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 하나 조약돌 하나 철마다 찾아오는 새가 노닐던 단구동 옛집에서 박경리를 만나다.
글?사진 박은경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에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중략)//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중 <옛날의 그 집>
홀가분하다던 당신, 지금은 편안하신지요
당신이 아직 그 집에 계셨더라면 곧 여든여섯 번째 생일을 맞으셨겠지요.
하지만 제가 너무 늦은 것인지, 아니면 세월이 너무 빠른 것인지,
당신이 떠나신 지도 벌써 4년이 지났습니다.
미리 고백하건대 저는 아직 토지를 마무리 짓지 못했습니다.
물론 게으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스스로를 옭아매며 써내려간 그 문장들이,
또 당신을 닮은 그 주인공들이 제겐 너무 버거웠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꼭 한번 와보고 싶었습니다.
또 만나고 싶었습니다.
토지 집필기간 25년의 마침표를 찍은 원주 단구동 옛집과 그곳의 당신을 말이지요.

집은 여전합니다.
3년 동안 돌 하나하나 직접 주워다가 만든 돌길 하며
손주들을 위해 정성 들여 꾸민 연못,
손수 심고 가꾸던 살구나무와 텃밭까지 모두가 그대로입니다.
아, 한 가지 달라진 것도 있습니다.
당신이 떠나고 이듬해 생일에 세워진 동상입니다. 그
는 생전의 당신처럼 바위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곁에는 유난히 따르던 고양이와 펜을 놓은 손에 늘 쥐어져 있던 호미,
그리고 모서리가 닳은 오래된 책도 보이고요.

한참을 당신 곁에서 바람을 쐬다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름 모를 작가가 찍었다는 당신의 영정사진이 보입니다.
그 밑에는 작지만 옹골진 당신의 손도장이 있고요.
전해 듣기로는 일곱 번 만에야 겨우 구워졌다지요.
그래서 도공이 이렇게 기가 센 손을 가진 사람이 누구냐고 되물었다면서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박완서 선생을 비롯한 가까운 지인들이 종종 찾아와 머물렀다는 방이 눈에 들어옵니다.
또 주방도 보이네요. 여느 집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만
그릇선반대신 책꽂이가 세워진 걸 보니 당신의 부엌이 분명합니다.
하긴 서울 집에서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사라질까
벽지 가득 글씨를 써넣었던 당신이니 그럴 만도 하지요.
뜰이 한눈에 담기는 따사로운 거실을 지나 반대편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전까지 당신의 책이 산더미만큼 쌓였을
서재를 슬쩍 건너 옆방으로 들어갔지요.
바로 대망의 토지가 완성된 그 집필실로 말입니다.

1994년 8월15일 새벽 2시.
당신은 25년간을 옥죄던 글자의 감옥으로부터 광복하셨겠지요.
조용히 그날의 당신을 떠올려봅니다.
어린애처럼 마냥 기뻐하셨을까.
마음 한구석 뜨거우셨을까.
아니면 그저 담담하셨을까.
오래된 가구와 낡은 벽지, 저 구닥다리 선풍기는 보았겠지요.
손때 묻은 만년필과 원고지는 알고 있겠죠. 물을 수만 있다면 더 묻고 싶지만,
당신이 곁에 둔 물건이 적어 이마저도 어렵습니다.
그저 '외로워야 자유롭다' 늘 되뇌던 당신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외로웠을 당신이었음을 직감할 뿐이죠.
그곳에서 당신의 보물들을 만났습니다
당신의 숨결을 좀 더 느끼고 싶어 이웃한 박경리 문학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곳에는 지독한 책벌레였던 열일곱 진주여고 학생 박경리도 있고,
정신대에 끌려갈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서둘러 결혼한 스무 살 새색시 박경리도 있었습니다.

사실 그 시절의 당신은 박경리가 아닌 박금이였지요.
1955년 시로 문단에 등단하기 위해 김동리 선생에게 추천사를 부탁하면서
그에게 받은 이름이 박경리라 들었습니다.
그렇게 문인의 길에 들어선 당신은 맨 먼저 당신의 모진 삶을 작품으로 승화시켰지요.
어릴 적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결혼 4년 만에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또 얼마 안 가 아들마저 하늘에 빼앗긴 아픔과 질곡을
글로 노래하면서 버티고 또 버텨내셨지요.
그리고 1969년,
당신은 필생 최고의 작품이 될 소설 토지 1부를 시작하셨습니다.
서울 정릉 집에서 꼬박 11년을 앉은뱅이가 되어 써내려간 토지 1, 2, 3부와
1980년 이곳 원주 단구동으로 자리를 옮겨
14년의 세월을 쏟아 부은 토지 4, 5부까지,
원고지로만 3만 매가 넘는 길고 긴 고행을 거치면서
당신은 어느새 일흔의 노인이 되었지요.
이곳에서 저는 당신이 한평생을 함께 나눈 물건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토지의 육필원고와 만년필은 물론 평소 귀하게 보관해온 달항아리와
농사지을 때 쓰던 호미, 손수 지어 즐겨 입던 옷가지들까지
어느 것 하나 당신을 닮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보물로 쳤다는 국어사전과 재봉틀 앞에서는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 닳고 너덜해진 국어사전과 녹슬도록 돌았을 재봉틀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어쩌면 이것들은 당신에게 보물보다 숙제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전국의 어려운 작가들에게 쉴 곳과 먹을거리를 아낌없이 내놓으셨습니다.
옛집에서 개구리, 메뚜기, 고양이들 밥 먹이며 내 자식 목에 젖 넘어가는 소리
마냥 행복해하시던 그때처럼 말입니다.

문학의 집을 나와 내친김에 토지문화관까지 가보기로 했습니다.
토지문화관은 당신이 마지막 10년을 보낸 곳이기도 합니다.
물론 당신은 단구동 옛집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셨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르기에 묘미입니다.

1989년 단구동 옛집은 택지개발에 따라 철거 위기에 놓였지요.
하지만 다행히도 여론의 반대에 힘입어 지금의 문학공원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대신 당신은 여기서 남쪽으로 삼십 리 떨어진 흥업면 매지리로 거처를 옮기셨죠.

이곳에서도 당신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친필원고, 안경, 모자 등 어느새 익숙해진 당신의 낡은 물건들이 저를 반깁니다.
옆에는 당신의 가장 마지막 모습을 알고 있는 집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섰습니다.
당신이 평소 좋아하던 장독대며 손수 일구던 텃밭도 언제 올지 모를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집은 가까이 갈 수 없도록 막혔고, 당신은 불러도 대답이 없을 뿐이죠.

아마도 어디론가 마실을 나선 것이겠지요.
유난히 꽉 닫힌 대문으로 미루어 보건대 평소보다 조금 먼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가야겠습니다.
다음번엔 꼭 고추 한 움큼 손에 든 당신을 마주치길 간절히 바라며.
박경리 문학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