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활동의 일부로 한국의 밀래,
서민화가 박수근의 여러가지 재미있는 유품과
연애편지도 같이 올립니다.
박수근과 양구
박수근 선생은 1914년 강원도 양구 정림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보통학교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12세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깊은 감동을 느껴 그와 같은 화가가 되기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후 가세가 기울면서 생활은 곤궁해졌지만
박수근 선생은 가난한 서민들의 소박한 삶을 그리는 화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양구는 박수근 선생이 평생을 바쳤던 그림에 대한 열정과 꿈이 시작되었던 곳입니다.
그가 수없이 스케치했던 나무와 일하는 여인, 나물 캐는 아낙, 빨래터...
양구는 그 모든 흔적을 담고 있으며 맑고 깨끗한 자연만큼이나
선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아름다운 부부,
박수근 화백과 김복순 여사의 잔잔하면서도 아득한 부부애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저와 같은 무지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부러운 부부가 아닐수 없습니다.
제1전시관 기획전시실
제1전시실
'사진엽서속의 박수근 그림읽기' (2012.7.25~10.7)
일제치하, 한국전쟁속의 화백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사진기의 보급이 대중화되어 있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었기에 화
백은 일제 당시 엽서를 수집하였고 이를 작품활동에 참고를 하였습니다.
대중적이지 못한 카메라에 더하여 일제는 칼라카메라는 들여와 사진 촬영을 하였습니다.
이는 어찌 보면 '백의민족'이라는 우리네 순수의 '색(色)'을 칼라로 촬영함으로서
우리만의 색을 없애려는 의도와 민족성을 평가절하 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하지요.
그러함 속에서 화백은 소박한 한국만의 서민들을 담고,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정서를 담아내는 데 노력하였습니다.
박수근 화백상
박수근 미술관 전경
박수근 미술관 제2전시관
제2전시관 앞에 자리한 생태연못분수대
정림리 창작스튜디오
박수근 미술관을 빠져 나오면 만나게 되는 또 하나의 미술관입니다.
2012년 10월 현재 인근의 초등학생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정림리 갤러리는 박수근미술관의 또하나의 전시관으로서 개인전이 열리는 공간이기도 하며,
공개 전시, 영화상영등을 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특히 월 1회 마을 어르신들을 초청하여 부침개와 막걸리로 잔치를 열어
전시관의 오프닝을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박수근 화백, 김복순 여사 그리고 장녀 박인숙 명예관장님
아마도 벌이가 좋았던 PX 초상화를 그리면서 번 돈으로 마련한 창신동에 마련한 집인듯 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집의 마루를 화백의 작업공간으로 삼았다고 하지요.
가득 자리한 화백의 작품은 한 점 팔아 쌀을 사다 끼니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출처 : 박수근미술관 홈페이지
박수근 나무
박수근 나무
양구보통학교 뒷동산이었던 곳에 보통학교 시절
박수근 선생이 자주 그렸던 300년 수령의 느릅나무 두 그루가 있습니다.
양구군에서 보호 관리하고 있는 이 고목들은 양구 교육청 뒤편에 위치하고
▶ 박수근화백 기념공원
비봉산 등산로 초입에 위치한 비봉공원 박수근화백기념공원에는 1990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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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민의 화가 박수근의 작품 세계 / 1950년대 작품들 **
박수근 선생은 이름없고 가난한 서민의 삶을 소재로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고자
일생을 바친 화가입니다.
그는 단순한 형태와 선묘를 이용하여 대상의 본질을 부각시키고,
서양화 기법을 통해 우리 민족적 정서를 거친 화강암과 같은 재질감으로 표현해냄으로써
한국적인 미의 전형을 이루어냈습니다.
우리 민족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던 그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구현한 서민화가이자 20세기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002년 10월 25일 박수근 선생의 생가에 건립된 박수근미술관은
작가의 작품세계와 예술혼을 기리는 동시에 지역의 대표 문화공간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박수근 선생의 소박한 삶과 작품세계를 연구하고 이를 전시,
교육, 출판사업 등 을 통해 재조명하고 있으며,
역량있는 작가들이 창작활동에 몰두할 수 있도록 창작스튜디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박수근미술관은 박수근 선생의 손길이 담겨있는 유품과 유화,
수채화, 드로잉, 판화, 삽화 등 여러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를 선별하여 상설 전시 하고 있습니다.
또한 박수근 선생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근 현대 한국 화단의 주요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를 기획 전시하고 있습니다.
나무와 두 여인
우물가(집)
빨래터
박수근(1914-1965)의 삶과 예술은 '서민의 화가'라고
한마디로 요약된다. 그는 곤궁한
시절에 힘겹게 살아갔던 서민화가 그 자체였다.
1914년 강원도 양구 산골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가난 때문에 국민학교밖에 다닐 수 없었
다. 6.25동란 중 월남한 그는 부두 노동자,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 귀로 : 1953 ]
[ 금강역사 : 1954 ]
[ 기름장수 : 1953 ]
[ 꽃 : 1956 ]
[ 꽃 : 1957 ]
[ 나무 : 1959 ]
[ 나무와 두 여인 : 1956 ]
[ 노상 : 앉아있는 여인 ]
[ 노상 : 1955 ]
[ 노상의 여인들 : 1950년대 ]
[ 마을 풍경 : 1955 ]
[ 복숭아 : 1957 ]
[ 빨래터 : 1954 ]
[ 석류 : 1954 ]
[ 아기보는 소녀 : 1953 ]
"하느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
- 박수근의 12세 무렵 소망
김병종의 <화첩기행2>이란 책을 보면 화가. 박수근을 '선한 이웃을 그리고 간 한국의 밀레'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참으로 그럴 듯한 말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부족한 말이다. 그 이유는 화풍이 그와 달라서만이 아니라 '박수근' 그 자신 역시 몹시도 선한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박수근은 12세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도 커서 저렇게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박수근의 그림들을 보면 어딘가에서 할아버지의 넓고 아득한 품에 안겨 잠든 채 집까지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인생이 그다지 풍족하지 못했음에도 아니 너무나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던 적도 여러번이었음에도 그의 그림에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품격과 함께 천진난만한 손주의 목소리가 듬뿍듬뿍 묻어나는 느낌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귀로
귀로
연애편지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 편지를 보내오니 용서하시고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 부농가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고운 옷에 갓신만 신고 자랐습니다. 그런데내가 일곱살 되던 해 아버지의 광산 사업이 실패하고 물에 전답이 떠내려가서 우리집은 그만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5세 때 서당에 다녔고 7세 때 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나는 보통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께서 유암으로 오래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셔서 동생들과 아버지를 어머니 대신 돌봐야 했기에 고학이라도 해서 미술학교를 다니려 하던 꿈은 그만 깨어져 버렸습니다.
나는 춘천과 서울로 다니면서 그림공부를 독학했습니다. 지금까지 다섯번 선전에 입선을 했습니다. 선전(鮮展)에 처음 처녀 입선한 것은 내가 18세 때였습니다.
지금까지 춘천에서 그림공부를 하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오니 부모님께서 윗집 처녀에게 장가들라고 권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번 거절했습니다. 내가 더 성공해서 결혼할 생각이었으나 부모님께서 하도 권하셔서 나는 당신에 대해 내동생 원근(元根)이와 동네 사람들에게 알아보았습니다.
일전에 당신이 우리 어머니와 빨래하러 같이 갔을 때 어머니 점심을 가져간다는 핑계로 빨래터에 가서 당신을 자세히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려고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그림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론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귀여운 당신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은 당신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나는 나혼자 당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나의 이 숨김없는 고백을 들으시고, 당신도 당신의 심정을 솔직히 적어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이 연애편지는 1939년 겨울 춘천에서 고향 양구로 돌아온 그가 자신의 아내가 된 김복순(金福順) 여사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연애편지는 처녀의 아버지에게 발각되고 처녀는 춘천의 의사집과 급하게 혼례를 추진하게 된다. 이에 낙담한 박수근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고, 이에 놀란 박수근의 부친은 그 처녀의 집에 가 담판을 짓게 된다. 김복순 여사의 부친은 혼례를 승낙하며 소리내어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어 화가 박수근은 김복순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된다. 그녀는 박수근의 처음이며 마지막인 유일한 모델이었고, 사랑이었고 생애의 모든 것이었다. 결혼한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부러운 부부의 전형을 꼽으라면 나는 이 박수근·김복순 부부와 김성칠·이남덕 부부(이들 부부에 대한 이야기는『역사 앞에서』/창작과 비평사/1993 을 읽어보시길), 그리고 화가인 장욱진·이순경 부부를 들고 싶다.
귀로
모자
모녀
아기업은 소녀
아기보는 소녀
풍경
농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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