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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 고산 윤선도의 유적을 찾아서

까까마까 2013. 7. 16. 18:37

 

 

 

 

 

 

 

 

 

 

 

 

 

 

 

이렇게 아름답고 고즈넉한 곳을 좀처럼 찾기 힘들어

많이 해매다 찾은 보물같은 보길도 입니다.

시간을 들여 한컷 한컷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선도형님이 반할 만 합니다.

 

 

 

 

 

 


 
보길도
 
고산 윤선도의 유적을 찾아서

 

윤선도(尹善道, 1587년 6월 22일 ~ 1671년 6월 11일)는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시인·문신·작가·정치인이자 음악가이다.

남인 중진 문신이자 허목, 윤휴와 함께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자 예송 논쟁 당시 선봉장이었다.

1차 예송논쟁 때 송시열이 체이부정설을 주장하자 이에 반발,

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과격한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맹공을 받고 자신이 삼수(三水)에 유배되었다.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되고,

숙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約而)[2]이고,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홍재전서에는 제2의 무학(無學)이라는 별칭이 등재되기도 했다.

정철, 박인로, 송순과 함께 조선 시조시가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의사로 민간요법에 관련된 저서인 약화제(藥和劑)를 남기기도 했고,

오우가와 유배지에서 지은 시인 어부사시사로 유명하다.

화가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5대조부이다.

 

 

 

 

 

 

 

 

 

 

 

 
세연정
 
 
 
 
 
 
 
 
 
 
고산(孤山) 윤선도가 유배생활이 끝나고 선생이 고향인 해남에 있을 때
병자호란의 소식을 듣고 향리 자제와 의병을 모집하고 가복들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강화도에 이르렀으나, 인조(仁祖)는 이미 남한산성으로 옮겨
적과 대항하다가 항복한 후였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선생은
세상을 등지고 탐라(耽羅:제주도)로 가는 길에
이곳 보길도의 산세가 수려함에 매혹되어 머물게 되었다 한다.

세연정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란 뜻으로 고산이 이름 지은 정자이다.
 
 
 
 
 
 
 
 
 
 
 
 
 
 
 
 
 
 
 
 
 
 
 
 
 
회수담(回水潭) - 세연정 정원의 일부로서 인공적인 요소가 두드러진 네모꼴의 연못이다.
연못 가운데에는 인공축도(人工築島:방도)가 있고 유도암(遊跳岩)이 있다.
 
 
 
 
 
 
 
세연정은 회수담과 세연지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정방형 정자로 난방시설까지 갖추었으며,
사방으로 문을 열어 젖힐 수 있는 개방된 구조였다.
 
 
 
 
 
 
 
 
 
 
 
 
 
 
 
 
 
 
 
 
세연지(洗然池) - 우리나라의 정원유적 중에서 조형처리가 가장 화려하고 광대한 연못으로
계곡의 물을 잘 이용한 연지(蓮池)
 
 
 
 
 
 
 
 
판석보(板石洑) - 우리나라 조원 유적중 유일한 석조보로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다.
평소에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수면이 일정량을 유지하도록 했다.
 
 
 
 
 
 
 
 
 
 
 
 
 
 
 
 
 
 
 
 
 
 
동천석실(洞天石室)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세운 한 칸짜리 정자로 서책(書冊)을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隱子)의 처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곡수당(曲水堂)
선생이 건물 짓는 것을 싫어하여 아들 학관이 자신의 사재를 털어 지은 정자다.
 
 
 
 
 
 
 
 
 
 
 
 
 
 
 
 
 
 
 
 
 
낙서재(樂書齋)
윤선도선생이 보길도에 정착하기 위해 제일 먼저 지은 살림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