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의 초대/시와 음악이 있는 곳

가난한 새의 기도 -이해인

까까마까 2012. 5. 1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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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새의 기도

 
가난한 새의 기도

 

 

 

 

 

-이해인수녀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

필요한 만큼만 둥지를 틀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새처럼
당신의 하늘을 날게 해주십시오

가진 것 없어도
맑고 밝은 웃음으로
기쁨의 깃을 치며
오늘을 살게 해주십시오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먼 길을 떠나는 철새의 당당함으로
텅 빈 하늘을 나는
고독과 자유를 맛보게 해주십시오

오직 사랑 하나로
눈물 속에도 기쁨이 넘쳐날
서원의 삶에
햇살로 넘쳐오는 축복

나의 선택은
가난을 위한 가난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가난이기에
모든 것 버리고도
넉넉할 수 있음이니

내 삶의 하늘에 떠다니는
흰구름의 평화여

날마다 새가 되어
새로이 떠나려는 내게
더 이상
무게가 주는 슬픔은 없습니다

 

 

 

 

 

 

 

 

 

 

 

 

 

 

 

*****
이해인(李海仁 1945 ~ )은 수녀 시인이다.
이 아름다운 글을 쓰는 수도자의 시는 독자가 몰래 엿듣는 듯한 내밀한 고백과 같은,
서정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서정적이면서 명상적이다.
종교와 예술과 삶을 조화시켜 나가고자 하는 시인의 경건하면서도 정갈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 욕심을 버리고 당신의 하늘을 날으게 하소서 라고
기원한다. 맑고 밝은 웃음으로 기쁨의 깃을 치며 훨훨 푸른 하늘을 날으겠다고 서원한다.
나의 가난은 사랑을 위한 선택이기에 내 삶의 하늘에 떠다니는 푸른 하늘같은 평화를 누리며,
욕심없는 새가 되어 인생길 떠나려는 나의 비상에 무개가 주는 슬픔은 없다는 시인의 앞날에
푸른 하늘만끔 맑고 찬란한 한 세생 있을지어다!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우리가 왜 시를 찾고 시를 읽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해인 수녀는 지상의 모든 대상들과 기도 안에서 만나고, 편지로서 만나고, 그리움
으로서 만난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기도로서, 편지로서, 그리움으로서 다가온다.
“뒤틀린 언어로 뒤틀린 세계를 노래”한 시들이 줄 수 없는 “위안, 기쁨, 휴식,
평화”를 주기에 종파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또한 그는 악기의 소리로 시를 쓴다. 우리를 불안해하지 않고,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감동으로 이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리듬에는 사기(邪氣)나 불화가 없다.
오묘한 화성의 조화, 부드럽고 아름다운 멜로디로 가득하다. 평생을 죄지은 자,
상처받은 자들을 감싸 안아 성모 마리아의 마음으로 사랑해온 수도자의 맑디맑은

 영성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경건하고 순결한 언어가 아닐런지.

 

 

 

 

 

 

 

 

                                           어머님 날에

 

 

“여긋 감은 한국 것 같들 않고 애기 머리만 헌디 씨는 하낫도 없어야.”
겨울이 한창인 호주의 요즘, 지난 가을부터 무르익던 감이 여전히 탐스럽습니다.
감에 대한 어머님의 찬탄도 지난 가을 이래 변함이 없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시장엘 갈라치면 때깔 곱게 윤나는 튼실한 단감에 마음을 빼앗겨 일없이 덥석 사게 될 때가 많습니다.

전날 어머님께 사다드린 단감이 정물화의 소재처럼 거실 한 켠에 놓여 있을 때면 익어가는 계절을 한쪽 베어 집안에 들여놓은 듯 정취를 더합니다.
어머님은 일을 마치고 오밤중에 집에 들어오는 아들 며느리를 반가이 맞으시며 감에 대한 칭찬과 감탄을 다시금 쏟아내십니다.
“크기는 애기 머리만 헌디 씨는 하낫도 없어야.”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사다놓은 감은 며칠째 그대로 있습니다.
낮에 혼자 계시는 동안에는 그저 감상만 하시다가 우리 내외가 집에 돌아오면 그제서야 감을 깎아 함께 드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당신은 한두 쪽만 잡수실 뿐, 남편과 제가 아기머리 만한 감을 거의 다 먹습니다.
어머님은 그런 저희들의 모습을 보시며 매우 흐뭇해 하시고

 

손자들이 먹을 때는 더 보기 좋아하십니다.

실상 감뿐이 아닙니다.
평생을 오롯하게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서만 살아오신 분 특유의 몸에 밴 희생이 자신을 위해서라면 우리 보기엔 아무리 하잘 것 없는 것이라도 아예 엄두조차 낼 수 없게 막아서는 것입니다.

이성부 시인의 시 <어머니가 된 여자는 알고 있나니>에 나오는 ‘가장 좋은 기쁨도 자기를 위해서는 쓰지 않으려는, 따스한 봄볕 한 오라기 자기 몸에는 걸치지 않으려는’이라는 대목 그대로, 구슬구슬 갓 지은 밥도 당신의 몫은 아니며 맛깔스레 버무린 겉절이 한 보시기도

 

먼저 젓가락을 대시는 법이 없습니다.

생선 한 도막, 따뜻한 떡 한 조각도 선뜻 먼저 잡수시질 못합니다.
당신이 비로소 편하게 대하는 음식은 식은밥, 시어진 김치,

 

냉동실 한 켠의 마른 떡조각 따위입니다.

제 남편은 소문난 효자이지만 그런 어머님을 모시는 것을 힘겨워합니다.
어머니께 맛난 것, 좋은 것을 사다드려봤자 결국 우리가 먹고, 대부분 우리 차지가 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마음이 늘 불편합니다.
그래도 계속 사다드리면서 어머니를 대신해서 어머니 몫까지

 

어머니 앞에서 아주 맛나게 ‘먹어드리’고 , 좋아라하며 가집니다.

어찌 보면 효도하기 참 쉽죠~잉.

옛날에 효성이 아주 지극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찌 그리 효심이 깊을 수 있는지 마을 사람들이 찾아가보니 마침 노모가 아들의 발을 씻겨주고 있었다고 하지요.
사람들은 아들이 어머니 발을 씻겨드리기는커녕 어찌 늙은 어미한테 젊은 아들이 더러운 발을 내맡기고 있으며 더구나 그런 사람을 어떻게 효자라 할 수 있나며 분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효심이란 결국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하시게 해서

 

마음을 편케 해드리는 것이라는 게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우리 어머님이 산해진미나 호사스런 치장을 원하셨다면 자식들의 효도가 좀 더 쉽고 생색도 났을 텐데 안타깝게도 우리 어머님은 옛날 이야기 속 효자 어머님 이십니다.
남편은 하는 수 없이 번번이 더러운 발을 어머님께 내밀어야 하구요.
어떤 땐 어머니의 ‘요구’가 좀 지나쳐 남편이 약간 짜증을 낼 때가 있지만

 

그래도 이내 수그러듭니다.

예를 들어 밥상에 좀 색다른 찬이 오르면 어머님은 우리들 앞에 찬그릇을 옮겨 놓으시고 우리는 다시 어머님 앞으로 놓아 드리느라 찬그릇이 빙글빙글 돌기 일쑤입니다.
물론 어머님이 늘 이겨서 당신은 젓가락을 대는 시늉만 하시고

 

실제로는 우리가 다 먹어야 합니다.

오늘 저녁 밥상에서도 그랬습니다.

올해 어머님은 85세, 저하고는 띠동갑이십니다.
아무리 건강하셔도 연로하신 연세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머님에 대한 남편과 저의 마음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만

 

저러다 그냥 돌아가시면 자식들 마음에 못이 박히는 건데 그걸 어머님은

 

도대체 알기는 하시는 걸까 하고 속이 상할 때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