어머니 나혜석을 밑에 실었습니다.
서울대 법대 교수와 캘리포니아 웨스턴 법대 교수 등을 지낸 뒤 정년 은퇴하고
현재 미국 샌디에이고에 사는 김 전 교수는
“고백하건대 나는 생모가 나혜석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다”면서 “
젊어서 펄펄 뛰게 미워했던 사람이,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용서할 수 없다고 별러왔던 사람이,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덜 미워지고 혹은 가물거릴망정
용서의 가능성이 부여되는 것은 나이 탓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월정 나혜석
1896년~1948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대표적인 신여성, 최초의 여류 소설가, 문필가 ,여성운동가
나혜석의 삶은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여러 삶이 중첩되었다.
3.1운동때 옥고도 치르고 사회운동을 전개한
의식있는 여성이었지만
나혜석의 삶에 '남성'이 끼친 영향은
그 무엇보다 지대했다는 생각이다.
여자에게....
어떤 남자를 만나냐가 그 여자의 삶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라는 것이
나혜석에게 많이 해당한다는 생각이다.
그야...남자에게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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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한 세상의 평가와는 조금은 달리...
* 김우영과 결혼할 당시의 사진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수원에서
5남매중 넷째고 딸로는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냈고
그의 집은 '나 부잣집'이라고 불린
부유한 개화 관료 집안으로 신식교육을 받고
두 아들 과 두 딸이 일본 유학을했다.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아버지의 축첩으로
어머니의 한숨을 듣고 자랐다.
*1929년 별건곤 발행인과의 인터뷰 사진
나혜석은 미인은 아니었지만 총명했다.
세련되고 따뜻해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부지런하고 소탈하고 속이 툭 틔여서
가슴속의 것을 담아두지 않는 성격이었다.
어려서 부터 그림도 잘그렸지만 수학 과목에 특출했고
진명여학교를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 '이상을 직시하는 계명자' <계명> 삽화
오빠 나경석
큰오빠인 나홍석은 둘째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
둘째 오빠인 나경석이 맏이 역할을 했고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나경석은 도쿄대에서 화공학을 공부,
귀국후 교사를 하고 민족운동에 관여하다
3.1운동 당시 길림에서 무기를 가져오다가
발각되어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후 3년간 동아일보 객원기자로 일했다.
* 1933년 어느날
첫애인 최승구
도쿄의 조선 유학생 학우회가
나경석 최승구등이 중심으로 결성되어
잡지 '학자광'을 창간, 인쇄인이 최승구였다.
최승구는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게이오 대학에서 공부하며
당시 도쿄문단에서 춘원 이광수 못지않게 촉망받는
뭇 여성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다.
최승구는 이미 조선에 부인이 있었으나
나혜석은 개의치 않고 교제를 했다.
* 1919년 <초 하룻날> 매일신보 만평
1916년 봄, 최승구가 지병으로 죽었다.
나혜석이 그를 돌보고 간 다음날이었다.
최승구가 죽고 그 비통함에 일시적으로 발광했고
그 충격으로 지병을 갖게 되었다.
'아, 그는 나를 버리고 갔다.
그는 내게 모든 풍파를 안겨주고 멀리 멀리 가버린 때가
이 봄밤이다.'
- '원망스런 봄밤' 신동아 1933.4
* 구라파 만유당시의 부부
변호사 김우영
최승구가 죽자 나경석은
나혜석에게 교토대 법대생이던 김우영을
배우자로 적극 권한다.
김우영은 나혜석보다 열살 연상이고
초취 부인과 딸 하나를 두고 사별한 사람이다.
춘원 이광수와도 사랑했지만
나경석이 생활에 안정이 없다고 반대했다.
김우영의 집요한 구애에 나혜석은 결혼 조건을 내건다.
나혜석은 신행여행길에
애인이던 최승구의 무덤에 묘비를 세워줄것을 요구했다.
첫째,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셌째,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하게 하여 주시오.
김우영은 모두를 수용하고 결혼했다.
* <화홍문> 연대미상
김우영이 1921년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
만주시절은 나혜석에게 살림하고 아기도 키우고
부영사의 아내로 유복하게 사는 동시에 그림도 그리고
글도 써내는....바쁘지만 행복한 날들이었다.
* 1923년 <만주 봉천풍경>
당시 일본은 변방관리에게 특전으로
구라파와 미국여행을 시켜주는 관례로
1927년 부부가 구라파에 가게 된다.
* 1928년 <스페인 해수욕장>
최린 (1878년~1958년)
그해 10월
3.1 독립선언 31인 중 한 사람인 민족 지도자이자
천도교 교령이던 최린이 파리에 온다.
나혜석과 최린은 이곳의 환영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최린은 정치가로서 웅변에 뛰어나고
동양철학 서양근대사에도 박식하며
시서화와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이어서
말하자면 나혜석의 '취미성'에 맞는 사람이었다.
* 1927년~1928년 <파리 풍경>
호기심 많고 적극적이고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한 나혜석은
취미와 교양이 풍부하고 풍류가였던 최승구와
운명적인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
최승구가 나혜석에게 고취했던것은
고난을 무릅쓴 예술가의 길에 매진하는 의지와 신념이었다.
남편인 김우영이 나혜석에게 준 것은 안정적인 가정과
예술가에게 필요한 정신적 물질적 후원이었다.
최린은 나혜석에게 예술을 꽃피게 하는
정열적인 사랑이었다.
그때 김우영은 법률을 공부하러 베를린에 머물렀고
나혜석이 글에 썼듯이 한시적인
가상의 독신 신분이 주는 자유를 만끽했다.
* 1927년~1928년 <무희>
짧고 위험한 자유는 나혜석의 삶을
회한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의 예술 세계가
한 단계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의 모든것을 버리고
간신히 얻게 된 예술의 진보였다.
* <농촌 풍경> 연대미상
1930년 김우영은 서울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나혜석이 의논차 최린에게 편지를 보낸것이 와전되어
김우영의 격노를 샀다.
김우영은, 이혼을 하지않으면 둘을 간통죄로 고소하겠다고 협박
나혜석은 이혼 도장을 찍는다.
1931년 봄.
아이들을 시댁에 두고 돈 한푼 없이 집을 나왔다.
* 1935년 <화녕전 풍경>
김우영이 간통죄로 고소한다는 말에
최린은 자신이 뒷감당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나혜석이 이혼도장을 찍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혜석이 그에게 경제적 도움을 청했지만 거절 당했다.
자신의 결혼생활을 솔직하게 회고하고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도덕과
제도와 인습을 비판하는 <이혼 고백서>를 삼천리에 연재하여
김우영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그에게 호소한다.
나혜석에게 1934년은
혹독한 가난과 자신을 따돌리는 사회 분위기로
몹시 힘든 시기였다.
* 1927년~1928년 <나부>
그리고 이어서 최린을 '정조 유린죄'로 고소한다.
최린은 여전히 천도교 지도자로 신파의 대도령에 올랐고
1934년 4월에는 중추원 칙임 참의가 되었고
8월에는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친일 단체인 '시중회'를 조직했다.
이런 사회적인 영향력이 있는 사람에게
법에 의지하는 소송을 제기하는 건
다만, 나혜석의 오기였다.
* <농촌 풍경> 일부
나혜석에게 그림은 순수한 도전의 대상이었다.
사상을 펼치기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림 자체의 회화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다.
페미니즘의 선구자였지만
페미니즘 의식이 담긴 그림이 없다는 것이 이유다.
* 1927년 <봄의 오후>
나혜석이 태어난지도 100년이 더 지났다.
그는 커다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혼외 정사로 이혼당한 후
여러번의 재기가 무산되고 가족에게마저도 배척되고
피폐해진 심신을 끌고 외롭고 병든 말년을 보내다가
1948년 행려병자로 생을 마쳤다.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니 아프긴 하다.
그러나...
그만한 배경을 가지고..........
너무....남자 의존적인 삶이 아니었나?
어떤 의미로 말이다.
* 1928년경 <자화상>
우리나라 근대 미술사의 최고 걸작이다.
여성의 힘과 능력은 무한하다.
여성은 위대하다는 긍지가 오늘날의 여성들에게
절실한 긍정과 사랑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나를 잊지 않으면 행복'의 길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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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나를 잊지는 않는데....
내게도...누구에게도 맞는 얘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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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여전히 용서할 순없지만...
아들 김진 前서울대 교수가 털어놓은 나혜석
작성자 에스더뱅큇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9)의 타계 60주년에 즈음해
나혜석의 둘째 아들인 김진 전 서울대 교수가 쓴 나혜석 이야기
’그땐 그 길이 왜 그리 좁았던고’(해누리 펴냄)가 출간됐다.
국내에 나와있는 기존의 나혜석 관련 책들이 그의 작품이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여성이라는 나혜석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과는 달리
이 책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나혜석의 이야기 뒤에 가려진
김우영과 어머니를 평생 원망하며 살아야 했던 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 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자신의 어머니가 나혜석이란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던 저자는
세월의 흐름 앞에 어머니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고 그녀에 대한 기억을 고백한다.
저자가 만 네 살이었던 1930년 11월 나혜석은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던 최린과의 염문 때문에
남편인 김우영과 10년 만에 혼인관계를 청산했다.
김 전 교수는 이후 숙부의 집에서 자라며 숙부와 숙모를 친부모로 알고 자라야 했다.
저자가 다시 어머니를 만난 것은 그 후 10년이 지나서였다.
그가 다니던 대전중학교 학교 복도에 불쑥 나타난 남루한 옷차림의 늙은 여인은
“내가 네 어미다”라는 말과 눈물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 후 나혜석은 다시 아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아들은 어머니가 죽은 뒤에야
자식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부림쳤고 끝내 행려병자로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된다.
“어머니 나혜석은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낯설게 나타났다가 그냥 없어진 그런 사람,
서 있었던 복도가 내게 유일한 그의 존재에 대한 증거라면
그가 나의 생모라는 세상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미약한 그 증거에 대해 확인이라도 해야 할까 보다”
’낯설게 나타났다가 그냥 없어진 그런 사람’은 평생에 걸친 원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나혜석 사건 이후 아버지 김우영은 세상 모든 일에 관심을 잃어갔다.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던 그에게 변호 수임은 완전히 끊겼고
당시 삼천리에 게재됐던 나혜석의 ’이혼 고백장’엔 그의 이름이 수없이 거론되면서
그는 세상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반갑지 않은 관심의 눈길을 한몸에 받아야 했다.
김우영은 1957년 회고록을 냈지만,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을 나혜석의 이름은 회고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나혜석이 죽은 뒤 만년에
나혜석과 절친했던 일엽스님의 아들 일당스님을 만나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나혜석이 자식을 위해 수덕사에서 불공을 드리던 모습과
자식을 만나고 싶어 몸부림치던 모습을 전해 들은 아들은 한바탕 눈물을 흘렸고
행려병자로 세상을 떠나야 했던 나혜석의 비참한 말년을 상상하며 가슴 아파한다.
그땐 그 길이 왜 그리 좁았던고
김진ㆍ이연택 지음/해누리 발행ㆍ288쪽ㆍ1만원
"새 어머니는 걸핏하면 돈 얘기를 꺼냈다.
나는 '우리가 이렇게 넉넉하지 못한 것은
다 나혜석 그년의 탓'이란 말을 여러 차례 들어야 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생모의 이름이 나혜석인 줄 몰랐다."(36쪽)
나혜석(1896~1949)에게는 '조선 최초'니 '여류'니 하는 말이 흡착판을 댄 듯 붙어 다닌다.
그런 수식어의 화가이자 작가, 여성운동가 나혜석이 타계한 지 올해로 꼭 60년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혜석을 기억하는 진짜 이유는
1930년대에 벌어진 '조선 최초의 스캔들'에 대한 관심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관심이 그의 핏줄로 하여금 긴 세월 어머니에 대해 침묵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나혜석의 둘째 아들 김진(83) 전 서울대 교수가 60년 만에 어머니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는 프롤로그에 이렇게 썼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나혜석과 관련해 숱한 이야기를 했다.
고증을 통해 비교적 객관적으로 본 이도 있지만, 어떤 이는 어처구니없는 왜곡을 일삼았다…
공통점은 나혜석 사건의 다른 주인공 김우영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로 인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그 상처로 일생을 휘청거리며 산 아버지의 모습을 난 잊을 수 없다.
내 이야기의 출발 동기다."
이 책의 시점은 독특하다.
저자가 등장하는 가족의 이야기임에도 가족 에세이의 폐쇄적 틀과 거리가 있다.
더러 '어머니'나 '아버지'라는 호칭도 나오지만
대부분 호칭을 생략한 '나혜석', '김우영'이라는 주어로 문장이 시작된다.
되도록 거리를 두고 나혜석의 삶을 그리기 위한 의도다.
저자는 직접 보고 듣지 못한 부분을 기술하기 위해 픽션을 넣기도 했다.
그는 "이 글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나와 누나의 기억도 제한적이고 그나마 가물거린다.
이야기 연결을 위해 가명과 가설을 사용한 것은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할 일이다"라고 솔직히 밝힌다.
기자 출신 공저자인 이연택씨의 문장과 상상력이 김씨의 이런 의도를 도왔다.
저자가 기억하는 나혜석, 그의 어머니는 이런 사람이다.
"그녀는 참 독특한 사람이었다.
어머니 나혜석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절제를 꼽는다.
그녀에겐 뭐든지 마음에 생기는 것이나 사고하는 것을 터트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기질이 있다…
만일 나혜석이 속내를 감수하고 차기의 기회를 별렀다면 그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고픈 말을 다 내쏟은 나혜석은 화단의 이단아로 낙인찍힌다."(44쪽)
자신과 형제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아버지를 평생 자포자기적 행동에 갇혀 살게 만들었던 "나혜석 그녀"에 대한 저자의 심정은,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간단히 몇 줄에 담을 방법이 없다.
끓는 애증 속으로 소용돌이치는 저자의 복잡한 감정은
아버지 김우용에 대한 묘사로 에둘러 표현된다.
"여전히 나혜석을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
그러면서도 그가 뿜어낸 예술가적 향내와 인간적 매력에 대한 그리움 사이에서
괴롭게 갈등하는 자신을 잊어버리려는 듯, 달래려는 듯 눈을 감고 있다."(37쪽)
책의 후반으로 갈수록, 저자의 어투는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아들의 목소리를 띤다.
"고백하건대 나는 나의 생모가 나혜석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다.
그에 대한 화가 오랫동안 축적되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비참한 말년을 상상해보면 가슴이 아프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했지만, 어느 누군들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단 말인가.
다만 고인의 명복을 빌 뿐이다."(2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