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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소위 오노다 히로-한 日軍 장교의 30년 나 홀로 전쟁

까까마까 2013. 12. 10. 18:03

 

 

 

밑에 들리는 일본말 동영상은 "오노다 히로"에 관한 영상물로

직접 나와서 대담하는 아주 정확한 뉴스를 전해주는 동영상입니다.

비록 일본말은 잘 모르나 영상이 아주 볼만하니 재생해서 보세요.

영상만 봐도 이해가 되는 쉬운 일본말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 30년간을 "나홀로" 밀림에서 생존헸다는 

특이성과 회귀성 때문에 올리긴 했지만

그런데 이 쉑휘는 아주 극우파로

정신감정을 받아야 할 놈인 것 같습니다.

 

 

 

 

 

 

 

일본군 소위 오노다 히로

 


日軍 장교의 30년 나 홀로 전쟁

 

 

힌 日軍 장교의 30년 나 홀로 전쟁

 

The last SAMURAI

 Japanese Spirit.Hiroo onoda

 

20091230235450_1_6934.jpg

일본 항복 후 30년 동안 나홀로 전투를 하다
1974년 마침내 항복식을 하는 일본군 "오노다"/

 

 

 

2009.11.15 17:34 | 한 日軍 장교의 30년 나홀로 전쟁

 

 

 onoda-young.jpg"
육군사관 시절의 오노다 히로

 

 

 

 

한 日軍 장교의 30년 나 홀로 전쟁

 

태평양 전쟁기간 일본은 남태평양과 동남아시아의

넒은 지역에서 작전을 했다.

그러나 미군의 항공력과 해상력이 너무 막강 했던 터라

넓디넓은 해역에 흩어진 부대들과 보급은커녕 통신마저
단절되어 고립된 부대들도 많았었다.

오노다 소위
일본이 항복하고 고립된 부대들은 그런대로 연결이 되어

귀향할 수 있었지만 원격지에서 연락 두절된 소수 인원들이나
전투가 휩쓸고 간 전장의 패잔병들은 밀림에서 방황하다가
몇 십 년의 세월을 두고 한두 명씩 숨어있던 밀림에서
새 세상으로 나왔다.

 

 

 

 

 

[30년이 지났음에도 잘 관리한 군복과 무기,

군장들을 착용한 채 경례하는 오노다]

 

 

 

 

50년대에 수 십 명이 귀환하였고[이들 중에 한국인도 있었다.]

수가 격감했지만 60년대에도 일본을 떠들썩하게 하던
귀환자들이 있었다

1972년 1월 24일, 메스컴에 크게 각광을 받았던 요코이 쇼이치

[橫田 庄一]가 28년 만에 괌 섬에서 발견되어 귀국했다.
발견당시의 요코이 오장.옷은 자신이 식물에서
섬유를 뽑아 직접 만든 것이다.
그러나 요코이보다 더 일본국민을 놀라게 하는 일본 군인이
필리핀의 한 작은 섬에서 발견 되었다.

명령이 없는 한 죽을 때까지 게릴라전을 수행하라는 상관의 명령에

악착같이 충실하며 29년 동안 싸우던 일본군 소위가 중늙은이로

생환하여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했었다.

필리핀 루방 섬에서 발견된 일본군 소위 오노다 히로

[小野田 ?? 1922년 생]소위다  

 

 

▲ 패전 후 30년 만에 투항한 일본군 소위 오노다 히로.

 

그는 1923년 일본 와카야마[和歌山]생으로서 고등학교 졸업 후

중국에 있는 일본 무역회사 중국 지사에서 근무했었다.

사회에 나왔을 때의 오노다.
태평양 전쟁이 격화 되자 그도 징집되었다.

그는 영어와 중국어가 유창한 덕분에 갑종 간부 후보생으로
선발되어 유명한 일본 정보학교인 나카노[中野]학교에 입교하여
졸업과 동시 1944년 12월 26일 필리핀의 루방 섬으로 파견되었다.

루방 섬은 마닐라로 들어가는 마니라 만 입구에 자리 잡고 있어

전략적으로 극히 중요한 위치의 섬이었다.
항복 당시 그는 총과 실탄과 군도가 있었다

그는 루방 섬에서 적의 비행장이나 항구의 부두 시설 파괴등,

적의 공격을 방해할만한 모든 군사행동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별도의 철수 명령이 없는 한 

항복하거나 쉽게 자결하지도 말라는 엄명도 받았다.

그 철수 명령은 30년 만에 떨어졌다.

오노다 소위는 섬에 상륙해서 전에 미리 파견해놓은

일본군들과 연결을 했다.

이 부대원들을 지휘하는 장교들은 계급이 높아서 혈기 높은

오노다의 행동에 자주 제동을  걸었다.

오노다가 명령 받은 게릴라 행동이 제대로 실시를 하지 않아

그 다음해 1945년 2월 28일 미군과 필리핀군의 합동 군이 쉽게

상륙을 하게 만들었다.

 


1875년경의 일본 육군 병들.

 

 

 

 

미-비 연합군이 상륙하자 일본군들은 오노다와 그의 다른 동료

세 명을 제외하고 전사하거나 항복해버렸다.

오노다 소위는 부하 3명과 함께 루방 섬의 산악지대로 피신했다.

지휘관이 된 오노다는 명령에 따라 세 명의 부하들, 아카츠 유이치

[赤津 勇一]일병, 시마다 쇼치[島田 庄一]오장,

코즈카 긴시치 [小塚 金七]상등병등과 게릴라 전투를 개시했다.

그들은 섬에 자리 잡은 미군 레이다 기지를 기습해서 기지장에게

중상을 입히기도 하고 보급소를 약탈하거나 했다.

오노다 패는 잡은 야생 들소의 건포와 야자열매로 버티면서

유격전을 계속하였다. 

미군이 철수하자 섬의 산간에는 게릴라 전투를 할만한

군사 목표는 별로 없었다.

그들은 '적국'인 필리핀 농민들의 농사를 방해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소도 죽이고 농작물을 태우기도 하고 저항하는 농민들을
쏘기도 했다.

그들이 일본이 항복했으니 하산하라는 권고 삐라를 본 것은

1945년 10월이었다.
그들은 상의 끝에 이 삐라는 거짓이라고
결론을 냈다,.

 

 

1945년 말 필리핀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제 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山下 奉文]대장의 명의로 전쟁은
끝났으니 빨리 항복하라는 명령서의 삐라가 또 살포되었다.

그들이 근 일년간 산 생활을 하면서 처음 접한 최고 사령관의
지시였다

오노다 부대원은 삐라를 면밀하게 검토해보고 이것 역시 자신들을

속이려는 꾀임 수라고 결론을 냈다.

세월이 한참 흘러간 1950년 오노다 소위 대원 중 아카츠 유이치가

조직을 이탈해서 6개월간 혼자 방황하다가 필리핀 경찰에 투항했다.

오노다와 부하들의 신원과 여러 활동 정보가 그들을 찾고 있던

‘적’에게 넘어 가자 그들은 더욱 조심을 하며 행동에 신중함을
가했다.

필리핀 경찰을 태평양 전쟁이 끝난 다음부터 무장대를 조직해서

농민들에게 해꼬지를 해대는 이들을 추적했었다.l.
요코이가 괌 섬에 숨어 살던 땅굴-그는 손재주가 좋아 여러
생존의 도구와 방법을 개발했었다. 일본 귀국후 내핍생활의
인기 강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1952년 이들 오노다 대원들에게 보내는 각 대원들의 일본 가족들

사진과 편지가 인쇄된 삐라가 뿌려지며 투항이 권고되었다.

그러나 오노다와 그 부하들은 이것들이 모두 자신들을
유인하는 미끼라고 무시해버렸다.

1953년 7월 대원 시마다는 지방 어민들과 벌린 총격전에서

다리 부상을 입었다.

오노다는 그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여 정상적인 건강을
찾게 해주었다.

그러나 시마다는 일년 뒤 1954년 5월 7일 그들을 추적하던

수색대에게 총격을 당해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후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두 명 만 남은 오노다 패는 이곳저곳으로 피신과 은신을
다니면서 필리핀 경찰 수색대의 추적을 빼돌렸다.

놀랄 일은 이들이 미군 부대에서 훔친 라디오를 통해서

가끔 외부의 소식을 접했다는 것이다. 완전한 정보 두절상태에서

그런 고집스러운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국 일본인 항복한 사실을 알았지만 그것은 미국의

괴뢰 정부이고 진짜 정부는 만주로 망명하여 암약 중에 있다고
믿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 것도 알았으나 그것은 만주에 망명했던
진짜 일본 정부가 미군에게 반격하는 것이라고 추리해 버렸다.

[일본 나가노 정보학교의 무서운 정신 교육이 놀랍다.]

그 사이 이들을 귀환시키고자 일본의 가족들까지 루방 섬에

찾아와서 확성기로 방송을 하며 이들을 불러냈었다.

오노다는 그의 형이 루방 섬을 찾아와서 방송을 하는 것을

먼 발치로 보았지만 괴뢰정부가 그 형을 강제로 동원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가지 않았다.
오노다의 아버지까지 현지에 와서 아들에게
항복하도록 확성기 방송을 했다.

오노다의 아버지가 현지에 와서 항복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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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19일 그들이 ‘명령 받은’ 게릴라 활동의

일환으로 필리핀 농민들이 추수한 쌀 노적가리에 불을 지르다가

필리핀 경찰에게 습격당하여 대원 중 한 명인 고즈카가

총탄 두 발을 맞고 사망했다.

이제는 오노다 한 명만 남게 되었다.

일본에서 오노다는 1959년 사망한 것으로 정리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필리핀 경찰은 수색대를 더 보강하여 도주한 오노다 수색들
했지만 그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2년 뒤 1974년 오노다에게 놀랄만한 일이 발생했다.

일본 호세이[法政] 대학 중퇴생 스즈키 노리오[鈴木 紀夫]가
먼 일본에서 오노다를 찾아 온 것이다.
스즈키와 오노다 .
 그는 호기심이 많은 젊은이였던 듯하다.

일본을 떠나 세계 여행에 오를 때 그의 목표는 중국의 판다,

히말라야의 설인, 그리고 72년 총격전으로 일본에 그 생존이

알려진 오노다 소위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는 루방 섬을 방문해서 오노다 소위를 만나서 함께 지내며
친해졌다.

스즈키는 오노다에게 전쟁은 이미 끝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야기 해주며 투항하기를 간곡히 부탁했다.

오노다는 자기에게 끝까지 투쟁하라는 마지막 지시를 내린 그의

직속 상관이 찾아와서 투항을 명령하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스즈키는 일본에 돌아와서 그와 오노다가 같이 찍은 사진을 가지고

일본에 돌아 와서 언론에 오노다와의 만남과 그의 투항 조건을 밝혔다.

일본 정부는 즉각 오노다의 상관이었던 다니구치[谷口  義一]소령을

찾아냈다.  그는 서점을 하고 있었다.
스즈키가 찍은 오노다의 사진
 다니구치는 즉시 필리핀 루방으로 날아가 접촉 노력 끝에

드디어 1974년 3월 9일 오노다를 만났다

오노다는 깍듯한 경례로 옛 상관을 영접했다.

다니쿠치는 원래의 직책인 제 14방면군 참모부 특별 정보 반장의

이름으로 임무 해제와 귀국 명령을 내렸다. 실로 29년만의

명령이었다.

항복시 오노다는 손으로 만든 일본 군복을 입고 군도와 99식 소총,

실탄 500발, 그리고 몇 개의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지방 필리핀 군기지에 가서 군도를 내놓고 고전 방식의

항복 신고를 했다.

해프닝에 놀란 필리핀 군 기지 사령관은 그 군도를 돌려주었다.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바치는 항복의 군도.
 그와 그의 대원들은 1945년부터 1974년까지 30여명의
농민들을 살해했다.

오노다 패들에게는 명령 받은 대로‘전쟁’을 하면서
적을 살상한 것이지만 전후 독립한 필리핀 입장에서 보면
이는 엄연한 양민 학살이었다.

그러나 필리핀 대통령 마르코스는 오노다의 충성심과 군인 정신을

높이 사서 특사를 발표하였다.[경제적으로 일본 의존이 컸던

필리핀으로서 일본에 일기 시작한 오노다의 인기를 의식한듯하다.]

오노다는 일본으로 귀환하면서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

그의 귀환을 NHK가 한 시간 동안 생중계했고 방영의

전국 시청률은 45%가 넘었다.

[요코이의 귀국 때도 생방송이 있었지만 시청률이 41.2%였다.]

귀국하는 오노다
 그의 인기는 매우 높아서 그는 주변에서 중의원 출마를
권유 받기도 했다.

오노다는 그의 홀로 전쟁을 담은‘나의 루뱅 섬 30년 전쟁’

[미국에서는‘항복은 없다. 나의 30년 전쟁’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오노다

 

그는 그런 관심을 부담스러워했고 또 전후 일본 정신과 애국심이

사라지고 타락해가는 전후 일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1975년

그의 형 다다오가 사는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다.

그는 브라질로 간 다음해 목축업을 시작해서 1976년 결혼도 하고

활발한 교민회 활동도 했다.

1980년 10대의 일본인이 부모를 살해한 것을 보고 결심 끝에
1984년 귀국해서‘오노다 자연숙’이라는 젊은이 교육 캠프를
개설했다.

이 캠프는 인기를 끌어 일본 내 여러 곳에서 지소를 열었다.
 오노다는 1996년 자기가 전쟁을 했던 루방 섬을 방문하여

지방 학교를 위해 10,000 달라를 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죽임을 당한 농민들의 유족들이 그에게 격렬히

항의하는 데모를 하기도 했다.
1996년 자신의 나홀로 전쟁터였던 루방섬을 찾은 오노다.

 

오노다의 상관이었던 다니구치[谷口 義一]소령을

찾아냈다. 그는 서점을(책 가계를 운영) 하고 있었다.

 

1974년 3월 9일- 오노다 항복.

 

 

 

그와 그의 대원들은 전쟁이 끝난후,1945년부터 1974년까지

30여명의 농민들을 살해했다. 

독립한 필리핀 입장에서는 양민을 학살한 범죄자였다. 

 

그러나 필리핀 대통령 마르코스는 오노다의 충성심과 군인 정신을 높이 사서 특사를 발표하였다

(일본은 필리핀에 대규모 경제원조를 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특별사면이였다.)

 

귀국중인 오노다. NHK 생중계. 시청률45%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1975년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

목축업을하고 결혼을 했다.

 

1996년 루방 섬에 방문하여 10,000달러를 기부 했지만,,

죽임을 당한 필리핀 농민들의 유족들이 항의하는 데모를 받았다.

(항의 시위를 받음)

 

 

 

 

그는 현재 브라질과 일본을 오가며 살고 있다.

오노다가 영웅이 되어 일본에 돌아 온 마지막 일본군은 아니다.

그가 귀국한 후 그 보다 더 오랫동안 정글에서 피해 다니며

 

 

구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서 나타났다.

 

 

1972년 1월 24일, 메스컴에 크게 각광을 받았던 요코이 쇼이치

[橫田 庄一]가 28년 만에 괌 섬에서 발견되어 귀국했다.

 

 

 

나카무라 데루오[中村 輝夫]라는 사병으로서 이름은 

일본식 이름이지만 대만인 이 광휘[李 光輝]였다. 

 

밀림의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1974년 12월 27일 발견되어

대만으로 돌아갔다.

 발견 당시 너무 오랫동안 혼자 살아서 일본어도 중국어도
전혀 못하는 상태였다.

그는 대만인이었고 오노다만큼 극적인 사회 귀환의 일화가 없어서

일본 대중의 별다른 인기를 끌지를 못했다.

 

 

▲ 필리핀에서 생존이 확인된 것으로 알려진

 나카우치 쓰즈키 상등병의 젊은 시절 사진.

가족들이 간직하고 있는 이 사진의 촬영 시점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들이 구 일본군으로 확인돼 귀국할 경우 1972년

괌에서 생환한 요코이 쇼이치(橫井庄一·당시 56세,

1997년 사망)와 1974년 필리핀에서 생환한

구 일본군 소위 오노다 히로(小野田寬郞·당시 51세)에 이어 31년 만이다.

요코이는 귀환 당시 “부끄럽게도 살아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해 당시 유행어가 됐다.

오노다 히로의 경우 일본 정부가 수색대를 보내고 스스로도 패전을 알리는 전단을 보았지만

종전을 믿지 않았으며 1974년 직속상관으로부터

투항 명령서를 받고 나서야 필리핀 정글을 나왔다.

이번에 발견된 두 사람도 이들과 같은 심리상태에 빠져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종전사실은 알았지만 탈영죄로 처형될 것이 두려워

계속 숨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두사람의 구 일본군이 또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아니 그럴 수가…”라고 말했다고 일본 언론들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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