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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돌다리의 옛 사진과 사연들을 모아-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자료

까까마까 2012. 12. 18. 17:44

 

 

 

 

알아두면 유익한 역사적인 자료이며 아주 회귀한 사진입니다.

제일 밑에있는 사진은 전에 올렸던 자료이나 여기 다시 올리니 어울리네요.

옛날에 녹음한 음악자료라

음질과 오캐스트라가 깨끗하질 못하니 양해 바랍니다.

 

 

 

 

 

 

청계천 돌다리의 옛 사진과 사연들을 모아...

 

 

 

 

 

 

 

 

 

 

 

 

 

광통교 도성 내에서 가장 큰 다리로 경복궁 육조거리ㅡ종루ㅡ숭례문으로

 


이어져 남북대로를 연결하는 도성 안 중심통로였고 그 주위에는

 


많은 상가들이 있어 서울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했습니다

 

 

 

 

 

 

 

 

 

 

 

 

 

 

 

 

 

 

닭과 계란을 파는 가게, 갓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대나무를

 


파는 가게, 갓을 파는 가게, 부인의 머리 장식을 파는 가게,

 


부인들의 패물과 가락지 등을 파는 가게, 신발을 파는 가게,

 


, 물감과 중국 과실을 파는 가게, 칠목기와 장롱을 파는 가게,

 


, 잔치 때 그릇을 세놓는 가게, 채소를 파는 가게,

 


솜을 파는 가게, 말총• 가죽• 초 •실 •휴지 • 책 등 잡화를 파는 가게,

 


말안장 • 등자 •굴레 등을 파는 가게,서화와 책을 파는 가게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곳이었습니다

 


. 보신각이 있는 종로 네거리에서 을지로네거리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에 있고 조선시대 광통방 (廣通坊) 에 있던

 


큰 다리였으므로 대광통교 (大廣通橋) 라고도 했습니다.

 

 


조상의 얼이 새겨진 옛 정능의 청계천 돌다리 (광통교)

 

 

 

 

 

 

 

 

 

 

 

 

 

 

 

 

 

 

 

수표교 중구 수표동 43 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20 번지 사이 청계천

 


위에 놓여 있던 다리로 홍수를 방지하기위해 수심을 측정하는

 


수표석주(手標石柱) 를 세웠는데 이 지주는 보물 제 838 호로 지정되어

 


세종기념회관 뜰 안으로 옮겨졌습니다.

 

 

 

 

 

 

 

 

 

 

 

 

 

 

 

 

 

 

 

 

 

 

 

 

 

 

 

 

 

 

위는 보물 838호로 지정된 수표석주(手標石柱)이고

 

아래는 수표교와 함께 촬영된 사진입니다.

 

 

 

 

 

 

 

 

 

 

 

 

 

 

 

 

 

 

 

 

 

 

 

 

 

 

 

 

 

아래는 장춘단 공원으로 옮겨진 뒤의 수표교 입니다.

 

 

 

 

 

 

 

 

 

 

 

 

 

 

 

 

 

 

 

 

 

 

 

 

 

 

 

 

 

 

 

중구 장교동 51번지와 종로구 관철동

 

11번지 사이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입니다.

 

일대는 일찍부터 도성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시전상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며,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사무를 맡아 보던 경주인(京主人)들의

 

본거지였습니다.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 나가는

 

지점에 놓여 있던 다리로 서울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있도록 다섯 개의 아치형으로

 

구멍을 만들었고, 위로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해서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한 다리입니다.

 

 

 

 

 

동대문 옆의 오간수문은 물길이 빠져가기 위해 가설한 다리로

 

조선시대에는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 달아나든가 혹은 밤에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기도 했고 명종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도 이곳으로 났습니다.

 

 

 

1907 일제가 청계천 물이 흘러가도록

 

한다는 미명하에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릴 함께

 

사라지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되었다가 후에 성곽이

 

훼손되면서 자취를 찾아볼 없습니다.

 

 

 

 

 

 

 

 

 

 

 

 

 

 

 

 

 

 

밖에 청계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올립니다.

 

 

 

 

 

아래사진은 일제 강점기 경복궁 동편에 옮겨진

 

공화문인데 청계천에 걸려있는 사진을 감상 하시던 분들이

 

자하문이라며 얘기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고 사진의 사연을

 

설명했더니 숙연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72DEF114CBAD7DF4D

 

 

 

 

 

 

 

 

 

 

 

https://t1.daumcdn.net/cfile/blog/182DEF114CBAD7DF4E

 

 

 

 

 

 

 

 

 

청계천의 지나간 옛 모습들을 다시 본다

 

 

 

 

 

 

 

     

 

 

 

 

 

 

위의 윗 사진은는 대한제국시기, 천변길에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고 있는데,

양반 여인네들이 장옷을 입고 얼굴만 내놓은 채 걷고 있다. 청계천 남쪽을 촬영한 듯 길가 벽에는 창이 보이지 않는다.

 

위의 아래사진은 1900년경으로 '京城名所' 사진엽서다. 종로방향에서 광통교를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광통교는 시전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도성에서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곳 중의 하나였다.

중앙에 광통교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한 난간석이 잘 보인다.
 

 

 

 

 

 

 

 

1904년의 청계천, 상류는 물이 얕고 맑아 빨래를 하려는 주변의 아낙네들이 모여들었다.

 

 

 

 

 

 

 

 

 

 

 

 

대한제국시기, 청계천을 따라 나있는 길 축대 밑에 과일가게가 있고,

그 옆에 곰방대를 쥐고 있는 중년 남성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그리고 지게에 무언가를 담고 가는 지게꾼이 보인다.


 

위의 윗 사진은 일제강점기로 수표교 남쪽을 바라본 사진이다. 수표교 남편에는 양 길가에 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좌측 길모퉁이에 담배를 팔았던 연초煙草(タバコ)가게가 눈에 들어오고, 그 양옆에 약국과 중앙상회지점 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탕반, 탁주, 소주 등을 한자와 한글로 쓴 술집 간판이 보인다.

 

위의 아래사진은 1950년대말~1960년대초의 어느 날 수표교를 찍은 사진이다.

수표교 난간 위의 사람은 사진소장자 본인이다.
사진 속 수표교에는 난간석 1조가 없는데, 소장자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한 상처라고 한다.

 

 

 

 

 

 

 

 

 

 

 

     

청계천에는 지천들이 있다. 위의 윗 사진은대한제국시기로 삼청동천이다. 나무 뒤로 경복궁 건춘문이 가려져 있고,

천변 우물가에 물장수가 물지게를 지고 있다.

 

위의 아래 사진은 1927년, 금청교다. 청계천에 처음 놓인 돌다리로 청계천 상류 부근에

체부동과 통의동, 적선동, 내자동으로 통하는 십자로에 있었다.

     

 

 

 

 

 

 

 

 

광복과한국전쟁 후 서울로 피난 온 피난민들은 청계천변을 따라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청계천변 판잣집은 불결과 빈곤의 상징이었다.

큰 비가 쏟아지면 집을 떠받치고 있던 나무기둥이 불어난 하천에 쓸려가 버렸다.

이로 인해 집 전체가 무너지기도 했다.

한편, 판자촌 거주민들이 버린 생활하수가 그대로 하천으로 배출되어

청계천은 심한악취가 진동하고 각종 쓰레기로 몸살을 앓았다.

 

 

 

 

 

 

 

 

 

청계천변 판자집 1965년

 

 

 

 

 

 

 

 

 

2층, 3층으로 얽혀 지어진 판자집들, 나무 기등위에 의지한 집들은 마치 곡예를 보는 듯하다.      

 

 

 

 

 

 

 

 

 

위의 사진 2장은 일본사진작가 구와바라 시세이가 1965년에 찍은 사진으로

청계천 판자집에사는 주민들의 일상풍경을 담았다.

 

 

 

 

 

 

 

 

 

 

      1960년대말 찍은 사진으로 염색한 천을 말리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대 위에 널고 있다.
청계천변에는 군복을 염색하는 업체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방출된 하수는 그대로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갔다.
이 때문에 청계천 하류의 물빛은 언제나 짙은 회색을 띄고 있었다.

 

 

 

 

 

 

 

 

 

청계천 복개공사 중으로 판자집을 철거하고 있다.

 

 

 

 

 

 

 

 

     1965년의 복개전 풍경이다. 오간수문 밖 하류 청계 6가 청계천변,

열 지어 늘어서 있는 콘크리트 기둥 사이에서 뛰놀며

물놀이하던 아이들은 지친 듯 늘어놓은 콘크리트 파일 위에서 잠시 쉬고 있다.

 

 

 

 

 

 

 

     

고가도로건설모습, 일본사진작가 구와바라 시세이가 1965년에 찍은 사진이다.

 

 

 

 

 

 

     

1967년의 청계고가도로건설, 거대한 교각들이 개발을 상징하듯 보인다.

 

 

 

 

 

 

1965년의 평화시장은 청계천이 오간수문까지 복개되면서 함께 문을 열었다.

이 시장은 1960년대 한국 수출산업의 선구적 역할을 톡톡히 담당했다.

러나 또한 당시 노동자들의 한숨과 분노가 스며 있었으니 1970년 겨울,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한 곳도 이 시장 앞이었다.

 

 

     

1965년 복개된 후 청계천로를 찍은 사진. 중앙에 보이는 가두노점이 인상적이다.


 

 

 

      1968년 세운상가. 종로에서 청계천을 거쳐 퇴계로에 이르는 세운상가.

건축가 김수근씨가 설계한 최첨단 건물이었다.

1~4층은 상가로 하되 1층을 자동차 전용 공간으로 설정하고 대신 3층을 보행자 전용도로로 건설하는

엘리베이터까지 갖춘 주상복합타운이었다.

이 세운상가는 국내 전자산업이 태동할 당시 전자부품이 집결되는 곳으로 70~80년대 청계천을 상징한다.

 

 

 

 

 

 

 

 

 

1967년 대한극장 앞

 

 

 

 

 

 

 

 

 

1973년에 발생한 청계천 판자촌 화재

 

 

 

 

 

자료출처=춘하추동,호시탐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