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
우남 이승만은 미국정치의 중심지인 조지워싱턴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굶주림 속에서도 학업과 강연을 병행했다.
이승만은 한성 감옥 대학의 연장선으로 미국 대학에서 공부했다. 한성 감옥에서 노트에 자유롭게 쓴 글 가운데 ‘미국흥학신법’이 있다. 우리말로 풀면 ‘미국의 교육 진흥에 관한 새 제도’가 된다. 이승만은 이 글에서 미국의 공·사립학교 제도의 연혁과 현황을 상세히 기술해 놓았다. 아마 책을 여러 권 읽고 필요한 부분을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 내용을 읽어보면 1870년대 미국의 교육제도를 훤히 파악할 수 있다. 심지어 생계를 유지하려는 유학생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일거리에 관해서도 적어 놓았다.
2
조선 정부 특사로 미국으로 향할 때, 이승만은 민영환과 한규설이 쓴 밀서와 함께 선교사들이 작성해 준 추천서를 품고 떠났다. 미국 대학에 입학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받아둔 추천서인데 무려 열아홉 통이나 되었다. 치밀하고 집요한 그의 성격을 보여준다. 선교사들은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본국 정부의 훈령을 어겨 가면서 이승만을 도왔던 만큼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이미 한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상당한 공을 세운 것에 더해 장차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이끌 지도자가 되리라고 예상했다. 선교사들은 미국에 있는 대학에 이승만에게 교육 기회를 줄 것을 요청하는 추천서를 기꺼이 작성해 주었다. 이승만이 처음 선택한 학교는 조지 워싱턴 대학으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 한복판, 백악관 바로 옆에 있었다. 워싱턴은 미국의 정치 중심지였기에 조지 워싱턴 대학은 정치 지망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나이 서른에 대학 신입생이 되어 처음 받는 미국 교육이었지만, 이승만의 교육 수준은 교수 대부분을 능가했다.
3
이승만은 장차 기독교 교역자가 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여 목회 장학금을 받았다. 등록금 전액을 면제받고 도서관 사용료도 한 학기에 1달러만 내는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가난한 유학생인 그는 먹지 못해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강의를 듣는 일이 허다했다.
그리고 배재학당에서 들은 수업을 인정받아 2년 반 만에 학부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워싱턴에서 학교에 다니면서 미국 정치의 내막을 파악하고 정치적인 안목을 기르는 등 커다란 수확도 거두었다.
학부 시절에는 미국의 교회와 YMCA에서 한국 선교와 독립을 주제로 강연했다. 강연한 총 횟수는 무려 170여 회에 달했다. 1907년 6월 13일 자 <워싱턴 포스트>는 이승만이 YMCA에서 강연한 내용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했다.
이승만이 보여 준 100매가 넘는 사진 중에는 ‘장옷을 입고 언제나 눈을 내리깔고’ 나들이하는 중인계급 부인들의 사진도 포함되어 청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국의 ‘양반집 여인들’에 관한 슬라이드를 보여 주지 못하는 이유는 지체 높은 여인네들은 집 밖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연설을 마치자 청중 수백 명이 이승만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방법에서 두 나라는 다르다. 지나친 자만으로 충만한 러시아는 러일 전쟁 기간 중 외부 비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선량해 보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서양 문명이라는 양가죽으로 늑대의 본성을 위장하려고 애썼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빈 수레가 요란한 셈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총은 조용히 적의 심장을 겨눈다. 일본에 굴복한 한국인은 아무도 없다. 강대국들은 정의의 대의를 위해 한마디도 못 하고 있다. 일본을 자극해 극동의 상업적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 보이지 않는가? 약소국들에 대한 불의로 얼룩진 평화를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다.”
이승만은 한국을 소개하고 일본의 침략 야욕을 폭로했다. 청중은 대체로 이승만의 강연에 환호했지만, 호응도는 내용에 따라 판이하였다. 알려지지 않은 나라 조선의 신기한 이야기에는 호기심으로 귀를 기울이고, 기독교 선교에 관한 내용에서는 감동하기도 했다.
거대한 대륙 국가인 중국을 위협하고, 나중에는 미국까지도 위험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는 이승만의 주장은 웃음을 자아내는 어이없는 소리였다. 훗날 이승만의 예언적인 강연은 모두 사실로 입증되지만, 그 당시 미국인에게는 너무나 먼 이야기였다.
자료제공 |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이호 목사 저) 4
이승만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다. 물론 공과가 있다. 하지만, 요즘 학교교사들은 어린 초등학생들에게 이승만대통령의 과오만 부추겨서 4.19를 말할 때도 어린이들 입에서 욕이 나올 정도로 가르친다. 나는 너무 놀랬다 그들은 전교조도 아니다. 교사들에게 역사의식을 다시 고취시키고 재학업을 시켜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생각하면 답답하다.
나는 어린이들을 만나는 기회가 많아서 아이들의 잘못배움을 교정시켜 주기도 하고, 학교에 항의도 해 보지만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어찌할꼬. 교사시험을 치룰 때 역사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는것인지?
-하얀비의 풀꽃편지..
===백년전쟁 조작 증거 영상물.
<사진설명> 이승만이 감옥에서 쓴 한시모음집 <체역집> <감옥잡기>
이승만이 감옥에서 고생하는 동안 선교사들은 이승만을 석방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1900년 겨울, 고종 황제는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적당한 시기에 이승만을 석방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이후로도 고종 황제는 여러 차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여러 선교사와 연합하여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끈질기게 구명 활동을 벌였다. 이승만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편향한 것을 염려해서 그러다가 목이 달아날 것이라고 경고했던 아펜젤러였지만, 이승만이 한국 기독교를 이끌어 갈 거목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선교사이자 스승의 심정으로 아펜젤러는 감옥에 갇힌 이승만뿐 아니라 곤란을 겪고 있던 이승만의 가족에게도 담요와 땔감을 보내 보살펴 주었다.
끝내 제자의 출옥을 보지는 못했다. 성경 번역을 하고자 배를 타고 서울에서 목포로 가던 중 선박 충돌 사고가 일어나 목포 앞바다에서 익사했기 때문이다. 배 두 척이 부딪치는 순간까지 아펜젤러 선교사는 안전했지만, 위험에 처한 학생들을 구출하려다 생명을 잃었다. 사람은 살아온 모습 그대로 죽는다. 아펜젤러가 맞은 최후는 제자들을 사랑했던 스승, 한국인을 사랑했던 선교사의 일생이 축약된 장면이었다. 옥중에서 아펜젤러의 순교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식사도 거른 채 온종일 통곡했다.
그들이 쏟은 노력과 한규설의 후원으로 1904년 8월 7일, 이승만은 5년 7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조선 국왕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고종 황제와 맺은 특별한 관계 때문이었다. 언더우드, 애비슨, 헐버트라는 세 선교사는 명성 황후 시해 사건으로 친일파가 궁중을 장악할 때, 매일 궁중에 드나들며 고종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밤에는 당직을 서가며 고종을 보호했다. 고종이 생애 최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선교사들은 음으로 양으로 고종을 도왔다. 고종에게 최고의 은인인 선교사들이 알렌 공사와 함께 이승만이 출옥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선교사들이 이승만을 살리려 한 노력이 사실 규정 위반이었다는 점이다. 1897년 5월 11일 미국 정부는 셔만(Sherman) 국무장관 명의로 훈령을 내렸다. 미 정부는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선교, 교육, 의료 사업을 제외한 토착 정치에 절대로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알렌 공사와 미국 선교사들은 정치범 이승만을 감옥에서 나오게 하려고 내무협판에게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훈령을 위반하면서까지 노력을 기울였다.
학교를 세우며, 도서관을 운영하고, 논설을 쓰는 등 일취월장하는 이승만에게서 선교사들은 조선의 미래를 보았다. 조선에 복음을 자라게 할 중심인물로 이승만을 지목한 것이다. 훗날 펼쳐진 역사로 비추어 볼 때, 그들이 짐작한 예감은 적중했다.
이 한장의 기막힌 사진.
우리말로 번역하면 ‘청한 놈이나 거절한 놈이나’ 정도로 읽을 수 있다. 기사는, 러시아가 일본에 한반도를 둘로 쪼개어 나누어 지배하자고 제안했는데 일본이 거절했다는 내용으로, 일본 혼자서 한반도를 다 먹겠다는 심보를 비판했다. 한마디로 청한 놈이나 거절한 놈이나 남의 나라를 물건처럼 주고받으려는 도둑놈들이라는 논설이었다. 정부는 곧 <황성신문> 사장 남궁억을 구속했다. 이 사건은 우리 역사에 신문 기사로 말미암아 언론인이 구속된 첫 필화(筆禍) 사건이다.
이승만이 출옥할 무렵에 일본 공사가 황제와 면담을 요구했다. 고종이 거절했지만, 일본은 막무가내로 면담을 진행했다. 황제가 일개 외교관이 청한 요구를 거절하지도 못할 만큼, 나라는 혼란을 지나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승만은 자유를 얻었지만, 조선은 자유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 정부가 나름대로 생각해낸 해결책이 있었으니, 곧 미국에 원조를 구하는 것이었다. <계속>
출처/자료제공 |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이호 목사 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