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생기가 흐르는 공간, 영월의 조견당

까까마까 2014. 8. 8. 15:36

 

이제는 왠만한 고택은 다 둘러보았다 싶었는데

한도 끝도없이 보물이 나오는 군요.

 기막힌 고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여기 올려봅니다.

사진작가 백야의 "사진여행"과 "레이디 경향"에서

발췌한 것을 올리려 합니다. 글도 맛있고 사진도 수준급.

고급 사진기와 기막힌 사진기술의 진수를 맛 보세요.

 

 

 

 

 

 

 

 

 

 생기가 흐르는 공간, 조견당

 

 

영월의 여름은 싱그럽다.

푸르른 신록이 뿜어내는 맑고 차가운 공기는 몸속 세포에까지 파고드는 느낌이다.

조견당을 향해 굽이굽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가족 단위 캠핑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주천강에서는 다들 다슬기를 잡느라 여념이 없다. 바캉스의 계절을 실감한다.

고택에 들어서니 여자아이가 마당을 뛰어다니다 어느새 사라진다.

그러곤 퐁당퐁당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이전 고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생기가 이곳에 흐른다.
 
    

 

 

 

조견당에서 경쾌하게 흘러나오던 피아노 소리는 이 집에 살고 있는
김주태·안양순 부부의 딸, 열 살 김휘영양의 솜씨였다.   
고택 시리즈를 반년 넘게 진행하면서 얻은 깨달음 중 하나는,
집은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간다는 것이다.   
조견당이 여느 고택과 달리 생기와 에너지가 넘치는 이유는
젊은 주인 내외의 면면 때문이었다.

 

 

 

 

 

 

바깥주인인 김주태씨(53)는 MBC 기자로 현재는 MBC 수원총국 총국장이다.
안주인인 안양순씨(51)와는 방송국에서 만났다.
그녀는 보도국을 담당하는 메이크업 전문가였고,
김주태씨가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레 인연이 된 것이다.

 

 

 

 

 

 

"노총각, 노처녀가 만나 결혼을 한 셈이죠.

저는 44세, 아내는 42세 에 결혼을 했으니까요.

그전까지는 각자 일에 매진하고 있던 터라 결혼이 절실하지 않았거든요.

고택을 물려받아야 할 제 상황을 알고 있는 주변 선배들이

지금의 아내를 '생각보다 시골스럽고 털털한 여자'라고 평하며

'잘해보라' 하고 밀어주셨죠."
    

 

 

 

 

그는 '집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지금의 종부 자리를 아내에게 강요하진 않았다.

한 번도 먼저 조견당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이야기는 아내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아내가 자진해서 '고택에 내려가보겠다'라고 하더라고요.

와본 후 한 달 만에 서울 살림을 모두 정리했어요.

그런데 시골 생활을 해본 적 없었던 아내는 여름에는 각종 피부 트러블로,

겨울에는 동상으로 병원 신세를 지기 일쑤였죠."

 

 

 

 

 

"그해 겨울은 영하 25℃로 기온이 내려갈 만큼 강추위가 이어지기도 했고,

또 여기는 강원도라 눈이 내리면 허리까지 와요.   

겨울에 맨손으로 개밥을 주다가 동상에 걸리기도 했어요.

이곳 동네 사람들은 처음에는 '몇 달 버티다가 가버리겠지…'라고 생각했대요."
    

 

 

 

 

 

 

어린 시절부터 안씨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소박한 된장찌개라도 끓여서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해왔다.

주변에 베푸는 삶.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종부의 자리를 꿈꿨던 것은 아닐까?
 
    

 

 

 

 

"남편은 아는 사람도 많을뿐더러 고택에서 각종 행사를 자주 열어요.

한 번에 2백에서 3백 인분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데 그럴 땐 저도 모르게 신이 나요.

장 보는 것, 떡 맞추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점점 제게 의심을 품었던 주위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딱 제자리에 잘 왔다'라고 인정해주기 시작하더라고요."
    

 

 

 

 

 

 

고택에서 이곳저곳 쓸고 닦는 것만으로도 하루해가 금방 저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에 열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기분이 묘해진다.
    

 

 

 

 

 

"일을 하다 보면 해가 저물거든요.

그럼 주변 공기가 달라져 있어요. 어딘가에서 나무를 태우는 냄새도 나고요.

서쪽 하늘의 노을빛도 참 환상적이죠.

그럴 때면 마치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운명인 것만 같아요. '

이 집이 나를 끌어당겼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고택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각별한 인연으로 만나 사랑에 빠져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부부처럼, 그녀는 그렇게 고택을 마음에 담은 것 같았다.

고택을 기꺼이 사랑하는 것, 종부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일 것이다.
    

 

 

 

 

   현명한 여성, 어머니
 
 조견당은 7대째 내려오는 고택으로 강원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다.

종손인 김씨는 조견당의 선조 중에는 높은 벼슬을 하거나 대단한 치적을 남긴 인물은 없었다고 말한다.

당파 싸움이 심했던 조선 숙종 때 노론의 대부인 송시열과 각을 세우다   

반대파의 세력에 밀려 한양에서 숨어 내려온 그의 조상이

터를 잡은 곳이 이곳 주천강 인근이었다고 한다.

쇠락의 길을 걷던 집안이 어떻게 지방에서

1백20칸이나 되는 규모의 집을 지을 수 있었을까?
  

 

 

 

 

 

 "당시에 이곳의 유일한 교통로는 수로였어요.

이곳 주천강 주변은 상류와 하류의 물산들이 오가는 물류의 중심지였습니다.   

서해안에서는 소금이나 새우젓, 경기도 광주에서는 옹기나 도자기가 올라왔고,

대신 이곳에서 나는 목재와 약재들이 배에 실려 다른 지방으로 내려갔죠.

저희 할아버지는 집 앞에 선착장을 만들어 모든 물류가 통과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렇게 상업으로 커다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조상의 재기로 큰 부를 얻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안채뿐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주천강가에 있던 소나무 숲을 벌목해

안정된 농토를 만들어준다는 미명 아래 강에 제방을 만들면서

조견당의 행랑과 별채, 정자도 사라지고 말았다.

또 강원도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한국전쟁 때는

국군과 인민군이 교대로 진주하며 조견당을 숙소로 쓰는 바람에 많은 소실이 있었다.

조견당은 종손의 재건과 복원 노력으로 풍요롭던 시절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그의 어머니인 고 김휘선 여사의 고택에 대한 사랑과 자식 교육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매년 농사가 시작되는 3월 삼짇날 고사를 지내셨어요.

흙을 건드리기 전에 땅의 신에게 농사를 보고하며 집안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거죠.

고사 때는 늘 소나무 가지에 명주실, 한지로 장식한 성주대를 손수 만드셨는데

이것 하나하나에 깊은 뜻이 담겨 있죠.

명주실은 무병장수를 뜻하고, 한지는 그 쓰임새가 끝도 없는 생활용품의 으뜸 소재죠.

가장 주목할 점은 소나무 가지인데, 어머니는 늘 상순을 꺾어 사용했어요.

후손들에게 남의 곁가지 노릇을 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죠."
 
    

 

 

 

 

 

 

2000년 봄,

 

돌아가시던 해에도 어머니는 산에 올라가 직접 소나무를 골라 성주대를 만들었다.

현재 조견당에 걸려 있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솜씨다.

'이리 정성을 쏟았는데 너희가 잘못될 것이냐.'

그것은 어머니의 무언의 교육이었다.

김씨는 늦게 낳은 귀한 딸에게 할머니의 이름자를 붙여 '휘영'이라고 지었다.

김씨 집안의 버팀목이 된 여성, 어머니를 본받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조견당은 늘 사람이 북적인다.

주변에 사람 많은 주인 내외 덕분에 계절별로 다양한 행사가 이뤄진다.

성년의 날에는 인근 여고생을 불러 전통 성인의례식을 치러준다.

요즘엔 장미꽃이나 향수를 선물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성인식이 난무하지만

원래 우리 민족은 통과의례를 중요시 여겼다.

성인식의 준비와 진행은 모두 종부가 맡는다.
    

 

 

 

"고택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냥 집일뿐이잖아요.

그렇게 남고 싶진 않아요. 시커멓고 낡은 집이 젊은 혈기들로 화사함이 채워지는 거니

저도 기쁘게 행사를 준비해요.

학생들이 부모님께 키워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4배를 올리거나

머리에 비녀를 찌르는 것만 봐도 가슴이 뭉클해져요.

'아! 내가 이 집 마당에서 보고 싶었던 장면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새삼 느끼죠."
    

 

 

 

 

 

종부도 '귀빈'이라는 큰 어른으로 성인식에 참여한다.

그저 옛날 방식의 이벤트라 가볍게 여기고 한복을 입고 재잘대며   

'셀카'를 찍던 아이들도

전통 예법으로 경건하게 진행되는 성인식을 하고 나서는 표정이 달라진다.
    

 

 

 

 

 

 

 

매년 하지 직전인 6월 셋째 주 토요일에는

보리를 벨 때까지 먹을 것이 없어 힘들었던 과거를 추억하며

그 시절 음식을 먹는 '보릿고개' 행사를 연다.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10년째 하는 것으로

'보릿고개'는 묵은지 국물 묵밥이나 찬 조밥을 먹거나   

옥수수, 쑥버무리나 개떡을 먹는다.

이제는 모두 웰빙 음식으로 재평가를 받는 것들이다.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매년 다양한 주제로 꾸밉니다.

음악회도 하고 때로는 '놀부전' 같은 공연을 보기도 하죠.

매년 3백여 명이 모이는데, 작년에는 조견당이 전국 70가구를 선정하는

'명품 고택'으로 선정된 걸 기념했습니다."
    

 

 

 

 

 

그들은 숙박시설로도 이용이 가능한 사랑채를 복원하면서

기둥에 주련을 달고 자축 행사를 열었다.

주련 제작은 김씨가 기자로 지냈던 시간들이 만든 인맥이 총동원됐다.

시는 이명권 시인에게 받았고 글씨는 여류 서예가 소엽 신정균씨가,

글씨 조각은 이창석 각자장이 맡았다. 학문과 예술, 기능의 결합이었다.
    

 

 

 

 

 

"이창석 각자장은 제가 처음 세상에 알리고 유명해져 무형문화재가 됐죠.

그 사람 자체가 보석이기 때문에 제가 오히려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어머니의 교육 덕에 기자가 돼 세상을 돌아다니며 얻은 것들이

이 주련에 응집돼 있죠.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더군요."
    

 

 

 

 

 

부부는 남편의 직장 탓에 주말 부부로 지낸다.

오롯이 고택을 지키는 이는 종부와 어린 딸이다.

인터뷰 중에도 열려 있는 대문으로 뜨내기 관광객들이 드나든다.

늘 개방을 해놓아야 하는 고택의 특성상 "혹여 무섭지 않나"라는 질문에

종부는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다"라고 간단명료하게 답한다.
    

 

 

 

 

 

 

"사실 안방 문을 막 열어보는 경우도 있고 마루에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분도 계세요.

이상하게 마루에 새겨진 신발 자국은 잘 안 지워져요(웃음).

힘들어도 이해해요.

조견당은 집이 아니라 문화재니까 관심을 보이며 찾아와주는 것이 감사하죠."
    

 

 

 

 

 

종부는 소일거리를 하다 말고 손님이 들어오면 고택 해설가가 된다.

집을 한 번 둘러보는 건 10분이 채 걸리지 않지만 화방벽에 담긴 뜻,

서까래의 조형미를 설명하면 사람들은 감동한다. 그

렇게 종부는 2백년이 넘은 집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유진 기자

 

 

       1

 

 

 

 

 

       영월 읍내에서 주천강을 거슬러 오른다.

한반도면을 지나 곧 강과 같은 이름을 간직한 주천면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옛날에 술이 솟아나는 샘이 있어 주천(酒泉)이라 불렸다 전한다.

술이 쌀로 빚는 것이니 옥토와 무관하지 않겠다. 강이 흘러 기름진 평야를 간직한 마을이다.

조견당은 김종길가옥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고택이다.

지금은 주천고택 조견당으로 불린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1호다.

고택은 면의 중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면내를 관통하는 주천로에서 300∼400미터 거리다.

건물이 밀집한 지역을 벗어났는가 싶더니 어느새 고택이다.

과거에는 고택 그 자체가 주천의 중심이었다.

약 200년 남짓을 거슬러 오른다.

조견당은 1827년(순조 27년)에 현 주인장 김주태(53)씨의 10대조 김낙배가 지었다.

      

 

 

 

 

 

 

       원래는 황해도 의주와 부산 동래를 오가며 무역을 통해 쌓은 부를 기반으로

40칸 규모의 집을 지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파당정치와 탐관오리의 횡포로

서민들의 굶주림이 심하던 시절이었다.

집을 짓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을 외면할 수 없어 공사가 커졌다. 결국 120여 칸 규모의 큰 집이 들어섰다.

목재와 자재를 구하는 데 3년이 걸렸고 건축에만 6년이 소요돼 9년 만에 완공했다.

 

 

 

 

       처음 지어질 당시 규모는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조견당 남서쪽에는 주천강이 흐른다. 주변으로는 백사장에 선착장이 있었다.

과거에는 그 앞에 조견당의 행랑채가 위치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아쉽게도 일제 강점기에 제방을 쌓으면서 행랑채와 곳간채가 헐리고 말았다.

      

 

 

 

 

 

 

 

 

9년에 걸쳐 지은 120여 칸 한옥

 

       안타까운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비행기 폭격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됐다.

사랑채와 사당 등이 전부 사라졌다. 간신히 안채만 살아남았다.       

안채를 중심으로 다시금 고택의 시간을 복원하는 중이다.

지난 2007년에는 사랑채를 복원했다. 2009년에는 그 곁에 다시 별채를 신축했다.

한옥 민박 체험을 시작한 것이 2012년이다.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꽤나 입소문이 났다.

      

 

도로에서 벗어나 고택을 향하는 고샅으로 접어든다.

조견당에 다다르자 한옥보다 먼저 시선을 끄는 존재가 있다.

담벼락의 모퉁이 바깥쪽에 자리한 500년 수령의 밤나무다.

마치 같은 밑동에서 자란 두 그루의 나무인 양 V자를 그린다.

대문 곁을 수호신처럼 지키고 섰다.

밤나무 뒤로는 긴 담이 이어져 사랑채에 가닿는다.

그 가운데 대문이 있고 다시 사랑채 끝에서 이어지는 담을 따라 또 하나의 문이 열린다.

별채로 열리는 끝의 문이 가장 많이 쓰이는 출입구다.

하지만 곧장 집안으로 들어서지는 않는다.

 

 

 

 

 

 

 

새벽별 같은 젊은이와 함께하는 집

 

       조견당은 바깥에서 누릴 수 있는 경치가 있다.

담벼락과 나란한 정원이다. 수목과 돌들이 어우러진 쉼터다.

비스듬하게 뻗은 소나무의 가지 사이로는 담 너머 안채가 어른댄다.

그 또한 한 폭의 그림이다. 아껴서 음미하듯 정원을 어슬렁거린 후에야 대문을 연다.

큰 길에서 가장 먼 쪽의 문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별채와 사랑채 사이의 마당이다.

왼쪽의 별채는 ‘一’자형이다. 안주인이 기거하는 살림집이다.

오른쪽의 사랑채는 ‘ㄴ’자형으로 ‘ㄱ’자의 안채와 마주한다.

사랑채는 주인장 김주태씨가 특별히 효성재(曉星齋)라 이름 붙였다.       

‘새벽별 같은 젊은이들이 미래를 준비하는 집’이라는 의미다.

 

 

 

 

 

 

       그가 꾸려가는 조견당의 가치를 잘 드러낸다.

고택을 빌려 젊은이들과 교류하며 우리의 고유한 전통 문화를 공유하려는 의지다.

고택에서 머물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한 숙소 역할을 한다.

별채를 마주한 바깥사랑채와 안채를 마주한 안사랑채로 이뤄지는데 각각 8칸과 5칸이다.

바깥사랑채는 너른 대청마루를 가진다. 차(茶) 손님들이 쉬어간다.

조견당은 숙박객에게만 개방되는 것이 아니다.

고택을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하지만 쉽사리 들어서지 못하자 그 걸음을 가볍게 하기 위해 찻집 간판을 걸었다.

조금 더 편하게 머물며 둘러보고 쉬어가라는 안주인의 배려다.

사랑 마당에는 야외에 나무 의자와 탁자를 여럿 배치했다. 사랑채의 툇마루도 제법 넓다.

바깥 담 너머로는 산세가 유려하다. 담 안쪽의 솟대와 어우러져

수묵화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차를 마시며 천천히 누려봄직하다.

바깥사랑채를 돌아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비로소 고택의 역사를 제 몸에 아로새긴 안채다.

조견당에서 가장 오랜 시간 제자리를 지킨 건물이다.

조견당은 주천고택의 당호이자 안채의 이름이다.

그 의미는 불교의 <반야심경>에서 가져왔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으로 조견(照見)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춰본다’로 해석한다.       

글자 그대로 읽으며 ‘비춰보는 집’이라는 의미도 찾을 수 있다.

안채 조견당은 낮은 기단 위에 세워졌다. ‘ㄱ’자형 모양으로 16칸 규모의 건물이다.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사랑채 방향으로 꺾인 왼쪽에는 윗방과 안방, 사랑방, 부엌이 있다.

오른쪽으로는 조견당 현판이 걸린 건넌방과 부엌이 차례로 이어진다.

      

 

 

 

 

 

 

 

 

합각머리와 화방벽에 새긴 음양오행

 

대청마루에 올라서면 자연스레 대들보에 눈이 간다.

조견당의 역사를 지켜본 산증인이다.

직선으로 뻗은 것이 아니라 아치형으로 위아래를 깎았는데 그럼에도 여간 굵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애초에 800년 된 소나무를 다듬어 사용했다.

조견당의 역사가 200년이니 살아 800년, 죽어 200년으로 1천년을 살아낸 나무다.

      

 

       마루 안쪽에 있는 뒤주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 또한 만만치 않은 크기다.

무려 쌀 여덟 가마가 들어간다. 겨울에도 행랑 끝방에 불을 피우고 보리밥 한 그릇이라도 묻어두는,

조견당 인심의 상징이다. 조상께 치성을 드리던 안택의 흔적도 있다.

윗방과 안방 사이 바깥 기둥의 종이 성주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주태씨의 어머니 고 김휘선씨가 달았다.

14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안위의 기억으로 남겼다.

이 또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집의 역사다.

 

 

 

 

 

 

 

 

       안채는 대청마루에서 내려와 한 걸음 떨어져 바라봐도 좋다.

처마와 추녀의 유려함이 돋보인다. 한옥의 고운 선이다.

 팔작지붕의 합각머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다른 고택과 달리 조견당만의 문양을 수놓았다.

      

 

 

 

 

      

안채 동쪽의 해 모양 아래에는 화방벽도 아름답다.

우리의 전통색인 청·적·황·백·홍의 오방색을 띤 사괴석을 다듬어 쌓았다.

합각지붕 아래 음양과 화방벽의 오행은 음양오행의 유교적 가치를 표현한다.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철학을 실천하고 다짐하는 대상이다.       

물론 조형미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동쪽의 해 문양과 화방벽을 확인한 후에는 안채 주변을 한바퀴 돌며       

달과 별의 흔적도 찾아봄 직하다. 안채의 뒤편은 시간의 궤를 달리하는 두 건물의 처마다.

새로 지은 창고의 지붕이 안채에 머리를 맞댄다. 색다른 볼거리다.

그 옆으로는 가지런한 장독대의 행렬이다. 슬그머니 팔을 뻗는 호박넝쿨이다.

 

 

 

 

 

 

       또한 바깥사랑채와 대문을 잇는 담 앞에는 키 큰 굴뚝과 소나무 한 그루가 조화롭다.

 바깥 정원과 어울려 한층 멋스럽다.

그 품에서 묵어가는 하루다.

열린 공간 사이를 넘나드는 바람에 젖고,

귓가에 울려퍼지는 풍경 소리에 마음의 빗장을 연다. 모

처럼의 조견(照見)이다.

글과 사진·박상준(여행작가)

      

 

 

 

 

 

 

 

[영월] 우중의 조견당(照見堂) 김종길 전통가옥

(해와 달 품은 고댁)

 

 

 

 

 

 

 

 

 

 

 

 

고댁의 입구 우측 담장끝에는 500년된 고목의 밤나무가 반겨 줍니다.

 

 

 

 

 

 

 

[조견당]이라는 이름은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이란 첫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합니다.

 

 

 

 

 

 

 

 

 

 

 

 

 

 

고댁의 자부 안양순씨(우측)가 서울 생활을 접고

고댁을 지키며 방문객들을 맞아 줍니다.

 

 

오색의 돌로 조화로움이 돋보이는 화방벽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고댁의 자부 안영순님

 

 

 

 

 

 

 

 

 

 

5색의 돌로 쌓아 올린 화방벽과 지붕 합각의 햇님이 어우려져 운치를 더합니다.

 

 

 

 

 

 

 

 

조견당 동쪽 합각에는 떠오르는 햇님이 조각 되여 있습니다.

 

 

 

 

 

 

 

 

조견당 동쪽 합각에는 떠오르는 햇님이 조각 되여 있습니다.

 

 

 

서쪽의 합각에 조각된 달님의 조각이 동쪽의 햇님과는 또다른 모습입니다.

 

 

 

 

 

 

 

 

 

 

 

 

 

 

 

 

 

조견당의 대들보는 800년된 곧은 나무를 목수들이 다듬어 곡선으로 만들어 운치를 더합니다.

 

 

 

 

 

 

 

 

 

 

 

 

 

 

 

 

 

 

 

 

 

 

 

 

 

 

 

고인이되신 모친이 새해봄이면 소나무 햇순인 상수리를 꺽어

한지에 명주실로 묶어 기둥에 붙여놓고

 

자식의 무병장수와 입신양명을 기원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