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탄 입니다.
우리 일행은 이 통곡의 벽을 두 번 방문했습니다.
밑에 보이는 영상은 목요일 저녁에 방문을 한 것이고
그 외에 환하게 보이는 영상은 일요일날 아침식사후 곧바로 걸어서
아무도 없을 때 찍은 영상사진들 입니다.
그 날은 WALL TUNNEL까지 들어갔습니다.
목요일 저녁에는 모든사람들이 몰려와 기도하는 날이라
사진을 못 찍게 하는데 그 대신 뒷쪽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서 찍었습니다.
글은 "걸어서 이스라엘"의 김종철 작가님의 글을 많이 참조하였습니다.
통곡의 벽
THE WAILING WALL
오랫동안 '통곡의 벽' (the Wailing Wall)이라 불리고 있는 이 성벽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성전 서쪽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통곡의 벽에는 유대인의 역사가 그대로 나타나는 곳입니다.
사실 이 통곡의 벽은 원래 벽이 아니라 성전 이였습니다.
솔로몬왕이 아버지 다윗왕의 철저한 준비로
첫번째 이곳에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도착하니 이미 여러 사람들이 모여있더군요.
현재 남아있는 통곡의 벽은 이 제2 성전의 서쪽벽이라 알려져있습니다.
뿌리를 잃은 유대인들이 그나마 남아있는 성전의 서쪽 벽에 모여 통곡을 하였기에
통곡의 벽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오랜 숙원은 풀렸지만,
아직도 많은 유대인들은 이곳을 찾아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 이후 400년이 지나 바빌로니아의 침공으로 파괴 되었습니다.
그 이후 최고 14 m 의 길이와 400 t 이나 되는 돌을 비롯하여 평균
1 ~ 3 t 의 돌을 이용하여 쌓은 높이 16 m의 이 성벽은 헤롯 대왕 때의 것으로
그가 왕위에 오른 이후 건축이 시작되어 약 60여년 동안이나 걸려 지은 것입니다.
이때가 예수님의 시대 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보시며 우신 적도 있고 성전에서 장사하며
성전을 더럽게 하는 것과, 불법과 불의가 가득한것을 보시고
"돌 하나도 돌위에 남지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리들 가운에 많은 군인들이 한 가운대 몰려 노래도 부르고
한 편에서는 몸을 흔들고 성경을 읽고 벽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축제 분위기 였습니다.아마 성년식인 바르밋츠바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후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로마와 유대의 이스라엘간에 분쟁이 발생합니다.이유는 종교 문제였습니다.
로마는 다신교 국가라 모든 신을 포용하고
그들의 신의 하나로 생각하고 인정해 줍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오로지 야훼 이외에는 신이 없다고 했으며 그 때문에
자주 양국민 사이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던 중 종교세 문제와 더이상 이방인에 의해 굴욕을 받으며 살수 없다며
독립을 외치며 유대의 과격파가 들고 일어납니다.
사실 로마는 세금 문제만 해결되면 타 종교에 대해 그리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생각으로는 하나님께 가는 세금은 손댈 수 없는 것과
야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투철한 민족의식이 있었기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때 유대 지방에 파견되어 있던 로마군을 살해하고 유대의 독자적
국가를 성립시키고 독자적 화폐제도 까지 확립합니다. 그것이 AD 66년의 일입니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습니다.
로마는 이 사태를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집정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처리를 명합니다.
(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다음 황제로 등극합니다)
유대군은 곳곳에서 깨지고 밀려서 예루살램까지 쫒겨 들어갔고
성전에 들어가 농성을 하기로 합니다. 이때 예루살렘 공략의 주장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는 고민에 빠집니다.
피해를 감수하고 군대를 돌입시켜 과격파 잔당들만을 제거할 것이냐?
아니면 아예 유대의 반항정신을 뿌리 뽑을 것이냐? 로 말입니다.
이 날은 밑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된 터라
이 표지판을 앞부분만 보고 이곳에 왠 식당인가하고 의아해 하며
가이드가 분명 얘기했을텐데 나는 사진찍기 좋은자리 찾기위해
우리 일행을 미리떠나
무작정뛰어 올라가서 더 위를 바라보고 찍은 영상입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곳이 그 유명한
고아와 과부를 위한 자선단체란 것을 알았습니다.
통곡의 벽 옆 남쪽으로 나있는 길인데 가게들이 있고
통곡의 벽 밑 지하 동굴로 들어가는 곳은 이곳을 지나 들어갑니다.
오른쪽 귀퉁이에 칸막이 있는곳은 여자들만 들어가 기도하는 곳 인데
남자의 4분의1정도의 크기 입니다.
저항의 끝에 이스라엘은 망하고 이후 민족은 있으되
나라는 없는 상태로 2차 대전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 후 유대인들은 로마에 의해 노예로 끌려가고
이들은 절대 예루살램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파괴된 성전은 단지 약 60m의 벽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비잔틴 시대로 오면서 약간의 관용정책을 펴서
일년에 한번 예루살램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이때 잠깐 돌아왔던 유대 민족이 이 벽을 앞에 두고
과거를 생각하며 통곡했다고 해서 이 벽은
통곡의 벽으로 불리우는 것입니다.
비들기 한 마리가 조용한 곳에서 배회하고있는 것을 찍었습니다.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은 유대인들이 오랜만에 세운 하스모니아 왕조를 종식시키고,
총독을 두어 팔레스타인 땅을 다스렸습니다.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임명된 이가 바로 헤롯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영아대박해를 저지른 장본인)입니다.
헤롯은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태어난 반(半) 유대인이었습니다.
로마에 대해서는 충성을 다하고,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의 대대적인 증축을 통해 환심을 사려했습니다.
덕분에 당시 예루살렘은 정말 아름답고 대단한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헤롯성전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피통치지역인 예루살렘에 황제의 동상을 세우려했습니다.
우상숭배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로마 장군 티투스(=디도)는 유대인들의 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고 불태워버렸습니다.
이때 디도장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부숴버릴 수 있었던 로마의 힘을
후대에 보여주려고 조금 남겨둔 것이 바로 오늘날의 통곡의 벽입니다.
원래 이름은 ‘서쪽 벽’(The Western Wall)이지만
오늘날은 ‘통곡의 벽’(The Wailing Wall)으로 더 유명합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져내린 이후,
이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의 최대 성지가 되었습니다.
◈ 서기 70년 로마에 의해 파괴된 성전의 일부
성전이 파괴되고 불탄 자리에 로마제국은 제우스 신전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또다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통곡의 벽에 서 있는 방문객들은 항상 사람들에 에워싸인
예루살렘(Jerusalem)의 마지막 유적인 거대한 고대의 돌을 올려 보게 됩니다.
방문객 중 일부는 바르 미츠바(성년식)을 축하하고 다른 일부는 결혼 촬영을 하거나
벽 사이에 생긴 틈 사이에 진심에서 우러나는 기도 메모를 껴 넣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와 현재의 존재뿐만 아니라 수 세기 동안
세계에서 이 가장 성스러운 장소로 유대 민족을 이끈
수 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통곡의 벽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웅대한 건물 중 하나입니다.
이 통곡의 벽은 위대한 헤롯 왕이 성전의 1,555,000 평방 피트되는
대광장을 지지하기 위해 세운 4개의 벽 중의 하나였습니다.
나머지3개의 벽은 통곡의 벽 터널 내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원래는 지상으로는 90 피트, 지하로 60 피트 높이였습니다.
하지만 통곡의 벽이 유대 민족의 고귀한 유산이 된 것은 웅대한 건축 때문이 아닙니다.
제1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은 이 벽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했습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현재는 벽의 앞뒤 쪽에 이삭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에 의해 처음으로
유대 민족과 예루살렘이 연결된 모리아산, 성전산(Temple Mount)이 있습니다.
제물을 바치려 했던 바위 위에 17세기 말에 바위 돔(Dome of the Rock) 이 만들어졌으며
유대인 전통에서 세계의 주춧돌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윗 왕은 이 땅을 샀습니다.솔로몬의 제1성전은586 BCE에 바빌로니아인들이 파괴했고
헤롯 왕이 제2성전을 지었으나 통곡의 벽을 제외한 나머지가
70 CE에 로마인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이 때 탈무드에 나오는 현자 한 명이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이는 서쪽의 쉐키나(shekhinah)[성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결코 파괴되지 않은 통곡의 벽이다”
(바미드바르 라바(Bamidbar Rabah) 11:63)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무너진 성전위에 다시 성전을 세우지 않았지만
무슬림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그위에 모스크를 지었습니다.
바로 통곡의 벽이 있는 성전산위에 세워진 무슬림의 황금성전사원.
이 안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이슬람교에서는 이스마엘)을 바쳤다는 바위가 있고
이슬람교에서는 이 바위에서 마호메트가 승천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코텔 하마라비)
과거 요르단 령에 속했지만,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하였습니다.
그 너머로 보이는 황금빛
바위의 돔은 무하마드가 승천했다고 알려진 곳입니다.
통곡의 벽에서 유대인들의 통곡은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중 입니다.
주일날 오전에 조용할 때 찍은 사진입니다.
중세 때 이 곳에서 유대인이 성전의 파괴를 슬퍼하며 통곡했기 때문에 통곡의 벽이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습니다.전승에 의하면 성전 파괴를 기념일인 아브월 9일에
벽에서 반짝이는 이슬은 벽이 흘리는 눈물이라고 합니다.
출애급을 통해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여 잘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그곳에서 내쫓음으로서 오늘날 팔레스타인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묘사되어 있는 가나안 땅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내 거주가 금지됐습니다.
로마제국이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정한 동로마 시대에는 일년에 딱 하루, 즉
로마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아브(Av. 여덟번째 달 8일)에만 예루살렘 출입을 허용했습니다.
아브날이 되면, 유대인들은 파괴된 성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서쪽 기단 벽에 머리를 대고 통곡했습니다.
나라를 잃은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했습니다.
서쪽 벽은 유대인들의 통곡으로 늘 젖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점차 서쪽 벽은 통곡의 벽(Wailing Wall)으로 불리어갔습니다.
서쪽 벽은 예수가 마귀에게 세차례나 시험당한 성전산의 서쪽 450m의 벽으로
헤롯에 의해서 세워진 성벽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부분입니다.
오늘날 통곡의 벽은 두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입구에서 오른쪽(남쪽)은 여자들 구역,
왼쪽(북쪽)은 남자들이 기도하는 구역입니다.
남자 구역에 여자 구역보다 네배 이상 크다고합니다.
통곡의 벽에는 키파라는 꼬깔모자로 머리를 가린 유대인들이 토라(모세오경)를 읽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항상 볼 수 있다. 24시간 개방되어 있지만 매주 금요일 오후,
해가 저물면서 시작되는 안식일부터는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시간입니다.
◈ 서기 70년 로마에 의해 파괴된 성전의 일부
성전이 파괴되고 불탄 자리에 로마제국은 제우스 신전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또다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폭동마저 진압한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렸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내좇아버린 것입니다.
로마는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에는 유대교를 인정했던 관용 정책을 폐지하고
주피터 신전을 세웠습니다. 비잔틴 시대에는 기독교가 신전을 접수하여 관리하다가,
614년에는 페르시아가 신전을 파괴합니다.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이 636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언자 마호메트가 이 곳에서 승천하였다고 하여 황금사원을 지었습니다.
결국 통곡의 벽은 유대교의 성지인 동시에 이슬람교 성지가 되었습니다.
탈무드의 거두 SHLOMO GOREN씨
이날 키파를 쓰고 있는 유대인들이 많이 몰려와서 기도를 합니다.
키파가 클수록 종교적인 생활을 더 강하게 하는 유대인이라 보면 됩니다.
큰 키파에귀밑까지 단 갑을 단 것을 보면 신앙심이 대단한 분으로 봐도 됩니다.
안식일에는 사진 촬영도 금지됩니다. AD 70년 로마에 의해 멸망당할 때
"돌위에 돌하나 남지 않도록" 무너진 통곡의 벽 아래 부분은
당시 성전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통곡의 벽 돌틈에는 전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 뿐 만 아니라
순례객들도 소원이 적힌 쪽지를 벽의 돌 틈새에 끼워 두고 기도합니다.
한가지 간절한 소망은 들어준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 팔을 입을정도로 더운 날에 아주 더워보이는 표정
주전 37년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른 에돔 족속의 후손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성전 확장 공사를 시작합니다.
헤롯이 성전 확장 공사를 하는 중 가장 고난이도의 작업이 요구되었던 것은
지진으로부터 성전을 보호하는 것과, 산지 위쪽을 평탄 작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전 주변의 고르지 못한 산지의 계곡 사방에 돌을 쌓도록 명하였습니다.
돌을 쌓은 후에 굴곡진 빈 공간을 다시 돌을 쌓는 방법으로 헤롯은 성전산에
거대한 플라자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 주변 사방에 쌓여진 돌들은 벽이 되었습니다.
그 벽이 지금도 성전산에 남아 있습니다. 통곡의 벽 (서쪽벽) 역시 헤롯이 쌓아올린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에 비해 보잘것 없이 초라하였던 스룹바벨의 성전 (제 2차 성전)을 보며
과거의 영화로운 위대한 성전의 기억을 담고 있던 노인들은 그 기억을 눈물로 씻어내고.
통곡의 벽은 헤롯이 쌓아올린 돌들의 유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통곡의 벽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늘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이유는 솔로몬이 성전 봉헌 기도를 할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들 중 하나가
"내가 이 성전을 결코 떠나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무너졌으나, 그 성전을 지탱하던 통곡의 벽에 하나님의 임재가 늘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유대 전승에 따르면 성전산은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된 곳 아담이 살았던 곳입니다.
성서에 나오길 솔로몬의 재판으로 유명한 솔로몬왕이 예루살렘에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세웠다고 하는데 솔로몬 왕이 세웠다고 하는
제1 성전은 수차례 전쟁을 겪으며 파괴됬습니다
동쪽에 있는 곳
낮에 밑에서 위를 보고 찍은 사진입니다.(RAW FILE에서)
포로시대 이후 느헤미야 당시 제2 성전건축,
이후 약 3, 4백년 후 마카비 시대를 지나 헤롯왕으로 알려진
헤로데스 왕이 백성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 성전을 재건하여
제3 성전을 세우게 됩니다. (제2성전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위의 표지는 통곡의 벽 북쪽에 있는 SHLOMO씨가 후원하고있는 HOLY ASSEMBLY입니다.
이후 제3성전은 로마인과 유대인간의 갈등으로 벌어진 유대 전쟁당시
티투스장군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이후 예루살렘과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은 안식처를 잃고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이곳에 MARTIN LUTHER의 학교가 있나봅니다.
◈ 성전 파괴 이후 1900년 만에 서쪽 벽 되찾아
유대인들은 로마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고 불태워버린 날 밤 이후
예루살렘의 열쇠는 하늘이 갖고 있다고 여겨왔습니다. 성전이 불타버린 그날 밤,
망연자실한 랍비가 “이 (예루살렘의)열쇠는 당신이 간수하소서.”라며
예루살렘의 열쇠를 하늘을 향해 던져버렸다는 전승 때문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단 하루만 성역에서 기도하는 것을 허락 받았고,
이슬람이 팔레스타인 땅을 지배할 때는 이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가장 가까운 이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이후에도 서쪽 벽은 요르단이 차지했기에
유대인들은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해진 날에만 방문이 허가되었습니다.
1967년 6일 전쟁으로 히브린의 후예인 이스라엘은 서쪽 벽을 되찾았습니다.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을 공식적으로 되찾은 것은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약 1900년 만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의 최대 성지이자,
히브리 민족의 기쁨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통곡의 벽 앞쪽에는 큰 뜰이 건설되어
수천명의 순례 객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곳은 유대인의 최고의 기도처가되고 있어 많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러 모이는 곳입니다.
2천년 동안의 방랑생활 가운데서도 예루살렘에로의 귀향이라는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신앙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안식일이나 절기 때가 되면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기도하는 모습이 장관을 이룹니다. 종종 성년식 (Bar Mitzbah)을 행하는 춤추며 기도하는
소년과 그의 가족들의 모습도 지켜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여느 회당이나 마찬가지로 남녀가 각각 칸막이로 나누어진 구역에서 기도합니다
1967년 6일 전쟁때 요르단에게서 이곳을 탈환한 유대 군인들의 감격은 2천년 만에 예루살렘을
되찿은 유대인 전체의 감격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그들은
2천년 동안 예루살렘의 회복을 꿈꾸었으며, 2천년 동안 행하여 온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Next year in Jerusalem) 라는 기도가 이루어 진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바치려 하였던 곳입니다.
하란 땅으로 도망하던 야곱이 꿈에서 하나님을 만난 곳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솔로몬과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졌던 곳이기도합니다.
중세 때 이 곳에서 유대인이 성전의 파괴를 슬퍼하며 통곡했기 때문에
통곡의 벽이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습니다.
민족 전통의 유산이 숨쉬는 통곡의 벽이기에 유대인들에게 통곡의 벽은
그들의 심장과 같은 곳입니다. 1967년 6일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 특공대원들이
통곡의 벽에 기대서서 기도하는 장면은 얼마나 그들이 이 통곡의 벽을 사모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날 통곡의 벽에서는
바르 미쯔바 (계명의 아들, 유대 성인식) 의식이 진행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밤에 찍은 영상 입니다.
과거 유대인들은 헤롯을 미움을 뛰어넘어 증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헤롯이 건축한 그 서쪽벽 (통곡의 벽)에서
민족 애환의 역사의 숨결을 기록하는 것을 보노라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습니다.
주일날 낮에 찍은 영상입니다.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경전을 읽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고,
소원을 적은 종이를 바위틈새 사이에 끼워넣기도 하며,
바위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거나 눈물을 짓기도 하는데요.
지금도 유대인들들의 성지로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이곳에서는 유대인들의 기념일인 매주 금요일이면
이곳에서 기도를 하고 '예레미야 애가' 등을 부른답니다.
기도쪽지를 넣고있는 영상
우리일행들 입니다.한쪽은 JEWISH이고 한쪽은 ITALIANO입니다.
안식일에는 사진 촬영도 금지된다. AD 70년 로마에 의해 멸망당할 때
"돌위에 돌하나 남지 않도록" 무너진 통곡의 벽 아래 부분은
당시 성전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 통곡의 벽 돌틈에는 전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 뿐 만 아니라
순례객들도 소원이 적힌 쪽지를 벽의 돌 틈새에 끼워 두고 기도한다.
한가지 간절한 소망은 들어준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힘들 때 어디로 가서 마음의 위안을 털어놓으시나요?
그런 비밀의 장소가 한국 어딘가에 이곳처럼 기도하고 통곡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정문을 통해 들어오면 반들반들한 이 돌길 좌측에 통곡의 벽이 있고
우측에 자선단체 건물이 있습니다.
현재 통곡의 벽은 유대인의 성지이자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어있습니다.
지상에 나와 있는 부분은 윗부분이고, 아랫부분은 지하에 묻혀 있으니
가이드를 대동해서 지하도로 내려가보기 전에 다시 모여서 가이드 설명을 듣습니다.
<통곡의 벽 터널>
지하동굴로 들어가기 위하여 밖으로 나와 골목을 지나 들어갑니다.
너무 어두워 밝게 했습니다.
성전에 대한 모형도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제2성전(헤롯 대왕 시대)과 그이후
<통곡의 벽 터널>은
통곡의 벽 광장의 북쪽 부분에서부터 지하로 들어가
성벽 측면을 따라 이슬람구역 건물들 밑을 지나며,
Via Dolorosa Station I(십자가의 길 제1처) 쪽에 출구로 나가게 됩니다.
이슬람 시대까지의 유적들이 드러나 있습니다.
BC 2C의 하스모니안 때부터 AD 70년 로마군에 의해 성전이 파괴될 때까지에는
성전산의 서쪽 성벽은 예루살렘 시가지와 4개의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문 2개는 지면에서 또 다른 2개는 다리 위로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또 성벽을 따라 포장된 길이 있었고 그 길가로는 구조물 시설물들도 있었습니다.
비밀 통로(Secret Passage)
현재 Hagai st.(Al-Wad 골목)을 따라 지하에 있으며 길이가 70m에 달한다고.
<The Secret Passage 비밀통로>는 중세 때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현재 터널로 내려가는 입구입니다.
AD 70년 로마군이 무느뜨린 성전과 성벽의 돌들이 이곳에 쌓여 매립되었고,
그후 2천년 동안 그 위로 건축물들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지하 깊숙이에는 빈 공간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1996년 총 500m의 터널이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었고,
북쪽 출구를 만들 때 아랍인들이 극렬히 저항하기도 했다고.
Second Temple Period Staircase(제2성전 시기의 계단)
<비빌 통로> 주변은 아직 발굴을 계속 중이라고 합니다.
1996년 총 500m의 터널이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었고,
북쪽 출구를 만들 때 아랍인들이 극렬히 저항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윌슨의 다리(윌슨 아치) 북쪽으로 대형의 지하공간이 있습니다.
우리 일행들은 이런 동굴을 수도없이 다녔습니다.
이 벽면의 돌은 비행기 두대의 넓이를 지닌 한 덩어리로 된 돌인데
어떻게 이걸 옮겼는지는 미스테리라 합니다.
아래 보이는 줄위의 벽의 돌은 한덩어리 입니다.
이 돌의 무개는 600톤 가까이 되며 코끼리 200마리의 무개라고 합니다.
704 JUMBO JET두대의 넓이로 세계에서 옮긴 돌 중 6번째로 큰 단일암채라고 합니다.
돌벽에 있는 구멍들은 중세 때에 이 대형 홀을 저수조로 변경하면서
돌벽에 회를 붙이고 지탱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라 합니다.
Warren's Gate 성전 출입문(지상)
이 어둑컴컴한대서 열심을 다해 기도하는 순례자들이 보입니다.
바로 이곳 지상위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위해 여기 지하 물을 공급했다는 문구
동굴속에 새겨진 길 이름
현재 폐쇄된 이 지하 문은 '윌슨 아치' 북쪽 40m 지점,
제2 성전 시대에 지상골목에 있습니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성소 내 계약궤를 올려놓는 받
침석을 마주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가장 신성한 문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1876년 워런이 발굴했습니다
해롯의 원형 돌기둥 두개를 길을 만들 때 세웠는대
이 위에있는 광장의 길들을 따라 잘 받쳐주고 있다는 문구.
19C부터 영국 고고학자 Warren, Wilson이 제2성전의 유적을 찾기위해
이들 지하공간과 터널 일부를 발굴했지만 오토만제국에 의해 중단되었고,
1967년 6일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한 후 전체적으로 발굴하게 되었습니다.
CHARLES WARREN이 이곳을 제일먼저 발견했는데
예루살램에서 제일작은 POOL이라고 합니다.
이 POOL의 이름이"SMALL BIRD"라고합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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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stern Wall 8;13 각국의 대통령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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