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ㅂㅇ ㅈㅇ ㅈㄱㅇ
*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가문들.
102칸 짜리 강릉 선교장…강원도 유일의 만석꾼
# 족ㅇ제비가 만들어준 부잣집 한국 최고의 부잣집 한옥은 어디일까.
일반적으로 궁궐이 아닌 일반 양반집으로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집은
99칸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나친 낭비를 막기 위해 집의 규모를 제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실제 우리 전통 한옥을 살펴보면 99칸보다 큰 집이 존재한다.
정확히는 102칸 집이 있다.
하인들이 살던 집들까지 모두 합치면 300칸에 이르렀던 집이다.
현존 살림집 한옥 중에서 가장 큰 집이다. 바로 강릉의 명물 ‘선교장’이다.
집이 하도 커서 집 안에 대문만 12개가 있을 정도다.
선교장은 우리가 만나볼 수 있는 최고 부잣집이다.
역사가 300년에 이르는 이씨 집안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다.
그리고 이 집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른 큰 전통 한옥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많다.
먼저 그 이름부터 다르다.
보통 양반집들은 ‘~당’이나 ‘~각’ 등의 이름을 붙인다.
그런데 이 집은 유독 ‘장’이란 이름이 붙었다.
집의 경제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
선교장은 ‘장원’이기 때문에 이름에 ‘장’자가 붙었다.
장원은 단순히 식구가 많고 큰 집이 아니라 한 집이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경제적 시스템을 갖춘 것을 말한다.
선교장은 이 집의 건물과 가구 등을 전담하는 목수,
옷가지를 만드는 침모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전용 전문 인력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런 장원 체계의 부잣집은 조선 시대 만석꾼 집안 중에서도 유례가 거의 없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집안이 강원도에서 만석꾼이 된 것이다.
농토가 넓은 전라도나,
세력가들이 많았던 경상도가 아닌 산 많고 기후가 거친
강원도에서 만석꾼이 나온 경우는 이 집이 유일하다.
한때 선교장 집 땅은 북쪽으론 주문진, 남쪽으론 울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넓은 것인지는 지도를 펴보면 실감하게 될 것이다.
곡창지대가 아닌 변방 강원도에서 이 집이 흥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실은 족제비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설마 그 족제비? 맞다. 그 족제비다.
선교장 집안을 일으켜세운 이내번이란 사람에겐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가 집 지을 터를 찾아 강릉 일대를 돌아다니던 어느 날 산 속에서
갑자기 족제비 무리를 만났다고 한다.
족제비가 떼를 이뤄 몰려가는 게 신기해 그는 족제비들을 좇아갔는데,
어느 곳에 이르더니 족제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의아해진 그가 주변을 돌아봤는데,
그 순간 자기가 있는 곳이 놀라운 명당임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지금 선교장이 있는 배다리골이다.
어떤 신기한 기운이 족제비 떼를 시켜 그에게 명당 터를 일러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명당이란 개념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법도 해보인다.
좌우지간 이렇게 집터를 고른 선교장 집안은 1760년께 집을 짓기 시작했고,
이 집이 점점 커져 지금의 선교장으로 진화해갔다. 그럼 이 집이 얼마나 큰 집인지,
왜 진짜 부잣집으로 꼽히는지 돌아보자.
선교장은 전면이 통째로 집으로 이어져 있다. 집은 무지하게 앞면이 길고
그 앞에는 우물이 있다.
이 집 앞쪽으로 수구(水口)가 넓게 벌어져 있으므로 선교장은 집 방향을 남서향으로 틀었다.
그리고 열린 수구를 비보하기 위해 긴 건물로 닫힌 형태를 만들어
풍수의 약점을 보완하려 했다. 흥미로운 점은 입구부터 나온다.
저 사진 오른쪽으로 대문이 보인다. 이 집은 앞서 말했든 집안에 문이 12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인 대문은 하나가 아니라 2개다.
집 앞쪽이 이렇게 길게 처리되고 대문이 2개가 있다는 점에서
선교장은 창덕궁 낙선재와 비슷하다.
저 평대문 말고 더 멋진 솟을대문이 그 옆쪽에 있다.
자, 여기가 가장 중요한 이 저택의 대문이다.
이 솟을대문으로는 남성들과 손님들이, 옆쪽 평대문으로는 가족들과 여성들이 드나들었다.
조선 시대의 사회구조를 문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럼 문으로 들어가보자. 도대체 얼마나 큰 집인지.
들어가면 또 문이다. 이 문 너머로 사랑채 공간이 있다. 언뜻 문 사이로 봐도 넓다.
선교장은 남성들의 공간이자 손님을 만나는 공간인 사랑채가
그 어떤 집보다도 크고 중요했던 집이다.
그래서 다른 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랑채가 크다.
그 이유는 이 집안이 손님을 환대하고 교류하는데
전국에서 가장 신경을 쓴 집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옥들과 가장 비교되는 부분이 사랑채가 집 한 채가 아니라
무려 3채나 된다는 점이다.
작은 두번째 문을 지나 사랑채 마당으로 간다. 정말 길다.
입구에서 보았던 그 긴 전면 건물이다. 행랑 건물인데,
행랑이 줄지어서 있어서 ‘줄행랑’이라 부른다. 이 무지하게 긴 행랑채는 모두 23칸이다.
우리나라 집의 규모를 세는 단위는 칸(기둥과 기둥 사이)인데,
가장 작은 집은 3칸짜리다(초가삼간 같은).
이 행랑 건물은 작은 세칸집 8채를 붙여지은 수준이다.
저 행랑채에서 사랑채 마당을 바라보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저 맞은 편 건물,
딱 보기만 해도 이상해 보인다.
한옥 건물 앞에 뭔가를 붙였다. 그 모양이 생소하다. 저건 뭘까?
저 앞에 붙인 부분은 햇빛을 가리는 차양이다. 마치 한옥 같지 않아 보인다.
외국 양식을 한옥에 혼합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저런 집이 아주 드물 뿐, 우리 전통 건축 양식 중 하나다.
가령 창덕궁 연경당의 선향재의 경우 이보다 훨씬 큰 차양을 달았다.
▲ 창덕궁 선향재. 건물 전면에 큰 차양을 달았다.
출처=문화재청 누리집 선향재말고도 서울 종로의 윤보선 전 대통령 고택에도
저렇게 차양을 댄 건물이 있다.
그런데 선향재와 윤보선 고택 차양은 모두 나무로만 만들었다. 반면,
이 건물의 차양은 지붕을 구리로 했다.
구리는 엄청나게 비싼 재료다. 구한말,
이 선교장의 초청으로 방문했던 러시아 공사가 답례품으로 선물한 구리로
저 차양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독특한 선교장 안에서도 가장 독특한 건물이 ‘열화당’이다.
가족끼리 모여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집이란 뜻이다.
열화당이란 이름은 아마도 미술이나 책을 좋아하는 분들께는 낯익을 것이다.
미술전문출판사로 유명한 출판사 열화당의 이름이 이 건물에서 따왔다.
열화당 이기웅 사장이 선교장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열화당이 선교장의 사랑채 3종 세트의 으뜸이다. 큰사랑으로,
여기서는 손님들과 선교장 주인이 이야기도 나누고 중요한 손님이 숙식을 하고,
토론도 하고 파티도 했다.
선교장은 사랑채가 3개여서, 손님의 등급을 보고 머물 숙소를 정해줬다고 한다.
저 열화당 옆으로 중사랑이 있는데,
이 중사랑에 집사가 머물면서 손님이 찾아오면 이야기를 나누면서
집안 내력과 학식을 테스트한 뒤 가장 뛰어난 손님이면 당연히 저 열화당으로,
중간급이면 중사랑으로, 그리고 좀 처지는 사람이면 아래사랑에 방을 내줬다.
그 아래사랑이 바로 우리가 본 길디 긴 행랑 건물이다.
23칸, 다시 봐도 길다.
일반적으로 조선 양반집에서 행랑은 하인들 숙소와 마구간, 창고 등으로 쓰는 건물이다.
그러나 선교장 행랑은 사랑채 기능을 했다. 열화당에 찾아오는 손님은 물론,
선교장이 불러 온 각종 전문인력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도대체 손님이 얼마나 많았기에 이렇게 손님 공간을 크게 마련했을까?
선교장은 손님 환대 전략으로 집안을 키웠다. 강원도는 한양을 기준으로 볼 때 변방이다.
이 변방에서 선교장이 명성을 유지한 것은 ‘문화적 소통’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 양반들 최고의 유람 코스는 관동팔경과 금강산이었다.
강릉 선교장은 바로 그 길목에 있었다.
당대의 인사들이 찾아와 선교장에 머무는 것이 코스가 되었다.
워낙 환대해주고 문화적 분위기가 좋았다고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손님들은 선교장을 문화 인맥의 핵심이자, 한양 정계와 이어주는 존재들이었다.
선교장이 얼마나 손님을 잘 치렀느냐면 절정기에는 손님용 밥상 소반만 300개가 넘었고,
머물다 떠나는 이들에겐 일일이 옷을 한 벌씩 만들어줬다고 한다.
그래서 옷 만드는 침모용 건물이 따로 있을 정도다.
이렇게 전국 곳곳에서 찾아온 손님들은 사랑에 머물다가 떠날 때에는
글이나 그림을 남겨 환대에 보답했다.
지금의 선교장 곳곳에 있는 명필들의 글씨와 그림들이 모두 이런 사랑손님들의 작품들이다. 낮은 급 손님은 때가 되면 상차림의 국과 밥의 그릇 위치를 바꿔
알아서 떠나달라고 힌트를 주었다고 한다.
건축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저 길고 긴 행랑은 특별한 효과를 내는 장치라고도 볼 수 있다.
선교장은 도면으로 보면 뜻밖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행랑채 건물이 뒤쪽 건물들과 수평을 이루지 않고 비스듬히 틀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사다리꼴이다.
집을 지을 때는 직사각형으로 만드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우리 한옥들을 보면 뜻밖에도 한쪽이 비스듬한 사다리꼴 구성들이 의외로 많다.
조선 사람들은 굳이 정확하게 각을 잡고 정확한 대칭 구조를 만드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선교장에서 행랑 각도를 본채와 평행으로 하지 않은 정확한 이유는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건축 전문가들은 시각적 효과 때문일 것으로 분석한다.
행랑채를 열화당 쪽으로 더 좁아지게 배치해 중사랑 쪽 마당이
너무 휑하게 넓어 보이지 않게 만들었으리라는 추정이다.
실제 이 마당에서 보면 줄행랑 건물이 비스듬한 것인지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다.
이런 배치는 조선 왕실의 궁궐인 창덕궁의 인정문 앞마당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경우는 지형적 요인을 시각적으로 보완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실제 인정문 앞마당에 가보면 양쪽 끝의 거리가 멀어 너무나 자연스럽게 공간 구획이
평행으로 이뤄진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이 사랑채 건물 3개가 몰려있는 공간 뒤로는 근사한 쉼터 건물도 따로 있다.
집 뒷산으로 이어지는 경사지를 계단식으로 단을 내고 그 위에 초가지붕을 얹은
정자도 되도 숙소도 되는 집을 지었다.
일부러 기와를 얹지 않고 초가로 한 지붕이 더욱 정겹다.
(이 근사한 집과 아래 긴 행랑채는 여행자 숙박이 가능하다.)
그럼 이제 남자와 손님들 공간을 봤으니 여성과 가족들의 공간 안채로 갈 차례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 개인적으로 선교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문 안에 또 문, 그리고 그 문 안에 다시 문이 보인다. 반대쪽에서 보면
또 다른 느낌의 풍경이다.
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들의 높이가 서로 다르게 배치되어
그 느낌이 사뭇 색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우뚝 올라서 앞을 굽어보는 오른쪽 건물은 안채와 붙어있는 동별당이란 건물이다.
이 건물은 현판이 일품이다.
‘오은고택’. 한국 최고의 서예가로 꼽혔던 여초 김응현의 글씨다.
선교장에 머물렀던 여초가 선사한 것이다. 그리고 이 건물은 독특하게 건물 아래
기단부에 작은 쪽문이 달렸다.
무엇에 쓰는 문일까? 수납공간?
열어보면 알게 된다.
저 문은 건물 아궁이 출입문이다.
세상에, 저렇게 작은 문으로 저 비좁은 아궁이 공간을 드나들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게 신분 계급 사회다. 당시 하인들에겐 저런 것이 일상이었다.
이 동별당 건물에서 안채를 바라보면 개인적으로
선교장에서 두번째로 좋아하는 장면이 나온다. 안채 건물의 변화하는 지붕 선이다.
지형에 따라 건물과 지붕 높이가 삼단으로 꺾이는 모습이 근사하다.
이 건물이 안채다. ㄱ자로 꺾어져 있는데 정면을 바라보는 쪽이
당연히 여성들의 대장인 안방마님의 숙소이고,
그 옆으로 꺾이는 부분에 며느리가 산다.
안방마님의 방에는 어딘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아래 사진에서 찾아보시라.
자세히 보면 방 구조가 2겹이다. 앞쪽에 넓은 방이 있고, 그 안에 다시 좁은 방이 있다.
왜 이렇게 했을까? 앞쪽 방이 주인인 마님 방이다. 뒤쪽은 하녀의 방이다.
하녀는 마님 옆 저 방에서 마님과 함께 잤다. 중간마다 심부름 해야 하니까?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하녀가 마님 옆에 자는 주된 이유는 마님이 잠들 때까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하녀는 곧 ‘인간 텔레비전’이었던 것이다. 역시 신분사회의 모습이다.
온 김에 부엌도 보자. 뒤쪽에 돌담을 만들어 부엌에서 보이는 풍경이 액자처럼 멋지다.
경주 최부자댁 구경하기
행정구역으로 울산광역시 두서면 활천리에 서 있는 경주최씨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묘지안내석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소재해 있는 최 부잣집의 파시조(派始祖) 최진립이
살았던 "충의당(忠義堂)"
"충의당(忠義堂)" 의 사랑채
사랑채 앞에는 장군의 6대조인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사당 표지석으로 보이는
대형 석물 한 점이 출토 되어 놓여 있다. 이곳이 사당이 있었다는 사실과 아들 3형제의 이름자가 적혀 있다.
행랑채에 걸려있는 멋진 글씨의 현판과 안뜰에 둘러쳐진 담장.현판의 글은 중용(中庸)의 신사명변(愼思明辨)을 인용하였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판단하라"
기와담 사이의 문양들. 귀면(鬼面),천년(千年)의 미소.......
충의당의 사당
경주 교동의 최 부잣집
대문과 행랑채
100여명의 식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경주 최부자 집의 사랑채.본래 최 부자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
1970년에 화재로 소실된 사랑채는 근래에 새로 지어졌다.
교동법주의 담장길........ 최 부자집과 담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주(家酒)를 빚는 교동법주가 있다.
경주 최 부자집의 300년간 내려온 부(富)의 비밀
아래 내력들을 자세하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속담에 부자 3대를 못간다는 말이 있지요. 과연 그럴까요??
*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높고 귀한 지위에 있는 인사들이
자신의 신분에 맞는사회적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진다는 뜻
2005년12월20일 (주)황금가지에서 발행하여 읽었던
경주 최부잣집의 富의비밀이라는 책을 올해 다시한번 읽었다.
1600년대 초 경주 지방에서 처음 가문을 일으킨 최진립장군에서
광복 직후 모든 재산을 바쳐 대학을 설립한 최준까지,
10대 300년 동안 거부로 이름을 떨친 경주 최 부잣집 이야기...
나는 어려서 가난하게 자라서인지 부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부지런하면 하늘도 감동하여 작은 부자로 태어날수 있다고
지금까지 나는 믿고 있는 사람중의 한사람이다..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가문이 경주 최부자 집안이다.
부자가 3대 가기 힘들다는 옛말이
무색하게 경주 최부자 집안은
무려 300년 12대 동안 만석의 재산을 유지했다.
이렇게 장기간 한 집안이 부를 유지한 사례는
전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나도 부자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옛날 서울식품 사장님께 명절이면 인사를 다녔다..
옛 사장님께서는 유럽에도 집안의 富가
100년을 넘기기가 쉽지않다고 하시면서 우리나라의
두산그룹역사를 공부하신다고 하셨다...
그러기에 자료를 검토하다가 경주 최부잣집의
부의 비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연말을 맞으면서 다시한번 읽었지만 감동은 잊을수 없다.
내년에 모 방송국에서 경주 최부잣집의 모델로 삼아
드라마로 제작한다고 하니 관심을 가지게 될것이다.
책내용을 보면서 나름대로 최씨 일가의 소박하지만
끊임없는 혁신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그러나 최부자 집안이 칭송을 받는 것은 부를 많이 축적했고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선행과 독립운동의 후원자 역할을 통하여
지도층으로서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씨 가문은 부자가 천당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 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고금을 막론하고 부자가 존경받기는 어렵지만,
부자로서는 드물게 존경과 칭송을 받았다.
최부자 가문의 기본적인 생활지침은
육연(六然)이라는 가훈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최부자 집안의 가훈은 육연 외에도 보다 구체적인 행동지침으로 제시.
권력까지 가질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 되겠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양반으로서의 신분은
유지하되 권력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과거를 보라는 것은 학문을 가까이 하여
지적능력을 기르라는 가르침이다.
진사는 일명 생진(生進)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조선시대에 생원과 진사를 뽑았던
소과(小科)에 급제한 것을 일컫는다.
때문에 생원이란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기 보다는
신분상 선비로서 사회적 공인을 받는다는 의미가 컸다.
이를테면 생진과보다 더 높은 과거에
급제하여 권세의 자리에 있게 되면,
그것은 마치 작두 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으므로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최소한의 지위는 필요하나 권력까지는 안되.
(2)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마라.
대단히 역설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집안을 존경받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가르침 때문이다.
최부자의 후손들은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부에 대한 욕망을 절제해야 했다.
그들은 이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다른 부자집들이 70% 정도
받던 소작료를 40%로 낮추어 부의 혜택이 자연스럽게
남들에게로 퍼져나가게끔 하였다.
경주 일대의 소작인들이앞다퉈
최부자 집 농사를 지으려고 줄을 섰으며,
수많은 소작인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였고
최부자집의 재산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데
최 부자가 논을 사면 박수를 치지 않았을까.
말하자면 윈-윈(win-win) 전략의
선구자적인 실천이었던 것이다.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최씨 집안의 셋째 원칙은지나가는
손님을 후하게 대접함으로써
덕을 쌓고 인심을 얻으라는 가르침이다.
과객(過客)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여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선행을 베푸는 것이기도 하지만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정보 전달자 역을 하던 과객들을 통해
최씨 집안은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지역의 민심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한 대접을 받았던 이들은 조선팔도에
최 부자집의 인심을 소문내고 다녔는데,
‘적선지가(積善之家:선을 쌓는 집)’란
평판은 사회적 혼란기에도
이 집을 무사할 수 있게 만든 비결이기도 했다.
동학 이후에 경상도 일대에는부자집을 터는 활빈당이
유행해서 다른 부자집들은 대부분 털렸지만
최 부자집 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 집의 평판을 활빈당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렸을때 이북에서 내려오셨던분의 이야기를 들었던기억이 난다.
주위의 가난이에게 후하게 대접하였더니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죽을 목숨 이었지만 신세졌던
이웃의 도움으로 남한으로 탈출하여
목숨을 보전하였다는 이야기를...
(4)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남의 불행을 치부의 기회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정의로운 경제활동을 하라는 뜻도 될 것이며,
이웃의 원성을 살 일은 하지 말라는 의미도 되겠다.
최부자집은 이웃의 어려움을 통해서 재산을 늘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웃이 어려울 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그들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흉년이 들면 수 천명씩 굶어 죽던 시대에,
흉년은 없는 사람에게는 지옥이었지만
있는 사람에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절호의 기회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헐값으로 내놓은 전답을 매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급하니까흰죽 한 그릇 얻어먹고 그 대가로
팔게된 논을 말하는''흰죽 논''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 부자 집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이는 가진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렇게 얻은 인심은 다른 기회에 재산을
늘리는 데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런 금기는 또 있었다.
‘파장 때 물건을 사지 않는다’ 가 그것이다.
석양 무렵이 되면 장날 물건들은
값이 뚝 떨어지기 마련이다.
다른 부자집들은 오전에는 절대 물건을 사지 않고
파장 무렵까지 ‘떨이’ 물건을 기다렸으나,
최씨 집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항상 오전에 제값을 주고 물건을 구입하였다.
그러다 보니 상인들은
제일 질이 좋은 물건을 최 부자 집에 먼저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러한 최부자집의 재물에 대한 철학은
부를 축적하는 데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이 어려울 때를 축재의 기회로 삼는 요즘 기업인들에게도
크게 교훈이 되는 가르침이다.
(5)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이웃과 나누라는 가르침이다.
그것도 사방 백리안의 이웃과 나누라는
것은 그 스케일 면에 있어서도
로마제국 귀족들의 선행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규모이다.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100리를 살펴보면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에서 서로는 영천까지이고,
남쪽으로는 울산이고 북으로는 포항까지 아우른다.
최부자집은 춘궁기나 보릿고개가 되면
한 달에 약 100석 정도의 쌀을 이웃에 나누어 주었고,
흉년이 심할 때에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가
바닥이 날 정도로 구휼을 베풀었다고
한다.
최 부자집에서 1년에 소비하는 쌀의 양은
대략 3000석 정도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1000석은 식구들 양식으로 썼다.
그 다음 1000석은 과객들의 식사대접에 사용했다.
그리고 나머지 1000석은 빈민구제에 썼다는 것이다.
최씨 집안의 이러한 전통은
1대 부자인 최국선의 선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최국선은 신해년(1671)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지켜서 무엇 하겠느냐"며
곳간을 헐어 이웃을 보살폈다고 한다.
그 이후''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는 가르침이 가훈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6)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 온 후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조선시대 창고의 열쇠는남자가 아니라
안방 마님이 가지고 있던 시대였다.
그런 만큼 실제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의 절약정신이 중요했다.
집안의 살림을 사는 여자들에게
근검 절약하는 생활을 강조하는
이 가르침은 자신들에게는 박하고 엄격하게,
타인들에게는 후하고 자비롭게 대하는
최부자집 생활철학의 진수이다.
또한,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는데,
이렇게 교육받은 후손들이 재산을 낭비할 리 없으므로
이 교훈이야말로 300년 동안이나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비결이라고
하겠다.
최부자집의 부는 마지막 부자인 최준의 대에 와서
길고 긴 300년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나 그것은 부의 끝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공헌의 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 운동가였으며 오늘날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설립한 교육 사업가로서
우리의 근대사에 독특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당대의 거부이면서도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관계하면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최준과 그의 둘째 동생인 최완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최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일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1921년 35세로 순국했다.
그는 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아래와 같다. .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
.
'문화와 예술 > 한국의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자기 보물-陶磁器 寶物 (2) (0) | 2012.12.18 |
---|---|
도자기 보물-陶磁器 寶物 (1) (0) | 2012.12.12 |
Endeavour의 고별비행 (0) | 2012.10.17 |
비내리는 경주 양동마을 (0) | 2012.09.15 |
고화질로 찍은 독도사진 (0) | 2012.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