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역사자료,여행지/여행지를 찾아서

대구 근대화골목에서 잊혀진 추억과 삶을 찾다온 봉산 문화거리

까까마까 2012. 11. 28. 15:48

 

 

 

 

대구떠난지 십년이 넘다보니
저곳이 어딘가 합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다녔던 그 시절
저 거리는 분명
대구학원 유신학원 종로학원
있던 그 동네였던듯요

그 시절의 반월당이
그립습니다(펌)
^^

낯선 대구 봉산동 사진

 

 

 

 

 

 

대구 근대화골목에서 잊혀진 추억과 삶을 찾다

 

 

 

 

대구 골목투어는 신문과 방송에 소개되어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습니다. 대구에서 회의차 내려가는 길.

이번엔 필히 들려보리라, 다짐을 하고 대구로 향했고, 그리고 대구 근대화골목길 투어에 나섭니다.

의료선교박물관을 시작점으로 하여 민족저항 시인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3.1운동길, 계단성당등 대구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대구 근대화골목의 첫번째 방문지인 청라언덕입니다.

청라언덕 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푸른 담쟁이 덩굴이 많아서라고 합니다.

대구동산병원이 1899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 대구동산병원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 15호로 등록된 문화유산입니다.

병원의 담장올라간 넝쿨나무 입니다.

저 넝쿨나무가 물드는 가을에 찾아오면 참 볼만할 것 같습니다.

청라언덕에 있는 선교사 주택입니다.

일명 3.1운동길이라고도 불리우고, 90계단길이라고도 불리는 계단 앞에 섯습니다.

계단길에 서면 바로 계산성당이 보입니다.

계단을 내려와 다시한번 눈에 담아둡니다.

대구 계산성당에 도착했습니다.

오늘이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안에서 예배도 있고, 어떤 분의 결혼식도 있는 모양입니다.

제가 찾았을때 정말 많은 진사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셔 사진기의 셔터 연신 누르고 계시더군요.

이곳 계산성당은 전주의 전동성당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성당으로 불리우는 성당입니다.

이곳 계산성당을 지은지가 100년이 넘었고, 대한민국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성당안에서 예배를 보는분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성당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밖에서 본 성당 스테인드글라스입니다.

이곳 계산성당안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특이하게 한복을 입은 한국인이 새겨져 있는데

초기 대구의 천주교신자, 한국성인상이라고 하더군요.

십자가 참 많죠..ㅎㅎ

하지만 정 가운데있는 십자가는 대구 제일교회의 십자가의 모습입니다.

계산성당을 나와 우측으로 이동하니 벽에 타일로 이상화선생과 서상돈선생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상화고택으로 향하는 보도블록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으니

참고해서 보시기를...^^

보도블록의 글씨가 끝날때쯤 만나게 되는 이상화선생의 초상화입니다.

골목길을 걷는 아버지와 딸의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이상화고택과 서상돈고택에 들어섰습니다.

이상화고택 안으로 들어오니 예전에 우물가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 보입니다.

한여름 무더위때 저 우물에서 올린 물로 등물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대한민국 해방 2년을 앞두고 돌아가신 이상화선생의 조각입니다.

그리 크지않지만 단아하고 소박한 선생의 인품이 느껴지는 고택입니다.

이상화고택 옆에 설치된 전시실실서는 대구의 근대화 사진전이 열리고 있더군요.

고택뒤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사진찍을때 저 브이 모습...ㅋㅋ

그리고 그 옆에서 심통난 얼굴을 한 사내아이의 표정에 웃음이 납니다.^^

이곳 대구 근대골목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99곳’에 뽑혔다고 하니

혹시 못가보신 분은 꼭 한번 다녀오시기를...^^

대구 근대골목 여행 순서는 청라언덕->3.1게단->계산성당->이상화고택 순으로 여행하시면 좋습니다.

 

 

 

 

 

 

 

 

 

대구 봉산 문화거리에서 만나는 풍경들

 

 

 

이천을 출발해서 안성에서 잠시 여행의 즐거움을 즐기고,

천안아산역에 차를 주차하고 대구행 ktx에 올라, 동대구역에 도착해서

이곳 반월당역 도착하니 회의시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때는 이때다! 싶어서 가방에서 카메라를 빼내어 거리를 걷기 시작한다.

이곳 대구 봉산 문화의거리 중심에 내가 가고자하는 회의장소가 있다.

이곳에서 오늘 처음 회의를 하는 것도 아니다.

몇차례 이곳에서 회의를 하면서 내가 언젠가 기필코 이곳을 담고 말꺼야! 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가 온것이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 않았는데,

오늘은 봉산문화회관에서 무슨 행사가 있나보다.

거리를 걷다가 만나게 되는 꽃들!

수목원이나 식물원에서 보는 꽃들과 이곳 도시의 한복판에서 만나는 꽃이 왜이렇게 이쁠까!..

커피한잔이 생각나게 하는 예쁜 커피점도 많고..

하지만 내게는 그럴 여유는 없고...

공방을 꾸며놓은 것이 이뻐서 사진을 찍고 있으니

주인 아주머니께서 나에게 인사를 건낸다.

서울 인사동거리 축소판이라는 느낌

상가 창가마다 이렇게 예쁜 장식들로 꾸며져있어서 그 소소한 풍경이 좋다.

작은 골목길안에도 공방들이 자리를 잡고있다.

종을 치라는 얘기같은데, 종이 보이지를 않는다. ㅠ.ㅠ

하나사서 빵님께 선물이나 해볼까?..하다가 왠지

쑥스러워서...포기..ㅋ

주전자 모양들도 참 많네..

내가 들어가보고싶었던 카페,

하지만 꾹! 참고 회의장소를 아주 천천히 찾아간다.

갤러리를 들어갈까 하다가...

설마 무료는 아니겠지?..실은 잘 몰라요. 무료인지?..유료인지..ㅋ

이제 회의장소도 도착했다. 오늘은 과연 몇시까지 회의를 하려나..

회의전에 잠시 걸었던 봉산 문화의 거리,

오늘 회의가 잘되고 빨리 끝나기를...^^

 

 

따뜻한 햇살이 퍼지는 이 언덕은 천천히 산책하면서 돌아볼 것이 많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지냈던 집 앞에 있는 작은 공동묘지 은혜정원에는 한국에 뼈를 묻은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다.

종교를 초월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전한 선교사들의 사랑과 열정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음을 느끼면서 감탄하고 깊이 감사 하게 되었다.

 

 

 

 

 

대구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우뚝선 대구제일교회

멋지고 거대한 건물이 아직도 깨끗하게 사용되고 있다. 제일교회는 대구 최초의 기독교 교회이기도 하지만

제중원(동산병원의 전신)을 세워 의료 활동을 펼쳤고 대남학교, 신명여학교를 설립해 대구 지역의 근대 교육을 이끌었다.

선교사들은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포교와 함께 근대적 의료 및 교육을 전개했다.

 

 

 

 

 

 

 

 

 

 

 

 

 

 

 

 

 

제일 교회 옆에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긴 계단 길이 있다. 그계단은 3.1 만세운동길이라고 한다.

90계단길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학생들이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지나 다녔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곳이 중심가와는 떨어진 우거진 숲길이었을 테니까,

 

 

 

 

90계단을 걸어 내려가 큰 길을 건너면 우리나라에서 세번째로 지어진 계산성당이 있다. 대구대교구 주교좌성당인 계산성당은

서울의 중림동 성당(약현성당) 명동 성당 다음으로 지어진 고딕식 성당으로 내부는 명동성당과 비슷하다.

게산성당은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사제서품을 받은 곳이다. 그리고 육군 소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한 곳이기도 하다.

 

 

 

아 참! 이 나무는 계산성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데 유명한 근대화가로 이인성화백의 나무로 알려져 있다.

 

 

 

 

 

 

 

마당에는 정겨운 장독대와 오래 된 나무가 암울했던 시대, 민족의 독립을 꿈꾸던 이상화의 마음을 전해 주고 있다.

이상화 고택 맞은 편으로 서상돈(徐相燉, 1851년 - 1913년)은 조선 말기의 기업인, 공무원이다.

대구에서 지물(紙物) 행상과 포목상으로 성공한 인물로,

정부의 검세관(檢稅官)이 되어 정부의 조세곡을 관리하기도 하였다-위키백과). 고택이 있다.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분으로 유명하다. 국채보상운동이란 (1907년에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대구 광문사 사장인 김광제(金光濟)와 함께 대구에서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회를 조직하고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위키백과)

서상돈은청라언덕에 자리 잡은 제일교회와 대구 계산성당터를 기증한 대구의 거부이기도 했다.

이상화와 서상돈 두 분다 대구의 부호여서 집이 컸지만

지금은 아담한 기와집으로 그분들의 흔적을 보여줄 뿐이다.

 

 

 

 

 

 

 

 

 

 

 

 

 

 

 

 

 

 

 

 

 

 

 

 

 

 

 

 

 

 

 

 

 

소설가 김원일씨의 마당 깊은 집의 모델인 작은 기와집과 골목근처에는 소설의 내용을 그려놓았다.

전쟁통에 남쪽으로 내려와 다가구 생활을 하면서 겪는 서민들의 애환을 그린 작품으로

그 제목을 기억하고 있던 차라 반가웠다.

 

 

 

 

 

 

 

 

 

 

 

 

 

 

 

 

 

 

 

 

 

 

 

 

 

 

 

 

 

 

근대화 골목길은 대구시의 명물인 약령시장에서 큰길로 바뀌었다. 약전골목(약령시)으로 이어지는 길은 한약향기가 가득하다.

약령시는 조선시대부터 국내 제일의 한약재시장이였을 뿐만 아니라 해외 시장의 한약재 유통의 거점역할을 했으며

약전골목길을 걸어 나와 경상감영공원을 질러 나간다.

 

 

 

 

 

 

 

 

 

 

꼬불한 골목길이 이어지는 곳에 수제화 구두 가게들이 이어져있다.

점점 더 허름해지는 길골목길을 따라가면 근대문화와 문학을 이끌던

문인들과 저명인사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드나들던 찻집, 출판 기념회를 했던 곳들...

 

 

 

 

 

 

 

 

 

 

 

 

 

 

 

 

 

 

 

 

 

 

 

 

 

 

 

 

 

 

 

 

 

 

향톤동에는 이효상, 구상, 화가 이중섭 같은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 예술인들이 드나들던 찻집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은 나이

드신 분들만 오가는 골목길이 되었다. 과거의 흔적을 더듬던 향촌동길을 나오면 동성로 젊음의 거리로 연결되는 큰 길이 나온다.

근대화 거리의 마지막 여정으로 한국최초의 음악감상실 녹향을 찾았다. 1090년대 전쟁 시기에 많은 지식인과 문화인들에게 클래식

음악의 고향으로 자리 잡았던 녹향은 시대와 더불어 사양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녹향의 설립자 이창수씨를 이어 세째아들이 운영하고 있는 녹향의 현실은 먼지 덮인 많은 엘피 레코드에서 화려했던 지난날의 시간과 오늘의 간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명한 빅터레코드사의 확성기가 초라한 실내를 장식해주는 곳. 지금은 쇠락하는 녹향을 살리려는 뜻있는 사람들에의해 한달에

두 번정도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대구 근대화의 산역사를 간직한 근대화거리는 역사와 문화, 예술의 자취를 돌아 볼 수 있는 소중한 과거로의 여행길이었다

 

 

 

 

 ■

 

 

 

 

 

 

 일부자료=세상둘러보기와 꿈쟁이의 외딴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