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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접 전차몰고 광주폭동 선두에'와 영화배우 최은희 증언

까까마까 2014. 2. 27. 11:12

 

 

 

 
 
 
☆'내가 직접 전차몰고 광주폭동 선두에'☆
직접 경험한 일입니다
 
나는 21살 때까지 5.18을
추호도 의심 없는 민주화 항쟁으로 생각했고
전두환을 정권욕에 눈이 먼 광기 어린 살인마라고 생각했다.
국사 시간에 배운데로 광주시민은 전두환에 의해 무참히살육된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었다. 

대학 2학년1학기 마치고 신검1급으로 육군으로 입대하였다가
교도대로 차출되어 교도소에서 군생활을 하였는데
그 당시 60대 초반의 중풍걸린 비전향 장기수 한분이 계셨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빨갱이라는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비로서 분단의 아픔과 군대에 왔다는것을 실감했다. 

비전향 장기수의 특성상 다른 죄수들과 합방을 할수 없어
독방을 쓰는데 중풍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빵간에 동기가 없어
나 처럼 군대에서 차출된 신병들이 병걸린 장기수를 돌보다가
후임 들어오면 그 후임이 돌보는 식으로
중풍 걸리고 몇년 동안 그래왔다고 했다.
 
나도 첨에 신병이라 그분의 수발을 들었다.
막내생활을 거의 11개월하고 나서야 겨우 후임을 받아
수발 드는 일을 마칠수 있었는데 어느날 그 분에게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자신은 사북탄광 폭동때 지령을 받고 내려온 통일혁명전사인데
그 다음 지령으로 광주폭동에 투입되어 자신이 직접 전차를 몰고
광주폭동의 선두에 있었다.
 
폭동이 진압된 후에 북에서 내려온 동기들은 복귀하였으나
자신은 잔류 명령을 받고 대남활동을 계속하다가
80년대 중반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고 했다. 

그 분하고 이야기를 나눠 보면 놀랍게도 누구보다
사상적으로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김정일 체제에 대해서
강한 비판을 퍼부었으나 아이러니하게 왜 그 오랜 세월을
전향하지 않고 옥살이 하냐 물어보니.
 
 
자신은 북에 가족들이 있고 만일 전향할경우
가족들에게 돌아갈 피해를 생각해서
자기 하나 희생하는게 차라리 났다고 했다. 

전두환이에 대해서 물어보니
전두환이가 당시에 초반에 특전사를 투입하여
광주폭도들을 토벌한것은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니.
당시 북에서 내려온 특작부대원들은 광주를 거점으로
폭동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남조선 통일혁명을 이루려고했는데
전두환이가 대통령이 될 팔자였는지 천운이 따랐는지 잘모르겠으나
초반에 폭도들을 도륙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적화로 부터구해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다음부터  광주에 대한 나의 생각은 바뀌었고,
대한민국 역사 교육 또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유복 제공-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시편11:5)

北, 5.18 뒤 8월 함북 청진에 추모비 설치

..비석 뒷면엔 158명의 이름이!

 
 
 
 
특히 비석의 뒷면을 찍은 사진에는 ‘홍성표’, ‘리진혁’ 등 모두 158명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지난달 27일 북한인권운동가인 김주호 박사가 공개한 함경북도 청진시 낙양동에 있는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 사진.ⓒ
▲지난달 27일 북한인권운동가인 김주호 박사가 공개한 함경북도 청진시
낙양동에 있는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 사진.ⓒ
“홍성표 리진혁 등 외 332명의 인민군 영웅 렬사들이 잠들고 있다”
- '렬사 추모비' 뒷면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 뒷면 사진.ⓒ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 뒷면 사진.ⓒ
 
공개된 사진과 김 박사의 설명을 종합하면 80년 광주사태 당시

남한에 침투한 북한군은 이름이 밝혀진 158명을 비롯 모두 490명이다.

“비석에 이름이 새겨진 158명이 ‘남조선혁명투쟁에서 희생된

인민군 영웅들’이라는 사실을 각기 다른 문건에서 중복 확인했다”

“사망자의 ‘죽은 날’로 기록된 1980년 6월 19일은 소속부대의

광주남파작전 종결일로, 사망일을 이 날짜에 맞췄다”


 

 

- 김주호 박사

 

 

 

 

 

 

 

영화배우 최은희 여사의 광주사태 증언

(북한에서 들은 뉴스들...)

 

 

 

 

북한에서 광주사태 생중계 방송을 들었음을 증언하는 납북 여배우 최은희.

현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의 민족문제 연구 활동은

그가 1978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 명의로

김일성에게 충성맹세 편지를 보내면서

남한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킬 테니 북한에서 지원해 달라고 요청한

때로 거

슬러 올라간다.

광주사태 주동세력인 남민전은 이때부터 남한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킬 준비에 착수하였고,

 

 

북한 당국자는 최은희에게 3년 있으면 남조선이 해방될테니 그때까지 기다리라

 

했는데 정말로 1980년 광주에서 남민전이 주동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5 21일 광주를 완전히 장악함과 동시에 전라도 전 지역으로 무장봉기를 확산

 

시키고 있던

무장봉기 세력은 송정리 비행장을 점령하고 광주역에서 시민군을

기차로 서울로 보내어

서울로 무장봉기를 확산시키려 하였으며,

무장봉기가 서울로 확산되는 즉시 북한군이 남침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 비디오 1:36-1:46에서 최은희씨는

 

"지금 폭도들이 무기고를 부수어 가지고 무기를 들고 서울쪽으로 향하고있다. 이런 뉴스도 들었다"고 증언한다.

이런 생중계 방송은 북한군이 무기탈취 현장에 있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무기 탈취 현장에 북한군이 있었다.

봉기군이 서울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작전지시자가 북한세력이었을 때만 북한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시민군 작전은 북한의 지시 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증언에서 북한 용어 '광주인민봉기 봉기군' 을 최은희씨는 '폭도' 라고 칭한다.

 

출처 : 미주통일신문 모신글

 

1. 사실 이런데도 광주가 민주화 란다

2. 한두사람 증언도 아니고 그 어떤 증언 하면 믿을까

 

Image removed by sender.

                 http://www.sookut.com/870433664667

 

 

 

 

 

 

 

 

 

(아래 영문자 클릭해서 보세요!)


http://blog.daum.net/sionvoice/13756390

 

 

남태령 송덕비에 뭐라고 썼기에

 



옛날 과천 남태령에 송덕비가 하나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 비명(碑銘)이 ‘오늘 이 도둑놈을 보내노라.’였습니다.
 

 

조선조 지방 수령 중에 과천 현감은 서울이 가깝고
오가는 고관을 접촉하기 쉬었습니다.
 

그리고 세금징수가 많기 때문에 재물을 모아 뇌물을
상납하여 조정의 좋은 자리로 영전하는 자리였다고 합니다.
 

어느 때 과천 현감이 영전하여 서울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전들이 송덕비를 세우겠다며 비문을 어떻게 할까 문의하였죠.
 

그러자 현감이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여 아전들이
남태령에 송덕비를 세우고 현감에게 제막식을 하고
가시라고 했습니다.
 

현감이 잠시 행렬을 멈추고 포장을 벗겼습니다.
비문에는
 

“今 日 送 此 盜 (금일송차도)/ 오늘 이 도둑놈을 보내노라. ”
라고 쓰여 있었지요.
 

이를 보고 현감이 화를 내기는 커녕 껄껄 한번 웃고
그 옆에 한 줄 더 씁니다.
 

“明 日 來 他 賊 (명일래타적)/ 내일 다른 도둑놈이 올터인데.”

현감이 떠나자 아전이 기가막혀 또 한 줄을 보태 씁니다.
“此 盜 來 不 盡 (차도래부진)/ 도둑놈들만 끝없 이 오는구나.”


행인이 지나가다 이를 보고 또 한 줄을 더 보태어 씁니다.
“擧 世 皆 爲 盜 (거세개위도)/ 세상에 모두 도둑 놈뿐이구나."


 

- 웬지 요즘 국회의원 이야기 같아서 씁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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