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화가-Amadeo Modigliani의<큰 모자를 쓴 여인>과 그의 삶
Amadeo Modigliani
"역사상 가장 잘 생긴 화가"
라는 평을 듣는 이탈리아
출신의 미남 화가-
열정과 사랑을 위해 생명을 불태운 비운의 화가,
Amadeo modigliani (1884년 7월 – 1920년 1월)
1884. 7. 12 이탈리아 리보르노~1920. 1. 24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
큰 모자를 쓴 여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하면 사람의 얼굴을 길쭉하게 그린 초상화로 유명한데요,
원래의 형태에서 변형되어 길게 늘인 모습이 기괴할법도 한데,
모딜리아니의 그림에는 여성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모딜리아니는 여성의 누드를 아름답게 표현한 화가로도 유명한데요,
여기 잠간 소개할 작품은 <큰 모자를 쓴 여인>입니다
모딜리아니의 많은 작품에서 모델로 등장한 이는 그의 아내이자 영원한 동반자인 잔 에뷔테른입니다
잔 에뷔테른은 파리의 예술가 마을 몽파르나스에서 모딜리아니를 만나 인생의 반려자가 되었고,
모딜리아니 사후 자살하여 남편의 뒤를 따른 여인입니다
<큰 모자를 쓴 여인>에서 긴 타원형 몸체와 작은 타원형 모리가 기다란 목으로 이어지며
다시 타원형의 모자가 반복되는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단순한 색채와 간결한 구도임에도 주인공의 아름다움과 여성성을 느낄 수 있으며
눈동자에는 우수가 느껴집니다
사슴처럼 긴 목과 푸른 눈을가진 여인에게서는 잔잔한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눈동자가 없는 여인의 초상화
길쭉한 얼굴, 상아로 깎은 조각처럼 늘씬하게 뻗은 콧날, 새초롬하게 다문 빨간 입술,
사슴만큼이나 슬프도록 긴 목. 그림 속 인물은 디테일이 생략된 채 매우 단순화된 얼굴이다.
기다란 손가락 하나, 왼쪽 턱에 살짝 대고 있다.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이고 싶을 때 하는 포즈라고나 할까?
그림 속 여인은 모딜리아니의 부인 잔 에뷔테른이다. 너무나 슬픈 그들의 러브 스토리는
모딜리아니의 그림만큼이나 유명하다. 작가의 인생과 작품을 연결해서 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그의 그림을 언제나 비극적인 사랑과 관련지어 봐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 좀 냉정한 마음으로 그림을 살펴보자.
그녀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우리를 향해 있다.
나는 여기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라고 쓰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녀에겐 눈동자가 없기 때문이다. 모딜리아니. 눈동자가 없는 눈을 그리고
이상한 거울 속 이미지처럼 길게 늘여진 얼굴을 그리는 화가. 참 이상하지 않은가?
그는 왜 초상화에서 눈동자를 제거해 버렸을까?
사람의 얼굴에서 눈동자가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다.
문득 이 지점에서 깨닫는다. 그가 제거한 눈동자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지….
우리는 종종 말로 표현된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에서 더 많은 것을 읽어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Seated Nude, Ca. 1917
by Amadeo Modigliani
Nu Sur Coussin Bleu
by Amadeo Modigliani
Reclining Nude with Arms Open
by Amadeo Modigliani
Reclining Nude with Arms Above the Head
by Amadeo Modigliani
Seated Nude 1913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눈을 통해 타인을 알 수 있을까
사르트르적 의미에서 ‘타자는 나를 바라보는 자’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보면서 상대를 객체로 만든다.
나는 너를 바라보면서 너에 대해 내 맘대로 해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너를 객체화한다.
반대로도 마찬가지다. 너는 나를 바라보면서 실제의 나와는 상관없이 네 맘대로 나를 해석하고
이해했다고 생각함으로써 나를 객체화한다. 나의 주체성은 그렇게 ‘바라봄’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하지만 내가 타인을 바라볼 때 그는 내가 자기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고,
그것은 반대로 말해도 마찬가지다. 타인은 나를 바라보고 나를 객체화하지만
그가 그런 나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모르고 그것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 너는 나를 바라보지만
네가 나를 보며 하는 생각까지 내가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에서 여성 혹은 대상은 눈동자가 없다.
그림을 그리는 모딜리아니는 그녀/그를 바라보지만 그림 속 그녀/그는 눈동자가 없으므로
화가를 보지 않는다(혹은 보지 못한다). 바라보는 자는 오직 화가다.
상대에게서 눈동자를 지워버림으로써 화가는 자신이 객체화될 수도 있는 위험 요소를 애초에 제거해 버린다. 바라보는 자는 오직 화가 한 사람이다. 시선을 독점한 자가 누리는 절대적인 힘.
그러나 그만큼 그는 외롭다. 왜냐하면 타인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은 나는 그만큼 안전하지만
상대의 눈에 보임으로써 사랑받을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차단되기 때문이다.
그가 그린 초상화를 보면서 고독해지는 건 아마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눈동자가 없는 이상한 그림 때문에 내 생각은 계속해서 가지를 친다. 누군가를 알고 싶을 때
우리는 그의 눈 속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말은 속일 수 있어도 눈은 속이지 못해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때로 그 순한 눈동자로 사람을 속이기도 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눈을 통해 그 사람을 알고자 한다.
상대가 사랑하는 이라면 그 갈망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아닌 타인을 진정으로 알 수는 없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Self-Portrait
Oil on canvas, 33½ x 23½, (브라질의 Mrs. Yolanda Matarazzo 수집)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모딜리아니는 좀처럼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그가 죽기 얼마전,가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그는 1919년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화폭 위의 화가는 가장 잘생긴 미남화가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왜소하다. 빠레트위의 색깔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가라앉은 색깔이다. 선척적으로 약했던 그는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살았던 것일까? 어쩌면 그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생각도 못한채 굴종하며 겨우 술과 마약으로 미약한 반항이나마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으면서도 운명을 바꾸지 못한 채 죽음을 향해가던 비운의 모습이 그의 그림 속에 베어있다.
Portrait of Lunia Czechowska, 1919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사실적이라기보다는 몽상적이고 환상적이다. 그는 목과 코를 유난히 길고 굴곡지게 그리면서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반사해냈다. 사실적이지 않음에도 모델의 분위기가 살아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눈동자도 없는 얼굴이 어떻게 살아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그 살아움직임은 화가의 생명력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보는 관객의 생명이 그 안에서 숨쉬기 때문인지 모른다. 눈동자는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데 텅빈 눈동자를 보며 관객은 그 안에 자신의 눈동자를 박아 모딜리아니의 그림에 생명력을 넣어주는지도 모른다. 언뜻보면 만화같은 그림인데도 얼굴 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면 놀라고 만다.같은 피부색깔을 여러톤으로 주면서 입체화시켰다. 그녀의 꼭 다문 작은 입술은 폐쇠적이면서 내성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불쑥 튀어나온 볼로 생겨난 그림자는 자신의 성격으로 인해 마음에 담게된 불만과 불평을 보여주고 있는 것같다. 뒷배경으로 색칠해진 검은빛 톤도 그녀의 어둡고 외로운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 같다.
Reclining Nude, 1917
모딜리아니는 여자의 모습을 작품으로 많이 남겼다. 이중 누드화는 초상화와는 매우 다른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길게 그리고 선을 굴곡시키는 등 추상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는 초상화와는 달리 누드화는 현실주의에 가깝다. 또한 작품 분위기가 매우 강렬하다. 일상생화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술과 마약에 도취되었던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작품에서 반영시키려는 권태로움과 슬픔은 유독 누드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누드화는 유독 친근하고 강렬유한 느낌을 선사한다. 초상화중 자신의 아내였던 잔느의 그림에서만이 볼 수 있었던 그 친근함과 강렬함이 누드화에는 생생하게 살아나있다.
티없이 아름다운 나체로 부끄러움없이 소파에 적나라하게 누워있는 이 여자는 육체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감정까지도 모두 드러내고 있는 느낌이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른하게 누워있지만 그녀의 얼굴엔 우수가 남겨져 있다.
Jeanne Hebuterne
모딜리아니는 세잔느나 달리처럼 자신의 아내를 즐겨 그렸다. 이 작품에서도 다른 초상화에서처럼 기다린 코와 목이 특징적이다. 눈동자가 없음에도 관객은 그 눈동자를 읽을 수 있다. 검은 머리를 한 잔느가 검은 옷에 검은 모자를 쓰고 슬픈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핏빛으로 물든 것처럼 뒷배경이 슬픔을 노래한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잔느의 그림은 몇작품을 빼놓고는 모두가 처량하다. 어쩌면 모딜리아니는 잔느의 슬픈 운명을 보았을지 모른다. 자신을 만났기 때문에 슬픈 운명을 가져야했던 잔느. 모딜리아니가 정말 그녀를 사랑했다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지 말았어야하지 않았을까. 나는 잔느의 초상화를 볼 때마다 그녀의 아픔이 내 것처럼 슬프게 느껴진다.
Nudo Seduto
by Amadeo Modigliani
Nudo Disteso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Nudo Femminile di Fronte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Seated Nude, ca. 1918
by Amadeo Modigliani
Nudo Disteso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Nu de profile
by Amadeo Modigliani
Nu de femme
by Amadeo Modigliani
Nudo Seduto
by Amadeo Modigliani
Studio di Nudo I
by Amadeo Modigliani
Caryatid
by Amadeo Modigliani
Nudo Seduto, 1910-11
by Amadeo Modigliani
Nu de face
by Amadeo Modigliani
Seated Nude
by Amadeo Modigliani
Jeanne Hebuterne
* Jeanne Hebuterne
Amadeo modigliani 가 그린 '잔느'의 초상화들
Jeanne Hebuterne (1917-8)
1917년 7월 어느 날 그는 가난 속에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서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고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잔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숙명의 여인은 그 때 갓 열아홉 살이었고,
모딜리아니는 서른세 살이었다. 잔느는 그 동안 모딜리아니가 만난
모든 여인 중 가장 믿을 수 있고 헌신적이며 가장 순정적인 여자였다.
한 모델을 대상으로 여러 점의 작품을 남겨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모딜리아니
평생을 모딜리아니의 곁에서 모델이 된 여인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그의 아내 쟌느
모딜리아니의 부모는 유태인으로 스스로 유태인임을 자랑스러워 했고
잔느의 집안은 독실한 카톨릭 집안이었다.
사랑했으나 부모들의 반대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채 잔느는 사랑하는 그를 따랐다.
[그림]Amedeo Modigliani ◈ Portrait of Jeane Hebuterne, Left Arm behind Head (1919)
20세기 초엽 인상주의 물결이 휩쓸던 유럽에는 많은 화가들이 파리에 모여들었다.
새로운 시각이 고정된 형태나 관념을 탈피해 다양한 형태(양식)로 시도되는 시기였다.
고전적인 초상화의 틀에서 벗어나 왜곡된 얼굴의 형태(유달리 길다란 목과 얼굴)속에서도
우수에 찬 표정에 담겨져 있는 인물의 심성을 반영하는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파리의 몽마르뜨나 몽파르나스지역에 모여 활동하던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 파리파) 사이에서도 로맨티스트로
유명했던 모딜리아니를 사랑했던 쟌느는 `얼굴이 길어 슬픈 여인'
이라는 그만의 캐릭터를 완성시키는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목이 길쭉한 인물 스타일은 아프리카 원시 조각이나 모딜리아니가
활동하던 시기에 유럽에서 유행한 일본의 우끼요에서 영향을 받고,
세잔느와 입체주의가 가미된 그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와 쟌느 사이에 여자 아이가 생기기
얼마 전에 그려진 것이다. 웨르나의 해석에 의하면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의 이웃에 살고 있는
하층 계급의 어린이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을 많이 그렸으며 이것은 그 가운데의 하나이다.
이 꼬마아이는 고운 옷을 입고 있는데, 아마 단벌 옷일 것이다.
소녀의 얼굴은 밝지도 쾌활하지도 않다.그녀의 표정은
훨씬 연상의 다른 모델들의 경우처럼 쓸쓸하고 체념마저 하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어린이들의 그림은 참다운 자애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이 소녀는 천진 무구하지만 애처로움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는 화면을 통해
우리는 모딜리아니의 진심을 엿볼 수 있으며, 깊은 애정을 함께 느낀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The Servant Girl (La jeune bonne,1918)
파리라는 도회지로 나온 시골 처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녀라는 직업이며, 이런한 유형은 동. 서가 같다.
하루 종일 허름한 옷차림으로 근면하게 일 해야만 되는게 이들의 인생이었다.
특히 유럽인들의 사람 씀씀이는 고약할 정도로 가차 없고 지독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일들, 어린애를 돌보고
주부의 잔심부름을 도맡고 하는 것을 묵묵히 감당해 낸다.
이들을 프랑스 말로 본느라고 부른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살고 있는 애환의 표정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이웃을 사랑했고 그가 즐겨 그린 서민의 한 표정을
그녀는 대표하고 있다. 이 모델은 카뉴슐멜 출신이며,
마리훼레라는 이름의 처녀였다.그녀의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이 젊은 처녀의 삶을 모딜리아니는 공감했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9)
이그림은 2004년 소더비경매에서
3130만달러(347억6000만원)가 넘는 가격에 익명의 입찰자에게 팔렸다.
... 너의 영혼을 알게될때 눈동자를 그릴 수 있어..
1919년 무렵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화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잔느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좋아진 상황과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모딜리아니는 작품에 대한 열정과 끝없는 음주벽을 놓지 못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잔느 에뷔테른느>(1919년작)는 이때에 그려진 것이다.
임신한 잔느의 모습은 왠지 처연하다. 그 눈동자 없는 눈은
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담아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사진의 인물작품에서 눈동자를 표현하지 않은 점은 매우 특이한데
오히려 푸른색만으로 표현한 눈의 표정은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영원으로의 응시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Nazareth ◈ Love Hurts
모딜리아니는 지중해 문화권에 속하는 유태인 가정에서 1884년 7월 24일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 리브른느는 피렌체 남쪽의 포구였다.
소학교 시절의 모딜리아니는 성적은 보잘것 없었지만
그림을 잘 그렸고 어렸을 때는 잔병치레에 폐결핵까지 앓았다.
이 때에 앓은 결핵이 파리의 보헤미안 시절에
재발하여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본격적인 미술수업은 1898년 리브른느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
풍경화, 정물화, 누드화를 배우는 것으로 시작됐다.
누드화에 특히 재능을 보인 그는 1902년 5월 7일 피렌체에 가서
아예 스콜라 디누도(누드학교)에 등록했다. 여기서 그는 누드화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는 한편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 마르미지아노의 그림에 심취했다.
1903년 3월에 모디는 베니스로 옮겨 같은 계통의 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유명한 미래파의 아르덴고 소피치와
움베르도 보치오니 같은 동료화가도 만났다.
남쪽의 태양과 예술을 찾아 온 북구의 처녀들을 사귀면서
젊은 카사노바 같은 절제 없는 생활도 향유했다.
후에 베니스에서 배운 습성, 티치아노와 지오르지오네의
나체화들이 그의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준다.
1905년 돈을 대주던 외삼촌 아메데오 가르씨니가 죽자,
모딜리아니는 현대화의 메카인 파리로 향한다.
몽마르트에서의 모딜리아니의 삶은 보헤미안 그 자체였다.
돈이 없는 데다 그림마저 팔리지 않아 호텔에서나 하숙집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그림을 전당잡히다 번번히 쫓겨났으며,
때로는 몰래 빠져나가 집을 옮기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때의 그림은 희귀하다.
파리에서의 삶은 외로움과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멕시코에서 온 리베라, 소련에서 온 수틴, 자크 립시츠, 키슬링,
막스 자콥과 주로 어울려 다녔다. 캔버스 살 돈이 없어
캔버스의 앞과 뒤 양면에 그림을 그리고 물감도 절약했던 때였다.
1908년에 완성한 Nude with Hat는 절망과 불안, 성적 충동과 갈망으로
초조한 화가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수많은 여성들이 그의 삶 속에서 명멸해 갔다.
모딜리아니에게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룻밤의 고독과 자살 충동을 이기기 위해 소모품처럼 써버린
많은 요정들이 그의 예술혼과 끈끈하게 관계되어 있었다.
대개의 그 여성들은 그의 작품 안에서 익명으로 존재하며
과장된 풍만함으로 여성성의 일부만을 강조해 표현되어 있다.
모딜리아니의 다른 나부와는 달리 이 서 있는 알몸의 여성은
잔잔한 정감이 마치 여울물의 흐름같은 파문의 무늬로 숨쉬는 것만 같다.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여자의 나체란 단도 직입적인 관능의 외모도 아니며
여러 가지 기복으로 무겁게 덩어리짓는 복잡한 조형도 아니며
그것을 통해서 감지하게 되는 생의 풍요 혹은 그 찬미였는지도 모른다.
이그림은 실제 퐁파두르 부인을 모델로 해서 그린 게 아니라
모딜리아니와 동거했던 (1914~16) 베아트리체를 그린 것이다.
영국 여성인 베아트리체가 몽파르나스에 나타난 건
제1차 대전이 발발하던 해였으며,
사람들은 그녀를 런던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결코 미인은 아니었지만 모딜리아니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의 천재성을 개화시킨 숨은 공로자이다.
모딜리아니보다 5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그의 사기를 잘 참아 주었다고 한다.
그가 광분하면, "모딜리아니, 명심해요, 당신은 신사라는 걸.
당신의 어머니는 상류 사회의 부인이라는 것을 ."하며 타일렀으며,
이 말은 주문처럼 모딜리아니의 광기를 가라앉혔다고 한다.
그럴듯하게 모자를 쓰고 마치 귀족처럼 차린 이 그림을
퐁파두르 부인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들의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의 정경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그림]Amedeo Modigliani ◈ Portrait of Beatrice Hastings (1916)
첫번째 연인 베아트리체와 헤어진 1916년과 부인 잔느 에뷰테른을 만나게 되는
1917년 사이에 모딜리아니는 그의 걸작 누드화에 나오는 많은 모델들을 만난다.
그의 새 모델들은 가수와 댄서, 젖짜는 시골 처녀들 같은 건강한 여인들이었다.
이미 건강을 잃고 죽음에 다가가던 그는 건강과 생기가 넘치는
젊은 육체의 윤기와 탄력성과 매력을 흠모하면서 누드를 그렸음데 틀림없다.
여하튼 이 때에 그린 누드는 미술사상 걸작들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Seated Nude는 잔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대개의 모딜리아니 그림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단아하고 깊은 우수에 찬 눈을 갖고 있다.
이 그림에서도 예외없이 아름답지만 슬픈 그녀의 표정을 우리는 놓칠 수 없다.
앙다문 입에서조차 의지를 읽기보다는 세상을 관조하며
마주앉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그녀의 깊은 눈으로 인해..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 1920>
찢어지게 가난한 이탈리아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그는 처음부터 가난했던것은 아니였다.
유복한 집안이였지만 유대인이 토지소유를 금지했던 당시의 법을 어기고
포도밭을 샀다가 발각되어 로마에서 쫓겨나 리부르네로 이주한 퇴락한 부르조아 였다.
그의 어머니는 이태리의 문학작품을 번역하거나 가정 교사일을 하며 집안을 도왔다.
그가 열네살이 되던해,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으며,
미켈리의 '아뜰리에"에 다니면서 데생과 풍경화를 익혔다.
그가 열여섯살이 되던해,폐결핵에 걸리게되며,예술에..그림에 대한 열정은 더욱 깊어만 갔다.
"나는 내 인생이 즐겁게 흘러가는 풍부한 강물이 되기를 바란다네.
나는 지금 내 자신에게서 끝없는 창작의 가능성을 느끼고 있어.
작품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솟아 오르고 있네.."
<푸른눈의 여인>
그가 스무살이 되던해 플로렌치아로 떠난다
그는 누드 전문 미술학원에서 수업을 끝낸뒤 베니스로 미술학원을 옮겨 한 작품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프랑스 시인 '보들레느'의 <인공낙원>이라는 작품이다.
대마초에 체험에 대해서 쓴 글인데,일생동안 마약과 술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던
모딜리아니의 삶의 양식도 이시기에 이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학비를 대주던 삼촌이 죽고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는 파리로 떠난다.
1906년 파리에 도착하며 전망좋고 방값이 싸며,
젊은 예술가들이 많이 모였던 몽마르트에 자리를 잡는다.
잘웃고 친절한 미남이였던 그에게
여자들은 보수를 받지 않고 자원해서 모델을 서 주기두 하였다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에서 2년 먼저 와있던 청년 피카소를 만난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우정은 싹트지 않는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리며 ,
전통적인 회화을 무시하고 입체파를 탄생시키던 시기이다.
예술적인 토론보다는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술을 마시기를 즐겼던 모딜리아니는
문인들과 화가들의 화합 장소였던 '라뺑 아질'에서 술과 대마초에 젖어 있기 일쑤였다.
그리고 방세가 없어 쫓겨나 방랑 생활을 시작하게 되며,
그는 자신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버리기도 하고 떠돌아 다니던 시기라
초기 그의 작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그는 입영신청도 폐결핵때문에 거절당하고 조각가로서의 희망을 버리고
화가로서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해에 그는 "베아트리스 헤르팅스"라는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고 앨리스 모닝이라는 필명으로 잡지에 기사를 쓰는 기자이자 시인이였다.
술을 좋아하던 그녀의 영향으로 순한 포도주를 즐기던 그도 독한 위스키와 진을 마시기 시작한다.
그들 둘의 2년간의 동거생활중 대부분은 술에 취해있었고.
친구들은 베아트리스를 비난한다.
과격하고 정열적이던 그녀는 1943년 자살을 함으로 생을 마감한다.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중에서도 모딜리아는 그림 그리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
그는 베아트리스와 헤어진후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으며
카폐 테라스에서 손님들의 얼굴을 그려주고 술한잔 부탁하기도 했다
<막스 자콥의 초상> <파블로 피카소의 초상>
많은 친구들은 그를 좋아했지만
그는 피카소와 시인 막스 자콥만 좋아했다.
그러나 피카소는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당시 비평가들과 유대관계를 가지며 대화를 즐기던 그와 달리
몽파르나스에서도 낭만적인 기질로 떠돌던 모딜리아니가 반갑지 않았다.
물론 시인 막스 자콥은 그의 인간적인 기질이 좋아 시를 헌정하기도 하고
시인 아폴리네르도 그의 작품을 팔아주기도 했다.
어쩌면 그가 사교계 인사들과 유대관계를 맺으며 몸을 굽혔더라면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났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가 말하길..
"작품의 가치는 사상이 표현되고,말로 할수 없거나 해서는 안되는 것에
길을 열어주며, 작품 자체의 삶을 위해 작가에게 분리되는데 있다"
라고 친구의 편지에 적고 있다.
그는 가난했지만 우아하고 관대한 성격을 지녔다.
어느날 그는 자신보다 더 가난한 친구를 만난다.
카폐에 돌아다니다가 그 친구의 발밑에 지폐한장을 슬쩍 떨어뜨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자네 발 밑에 웬 돈이 떨어져 있는것 같군.."
그러던중 그는 1913년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를 갖는다.
32점의 누드 작품만을 전시한 이 개인전에서 외설적이라며 비난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대중에게 알려지지만 작품은 2점밖에 팔리지 않았다.
<앉아있는 누드.1917> <소파에 앉은누드.1917>
그의 누드화는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피곤하고 권태로운 모습의 여인을
표현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고야나 마네의 누드에서 볼 수 있는 알레고리나 이상적인 여인의 미는 없이
부드럽지만 포기한 듯 내던져진 자세를 지닌데다가 몸전체를 그리지 않고
화면의 여백을 많이 남겨둠으로써 더욱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다.
<두손을 벌리고 누운 나부>
이해 모딜리아니는 운명의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쟌느 에뷔테른느"
모딜리아니는 칸느의 축제에서 쟌느 에뷔테른느를 만났다.
아카데미 콜라로시에서 그림을 배우며 화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던
열아홉살의 쟌느에게는 슬프고 불행한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쟌느의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곧바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잔느 에뷔테른느> <잔느 에뷔테른느>
1918년 11월, 즈보르프스키 부부의 주선으로
니스에 내려가 있던 쟌느는 딸 '지오바나'를 낳았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신고를 하지 않은 부부 였기에
그들의 딸은 사생아로 신고 되었다.
니스에 머물면서 풍경화를 모색해보기도 했던 모딜리아니는 어느날 르느와르의 초대를 받았다.
당시 니스에 살고 있으면서 이미 거장으로 불리었던 르느와르는
모든 방문을 거절했지만 예외적으로 모딜리아니를 집으로 불러 자신의 그림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몇 점의 그림을 둘러 본 그는 차가운 반응을 보인채
이 나이든 대화가의 면전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능을 높이 샀던 르느와르는
자신의 그림을 팔아 그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괴팍하고 부도덕한 점이 예술가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특징처럼 되어버리기도 하지만
딸을 얻고 생활의 책임을 걸머지게 된 모딜리아니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 번의 시도 만으로 그자리에서 초상화를 그려내곤 했다.
당시에는 부탁을 받고 그리는 초상화는 모델이 자리를 잡는 횟수
와 시간에 따라 보수를 받는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여러번에 걸쳐쳐 데생을 하면서 시간을 끌수록 화가는 돈을 더 받기 마련이었지만
모딜리아니는 한 번에 그려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어느날 그는 야수파의 대가인 마티스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했다.
아직 모딜리아니를 잘 알지 못했던 마티스는 5분간만 모델을 서주겠다고 했다.
결과를 보고 흡족해진 마티스는 결국 한시간의 시간을 내주었다고 한다.
1918년 폴 기욤은 자신의 화랑에서 마티스와 모딜리아니, 피카소,
블라맹크를 모아 전시했고, 런던 에서도 같은 전시회를 열어호평을 받을 수 있었다.
<마티스부인의 초상.1905>
1919년 봄, 다시 파리에 올라온 쟌느는 둘째아이를 임신했다.
겨울이 되었어도 난로를 피울수 없어 시린 발에 옷을 감고 지내는
가난에 시달렸던 쟌느는 친정어머니의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잔느 에뷔테른느의 초상> <노란 스웨터의 쟌느>
모딜리아니는 카페나 노천에서 밤을 세우면서
거의 자살에 가까운 생활을 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갖고 싶어
쟌느와 정식으로 결혼하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때로는 딸이 보고 싶어서 찾아 가기도 했지만,
그를 못마땅해 하던 쟌느의 어머니는 문도 열어 주지 않았고
그러면 그는 집문 앞 계단에 앉아있다가 말없이 돌아가곤 했다.
<큰 모자를 쓴 쟌느 에뷔트르느>
즈보로프스키는 런던에서 모딜리아니 전시회를 열어 주었고,
그의 생전 처음으로 초상화 한 점이 1,000프랑이라는 가격에 팔려 나가는 행운도 얻었지만
이미 그의 건강은 한계에 다다랐다.
자신의 종말을 예감이라도 한듯 그는 친구에게 말했다
" 이젠 머리 속에 아무것도 남아 있는것 같지가 않아.
더이상은 버틸수가 없을 것 같군. "
<자화상.1919>
1920년 1월,
모딜리아니는 파리 자선 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당시 임신 9개월이었던 쟌느는 이튿날 새벽 친정집 5층에서 뛰어내렸다.
모딜리아니가 병원으로 실려가던 날, 그는 친구에게
" 죽어서 다시 만나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자 "
라는 말을 쟌느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 약속을 지킨것일까..
쟌느는 남은 일생을 모딜리아니의 추억속에서 지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하기
보다는 빠른 재회의 길을 선택했다.
이태리 사회당의 국회의원에 당선된 형 엠마누엘은
동생의 장례식을 " 왕자처럼 치뤄달라 " 는 전보를 보내왔다.
몽파르나스의 엘레강스의 종말이라는 시인 쟝 꼭또의 애도와 함께 모딜리아니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파리시민이 모여들어 기인 행렬을 이루었다.
그러나 딸의 시신조차 집에 들여놓기를 꺼려한 쟌느의 집안에서는
아무런 부고도 없이 쟌느를 파리 변두리에 묻었다.
모딜리아니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몇년후에야 두 사람은 뻬르 라 쉐르묘지에 함께 묻힐 수 있었다.
지중해의 뜨거운 햇빛과 고향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했던 그는
파리의 자선 병원에서 3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며 마지막말을 남긴다.
"그리운 이탈리아"
글쓴이 : 이사벨라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행복하고 슬픈 사랑이야기
'열정, 천재를 그리다'展
모딜리아나
인류가 존재하는 한, 사랑은 영원불멸한 삶의 테마다. 세계적 예술가의 사랑은 어떠했을까. 경기도 고양 아람미술관에서는 화가 모딜리아니의 전설적 사랑을 다룬 특별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그림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전시회를 주도하고 있다.
아무리 미술에 조예가 ‘얕은’ 사람에게도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언제 어디서든 표시가 난다. 특히 그의 여성 초상화는 대표적이다. 특유의 구도와 포즈, 가늚과 풍만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인체, 관능적이면서도 순수하고 고혹적이면서도 어딘가 텅 빈 듯한 표정 등이 뚜렷한 잔상을 남긴다. 그림이 주는 인상이 워낙 분명해서일까? 그의 캔버스 속 여성은 작가 자신의 ‘베아트리체’일 듯 하다.
실제로 모딜리아니가 그린 대표적인 초상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의 연인, 잔느다. 모딜리아니는 당대 미술계의 미남으로도 유명했다. 그의 모델이 되기를 자청하는 여성들이 끊이지 않았다.
크고 그윽한 눈, 현실적인 타협을 거부하며 고독과 자기세계를 고집하던 그의 괴팍한 성격은 더욱더 여성들의 모성애를 자극했다. 그러다 ‘천국에서도 당신의 모델이 되겠다’고 말한 운명의 연인, 잔느 에뷔테른을 만나면서 예술혼이 더욱 가열된다.
모딜리아니에 비해 잔느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조명은 아주 뒤늦고 미약한 편이다. 어릴때부터 탁월한 미술적 재능을 드러낸 천부적 작가 잔느의 작품이 처음으로 소개된 것도 지난 2000년, 베니스에서 열린 ‘Modigliani and His Circle’ 전시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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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몇 점의 정물화와 풍경화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생생한 묘사가 도드라진 자신의 누드화들이 공개됐다. 온화하고 헌신적인 모딜리아니의 연인으로만 알려졌던 잔느에 대한 인식을 일순간에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잔느의 과감한 ‘셀프 누드화’는 당대 남성들의 전형적인 여성 누드관에 대한 반격이었다.
‘예술적 영감을 위한 여성편력’이란 변론이 과연 이해타당한 것일까. 잔느는 어떤 면에서 모딜리아니보다 훨씬 담대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듯 보인다. 자신과 연인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른 여성들과 분방한 관계를 계속한 모딜리아니의 여성편력에 개의치 않았다.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된 지 채 3년도 안 돼 모딜리아니는 결핵형 늑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바로 그 이틀 뒤 잔느는 아파트 5층에서 투신자살해 모딜리아니의 뒤를 따랐다. 뱃속에 8개월 된 모딜리아니의 아기를 임신한 상태였다.
이번 전시회에서 이들의 애틋한 사랑에 주목할지, 여전히 유명예술가로서 이들이 만든 작품과 예술적 완성도에 주목할지는 순전히 관객들의 몫이다. 전시장에는 이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들이 남기고 간 총 150여점의 유작과 자료들이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다.
각자의 유화 및 소묘, 공동 드로잉, 엽서와 사진, 머리카락 등이다. 권위적 관습과 폐쇄성, 주류의식을 거부한 이 두 사람의 비범한 기질이 낳은 비극적 사랑을 관객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젊은 세대와 중년 세대, 남성과 여성 관객에게 각각 따로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문득 느낀다. 전시는 3월 16일까지 이어진다
편집=씨밀래
글쓴이;초이한, 이사밸라
일부출처 =그대와 나의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