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있었던 현실에 너무나 와 닿는 글이기에
바탕에 받쳐줄 그림이 마땅치 않아 한참을 해매다 겨우 하나 찾아서 올려봅니다.
"비전통신"에 나오는 글은 모두가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더욱 심금을 울리는 글 중에 이것이 눈에 띄기에 공유하고자 합니다.
너무 애절하고 가슴이 저려서 한동안 보관했다가 올립니다.
왁자지껄한 도시의 거리들을 올리려다 너무 감성을 붙잡는 것 같아
40-50년 전의 자화상을 올립니다.
밑에서 들리는 음악동영상은
재끌린의 생애가 담긴 동영상인데 읽고 들어볼만한 자료이니
이 글을 다 읽으신 후 재생헤서 보세요.
재끌린 듸 픠레의 첼로. 영국 출신 첼리스트.
1945년. 6세의 나이에 첼로 신동으로 불리며, 17세 엘가의 첼로 협주곡 연주.
세상에 명성을 떨치며 10여년을 활동중,
27세의 나이에 손의 감각이 없어지고 피로를 동반하는 희귀병 "다발성 경화증"으로
15여년을 가혹한 고통과 절망속에 지내다, 42세의 나이에 요절한 천재 첼리스트.
솔베이지의 노래를 올리려다 "자클린의 눈물"을 올립니다.
밑에 노래의 유래를 대신 올렸으니 아시는 것도 한 번 다시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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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로 사랑방에서 한동안 기거했던
어느 노숙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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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숙인의 시
둥지를 잃은 집시에게는
찾아오는 밤이 두렵다.
타인이 보는 석양의 아름다움도
집시에게는 두려움의 그림자일 뿐...
한때는 천방지축(天方地軸)으로 일에 미쳐
하루해가 아쉬웠는데
모든 것 잃어버리고
사랑이란 이름의 띠로 매였던
피붙이들은 이산(離散)의 파편이 되어
가슴 저미는 회한(悔恨)을 안긴다.
굶어죽어도 얻어먹는 한술 밥은
결코 사양하겠노라 이를 깨물던
그 오기도 일곱 끼니의 굶주림 앞에
무너지고
무료급식소 대열에 서서...
행여 아는 이 조우할까 조바심하며
날짜 지난 신문지로 얼굴 숨기며
아려오는 가슴을 안고 숟가락 들고
목이 메는 아픔으로 한 끼니를 만난다.
그 많던 술친구도
그렇게도 갈 곳이 많았던 만남들도
인생을 강등(降等)당한 나에게
이제는 아무도 없다.
밤이 두려운 것은 어린아이만이 아니다.
50평생의 끝자리에서
잠자리를 걱정하며
석촌공원 긴 의자에 맥없이 앉으니
만감(萬感)의 상념이 눈앞에서 춤을 춘다.
뒤엉킨 실타래처럼
난마(亂麻)의 세월들...
깡소주를 벗 삼아 물마시듯 벌컥대고
수치심 잃어버린 육신을
아무데나 눕힌다.
빨랫줄 서너 발 철물점에 사서
청계산 소나무에 걸고
비겁(卑怯)의 생을 마감하자니
눈물을 찍어내는 지어미와
두 아이가 "안 돼, 아빠.. 안 돼"한다.
그래, 이제
다시 시작해야지
교만도 없고, 자랑도 없고
그저 주어진 생을 걸어가야지.
내달리다 넘어지지 말고
편하다고 주저앉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그날의 아름다움을 위해
걸어가야지...
걸어가야지...
서울 영등포 노숙인 쉼터 '행복한 우리집'의 식당 벽에 붙어 있는 시(詩)가 있다.
제목은 '집시의 기도', 부제(副題)는 '충정로 사랑방에서 기거했던 어느 노숙인의 시'다.
쉼터 관계자는 "이 바닥에서 아주 유명한 시" 라고 했다.
'집시의 기도'는 화자(話者)가 노숙하는 신세를 한탄하다
'다시 일어서겠다'고 다짐 하는 내용이다.
노숙인 김모(68)씨는 "밥 먹을 때마다 (시를) 쳐다보는데
'이 악물고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이 시는 10년 전부터 노숙인 관련 단체행사나 자료집에 자주 등장했다.
이 시를 쓴 사람은 누구고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시인이 머물렀다는
'구세군 충정로 사랑방'은 2년 전 중랑구 망우동으로 이사 갔다.
구세군은 대방동·충정로·서대문을 거쳐 현재 망우동·서대문에
노숙인 쉼터 두 곳을 운영 중이다.
김도진(47) 사무국장은 "'집시의 기도'는 1998년부터 2001년 4월까지
우리 시설을 오간 장금(1949년생)씨가 쓴 것"이라고 했다.
장씨는 1999년 봄 이 시를 썼다.
"98년 장씨가 사업이 망했다며 찾아왔어요.
160㎝ 정도의 키에 머리숱도 적고 이(齒)도 많이 빠진 왜소한 사람이었어요.
그런 그가 '집시의 기도'를 써냈어요. 모두들 글 솜씨에 놀랐습니다."
당시 '대방동 사랑방'에는 노숙인이 100명쯤 있었다.
그 중 30여명이 글을 끄적였다고 한다.
김 국장은 "장씨가 평소에도 한문이나 사자 성어를 종이에다 쓰곤 했다.
이날도 장씨는 집시의 기도를 단숨에 써내려갔다"고 했다.
사랑방은 10여 년 전 상담기록을 폐기해 장씨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남아있지 않았다.
장씨는 1999년 10월 대방동 쉼터가 충정로로 이사갈 때 떠났고
2년 뒤 다시 충정로로 찾아와 한 달간 지내다 또 나갔다고 한다.
김 국장은 "장씨는 본인을 '집시'라고 한 것처럼 얽매이는 걸 싫어했던 노숙인이었다" 고 했다.
장씨는 쉼터를 떠나서도 남대문·서울역 등지를 돌아다니며
1년에 서너번 김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왔는데 4년 전 연락이 끊겼다.
장씨의 흔적은 영등포 행복한 우리집에서 3분 거리인 또 다른 쉼터에서 발견됐다.
'햇살보금자리 상담보호센터'에는 작년 3월 영등포역 대합실 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있던 장씨를
고시원에 차린 응급구호방에 옮긴 기록이 있었다.
작년 4월 2일 밤, 이 센터 병원동행팀은 탈진한 장씨를 부축해 지하철을 타고
제기동역 근처 동부병원 응급실로 데려가기도 했다.
장씨는 4월 3일 119구급대에 실려 보라매병원으로 갔다.
이 센터의 마지막 기록은 다음과 같다.
'4/6 민윤찬 활동가가 김○○씨를 동행, 보라매병원에 다녀왔다고 하네요.
장금씨를 찾아갔는데 의식 불명인 상태라고 합니다.
4/14 보라매병원에 입원해 계신 장금씨를 찾았으나 중환자실에 있기
때문에 면회 불가.
' 마지막 면회를 갔다가 그냥 돌아왔다는 동행팀 윤순택씨가 말했다.
"장금씨가 ' 집시의 기도'를 썼다는 걸 모두 몰랐다. 그는 특별했다.
내게 가끔 아프리카나 세계평화 얘기를 해줬다."
그는 고시원 구호방에서 '노숙자라고 병원에서 천대받으면서 죽는 것보다
고시원 에서 깨끗하게 죽고 싶다'는 뜻을 윤씨에게 전했다고 한다.
보라매병원에서 기저귀를 찬 채 누워있는 모습이 윤씨가 마지막으로 본 장금씨였다.
보라매병원은 작년 4월 29일 시립 성인남성 부랑인 시설 은평의 마을에 장씨를 의뢰했다.
장씨는 작년 6월 1일 부천대성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은평의 마을 관계자는
"장금씨는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돼 벽제화장터로 갔다"고 했다.
가족들에게 내용 증명을 보냈지만 아무 통보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김 국장은 "4년 전 통화 때 '부산으로 가 아내와 살겠다'고 해
이 생활을 벗어난 줄 알았다" 고 했다.
노숙 시인은 '집시의 기도' 한 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아래 포스팅은 60년대 후반 미군장교로 주한 미군부대에서 복무하였던
Homer Williams씨가 찍은 사진으로 질곡스러웠던 그 시절의 풍경이 묻어난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한 손엔 망치들고 건설하면서 또, 한 손에는
총칼들고 호시탐탐 이 땅을 노리는 북한 공산집단, 무장공비들과 싸우던 시절이었다.
미소짓는 두 소년. 남산에서 본 신당동. 1968.
언덕받이 길을 젊은 여인이 물을 길러 가며 한 아이스케이크 통을 들고 가는 소년.
그 시절의 중랑川.
모래, 자갈을 실은 배를 트럭이 끌고있다.
60년대~ 70년대초까지 한강은 모래와 자갈의 채취源이었다.
배경의 뚝방에 서울-원산을 잇는 경원선이 있다.
1968. 서울.
청계川.
성동橋 아래... 1968.
시계수리.
군밤장수. 서울운동장 외곽. 1968.
의정부. 1968.
의정부. 1968.
남방리. 1968.
한강. 1969.
한강. 1969.
건국대학교. 1969.
솔배이지 노래의 유래
노르웨이 어느 산간마을에 가난한 농부 페르귄트가 살고 있었다.
한 동네에 아름다운 소녀 솔베이지가 있었다.
둘은 사랑했고 결혼을 약속했다.
가난한 농부였던 페르귄트는 돈을 벌기위해 외국으로 간다 .
갖은 고생 끝에 돈을 모아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국경에서 산적을 만난다.
돈은 다 빼앗기고 고생 끝에 겨우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어머니 오제는 이미 죽었다.
어머니가 살던 오두막에 도착해 문을 여니
어머니 대신 사랑하는 연인 솔베이지가
백발이 되어 다 늙어버린 노인 페르귄트를 맞는다.
병들고 지친 페르귄트는 솔베이지의 무릎에 머리를 누이고 눈을 감는다.
그녀는 꿈에도 그리던 연인 페르귄트를 안고
'솔베이지의 노래'를 부른다...
페르귄트는 솔베이지의 노래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이런 애절한 사랑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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