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 빠지게 만드는 이호 목사의 기막힌 강연-(하나님의 기적-대한민국 건국 2)
백만불짜리 강연입니다.
특강 동영상 때문에 올리는 자료입니다.
나윤선의 이 음악이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한 번 시작하면 푹 빠지게 만드는 기막힌 백 만불 짜리 강연을
후편을 먼저 올립니다.
이 다음에 전 편을 올리겠습니다. 보시면 왜 그러는지 알게 될 것 입니다.
밑에 있는 글들을 읽기 귀찮으시면 제일밑에 강연을 클릭하고 들으세요.
참으로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세계를 흑암에서 건져내는 역사의
주역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빵이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라고 설파한 이승만 박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농민에게 토지를 준 자 입니다.
1954년 7월 28일 미 의회의 40분 연설에서 무려 33번의 기립박수를 받은
기막힌 달변가이신 이승만 박사의 "기독교적인 면"에 한 번 빠져보세요.
요새 보기드문 이 호 목사님의 기막힌 특강을 들으시고
근대 역사공부를 하시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이 번에 기막힌 미의회 영어 연설을 하신 박 대통령께서도
40번 박수에
起立박수 6차례가 있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씨밀래).
이승만 박사의 기독교적인 면
밑의 것은 참고자료로 올립니다.
이것도 읽기 귀찮으시면 밑에 동영상으로 직접 가셔서
클릭하시고 보세요.
부록
이을식옹이
[손주에게 들려주는 광복이야기]
▲ 108세의 이을식옹이‘광복 직후 이승만’을 증언하고 있다. / 허영한기자
"당시 이승만박사, 백범과 소홀했다고? 친형제 같았어"
이을식옹이 말하는 이승만과 '독촉'
요즘 사람들 건준만 알고 독촉은 몰라… 해방정국 주도했지
'미국 이용해 자본주의국가 세워야' 판단… 인공 주석직 거절
내가 초대대통령만 하시라 苦言… 그후 하야때까지 못 뵈어
“요즘 사람들은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은 알아도,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만든 독촉(독립촉성중앙협의회)은 몰라.
최근 정권들이 바뀌면서 생긴 일인데 참 안타까운 일이야.
독촉은 전 국민이 참여한 단체였어. 건준은 이 박사가 귀국하는 45년 10월에는 이미 세력이 약화됐고
이 박사가 온 뒤로는 아무런 정치적 영향이 없어 거의 자동 해산했어.”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환국할 때부터 대통령이 되기까지
측근에서 그를 도왔던 108세의 이을식(李乙植)옹은 ‘해방 정국의 주역 이승만’을 회고하면서
이 박사의 역할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요즘의 세태를 안타까워했다.
그에 따르면, 이 박사 귀국 당시 국내는 건준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200여개의 정당과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했으나 이 박사가 독촉을 만들자
좌파 계열의 세는 약화됐고 점차 이 박사가 정국의 중심에 서게 됐다고 한다.
"당시 이승만박사, 모든 진영서 모시려해
백범과 관계 소홀했다고? 친형제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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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촉에는 누가 참여했습니까.
“정확한 기억은 못하는데 대부분 참여했지.”
―이 박사가 만든 단체에 어떻게 공산당까지 참여했습니까.
“당시 이 박사는 민족의 어른이었어. 임시정부 대통령을 했고
대한제국 때부터 독립운동을 한 분이니 다들 이 박사를 모시려했지.
건준이 만든 조선인민공화국에 주석으로 추대됐고,
북의 김일성도 ‘전국을 통치할 분은 이 박사밖에 없다’고
했었어.”
―이 박사가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 직을 거부한 것은 왜 입니까.
“그 사람들(건준)이 나중에는 김일성과 같이 행동할 사람으로 이 박사를 생각했어.
그 사람들이 조각하면서 대통령은 이 박사, 총리는 여운형으로 하고
국방장관에 김일성을 거명했는데, 수락하자는 사람도 있었지만 난 반대했어.
이 박사는
미국을 이용해서 자본주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었지.”
"이 박사·맥아더 동상 없애?
나같은 사람 살아있는데 역사를 뒤집으면 안돼"
―이 박사와는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같은 전주 이씨로 일제 때 이 박사가 배재학당에 있을 때부터 따라다녔어.
내 숙부가 임정에서 재정 담당을 했는데 내가 자금을 모아 압록강을 건너 상해에 갖다 주기도 했지.”
―해방 후 이 박사의 귀국이 두 달이나 늦은 이유는 뭡니까.
“해방 직전에 이 박사로부터 인편으로 편지를 받았는데,
국제연합이나 미국과 독립정부 수립을 위해 논의할 문제가 남아 두 달쯤 늦게 귀국할 것이라고 했어.
좌파 영향을 받은 미국 국무부 당국자들이
이 박사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해 귀국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했지.
이 박사가 정권을 잡으면 미국에 협조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그랬다는 거야.”
―이 박사가 편지에서 다른 말씀은 없었나요.
“국민 대표를 뽑는 선거를 해야 하고 조직도 만들어야 하니까 저 보고 준비해달라고 했어.
정부를 세우려면 헌법도 만들어야 하니까 신망있는 율사를 알아보라고도 해서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씨와 함께 준비했지.”
―이 박사는 귀국 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했지요.
“서울운동장에서 귀국 환영대회를 할 때 처음 하신 말이야.
국민이 여러 갈래로 갈렸는데 이 말 한마디는 꼭 기억해달라고 국민들에게 당부하신 거지.
처음에는 ‘다 덮어놓고 뭉쳐야 산다’고 말씀했던 것 같아.”
―이 박사 귀국 후 어떤 일을 하셨나요.
“젊은 사람과 기독교 신도들 중심으로 청년단을 만들었는데 독촉의 활동에 바탕이 됐지.
약 2000명 이상 됐어. 위당 정인보씨가 청년단 단가도 지어줬어.
독촉을 전국적으로 조직하며 자금도 많이 들었는데, 내 사재도 많이 털었어.
정부수립
때는 이 박사에게 이범석 장군을 국방장관과 총리에 겸임시키라고 추천한 일도 있지.”
―이 박사 귀국과 대통령이 되기까지 맥아더 장군의 역할이 컸다는 설도 있습니다.
“난 다른 건 몰라도 이 박사와 맥아더 장군 동상이 이 땅에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이 박사는 이 나라 건국 대통령이고, 맥아더 장군도 건국에 지대한 기여를 했어.
나처럼
아직 살아있는 사람도 있는데 역사를 뒤집으면 안 돼요.”
―조선공산당이 11월 이 박사의 ‘민족대단결’ 원칙에 반대해 독촉에서 탈퇴해 좌우 대립이 시작됐지요.
또 11월 23일 임정 인사들이 환국했는데 당시 임정과 이 박사의 관계는 소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아. 이 박사는 김구씨를 고향 후배로 친하게 생각했어.
김구씨 일행이 귀국하도록 애쓴 것도 이 박사야. 두 분 사이는 육신의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어.”
이 옹은 김구 선생 환국 직후 자신의 집에 이 박사와 김구 선생을 초청해 하룻밤을 묵은 일화를 소개했다.
“두 분을 안방에 모셨는데 우리 내외가 밤새 수발을 했어.
두 분이 ‘형님’, ‘아우님’ 하면서 도란도란 얘기를 하더군.
어느 친형제가 저렇게 우의가 두터울까 생각했었어.”
―45년 말 이후 반탁운동 때도 두 분이 함께 했죠?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반탁 단체를 만들어 이 박사가 회장,
김구씨가 부회장을 맡아 공동성명도 내고 그랬어.
이 박사는 미국 통치를 받으면 왜정보다 더 오래갈 수도 있다고 했지.”
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의하자 반탁운동이 불붙었다.
김구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를 만들었고
46년 2월 이승만의 독촉과 합쳐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발족했다.
47년 미·소공동위 결렬 후 단독정부 수립이 논란이 될 때
이승만은 단정에 찬성했고 김구는 남북협상을 시도했다.
―이 박사 옆에서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했는데
중요한 직책을 맡지 않은 것은 왜 인가요.
“만세운동 때 다쳐 건강이 좋지 않았어. 또 나는 정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또 이 박사가 한민당과 너무 어울려져서, ‘이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렸더니
나를 불편히 생각하셨지.” 이 옹은 51년 전남지사에 임명됐는데
이 박사가 대통령을 계속하기 위한 직선제 개헌을 시도할 때 상경해 반대했다고 한다.
“초대 대통령만 하시고 미국 조지 워싱턴처럼 국부(國父) 노릇만 하시라고 진언했는데
이 박사가
노했어. 그후 하야 하실 때까지 뵙지 못했지. 그때 이후 난 사라진 사람이었어.”
이 옹은 전남지사를 그만 둔 뒤로 석회석 광산을 찾아다니고 직접 운영도 했다.
15년 전 사별한 부인과의 사이에 3남5녀를 뒀는데 이형국(67) 전 연세대 대학원장이 큰아들이고,
정시채 전 농림부 장관이 큰사위, 김동신 전 국방장관이
셋째 사위다.
오늘의 주제
이승만 박사의 기독교적인 면
1946년 제1차 미소공위. 왼쪽부터 이승만,김구,스티코프,안재홍
귀국과 선교 활동 (1910 ~ 1913)[편집]
1910년의 이승만
1910년 한국으로 돌아가 YMCA에서 교사로서,
그리고 이어 YMCA 청년부 간사로 취임하여 기독교를 선교하였는데[10
감리교파 선교사로서 생활을 하였다. 또한 당시 들어온 신문화에 대해 긍정적이라서
"나라가 없어진 것은 슬프지만 왕, 양반, 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912년 4월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국제감리교 회의에 참석하였다.[24]
1913년 그는 귀국을 시도했으나 아버지 이경선으로부터
귀국하지 말고 미국에 체류하라는 편지 서신을 받고 귀국을 단념한다.
1913년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이승만은 옥중 동지인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건너갔다.
1913년 2월 3일 이승만은 박용만과 함께 하와이에 정착했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한성감옥에서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둘 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25]
이승만은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였고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어 한인기독학원(KIC)의 원장도 겸하였다.
뒤에 학교 이름도 '한인기독학원'에서
'한인중앙학원'(韓人中央學院)으로 재단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5]
1913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 기차역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한 이승만(왼쪽)과 박용만.
한때 결의형제를 할 만큼 일생의 동지였던 두 사람은 독립운동 방법론과 국민회기금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결국 정적이 되고 말았다.[주해
2]
이 한장의 기막힌 사진.
최대 해상도입니다.
이승만_한성감옥_시절.jpg (600 × 419 픽셀, 파일 크기: 38 KB, MIME 종류: image/jpeg)
위의 음악을 안 끄셔도 되나 강연이 너무 좋아 그냥 끄시고
이 백만불짜리 강연을 들으시고 감동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
이호 목사님은
현, 기쁨누리교회 공동 담임목사며
현, 대구신학대학교, 고신대학교 외래교수
현, 청강 문화 산업대학 겸임교수 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