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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대한민국은 왜 鄭道傳에 열광하는가

까까마까 2014. 3. 17. 07:29

 

 

 

 

 

 

 

 

2014 대한민국은

 

 

 

鄭道傳에 열광하는가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현종 10년(1669년) 1월 27일 태조 이성계의 계비이자 세자 방석의 친모인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는 조선 건국의 기틀을 다진 정도전을 두고

"간신 정도전 등이 위험한 말로 선동하여 두 왕자를 요절하게 만들었으니

간신의 죄를 어찌 다 벌할 수 있겠느냐"고 비난했다.

 

 

조선 5대 왕인 문종은

즉위 첫해인 1451년 11월 1일

억울하게 죽은 고려 왕씨들의 제사를 지낼 후손을 찾을 것을 명하면서

"개국 초 왕씨들을 참혹하게 대우한 일은 진실로 태조의 본의가 아니고

모신(謀臣)들이 한 바이다. 모신은 바로 정도전의 무리"라고 했다.

삼봉 정도전은 1392년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조선의 토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1398년) 때

역적의 죄를 쓴 채 살해됐으며 사후 467년이 지난 고종 2년(1865년)에야

공신 칭호를 다시 받아 명예를 회복한다.

왕조의 설계자로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조선조 내내 역적과 간신의 대명사로 비난받아야만 했던 삼봉.

그런 그의 삶과 사상이 지금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우선 연초부터 방영되고 있는 KBS 주말극 '정도전'의 인기가

회를 거듭할수록 높아지고 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정통 사극을 표방했는데도

시청률이 14%대를 웃돌면서 같은 시간대 1위까지 넘보고 있다.

중장년층은 물론 퓨전 사극에 길들여진 청소년들까지 TV 앞으로 끌어모으고 있다.
 

 

 

 

 

삼봉집`

 

 

출판계도 '정도전 바람'으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올해 들어서만 김탁환의 소설 '혁명'(민음사)을 비롯해

이덕일의 '정도전과 그의 시대'(옥당), 조유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휴머니스트),

박봉규의 '광인 정도전'(아이콘북스) 등 그와 관련한 책이 서점가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시점에서 왜 정도전인가. 삼봉은 한 시대를 풍미한 혁명아였지만 그 출신은 미천했다.

 

집안은 대대로 고향 영주에서 향리 벼슬을 지냈다.

심지어 실록에는 "승려 김진이 종의 아내와 간통해 도전의 외조모를 낳았다"고 적혀 있다.

종의 자식은 천민이니 곧 그의 어머니 우씨 부인 역시 천민인 셈이다.

고려 땐 서얼 차별이 없어 과거에 나갈 수 있었지만

"천한 곳에서 몸을 일으켜 높은 벼슬에 올랐다"는 비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면서 그를 괴롭혔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

고려 조정의 친원 외교 노선을 반대하다가 당시 실권자 이인임의 미움을 사

3년 유배 생활을 포함해 10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다.

삼봉은 유배지에서 귀족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반노비 신세로 전락한 민초들을 접한다.

그들의 처참한 삶을 통해 '민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공맹의 가르침을

피부로 실감하고 정치란 벼슬아치들의 입신양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농사 짓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가슴 깊이 깨우친다.

 

 

'조선경국전' 서문에서 그는 "단 한 번이라도 임금이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그들은 곧 임금을 버릴 것이다. 힘으로 겁줄 수 없고, 지혜로서 속일 수 없다"고 가감 없이 표현했다.

나라 안의 모든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해야 한다는 시대를 초월한 토지 사상도 구상한다.

권세가들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구 체제 아래에서는 개혁이 불가능했다.

1383년 42세의 삼봉은 오랜 유랑을 끝마치고 마침내 혈혈단신으로

군벌로 성장한 이성계를 찾아가면서 역성혁명에 온몸을 불사른다.

개국 후 죽기까지 6년의 짧은 기간 이룩한 그의 업적은 실로 놀랍다.

 

 

조선시대 헌법에 해당하는 '조선경국전'과 정치구조ㆍ관료체계를 정리한

'경제문감'을 통해 국가 통치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불씨잡변'을 지어 불교를 비판하고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는다.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이씨 왕조 개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려사'도 편찬했다.

한양 천도를 책임지면서 궁궐과 종묘의 위치, 전각의 이름까지 직접 고안했고

서울을 5부 52방으로 개편했는데 오늘날 많은 행정구역과 그 명칭이 이로부터 유래한다.

 

 

'진법' '오행진출기도' '강무도' 등 다수의 병법 이론서를 펴냈고

종묘에 사용된 예식이나 궁중음악도 그의 손을 거쳤다.

과전법을 실시해 토지제도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가 꿈꾸던 정치체제는 재상국가였다.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왕의 자리는 줄지언정 나라를 넘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실록에 따르면 그는 공공연하게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고조를 쓴 것"이라고 얘기하고 다녔다.

왕은 절대권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유능한 재상을 선출하고

이들이 합리적으로 정사를 결정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을 이씨들의 나라로 만들려는 이방원과는 근원적으로 함께할 수 없었다.
 

 

권오창 화백이 그린 정도전 표준영정.

 

 

 

 

 

 

정도전은 사병혁파를 통해 중앙집권체제를 세우려 했다.

고토인 요동 수복을 말년에 필생의 사업으로 삼고 해산된 사병을 훈련시켰다.

이 과정에서 훈련에 소극적인 왕자들에게 태형을 가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는다.

왕이 백성 위에 군림했던 조선에서 백성의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그는 위험천만한 인물이었다.

최근 정도전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데 대해 사가들은 여말선초 격동의 시대와

절묘하게 오버랩되는 오늘날 혼란스러운 정치ㆍ사회 현실에 주목한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우경화로 국제 정세가 예측 불허의 혼란을 겪고 있고,

국내적으로도 청년실업과 양극화 문제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현 상황은

원명교체기에 토지제도가 극도로 문란해진 여말과 매우 흡사하다"며

"그런데도 정치권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오히려 네 탓 공방만 하면서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정도전은 법ㆍ제도에서 종교, 국방, 도읍지, 조세, 교육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이면서 이론에만 밝은 경세가가 아니라

현장을 아는 실천가였다. 더욱이 그는 시대를 뛰어넘어 백성의 귀중함을 알았고,

국왕과 관료는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던 사람이다.

 

 

도올 김용옥은 '정도전의 건국철학'이라는 책에서 "이념의 설계를 완성했고

그 설계를 구체적 현실로서 실현할 수 있는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며

"그는 좌절된 몽상가가 아니라 치열한 현실의 승자"라고 했다.

이어 그는 "위대한 정치 지도자를 바라는 우리의 갈망에 부합하는 인물이며

우리 역사에서 그를 뛰어넘는 인물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답답한 현실에서 우리 국민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꿈꿨고 실천했으며,

이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정도전과 같은 선구적 리더의 등장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 단양·종로구청엔 '三峰'의 향기가…
 

 

충북 단양의 도담삼봉

 

 

 

 

정도전(1342~1398)은 본관이 봉화다.

선향이 경북 영주지만 태어난 곳은 도담삼봉으로 유명한 충북 단양이다.

단양은 외가가 있던 곳이다. 그의 호 삼봉(三峰)은 도담삼봉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1388년 '삼봉에 올라'라는 시도 남겼다.

 

일찌감치 개경으로 올라온 그는 19세에 성균시, 21세에 진사시에 합격해 벼슬을 시작했다.

조선 개국 후 정도전이 살던 한양 집은 수진방에 있었는데

현재의 종로구청 자리다. 실제 종로구청 정문에는

'정도전 집터'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는 심효생 등과 송현에 있는 남은의 첩 집에 머물다가 이방원 일당에 의해 살해됐다.

종로구 수송동 옛 한국일보 자리다.

 

정도전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둘째 유와 셋째 영은 그와 함께 피살되고 넷째 담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맏아들 진은 한양을 떠나 있어 멸문지화는 면했다.

정도전은 역적의 멍에를 벗지 못했지만

아들은 태종 사망 후 벼슬이 형조판서에까지 올랐으며

증손자는 세조 때 우의정을 지냈다.

 

 

당시 정도전의 용모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일부 남아 있다. 권

근은 '삼봉 선생 진찬'에서 "얼굴이 윤택하다"고 썼고

태조실록은 "배가 불룩하다"고 묘사했다.

비만형 체질임을 짐작할 수 있다.

초상화 전문 작가인 권오창 화백의 국가표준영정(1994년 지정)은

후손들의 얼굴과 골격 특징을 참고해 그려졌다.




 

'고려 충신'이라 알려진 정몽주, 사실은...


 

 

▲ 드라마 <정도전>의 정몽주(임호 분).

ⓒ KBS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가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유명한, 정몽주의 단심가다. 흔히, 정몽주가 충신이었다는 증거로 제시되는 시조다.



정몽주 떠받든 조선왕조, 뭔가 이상하다

 

 

 

 

▲ 서울 양화대교 북단에 있는 정몽주 동상.

ⓒ 김종성



정몽주는 정도전의 선배 겸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결과적으로, 선배 겸 친구보다는 라이벌로 끝났다.

정몽주는 고려 멸망 직전에 정도전을 죽이려다 실패했다.

그런 정몽주를 띄우는 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정도전을 욕보이는 행위였다.

'조선을 거부한 정몽주'를 통해

'조선을 만든 정도전'을 욕보이는 행위는

정도전에 대한 이방원의 감정이 그만큼 편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권근이 이방원에 '정몽주 띄우기'를 제안한 이유

이방원이 정몽주를 띄운 데는 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방원이 집권할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성계는 우왕·창왕·공양왕을 연달아 갈아치우고 왕이 됐다.

또 이방원 자신도 정도전과 이성계를 몰아내고 왕이 됐다.

이방원은 이런 하극상 풍조에 종지부를 찍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면 충신의 대명사를 찾아내서 사회적으로 띄울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성계의 열렬한 동지였지만 막판에

'고려왕조 사수'를 외치다 죽은 정몽주는 고려왕조 입장에서는 충신이었다.

그런 정몽주를 띄우는 것은 충효 논리를 확산시키는 데 유리했다.

조선왕조의 적인 정몽주를 띄우는 것은 이방원의 광폭 정치를 과시하는 데도 유리했다. 
 

 

▲ 정몽주의 단심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의 여운형 생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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