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역사적 인물의 재조명

* 예수처럼 살고 싶었던 사람 *바보라고 불리면 그 인생은 성공-장기려 박시

까까마까 2012. 8. 30. 17:38

ㅈㄱㅇ

 

                                                                         제일 밑에 꼭 필요한 동영상을 2개 올렸으니 보셔서

                                                        유익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기사가 좀 길지만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장기려 박사님이 북의 아내에게 보내는 수신자 없는 편지

 

 

 

 

 

                                                                         북녘의 아내에게  

 

 

 

 

 

 

 

 

 


 

 

오래전 90년도 결혼 한참 전인 젊다못해 어리게 느껴졌던 중위 1년차!

장기려 박사님의 편지를 신문에서 읽고 철철 흘러 내리던 눈물,

나도 그분과 같은 남편을 만나고, 그 분과 같은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신문을 오려 내 스크랩 북에 고히 모셔 두었다.

그리고, 약 10여년후 남편의 설교에서 다시 등장하며 나의 눈물샘을 오래도록 자극하는 행운이 있었다.

노란 색으로 변해버린 오래된 신문지 조각!

그러나 내겐 더욱 새록 새록 가슴에 새겨지는 글귀와 그 분의 아내와 가족사랑!

 

 

 

 

 

 

 

재혼하라는 많은 사람들의 말에도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아내는 하나뿐이다. 북에 아내가 있는데 내가 왜 결혼을 또하느냐?'며 외롭게 살다가, 정부가 주는 가족을 만날 특혜마저 '우린 천국에서 만나면 된다. 더 나이드신 분부터 순서대로 하라'며 거부한 진정한 크리스챤의 모습을 보이신 분! 결국 편지와 사진으로만 만나고 실물을 보지 못한 채로 돌아가신 분! 그 사랑에 감격하며, 그 사랑을 존재하게 만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지닌 그 분의 믿음을 본받고 싶다.

장기려 박사님은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모델이었으며 부산의 복음병원청십자병원을 설립했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의료보험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고,
의료계에서 인정하는 실력있는 의술의 소유자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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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박사님이 북의 아내에게 보내는 수신자 없는 편지

 

 

 

 

 

 

 

 

북녘의 아내에게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리가 없건만 혹시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두움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못해 불을 밝히고 이편지를 씁니다.

여보, 40년이 흘러 여든이 된 지금 "여보"라는 호칭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당시는 쓰지않던 "택용이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것도 이상하고.......어쨌든 여보, 어느덧 40년이 흘렀소.

6.25참화로 생이별한 이가 어찌 나뿐이리오만 해마다 6월이 되면 뭉클 가슴 깊은 곳에서 치미는 이산의 설움을 감당못하고

 

기도로 눈물을 삭이곤 합니다. 택용,신용,성용,인용,진용, 북에 두고온 다섯애들이 모두 살아있다는 얘기는 어찌어찌 흘러

 

전해진 소식으로 들었소.

 

 

 

 

 

 

 

 

 

50년 12월 3일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을 떠날 때 둘째 기용이만 데리고 월남한 것이 지금 내 가슴속의 못이 되었다오. 그것이 벌써 40년전, 당신과 내가 나이 여든이 되도록 북과 남에 헤어져 애틋한 그리움만 간직한채 살게 되는 시작이었음을 어찌 알았겠소.

의사란 직분때문에 국군야전병원 앰블런스를 얻어타고 평양을 빠져나올때 거리의 아수라장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날 아침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이용못해 임시부교를 건너서나마 좀더 남쪽에 가 있겠다고 당신과 다섯 아이가 신양리 집을 나선 뒤 나는 교회에 가 맹렬히 기도를 했더랬소. 오후 4시경 국군야전병원 일을 해준 관계로 친해진 안소령이 앰블런스를 대고 타라했을때 나는 한 두어달 후면 다시 평양으로 돌아올 것이란 생각으로 차에 올랐답니다. 그때 신양리 집에는 부모님들도 계셨지만 "중공군이 내려오면 젊은이들은 모두 죽인다니 너만 타고 떠나거라 우리는 집을 지키겠다"고 말씀하셔서 부모님도 남겨둔 채였지요. 그 일도 한으로 남았습니다.

 

 

 

 

 

 

 

 

 

 

 

 

 

피난민들로 북적이는 평양 종로 거리를 앰블런스가 달릴때 기용이가 하염없이 창밖을 보다 문득 "아버지, 저기 신용이...."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차를 세워 달라는 말을 끝내 하지 못했소.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환자 차에 얻어타기도 했으려니와 차를 세운다면 피난민들이 몰려와 너도나도 태워달라고 간청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날부터 며칠간 당신과 아이들은 걸어서 남하하다가 중공군이 앞질러가는 바람에 울며 평양으로 되돌아갔다는 얘기를 나중에 목격자들한테 들었습니다. 다 내 불찰입니다. 그날 아침 당신과 애들을 먼저 대동강변에 보내지 않았다면.....또 종로거리에서 차를 세우기만 했었다면.....

 

 

 

 

 

 

 

 

 

당신도 기억하지요. 50년 9월 16일 그 엄청난 평양공습, 그때의 폭탄은 물체에 부디치면 곧 터져 수천 수만의 파편을 좌우로 흩뿌려 평양거리와 시민을 초토화시킨 무서운 것이었지요. 그때 나는 평양의대병원 2층 수술실에 있었는데 3층 지붕에 폭탄이 떨어져 불지옥이 되고 그런 와중에도 수술은 계속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밤새 파편에 맞은 환자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나는 일곱 수술실을 번갈아 돌며 모두 49명의 환자를 수술해 주고.....그러다 새벽녘 병원 앞뜰을 내려다보니 미처 병원에 못 들어온 부상자 수백명이 누워 신음하고 있는게 아니겠소. 그때의 울분, 누가 이 사람들을 다치고 죽게 했소? 사상도 이념도 모르고 한 생을 살아왔을 이 민족에게 폭탄을 퍼 부은 자가 누구란 말이오? 전쟁의 책임을 또 역사의 심판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까?

45년 쏘련군이 진주하고도 5년간을 당신과 나, 우리 가족은 평양에 살았지요. 공산주의자들이 나의 신앙을 박해하고 어떻게든 유물사관을 심어 주겠다고 별렀지만 실패한 것을 당신도 똑똑히 기억하겠지요. 당시 내가 김일성대학 의대 교수로 있었고 또 김일성의 맹장 수술도 해 주었다는 허황된 소문도 나돌았지만 나는 절대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었소. 김일성대학 부총장 박일, 부속병원장 최필석등이 "1년 후면 장선생을 꼭 공산주의자로 만들어드리리다."고 장담했지만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수술에 앞서 기도하고 주일이면 교회에 가는 나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지 못했지요. 오히려 그들이 무자비한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지 않았던가요.

 

 

 

 

 

 

 

 

 

 

 

50년 6월 25일의 민족전쟁은 김일성이 쏘련 진주군 사령관 스티코프의 사주에 의해 도발한 것입니다. 자본주의국가와는 공존할 수 없고 어떻게든 타도 괴멸해 공산사회를 세워야한다는 김일성의 신조가 민족의 피를 부른 것입니다. 노동신문은 "남조선 군대가 북침하므로 남에 대한 반격이 불가피하게 시행되었으며 성공적으로 진행중"이라고 보도했으나 그날 나는 박헌영이 방송을 통해 "남조선 군대가 먼저 쳐들어 왔다."고 말하며 심하게 더듬는 것을 듣고 공산주의자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작용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한 기억이 납니다.

여보, 평화통일에의 꿈은 40년전 전쟁이 일어났을 때나 지금이나 북과 남의 우리민족 모두의 염원일 것이요. 특히 북녘에 처자 부모를 두고와 불효자 불민한 남편 그리고 제 도리를 못한 아버지로 스스로를 자책하는 나에게는 민족사랑에 의한 평화통일을 보는 것만이 여생의 마지막 소망이기도 하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분단되었던 나라들이 속속 통일을 하고 있습니다. 독일이 그렇고 예멘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지도자와 민족의 슬기로 피흘리지 않고 통일을 쟁취했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무력에 의한 통일은 반대랍니다. 당신과 가족이 보고 싶다고 다시 수천 수만의 피를 흘리는 대가로 우리가 재회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베트남은 전쟁을 통해 통일을 얻었지만 남은 것은 가난과 폐허뿐이 아닙니까?

 

 

 

 

 

 

 

여보, 나는 정치는 모르오. 또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나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하기 위해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정치가, 자기 욕심에만 빠지고 공평을 실현하지 못한 정치가들 때문에 동족상잔과 가족 이산의 비극이 빚어진 것을 철저히 느낍니다. 평화통일은 민족 성원 모두가 공생애를 산다고 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요즈음의 국제정세가 화평의 분위기를 타고 한반도에도 긴장완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하지만 사랑과 평화 믿음이 없이는 진정한 평화통일은 힘들 것입니다.

 

 

 

 

 

 

 

 

 

택용 어머니, 나는 요즈음도 이따금 당신과 아이들의 꿈을 꿉니다. 50년 월남 후 부산에 내려와 세운 무료병원인 복음병원 앞에 당신과 내가 서있는데 갑자기 파도가 밀려와 당신을 삼켜가는 꿈도 꾸었습니다. 놀라 일어나 보면 텅 빈 방에 혼자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고.....당신에대한 나의깊은 사랑을 다시 느낍니다. 당신이 나에게 가르쳐 준 노래를 나직이 불러 봅니다.

 

 

 

 

 

 

 

 

 

 

단풍잎은 떨어져서 뜰앞을 쓸고 나간다

누른 국화 향내는 바람을 떠나 살더니

처량한 가을이여....

붉은 물 풀어 놓은 것 같이

찬란하다 낙조

내가 지금 인생의 낙조에 들어섰으니 이제와서 부르라고 당신이 가르쳐 준 것이었을까요?

 

 

 

 

 

40년을 남한에 살며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이들었다오. 그러나 당신에게 한 나 스스로의언약 "우리 사랑은 영원하다.만일 우리둘 중 누가 하나라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사랑은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이사랑은 우리가 육으로 있을 때 뿐 아니라 떠나 있을 때에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사랑이다."고 한 말을 상기하며 당신을 기다렸소.

여보, 몇년전 남북한의 이산 가족들이 몇명씩 남과 북을 방문하여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지요. 난들 왜 가보고 싶지않았겠소. 당신과 자식들을 만나고 지금은 돌아가셨을 부모님 산소도 들러보고 용천 입암리 고향집과 평양 신양리 의 옛집.....그러나 1천만 이산 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 않을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 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었겠소.

 

 

 

 

 

 

 

나는 내 생전 평화통일이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어울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날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당신도 아는 함석헌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제 육으로는 안될 것 같아. 영생을 사는 영으로 북녘땅을 밟아봐야지..." 함선생은 벌써 북녘땅을 가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사랑으로 평화통일이 이루어질것이란 확신을 가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북에서는 종교가 누구에게나 용인되지 않겠지만 당신은 항상 기도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 생전에 38선이 열리고 이산 가족 모두가 만나 재상봉의 감격을 나눌 수 잇다고 믿기에 기쁜 마음으로 이 편지를 끝낼 수 있습니다.

 

 

 

 

1990년 6월 24일, 이산 40년만에 부산에서 당신의 기려

 

 

 

 

 

 

 

 

 

 

 

 

 

 

 

 

바보 의사 이야기

 

 

 

 

 

 

 

 

 

 

 

 

 



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는
아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였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초라했다.

 

 

1995년 12월,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부산 복음 병원 원장으로 40년,
복음 간호 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지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한 채,
죽은 후에 묻힐 공동 묘지 10평조차 없었다.

장기려 박사는 언제나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사셨다.
물론, 병원 원장이나 대학 학장으로서의 수당은 있었지만,
그에게는 월급이나 수당보다는 가불이 많았다.
여기에서 그의 수수께끼가 시작된다.

장 박사에 대해 떠도는 미신에 가까운 풍문 때문에
전국의 가난한 수술 환자들과
다른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말기 암 수술 환자들이
부산 복음 병원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겨우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아 병이 나으면
그 다음에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들 대부분은 입원비와 약값이 없었다.
이 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원장실이었다.

원래,잇속이 밝지 않아 셈을 잘 할 줄 모르고,
바보 같을 정도로 마음이 착한 장 박사에게
"시골 우리 집은 논도 밭도 없고
소 한 마리도 없는 소작농이어서
입원비나 치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환자들이 하소연하면,
장 박사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고는 눈물겨워했다.

병원비 대신에 병원에서 잡일을 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겠느냐는 환자들의 제안에
장 박사는 환자의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처리하고는 했다.

병원 행정을 이렇게 하다 보니
장 박사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 운영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병원 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앞으로 무료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은
원장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부장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가난한 환자들이
장 박사를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결정권을 박탈당한 이후부터
장 박사는 어려운 환자들이 생기면
야밤에 탈출하라고 알려주고는 하였다.

"내가 밤에 살그머니 나가서 병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탈출하라."는 것이었다.
장 박사의 이러한 '바보 이야기'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북녘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지낸 장기려 박사는 평생에 걸쳐 묵묵히
사랑을 실천한, 진실로 아름다운 예수의 사람이었다.

 

 

 

 

 

 

 

 

바보 의사 이야기

 

 

 

 

 

 

 

                                                                                                                      

* 이산의 아픔 삭이며 희생과 봉사의 삶 살다간 참의사 *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4개월만인 1950년 10월 19일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을 탈환했다
당시 김일성의과대학 외과의사였던 장기려는
대학병원과 야전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국군은 평양을 철수하게 되고
이 때 장기려를 남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를 야전병원 환자수송용 버스에 태웠다.

그것이 가족과의 45년에 걸친 긴 이별의 시작이 될 줄 몰랐다.
그는 언젠가 가족들을 만날거라는 희망하나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다시 가족을 만날거라 했던 그의 바람은
길고 긴 분단의 세월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장기려의 인생은 헤어진 가족을 향한 그리움으로 바쳐진
사랑과 기도였다.

"의사를 한 번도 못보고 죽어 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
의사 장기려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리 의료계에
'가난한 사람도 치료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박애정신의 꽃을 피워냈다.

그는 의사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이 허락한 소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의사 한 번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맹세했다.

장기려는 경정의전에 들어가면서한
이 하나님 앞의 약속을 생이 다할 때까지 지켜나갔다.
평생을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펼친
의학박사 장기려. 


 

 

 

 

 

 

 

 

 

 

 

 

 

 

 

 

 

 

 

그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로 불렸다.

이광수는 장기려를 가리켜
'당신은 聖者아니면 바보요'라고 말했다.
장기려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북에 있는 가족도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고 믿음을 갖고
하루 2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 -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 설립

병원 규모가 커지면서 무료진료가 불가능하게 되자
장기려박사는
1968년 '건강할 때 이웃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라는 표어 아래,
북유럽의 의료보험제도를 본 딴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탄생시켜
한국 의료보험제도의 모태가 되었다.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그때,
주변의 몰이해와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병의 고통으로 시달림을 받는 것으로도 슬픈데
가난한 사람에게
과중한 치료비를 부담시킬 수 없다'는 신념 하나로
장기려는 한국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장기려박사는 서울의대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하고
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肝大量) 절제수술에 성공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중 한 사람이었다.
장기려는 한국 간외과학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 나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

장기려는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서
자기 돈으로 수술을 해주었다.
자기 월급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환자를 야밤에 탈출시키기도 했다.

평양 시절 그의 부인은 장기려가 생활비를 가져다 주지 않아
의사가운과 환자복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갔다.
그는 평생 자기 집 한 칸 갖지 않고
병원 옥상의 24평 사택에서 살았다.

* 다른 사람이 모두 만날 수 있을 때, 나도 가족을 만날 것이다 *

평생 나누고 봉사하는 삶을 산 장기려 박사.
그 자신은 분단 조국에 의한 피해자였다.
1.4후퇴 때 환자를 돌보는 와중에
부모, 부인, 5남매를 평양에 남겨두고
둘째아들만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
이산가족이 된 장박사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고향의 가족을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며 살았다.
그런 그가 85년 정부의 방북권유를 거절하였다.
혼자만 특혜를 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장박사는 끝내 그리운 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채
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는 임종을 앞둔 1995년 10월 가족들에게
통일과 민족의 만남에 대해
" 이 땅에서 지금 만나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게 짧게 만나느니 차라리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만나야지"
라고 말하며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는 부산시민상, 막사이사이상, 국제적십자상,
국민훈장, 호암상등을 수상했다.

특히 그는 지난 95년부터는
당뇨병과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상오 청십자병원에서 영세민 10여명씩 진료해 주다가
그해 성탄절 새벽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경기도 마석 모란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장기려 박사의 비문에는 그분의 유언대로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들의 벗'임을 자처하며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철저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간,
'이 땅의 작은 예수' 로 칭송받은 사람이다.

그에게 붙은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 라는 찬사에
한 점도 부끄럼 없이 평생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 예수처럼 살고 싶었던 사람 *

절대빈곤시절의
‘천막 무료진료’부터
미래를 내다본 의료복지 정책인 ‘청십자 의료조합’까지,
그것은 그의‘사랑'이 이뤄낸 기적이었다.

그는 예수처럼 살고 싶어했고, 그렇게 살았다.
분단의 아픔을 환자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한
의사 장기려의 삶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다

 

 

 

 

 

 

 

 

 

 

 

 

 

 

 

밑에있는 동영상 음악 들으시면서 보셔도 되고 끄시고 보셔도 됩니다.

좀 길지만 보시면 유익하리라 믿습니다.

 

 

 

 

 

 

                                                                                            장기려 선생의 일대기 47;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