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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판 고르바초프가 나올 수 있을까?-겉만 번지르한 모래성에 바람이 분다.

까까마까 2013. 6. 18. 15:41

 

 

 

 

 

 

북한판 고르바초프가 나올 수 있을까?

 

人類가 감사해야 할 大人物의 착한 심성은 가족,

친구, 고향, 자연에 대한 사랑에서 만들어진 것 같다.

趙甲濟   

 

 

'미하일 고르바초프 회고록'(Doubleday, 1996)을 읽었다.

770 페이지나 되는 책인데, 전엔 필요한 부분만 읽다가

이번엔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기 전까지를 읽었다. 


   

 

 

 



   나는 늘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를 '人類가 감사해야 할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착한 심성과 善意 덕분에 東歐 및 소련 공산 帝國이 평화적으로 해체되었다.

만약 1985년에 그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서기장으로 뽑혔더라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세계가 적어도 지금보다 평화롭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아직도 베를린 장벽이 건재하고

東西 냉전이 계속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너졌더라도 피를 훨씬 많이 흘렸을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동구 공산권 국가들이 차례로 민주화되고 독일이 통일되는 과정뿐 아니라

소련 연방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까지도 관리하였다. 어려운 2중의 해체기,

더구나 엄청난 核무기를 가진 소련의 해체기에 流血사태가 없었다는 점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가장 큰 공로자는 고르바초프이고 특히 그의 인간성이다'고 평가할 것이다.

 


   

 


   그는 소련 공산체제를 개혁하려고 하였지

공산주의를 해체하려고 페레스트로이카를 시작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련 체제는 개혁하기에 너무 늦은 중태임이 드러났다.

개혁을 주도할 집단이 공산주의 체제 안에선 만들어질 수가 없었다.

진정한 개혁가들은 공산주의를 개선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망선고를 원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하였으나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았다. 大勢 순응의 자세를 취하였다.

그는 동구 공산국가의 민주화를 소련의 군사력으로 저지하여 왔던 과거 방식을 폐기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사상에 대한 武力탄압을 싫어하였다.

고르바초프의 할아버지는 스탈린의 숙청시절에 反혁명 분자로 몰려 감옥에 가서 고문을 받고

죽다가 살아 나온 이였다. 작은 할아버지는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의지와 착한 인간성이 어디서 생긴 것일까 하고

그의 회고록을 읽어갔다. 몇 가지 해답이 있었다.
   


   모든 偉人들이 다 그러하지만 그의 단란한 가족이 그를 키운 보금자리였다.

세바스토플에서 태어난 그는 농민출신이었고 소년시절부터 農事에 참여하였다.

그의 회고록엔 부모와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찬사가 가득하다.

혁명과 전쟁과 숙청과 대기근 속에서도 가족의 유대는 지속되었고,

그 안에서 고르바초프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적인 人格이 형성된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아버지는 소련-독일 전쟁에 징집되어 5년간 전선에서 싸우다가 부상당하였다.

아버지가 戰死하였다는 통지를 받아 온 가족이 3일간 흐느끼는데

'살았다'는 통보가 와서 기뻐 날뛴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르바초프 자신은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하면서 5년간 보낸 세월이

자신의 미래를 만들었다고 썼다. 知的 開眼과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직시할 수 있는 의식화가 이뤄진 시기이자 부인 라이사를 만난 곳이었다.
  


   지금은 他界한 라이사에 대한 그의 묘사는 순정 소설을 방불하게 한다.

악마의 이데올로기였던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협력하였던(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愛妻家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고르바초프의 人格형성에 보다 근본적 영향을 준 것은 세바스토플이란

고향에 대한 사랑과 특히 자연에 대한 외경심이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그는 틈만 나면 자연 속으로 들어가 生氣를 느끼고 일체감을 가졌다고 한다.

그의 가족이 여러 번 '어머니 자연'의 덕분으로

대기근 속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경험을 감동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라이사(부인)와 나는 자연을 사랑하는 열정을 공유하였다.

우리는 함께 걷고 또 걸었다. 날씨를 상관하지 않고 자연속으로 걸었다.

暴雪속에서도 시골 길을 걸었다. 길을 잃어 목숨을 잃을 뻔도 하였다.

세바스토플의 草原, 특히 6월말의 草原을 좋아하였다. 초원, 곡식들, 풀냄새, 노래하는 새,

그리고 밤하늘의 별들.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것의 쾌감은 교회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과 같을 것이다.

그런 감정을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다.

내가 자연속에서 존재하고 자연이 나 속에서 존재한다는 감정 말이다.

자연에 대한 나의 열정은 내가 어릴 때 과수원에서 자란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자연을 고르바초프처럼 사랑한 사람이 박정희였다.

한국의 綠化성공은 그의 자연사랑의 정책화였다.

자연을 사랑하는 이는 모든 생명체, 특히 인간을 사랑한다.

그런 朴正熙, 고르비였으므로 그 격동기에서도 최소한의

人命피해를 내고 위대한 개혁과 전환을 이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 관료제도 속에서 생존에 성공한 사람이다.

그는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서기장까지 오른 이다. 생존법을 터득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늘 '인간이 이런 식으로 살 순 없다'는 문제의식을 놓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 가든지 문제점을 발견하고 改善하려고 하였다.
  


   그의 이런 자세를 높게 평가한 사람들이 그의 출세를 도왔다.

특히 브레즈네프 시절의 2인자였던 KGB 의장 겸 정치국원 안드로포프가 고르비의 후원자였다.

 아무리 惡의 집단이라도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에겐 동지가 생기는 모양이다.
  

 


   고르바초프의 정신적 지도자는 흐루시초프였다.

흐루시초프가 1956년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스탈린 격하 연설을 하였을 때

고르비는 黑海 연안 세바스토플市 콤소몰(청년공산당 조직)의 젊은 간부였다.

그는 흐루시초프의 연설문을 읽고 흥분했다. 개혁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흐루시초프의 조치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나는 내 생각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黨의 조직간부들은 흐루시초프의 연설에 대해서 복잡한 생각을 갖고 있었고,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한 지구당 책임자는 나에게

「인민들은 개인숭배를 규탄한 연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나는 당에서 말하는 「인민들」은 보통 당 조직간부들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직접 부딪쳐 보기로 했다.
  


   나는 공산당원들 및 청년당원들과 매일 만나 대화를 나눠 보았다.

젊고 교육을 잘 받은 그룹은 흐루시초프 연설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다른 사람들은 흐루시초프가 인용한 사실들을 믿지 않으려 했다.

제3의 그룹은 사실들을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왜 하필 이때 그런 사실들을 공개하여

黨을 곤란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는

스탈린이 자신들을 탄압한 간부들을 숙청했었다고 믿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스탈린에 의한 숙청이 자신들을 쥐어짠 악덕 간부들에 대한 응징이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흐루시초프의 보고연설이 너무 개인적이고 감정적이었다고 생각했다.

 복잡한 정치·사회·경제적인 현상을 지도자의 개인 성격에만 너무 결부시킨 점도 있었다.

더 깊은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고르비는 흐루시초프의 개혁이 守舊세력에 밀려 실패하는 것을 보고,

가장 큰 이유는 '인민들을 깨우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인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개혁은 실패한다'라고 생각하였다.
  


   고르바초프 회고록엔 출세한 다음에도 늘 과거의 친구들을 찾아가 만나는 모습이 나온다.

권력을 쥐고도 가족, 친구, 고향, 자연을 잊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이었기에 피비리린내를 뿜으면서 탄생한 공산주의 체제를 평화롭게 해체해 간 것이리라.

  
   나는 1996~7년에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에서 '역사의 교훈'이란 제목의 강좌를 들었다.

세 교수 중 한 사람이 부시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회의에서 독일통일 담당으로 일하였던 필립 제리코 교수였다.

그는 나중에 미국 국무장관이 되는 라이스와 함께

1996년에 '독일이 통일되니 유럽이 바뀌었다'는 名著를 낸 이다. 그에게 내가 질문한 적이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독일통일 협상과정에서 많은 카드를 쥐고 있으면서 이를 쓰지 않았습니다.

콜 서독 수상을 만났을 때 통일과 관련된 모든 사안에 대하여 다 동의해준 뒤

비로소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는 바보짓을 했고

이 때문에 1년 뒤 쿠데타를 초래한 셈인데, 왜 이랬을까요?'
  

 
   젤리코 교수의 대답은 의외였다.
   '고르바초프의 좋은 성격 때문입니다.

그는 독일 통일을 미끼로 하여 돈을 뜯어낸다는 생각을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북한정권의 반대를 묵살하고 서울 올림픽에 소련이 참여하도록 결정하였고,

韓蘇 수교도 일찍 결단하였다. 한국인이 감사해야 할 인물이기도 하다.
  


   북한에서 고르바초프 같은 인물이 나올까? 장성택이 그런 인물일까?

김정일의 死後에도 고르바초프나 등소평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

북한政權은 더 오래 지속되거나 루마니아 모델의 피바람이 나는 종말을 맞을 것이다.

 

 

 

 

 

자 8월의 쿠테타가 뭐인지 궁금하니깐 바로 설명한다.


 

격동의 80년대 말 소비에트는 생명이 끊어지기 직전의 상태에서의

경제상황과 정치구조적 문제가 사회 전반적으로

곪아서 터지기 직전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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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해체의 주범 고르바초프

동시에 냉전의 종지부를 찍는 쾌거를  이룩하여서 이에 대해서 노벨 평화상 수상함.


 

당시 고르바초프 체제하의 소련은 병신같이 돈만 퍼나르는 아프간전쟁을

종지부를 찍으면서 철수를 감행함으로써 전쟁의 끝을 맺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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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을 끝냄으로써 그동안 지독할정도로 많은 인명피해와 자원소모를 줄임으로써

 당시 재정부담을 줄이면서 서방과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함으로써

핵 감축을 추친하는 개혁적인 인물이였음.


 

그러나 그의 개혁적인 행동은 자연스레 발발로 이뤄졌는데, 당시 발트3국인 애네


 

애네도 억울한게 1940년에 강제로 소련에 병합되었기에

바로 이때가 기회다 라고 생각하고 바로 독립운동 시작하고, 애네들을 기점으로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등 소련 전역에서 강제로 병합된 국가들에서

독립운동들이 발생되면서 소비에트 연방제가 무너지는 상황으로 치닫지.

그리고 우리나라 옆나라인 일본에서 터진 핵발전소 운지사건의 원조격이 발생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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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소련의 관료주의 정책하에 막을수 있었던 안전사고임에도 어떠한 대응도 못하다가

 

엄청난 사상자를 일으킨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사고가 터지지.

현재까지 직접적인 피해로 인한 사망자만 5천명이상으로 추정되고

 

직간접적인 피해자만 해도 수만명에 이르는 사고였고, 우리나라에도 당시 영향을 미쳤음.

20~30년대생에서 갑작스럽게 갑상선암 발생률등...

 

 

 

겉만 번지르한 모래성에 바람이 분다.

 

김승근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한중일 3국을 방문했다.

그 결과물인지 우리는 북한에 대화를 제의했다.

굴욕적인 순간으로 보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북한은 대화를 거절했다.

심지어 우리에게 사과를 하지 않으면 대화 하지 않겠다는

이해할 수 없는 얘기까지 했다.
 

 

 

화해의 길은 멀고, 통일의 길은 더 멀게만 보인다.

하지만 북한의 속사정은 아무도 모르는 거다.

당장 내일 아침 붕괴될지 어떻게 아는가? 뜬금 없이 무슨 소리냐구?

미국 언론에서 나온 얘기를 해보겠다.


북한이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대표적 경제전문 잡지 포브스가

4월14일 북한정권 붕괴에 대한 견해를 내놨다.

포브스는 최근 ‘한국 통일 : 조기에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마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북한정권은 먼 장래 종말을 맞이하겠지만

예상치 못한 식으로 갑자기 붕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남북한이 불안정한 균형을 이뤄나가겠지만

먼 장래에 북한의 종말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현재 남북한과 양측의 멘토인 미국과 중국에서 전개되는 일들을 보면

옛 소련과 중부와 동구권 붕괴,

동서독의 통일 직전과 비슷하다고 강조했다.


다시말해 독일의 통일 당시의 모습과 주변 상황이 매우 닮아가고 있다는 것.

포브스는 옛 소련과 동독의 정치 경제체제가 건실했다면

둘다 현재까지 남아있을 것이라면서

북한 경제체제가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북한은 인민들에게 양식조차 주지 못 할 정도로

더 끔찍한데도 수십년간 생존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무너져야 정상인데 비상식적으로 버티고 있다는 얘기다.

북한이 수십년간주민들에게 세뇌해온우상화 및 정치공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얘기다.


포브스는 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옛 소련체제를 종식시키지 않고 보수하려 했지만

옛 소련은 붕괴했고 동독 지도부도 동독 공산주의를 구하려 했지만

결국 독일은 통일됐다고 강조했다.



김정은이 현재 개혁 개방을 외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급진적인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포브스는 남북한은 아무데로나 튀는 불꽃을 찾는 부시깃통과 같으며

둘다 새로운 검증받지 못한 지도자가 있고,

자기식으로 양측 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수사를 낮출 생각이 없다고 포브스는 꼬집었다.



실제로 화해와 협력을 향한 통일보다는 일방통행적 생각을 하고 있다는 지적으로,

북한은 실패한 체제임을 인정하지 않고

적화통일을 고집하고 있는 것 등을 얘기하고 있다.


또 포브스는 중국은 통일 한국을 원하지 않으며

미국은 북한의 협박에 싫증을 내고 한반도에 군사력을 배치함으로써

심각하다는 점을 보여줘야 하지만 어느 나라도 어떻게 물을 부어

한국이라는 부시깃통을 끌줄을 모른다고 지적했다.


한반도에 고조되는 위기감을 해소할 만한 카드를 내놓지 못하거나

내놓지 않고 있는 미국과 중국을 설명한 것이다.



포브스는 그럼에도 옛 소련은 고르바초프가 경제를 땜질하고

대담한 정치개혁을 하면 소련 체제를 유지할 것이라는 오판에 무너졌고,

동독도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을 해고하면 될 줄 알고

평화시위대에 총을 쏘지 않는 등 오판으로 무너졌다고 지적했다.


Mikhail Gorbachev

Mikhail Gorbachev

 


김정은이 슈미트 구글 회장을 부르고, 해외 투자를 허용할 것처럼

제스쳐를 취한 것 등이 앞서 소련이나 동독과 유사하다고 본 것이다.


포브스는 아울러 북한 독재정권의 종말을 시작할 환경이나

 실책을 알지 못한다면서 북한 인민이 봉기하거나 유명한 북한군이

사담후세인의 혁명수비대군처럼 무기력하고 충성심이 없어

무기를 내던질 수 있으며 북한이 개혁파 장군들이

고르바초프식 정부를 출범시킬 수 있다고 가정했다.


이어 루마니아 독재자 니콜라 차우세스쿠가 처형장에서

독재자 지지는 덧없다는 것을 깨달았듯이

김정은도 비슷한 운명을 감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헐벗은 주민들이 당장 들고 일어나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상황이지만

북한 주민들이 아직 제대로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대규모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다는 입장이다.


글을 쓴 폴 로데릭 그레고리는 “이 은둔 왕국의 임박한 붕괴를 예언하는 게 아니다”면서

“역사를 보면 주요한 변화는 대개 준비가 안됐을 때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 말이 맞다. 우리는 이미 북한의 붕괴 조짐을 우리는 모두 보고 있지 않은가.

김정은 암살 시도 및 내부의 총격전까지 있었다는 보도들이 있었다.

아직 어린 김정은,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거기에 발맞추지 못해

심하게 도태돼 있다는 상황. 발맞추기 위한 개혁개방은

북한의 모래성 체제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


주민들은 굶주리고, 권력을 가진 군부도 김정은에게 충성하고 있지 않다.

끌어안기 위해 김정은이 여러 가지 미친 짓을 하고 있지만,

김정은은 불안할 뿐이다.


국제사회를 향해 강경하게 대처하는 것이 내부 동요를 막기 위해

강한 모습을 보이려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북한 붕괴를 향한 징조들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북한 붕괴 이후의 시나리오까지 미리 계획해 놔야 한다.

그 혼란이 마침내 닥쳤을 때 우리가 준비된 시나리오대로 북한에게 접근한다면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자유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고 신속하게 북한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놔야만 한다.

 

그리고 준비된 대한민국이 완성된다면

북한 붕괴를 가속화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