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형제의 나라 터키
터키가 형제국인 역사를 아십니까?
'터키'라는 국가를 말하면 우리는 이스탄불, 지중해의 나라
형제의 나라 등 여러 수식어를 떠올리지만
정작 우리나라와 터키가 왜 '형제의 나라'라고 불리워지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아느냐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6.25 때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고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사실은
파병된 15,000명이 넘는 터키군 대부분이 자원병이였으며
그중 3,500명이 사망(미국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할 정도로
그들이 열심히 싸웠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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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했으며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요..
터키에 가면 관공서나 호텔의 국기대에
터키국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터키인들 역시 한국인에게 굉장히 우호적이며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대한민국 코리아를 Brother's country 라 합니다.
또, 한국말과 비슷한 단어가 많은 헝가리사람들 역시
한국이랑 헝가리랑 sister다 라는얘기를 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여기 한 라디오방송 아침 에서 나온 이야기를 잠시 참고해 보도록 하지요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투르크' 라고 부른다.
우리가 코리아를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것처럼.
역사를 배웠다면 과거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돌궐'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을 것이다.
투르크는 돌궐의 다른 발음이며
같은 우랄알타이계통이었던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가깝게 지냈는데돌궐이 위구르에 멸망한 후
남아있던 이들이 서방으로 이동하여
결국 후에오스만투르크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원래, 나라와 나라 사이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지만
돌궐과 고구려는 계속 우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지금의 터키에 자리잡은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들을 여전히
그리고 당연히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즉,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형제의 관계였던 것이다.
6.25 때부터가 아니고...
그렇다면 의문점 하나. 우리는 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리고 터키인들은 왜 아직도 우리를 형제의 나라 라고 부를까?
답은 간단하다. 역사교과서의 차이다.
우리나라의 중,??역사교과서는 '돌궐'이란 나라에 대해
단지 몇 줄만 할애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돌궐이 이동해 터키가 됐다느니 훈족이 이동해
헝가리가 됐다느니 하는 얘기는 전무하다.
터키는 다르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을 경험했던 터키는 그들의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역사과목의 비중이
아주 높은편이며 돌궐시절의 고구려라는 우방국에 대한 설명 역시
아주 상세하다. 형제의 나라였다는 설명과 함께.
그래서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한국을 사랑한다.
설령 한국이 그들을 몰라 줄지라도 실제로 터키인들은
한국인들 역시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인들도 터키를 형제의 나라 라 칭하며
그들을 사랑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1988년서울올림픽 때 터키의 한 고위층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했다.
자신을 터키인이라 소개하면 한국인들에게서 큰 환영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데 대해 놀란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터키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돌아온 답은 대부분 '아니오'였다. 충격을 받고 터키로 돌아간
그는 자국신문에 이런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한다.
'이제.. 짝사랑은 그만합시다..'
이런 어색한 기류가 급반전된 계기는 바로 2002 월드컵이었다.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 터키를 응원하자'라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을 타고 여기저기 퍼져나갔고
터키 유학생들이 터키인들의 따뜻한 한국사랑을 소개하면서
터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증폭되게 되었다.
6.25 참전과 올림픽 등에서 나타난 그들의 한국사랑을 알게 된
한국인들은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터키의 홈구장과 홈팬들이 되어
열정적! 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하이라이트는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자국에서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 많은 터키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한다.
경기는 한국선수들과 터키선수들의 살가운 어깨동무로 끝이 났고
터키인들은 승리보다도 한국인들의 터키사랑에 더욱 감동했으며
그렇게.. 한국과 터키의 '형제애'는 더욱 굳건해졌다.
우리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터키가 형제의 나라가 된 궁극적인 이유를 모르면 KBS의
어느 아나운서가 패널이었던 터키인에게 '아우님'이라 불렀던
어리석은 짓도 가능한 것이다.
형제는 형과 동생을 따지자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 형제는 곧 친구며 우방이니까.
<역사적 배경>
유럽으로 남진하려하는 러시아의 힘을 얻어 루마니아와 세르비아가
독립을 하게 되고 오스만터키의 아르메니아영토 대부분을 러시아가
차지하는 셈이 되자 이에 분노한 투르크인들이 러시아와 붙어먹은
아르메인들을 표적으로 인종청소라는 대학살을 감행한거죠.
1차대학살 20년 후 또 다시 오스만터키정부의 도움을 받은
투르크이슬람교도들은 아르메니아 5만명에 대학살을 자행합니다.
2차대학살
게다가 정는 학살된 아르메니아인외 175만명을 추가로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로 추방하고 그 과정에 60만명이 사막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1894년~1915년까지 2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은
겨우 30만명만이 살아 남게 됩니다.)
그후 1912년발칸전쟁 때
몬테니그로, 불가리아, 그리스가 오스만! 터키에서 독립할 때도
알게모르게 러시아가 개입하여 아르메니아인을 도와줍니다.
따라서 러시아가 북한을 지원하기 때문에 당연히 터키는
그반대쪽인 남한에만 병력을 파견한거지요
물론 혹자는 당시 터키가 미국과의 우방적 연계로 말미암은
국제적 이득을 노린 선택일 뿐이였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역사의 흐름이라는 큰 범주에서 바라본다면
터키가 2차세계대전 때 우리의 동맹국 중의 하나였던 이유가
필연적으로 러시아와 적대관계일 수 밖에 없는 과거사 때문
이였다고 보는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형제의 나라
한국의 경제성장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자부심을 갖는 나라
2002년월드컵터키 전이 있던 날 한국인에게는 식사비와 호텔비를
안 받던 나라. 월드컵 때 우리가 흔든 터키국기가 터키에
폭발적인 한국바람을 일으켜 그후 터키수출이 2003년 59%,
2004년 71%나 늘어났다는 KOTRA 통계가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지닌, 자기 나라로부터 수백만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의리와 애정을 받는 나라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대부분의 위인들은 평생독서를 즐겼으며
그들이 가장 즐겨읽었던 분야는 역사라고 합니다.
우린 세계사를 떠나 국사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관심이나 있을까요..
아니, 제대로 된 우리의 국사나 현대사를 과연 배운 적이나 있었나요..
내 나라 역사조차 바로알지 못하면서 남의 역사를 논했던
제 모습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고구려와 돌궐
대한민국과 터어키 우리가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
터키는 한국전쟁에서 약 1만 5천여명의 전투병을 파견해서
1천여명의 전사자와 2~3천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그리고 터키는 한국을 제외한 유엔군중 가장 용맹하게 싸웠고,
전투뿐 아니라 전후 한국을 위해 위급한 전시상황에서도
한국의 교육과 고아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들은 형제국가로서 역사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수천킬로 떨어진 터키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왜 그들이 우리를 형제라고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오바하는 것이라고 치부해야할까요?
아니면 우리가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북방민족인 흉노,돌궐,거란,여진 ... 우
리는 중국이 오랑캐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오랑캐 취급한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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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잘 모르지만 우리는 정이 있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3,4위전은 월드컵 사상 가장 아름다운 3,4위전으로 남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역사를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고조선 혹은 그 이전부터 북방민족과의 관계 등을 재정립하고
역사를 새로 배워야 할 것입니다.
고구려와 돌궐
『삼국사기』「고구려 영양왕 18년6」에는 "일찍이 수 양제가 계민의 장막에 행차했을 때
고구려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계민은 돌궐의 계민 가한을 뜻하는데,
돌궐은 투르크의 음역으로서 현재 터키의 전신이다.
이런 내용은 『수서』「양제본기 대업 3년」에도 실려 있는 사실이다.
이때 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돌아가 네 왕에게 마땅히 빨리 와서 조현하도록 하라"며,
그러지 않으면 계민과 함께 공격하겠다고 협박한다.
양제는 고구려와 투르크의 통교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영양왕은 제위 9년 말갈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선제공격하고,
양제의 부친 문제의 30만 대군을 전멸시킨 장본인이므로
양제의 입조 요구는 허세였다. 양제는 몇 년 후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되레 왕조가 망하고 말았다.
투르크는 13세기에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는데,
현재 터키의 국사 교과서는 고구려를 투르크의 형제국이라고 설명한다고 한다.
터키 이외에도 근방 여러 국가들에게서 한 동이족의 연맹이었던
여러 가지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의 시원역사를 들여다 볼 수록 세계 민족의 이동사를
알 수가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돌궐족 [ 突厥 , Turk , Tūjué ]
『단군세기』에는 흉노의 시조에 대한 언급뿐 아니라
투르크계인‘ 강거康居’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강거는 흉노의 서쪽에 자리 잡은 유목민으로서『 사기』에도 나온다.
가륵단군 8년에 강거가 반란을 일으키자 단군이 지백특에서 토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백특은 티베트를 가리킨다. 18세 동엄단군 때에는 지백특 사람이
공물을 바치러 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록은 고조선의 활동영역이
티베트 인근까지 뻗쳤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군세기』에 직접 나오지 않지만 투르크 계통의 민족으로서
동양 고대사와 서양 중세사에 큰 영향을 미친 민족이 있다.
바로 투르크족이다. 투르크족은 6세기 중반에 서쪽으로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 몽골과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강력한 유목제국을 세웠다. 이 제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스스로 족속 이름을‘
투르크(Turk)’라 하였는데, 중국 측 자료에는‘ 돌궐突厥’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터키Turkey라는 나라 이름도 바로 이 투르크에서 비롯한 것이다.
돌궐 제국은 기원 후 1세기 중반에 흉노가 붕괴된 뒤 실로 500년 만에
초원의 유목민을 통합하고 출현한 국가였다.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돌궐 제국은 553년에 토문土門이라는 이름의 수령이 몽골리아에 있던
몽골족 국가 유연柔然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이다.
돌궐은 몽골계인 유연의 예속 하에 있던 집단으로 알타이 지역에서
야금 일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돌궐족은 알타이 산지에서 나는 철광석을
제련하는 등 금속가공에 뛰어난 솜씨를 보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돌궐 제국의 건설자인 토문이 죽자 그 영토는 아들 무한과
아우 이스테미에게로 나뉘어졌다. 카간의 칭호를 쓴 아들은
몽골 지역을 차지하여 동돌궐이 되었고,‘ 야브구’라는 칭호를 사용한
이스테미의 나라는 서돌궐이 되었다. 서돌궐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위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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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567pixel, 세로 365pixel"
서돌궐은 곧 사산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헤프탈Hephtal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어서 동돌궐은 동쪽으로 거란족을 복속시키고, 북으로 바이칼호에 이르렀다.
남으로는 고비사막을 넘어 당시 북주·북제로 나뉘어 있던 북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당시 북주와 북제는 서로 대립하였기 때문에
북방의 돌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경쟁적으로 재물을 갖다 바쳤다.
그러나 중국에 당나라가 들어서자 상황은 급속히 바뀌기 시작하였다.
돌궐의 내분이 격화되고 자연재해가 겹쳤기 때문이다. 결국 당나라는
쇠약해진 돌궐, 초원의 대제국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다.
그러나 돌궐은 중국의 지배를 받은 지 반세기 만에 놀랍게도 제국을 부흥시켰다.
만리장성 주변 내몽골 지방에 살면서 당나라의 감시와 통제를 받던
부족민 사이에서 670년대 후반부터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나타나
돌궐 제국을 재건한 것이다. 이것이 제2 돌궐제국이다.
다시 일어난 돌궐 제국은 752년에 그 지배하에 있던 세 부족의 반란으로 무너졌다.
세 부족 가운데 하나인 위구르가 몽골의 모든 유목민을 제압하고
돌궐의 뒤를 이어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위구르족은 9세기 중반에
몽골고원에서 천재가 빈발한 때에 유목민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망하게 되었다.
돌궐의 후예들은 차츰 서진하여 이란 지역에 왕조(가즈나 왕조)를 세우기도 하고
11세기에는 동로마 제국으로 침투하여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세워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지배하였다. 13세기의 마지막해 1299년에는
오스만 투르크 왕조를 세우고 14세기 말에는 발칸반도까지 장악하였다.
환단고기 완역본 (상생출판) 297p
환단고기를 통해서 북방민족과 한민족의 역사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터키는 우리나라를 [피를 나눈 형제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터키는 언어학적으로 우리말과 같은 우랄알타이어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또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에 수나라에 대응하기 위해 터키의 선조인
돌궐민족과 우리민족인 고구려는 우방 관계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발해와 돌궐은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우방관계를 돈독히 하였습니다.
* 참고 : 돌궐 민족은 오늘날의 투르크 민족의 직계 조상입니다.
또한 투르크를 중국어로 표기하면 돌궐입니다.
이 후 투르크 민족은 서쪽 문명을 접함으로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같은 시기인 고려시대에 우리 민족은 몽고의 관습과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이때에 수 많은
투르크 민족들도 한반도에 정착하였습니다.
*참고 : 이때 몽골의 원나라에게 충성을 뜻하는 우리 민족의 왕에게
"충(忠)"자를 붙이게도 하였습니다.
충렬왕, 충선왕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조선시대에 우리 민족은
중국 외의 문물을 철저히 거부했으며,
투르크 민족은 이스라엘의 성지순례를 방해함으로 십자군 전쟁을 유발시키며
로마 제국의 후손인 비잔틴을 멸망시키는 등 강력한 힘을 과시한 시기로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과의 관계가 소원해졌습니다.
또한 이러한 연유로 인해 중앙아시아를 주무대로 하는
투르크 민족과의 교류도 단절되었습니다.
이후 두 민족이 가까워진 계기는 바로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입니다.
6.25전쟁이 두 민족의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중앙아시아를 지배했고,
터키 입장에서는 오스만 트루크 제국의 주무대였던 중앙아시아가
소련의 지배하에 신음하고 있음은 반공의 대열에 가담의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이때, 한반도는 북은 공산화, 남은 민주주의를 국시로 삼았으며,
곧이어 6.25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터키가 유엔이 참전 결정에 동참함으로 우리 민족과
오스만 트루크 민족간의 협적이 재개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터키의 한국사랑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먼저 터키는 5,000명의 계획을 세우고 한국전쟁에 지원병을 모집하였습니다.
이때 터키 국민들은 6.25전쟁을 "형제의 나라"의 전쟁이라고 하였으며,
계획보다 3배 많은 15,000명이 한국전쟁에 지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