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탄과 2탄에 많은 호응이 있어서 제3탄을 보냅니다.
1탄과 2탄 보다는 좀더 긴 동영상이니
시간을 느긋히 잡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전회의 내용보다 더 진지하고 유익한 새로운 것들이 많습니다.
1시긴 50분 짜리이니 날 잡아서 보시기 바랍니다.
백만불짜리 강연입니다.
특강 동영상 때문에 올리는 자료입니다.
나윤선의 이 음악이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한 번 시작하면 푹 빠지게 만드는 기막힌 백 만불 짜리 강연을
후편을 먼저 올립니다.
이 다음에 전 편을 올리겠습니다. 보시면 왜 그러는지 알게 될 것 입니다.
밑에 있는 글들을 읽기 귀찮으시면 제일밑에 강연을 클릭하고 들으세요.
참으로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세계를 흑암에서 건져내는 역사의
주역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빵이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라고 설파한 이승만 박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농민에게 토지를 준 자 입니다.
1954년 7월 28일 미 의회의 40분 연설에서 무려 33번의 기립박수를 받은
기막힌 달변가이신 이승만 박사의 "기독교적인 면"에 한 번 빠져보세요.
요새 보기드문 이 호 목사님의 기막힌 특강을 들으시고
근대 역사공부를 하시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이 번에 기막힌 미의회 영어 연설을 하신 박 대통령께서도
40번 박수에
起立박수 6차례가 있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씨밀래).
이승만 박사의 기독교적인 면
오늘의 주제
이승만 박사의 기독교적인 면
1946년 제1차 미소공위. 왼쪽부터 이승만,김구,스티코프,안재홍
귀국과 선교 활동 (1910 ~ 1913)[편집]
1910년의 이승만
1910년 한국으로 돌아가 YMCA에서 교사로서,
그리고 이어 YMCA 청년부 간사로 취임하여 기독교를 선교하였는데[10
감리교파 선교사로서 생활을 하였다. 또한 당시 들어온 신문화에 대해 긍정적이라서
"나라가 없어진 것은 슬프지만 왕, 양반, 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912년 4월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국제감리교 회의에 참석하였다.[24]
1913년 그는 귀국을 시도했으나 아버지 이경선으로부터
귀국하지 말고 미국에 체류하라는 편지 서신을 받고 귀국을 단념한다.
1913년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이승만은 옥중 동지인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건너갔다.
1913년 2월 3일 이승만은 박용만과 함께 하와이에 정착했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한성감옥에서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둘 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25]
이승만은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였고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어 한인기독학원(KIC)의 원장도 겸하였다.
뒤에 학교 이름도 '한인기독학원'에서
'한인중앙학원'(韓人中央學院)으로 재단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5]
위의 음악을 안 끄셔도 되나 강연이 너무 좋아 그냥 끄시고
이 백만불짜리 강연을 들으시고 감동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여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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