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이들은 백로디, 백로. 인간이 아니야.”
머리 하얗게 센 조창원(趙昌源·80) 할아버지는
요즘 종일 그림을 그린다. 그림마다 어김없이 백로 두 마리가 등장한다.
백로는 수녀다. 45년 동안 소록도병원에서 봉사를 하다 지난해 11월 21일 고향
오스트리아로 떠난
마리안느·마가렛 수녀를 백로로 그리고 있다.
고향인 평양 사투리가 짙게 남아 있는 할아버지는
8년 동안 소록도병원장이었다.
육군 대령 군의관이었던 그는 5·16 군사정변 후 1961년 9월 소록도로 갔다.
이청준(李淸俊)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서 끝날 것 같지 않은 간척사업을 무섭게 몰아붙이던
조백헌 원장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와 수녀들의 인연은 특별하다. “내가 가보니까 가장 필요한 것이 영아원과
보육소더란 말이디.
아기들이 태어난 다음에 엄마랑 바로 떨어지면 한센병이 전염되지 않거든.
” 할아버지는 시설이 없어 아이들이 ‘천형(天刑)’을 물려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소록도 가던 그해 광주 대교구의 미국인 신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 조창원 할아버지는 마리안느?마가렛 두 수녀를 사람으로 그릴 수 없었다고 했다.
머리가 센‘할매’로 그리기엔 너무 천사같았기 때문이란다. /이진한기자 magnum91@chosun.com | |
수녀들이 섬에 들어온 첫날 깜짝 놀랐단다. “마리안느 수녀님은 키가 나만했어. 내가 1m78㎝인데
덩치도 좋았지.
마가렛 수녀님은 호리호리했고. 스물예닐곱 살 금발 수녀 두 명이 소록도에 오니까 섬이 난리가 났다.
생전 외국인을 본 적이 없었거든.” 수녀들이 소록도에 온 것이 지난 1962년 2월. 할아버지
그림 속에선
소록도 파란 하늘 무지개 너머로 백로 두 마리가 날아오는 것으로 표현됐다.
소록도 사람들이 정작 더 놀란 것은 수녀들의 외모가 아니었다. 도착한 다음날부터 환자들의
썩어가고 문드러진 팔과 다리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그것도 맨손으로.
“나도 명색이 의사(醫師)인데 너무 부끄러웠디. 그전까지 우리 병원 사람들은 마스크에
고무장갑 끼고,
고무장화 신고 완전 무장하고 나서야 환자들을 치료하곤 했거든….” 할아버지는 수녀들이
맨손으로 치료하는 것을
본 다음에도 병원 사람들의 치료방법은 바뀌지 않았다며 또 부끄러워했다. 할아버지
그림 속 백로 두 마리는
부리에 핀셋을 물고 문드러진 발가락에 약을 바른다. “그 건장한 마리안느 수녀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2000년에는 장암에 걸려서 오스트리아에 가서 장을 1m20이나 잘라 냈다는 거야.
6개월 동안 수술받고 나서는 소록도로 다시 돌아왔더란 말이디. 그게 어디 사람인가.”
지난해 11월 22일 수녀들은 한국을 떠나기 직전 할아버지에게 타이핑된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한국에서 같이 일하는 외국 친구들에게 가끔 저희가 충고해주는 말이 있는데, 그곳에서
제대로 일할 수가 없고
자신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줄 때는 본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자주 말해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말을 실천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리안느 올림. 마가렛 올림.’
수녀들이 한국을 떠난 직후 할아버지는 그이들을 기리는 유화 22점을 그려 왔다.
그림은 소록도에 조성될 ‘마리안느·마가렛 수녀 기념관’에 놓이게 된다.
기념관은 올해 5월 17일 소록도병원이 만들어진 지 90주년이 되는 날에 맞춰 문을 열 예정이다.
“소록도 역사가 90년인데, 그이들이 45년을 봉사했으니 섬 역사의 반을 보고 간 거거든.
다시 우리 땅에 그런 분들이 오실지 싶어.” 그림을 쓰다듬는 할아버지의 손이 계속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