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숭산 수덕사 오르는 길목
나는 오늘 넓고 평탄한 길을 놓아두고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샛길로 가고 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고 이러는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일주문으로 오르는 길을 몰라서 그러는것은 더욱더 아니다
내가 오늘 샛길로 가고있는 이유는 매일 다니던 길에서 벗어나 샛길인생이 한 번 되고 싶어서이다
하지만 샛길로 한 번 잘 못 들어서면 도중에 길을 잃어버리고 헤메이게 될지도 모른다
때문에 안전빵으로 가고 싶은 사람들은 결코 이 길을 따라와서는 안 된다
익숙치 못한 길은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익숙한 평탄대로를 버리고 슬며시 샛길로 접어들어 다시 만나게 되는 인생의 길 !
그곳에는 과연 또 다른 어떤 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
그 길이 비록 비좁고 굴곡이 심해도 오늘같이 눈이 오는 날은 한 번쯤 빠져 들고 싶은 날이다
샛길인생 대가들의 신화가 있는 이곳 덕숭산 수덕사에서...
덕숭산 수덕사 일주문
수덕사 덕숭산 자락에는 아직도 한국 근대 선승의 양대산맥이었던 경허, 만공선사의 흔적이 남아있고
또 숭산스님이나 "청춘을 불사르고의 주인공이었던 일엽스님같은 분들의 체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대웅전 왼쪽 계곡, 1천2백개의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한국불교의 자존심이었던 능인선원(정혜사)이
나온다. 능인선원은 동안거나 하안거철이면 많은 납자들이 찾아오는데 1900년대 당시 만공스님은
그곳에서 선원장이 되어 수많은 납자들을 배출했다
능인선원(정혜사) 담장 아래쪽으로는 일제시대때 멸종되어가던 조선불교의 법통을 끝까지 지켜왔던
송만공스님의 만공탑과 만공스님이 깍아 세운 미륵불이 있다. 그리고 만공스님이 손수 지었다는
조촐한 암자인 금선대도 있는데 그 암자는 만공스님이 입적(1946년, 세수 75세 법랍 62년)할때까지
기거했던 곳이다
송만공스님의 스승인 경허선사는 시를 잘 ?고 만공스님은 돌을 잘 깍았다
때문에 능인선원(정혜사)과 금선대 주위에는 만공스님이 직접 깍아세운 미륵불이나 만공탑 등이 있다
덕숭산 수덕사 일주문
이곳 수덕사에는 경허, 송만공의 일화말고도 여승이었던 김일엽의 일화도 전해내려온다
김일엽은 33세 되던 해인 1928년에 출가하여 38세되던 1933년 견성암(지금의 환희대)에서
만공스님을 계사로 머리를 깍았다. 33세에 출가는 했지만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시작한 시기는
38세때의 일이다
요즘 38세라고 하면 새 인생을 시작해도 될 나이겠지만 당시에 38세라면 할머니로 불렸을지도
모르는 나이다. 여튼 당시의 상황에선 일엽스님의 출가는 아주 늦은 시기였다
1962년 초판 발행본, 김일엽 스님의 "청춘을 불사르고"
일엽스님은 1896년생으로 본명은 김원주(金元周)
평안남도 용강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일엽은 조실부모한 후 23세에 이화여전을 졸업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24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영화학교에 다니다 이내 귀국
잡지 '新女子'를 창간하고 시인으로서 신문화운동, 신여성 운동에 적극 참여 하였다
- 이상 1962년 "청춘을 불사르고" 초판 발행된 일엽스님 책자에서 옮겨온 글 -
신여성으로 불렸던 김일엽은 당시 사회적 국민윤리에 도발하는 대담한 글과 처신으로 세간사람들을
화들짝 놀라게 했었다. 당시 일엽은 구시대의 낡은 관습에서 억압받고 주눅들었던 여성들을 대변하여
투철한 자기정신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여성이다
그런 치열한 정신으로 구시대의 낡은 관습의 벽을 허물고자 안간힘을 다 하였으나
여자라는 인간적인 한계와 당시의 완고했던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고뇌할수 밖에 없었다
활화산처럼 뜨겁게 타오르던 정열이 다 소진되어 허탈해 하고 있을때 수덕사의 만공선사라고 하는
선지식을 만나게 되었고 만공선사로부터 영원히 꺼지지 않고 사는 큰 가르침을 얻게되어
불가에 입문하게 된다
1928년 김일엽(당시33세)의 출가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당시의 사람들은 적지않은 충격에 휩쌓였고
그때부터 그는 영원히 사는 길을 찾아...라는 제목의 수상록을 써서 세상에 보냈다
일엽스님이 1962년에 발간한 '청춘을 불사르고'란 책의 서두
이 책은 당시 김일엽의 대표적 저서이자 그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초판발행 원본이다
청춘을 불 사르지 못하면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청춘을 얻을 길이 없다는 일엽스님의 이야기는
오늘날 구도의 길을 가고 있는 구도자들의 가슴에도 불을 지르고 있다
"청춘을 불사르고" 란 책자의 한 내용
땅 끝 하늘가에 임자욱 그 어덴가
자욱조차 스러진데 눈설은 존재들이 무상을 알리지만
그지없이 아쉬움은 가신님 뒷모습을
피엉긴 가슴에서 또다시 뒤져내서
입술은 떨게 되고 눈물은 그 임인양
떠는 입에 대어드네
- 피엉긴 가슴을 안고 사는 R씨에게 -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던 불같은 정열을 토해내고 난 뒤에 찾아오는 허망함을 이렇게 노래했던
33세의 일엽은 38세가 되어서야 수덕사 만공스님을 만나 견성암(見性菴)에서 머리를 깍았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이 불가에 입문하게 된것도
예사롭지 않는데 두 번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자유분방한 연애론을 주장하면서 죽음을 불사하는
불같은 사랑을 했다는것은 당시의 사람들을 충격속으로 몰아넣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김일엽은 당시 여자로서 겪어야 하는 험난한 길을 잘 견디어 내고
뼈를 깍는 고통속에서도 끝까지 수도승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냈다
수덕사 일주문옆 수덕여관 안내문
일주문을 들어서자 마자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것은 수덕여관 안내문판이었다
수덕여관은 일주문 바로 왼편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을 지날때면 고암 이응로 화백 말고도
수덕사에 사연을 두고 있었던 두 여인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곤 한다
한 여인은 조금전에 이야기한 '청춘을 불사르고'의 저자 김일엽이고
또 한 여인은 수덕여관에 머물렀던 신여성 여류화가 나혜석이다
수덕사의 견성암(지금의 환희대)이 김일엽의 신화가 탄생된 곳이라면
수덕여관은 한국 최초의 여류서양화가 나혜석과 고암 이응로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혜석과 김일엽은 1896년생으로 같은 시대에 태어났고 또 김일엽이 출가했을 당시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이혼의 상흔를 달래고 있었던 시기였다. 나혜석은 친구인 김일엽을 따라 수덕사에 입산은
했지만 산중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산문을 뛰쳐 나갔다가 어느 양로원에 들어간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소식이 잠잠하다가 결국 어느 무연고 병동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위하면 서울역 부근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고도 하는데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

덕숭산 수덕여관
수덕여관은 허물어져 가던 예전의 재목들을 걷어내고 새롭게 조성했는데
예전의 모습과 거의 똑같이 복원되어 있었다
이곳이 바로 고암 이응로 화백이 1944년에 구입하여 1959년 프랑스로 가기 전까지 작품 활동을 했다는
곳이다. 그리고 여류화가 나혜석은 이응로 화백이 이 여관을 구입하기 전부터 잠시 머물다 간 곳으로
알려졌다
작품활동을 하려고 머물다 간 것이 아니라 당시 수덕사로 출가한 친구인 김일엽을 찾아 들어왔던
것이고 또 이혼의 상흔을 달래며 수년간 머물렀다
1896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난 김일엽은 이화여전에서 공부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신여성이
었고 그도 나혜석과 같이 자유분방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33세때인 1928년에 불가에 들었다
그후, 1933년 만공스님을 만나 38세의 나이로
수덕사의 견성암(지금의 환희대)에서 머리를 깍고 여승이 되었다
덕숭산 수덕여관
당시 여승이 된 친구 일엽을 찾아온 신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은 일본 유학후 부유한 집안의 남편과
세계여행을 떠났다. 그후 파리에 머물며 그림공부를 하던 중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파경을 맞았다
이후 수도승이 되려고 수덕사를 찾았으나 만공선사로부터 중이 될 재목이 되지 못한다하여
허락을 얻지 못하고 일주문옆 수덕여관에서 수년간 머물렀다
고암 이응로 화백과 덕숭산 수덕여관
당시 고암 이응로 화백이 새겨 넣었다는 문자체의 암각화
사물의 성함과 쇠퇴함을 추상화로 표현한 작품
당시 고암 이응로 화백이 새겨 넣었다는 또 하나의 암각화 (수덕여관 우물터 옆)
당시 고암 이응로 화백이 사용했다는 우물터
새롭게 복원된 덕숭산 수덕여관
예전의 재목을 걷어내고 새롭게 복원한 수덕여관
눈 덮인 덕숭산 수덕여관
수덕여관 이응로 화백이 쓰던 방 - 왼쪽 불이 켜져 있는 곳
당시 청년화가였던 고암 이응로 화백은 선배화가를 만나기 위해 수덕여관을 드나들던
나혜석과도 우정을 쌓았다. 이응로 화백은 1904년생이니 나혜석 보다는 8년 후배였던것이다
그후, 이응로 화백은 해방이 되기 바로전 해인 1944년에 이 수덕여관을 구입하여 이곳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응로 화백은 본 부인 박귀희를 두고 젊은 후배화가와 파리로 유학을 떠나
게 된다(이 당시는 수덕사에 일엽스님의 계사였던 만공스님이 생존해 있던 시기였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이응로 화백은 65세가 되던해인 1969년에 동백림 사건에 휘말려
2년간 교도소 수감생활 하게 되었다. 그때 본 부인 박귀희는 감옥에서 고생하는 남편의
모든 뒷 바라지를 해 주었다
하지만 이응로 화백은 또 다시 파리로 떠났는데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내인 박귀희는 이제나 저제나 남편 오기를 학수고대하다 그만 세상을 떠났다
여튼 이곳 수덕여관은 이응로 화백이 구입하기 전 부터 나혜석이 친구인 일엽을 찾아와
몇 년간 머물렀다 간곳이기도 한데 당시 일엽의 눈으로 봤던 나혜석은 누구였을까 ?
1980년 문학창조사에서 발행한 "아껴 무엇하리 이 청춘을 " 이란 에세이집에 보면 김일엽이
나혜석에 대하여 이야기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적혀 있다.
16절지로 약 7페이지 분량 정도 되는데 그중 몇 부분만 여기에 옮겨본다
"아껴 무엇하리 이 청춘을" 이란 책에 실려있는 나혜석 이야기
나씨는 자신보다 한 살 아래인 미소년의 미대생 최승구(당년 19세)와 지극히 열렬한 사랑에 빠졌지만
그 미소년은 폐결핵으로 요절 했다. 울부짓던 나씨는 타는 가슴을 견딜 수가 없었던지 자신을 순정적
으로 따르던 제대(현 서울대) 재학중인 김우영이라는 청년과 약혼까지 하게 되었다
약혼 후에도 나씨는 이광수(李光洙)란 천재 청년도 사귀었던 것이다. 이광수는 나씨와 친한 허영숙이
라는 재색을 겸한 의과대학생도 사랑하였다. 아마 이왕 사귄 나씨도 거절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하 생략...
눈 덮인 덕숭산 수덕여관
밤이 이슥한 시간의 덕숭산 수덕여관
덕숭산 수덕여관
밤이 이슥한 시간의 수덕여관
밤이 이슥한 시간의 덕숭산 수덕사 일주문
수덕사로 가는 길은 1천4백년 전인 백제 무왕시절에도 있었다
아니...그 이전에도 여기에 샛길은 있었다
사람들이 제각기 몸에 익숙한 길에 모여들어 저마다의 몫을 다투고 있을때 슬그머니 세상의 뒤안길로
돌아섰던 사람들...조선불교의 자존심 경허선사, 만공선사, 청춘을 불사르고의 주인공 김일엽 !
그들은 넓고 평탄한 길을 버리고 바깥세상과 단절된 이곳에서 평생을 보냈다
그리고 덕숭산 수덕사의 신화가 되었다
또 다른 샛길 인생을 살아왔던 한국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 그리고 고암 이응로 !
그들도 덕숭산 수덕여관의 전설이 되었다
먼 옛날 그렇게 이곳으로 길을 떠나왔던 사람들이 있었다
몸에 익숙한 평탄한 길을 버리고 기약도 없는 샛길로 접어들었던 사람들 !
후세의 사람들은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비좁은 샛길을 선택해서 길을 떠났던 사람들이라 믿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세상의 길들이 어찌 그 길 밖에 없었냐고 묻고도 싶었지만
이미 세상의 모든 길을 버렸는데 또 어떤 길들이 그 앞을 가로 막을수 있으랴 !
이제 그들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가고 세월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지만
덕숭산 골짜기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때마다
수덕사의 마른나무가지들은 잉 ~ 잉 ~ 속절없는 소리를 낸다
김영동 - 침묵 대답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