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역사적 인물의 재조명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의 마을

까까마까 2013. 2. 25. 13:02

 

 

 

 

 

 

 

우리들의 자화상 입니다.

 

 

"우리네 청국장도 먹고 민들레 물도 먹고 취나물도 먹고 고사리나물도 다 먹지.

밥, 김치, 그런 거 고려 음식 다 하오."

_예 라리사 (고려인 3세)

 

 

 

좀 길지만 끝까지 읽어 보세요.

고도원 님이 직접 가셔서 챙기신 것 입니다.

음악은 제일밑에 NABUCO중에 최고로 잘된 동영상을 올렸으니

밑의 글과 영상을 다 보신 후 재생해서 처음부터 다시

보실만 한 것을 올렸습니다. 

 

 

 

 

 

 

 

 

 

 

 

 

 

무엇보다 140년에 걸쳐 강제 이주와 재이주를 통해
이곳 연해주 우정마을에 정착한 몇 안되는 '고려인'들을 보면서
기억 저 멀리서 새록새록 솟아나는 아픔을 느꼈고, 그 감정은
다른 답사 여행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2004년 기아대책기구 홍보대사이기도 한 고도원님과 함께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키즈스탄을 동행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가슴에 담아 온 글을 '윤나라의 중앙아시아 여행스케치'란 이름으로
아침편지를 통해 처음으로 내보냈던 기억...그때 아린 마음으로 보고
들었던 태바짐님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처절했던 삶이 다시금 가슴에 되살아났다.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상황이 돌변하면서
그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른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을 보며
그들의 절망이 내 절망처럼 느껴져 돌아오는 발걸음이 내내 무거웠던
그때의 마음이 연해주 우정마을에 재이주 후 정착해 반짝이는
눈빛으로 다시금 희망을 얘기하는 고려인들을 보면서
작지만 분명한 희망을 발견하게 된 것, 이것이
나에게 이번 여행이 필연코 확실히 '다른'
여행임을 다시금 깨닫게 한 것이다.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의 마을

 

 

 

 

 

 

답사팀이 연해주의 우스리스크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우정마을'이었다. 'Friendship'(우정)을 연상케 하는 이쁜 이름 덕분일까.
처음 방문하는 곳인데도 왠지 모를 정이 느껴졌다.

자루비노항에서 3시간 정도 포장길과 비포장길을 번갈아 내달려
도착한 우정마을은 집이며 길들이 이제 막 정비 작업을 마친 듯한
한국의 여느 시골 마을에 다시 돌아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정겨운
동네의 모습에 모두들 '와'하며 탄성을 지르는 사이, 우리가 묵게 될
우정마을 내의 '솔빈마당 문화센터'에 도착했다. 일하던 작업복 그대로
답사팀을 맞아주신 약간 검게 그을린 듯한 동평의 대표 김현동님과
아내 주인영님의 따뜻하고 환한 환영의 웃음 덕분에 마치
시골 친척집에 온 것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의 우정마을을 실제적으로 만들어낸 주인공들,
그 분들의 꾸밈없고 순박한 웃음 덕분에 여행의 피곤함이 다 달아났다.

우정마을은 고려인 러시아 이주 140주년을 기념해 1998년 대한주택건설협회가
세운 것을 2004년에 동북아평화연대가 이어받아 꾸준히 공들여 만들어온
'고려인 정착촌'이다. 33개의 가옥에 고려인이 27가구를 이루고 있고,
러시아인 3가구, 그리고 한국인 가정이 2가구였다. 집집마다
무공해 채소를 재배하고 있는 비닐하우스와 청국장 제조 공간이
있었다. 이미 우스리스크에서는 이 우정마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마을이 되어 있었다.

이 마을에 들어와 정착해 살고 있는 고려인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게 그들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한국인'이라는 이름 대신 역사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몇 대째 이역만리 타지 생활을 하고 있고,
'고려인' 임에도 우리말 대신 러시아말이 더 유창한 사람들.
그들을 과연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것일까.

고려인 러시아 이주 14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140주년 기념관'을 돌아보며, 고려인들의 지난 역사와
오늘에 대해서 훨씬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한인들의 러시아 연해주 이주가 처음 시작된 것은 1863년,
쇠잔해가는 조선왕조 말기의 정치 불안과 빈곤으로 인해 시작된
이주민이 1870년대에 8,400명, 1923년도에는 무려 12,000명이 넘었다는
러시아 기록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 시기에는 그 숫자가 더 늘어 23만명에
이르면서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중일전쟁이 격화되면서부터
그 비극적인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가 강행되었는데,
그 해가 1937년이었다.

당시 스탈린은 갑작스런 강제 이주에 대한 반발을 예상해서
한인 지도자와 지식인들 3천여명을 간첩이라는 누명 등을 씌워 처형했다.
그리고는 일반 고려인들에게 불시에 명령서를 전달한 후 곧바로
'라즈돌로니에'역으로 끌고가 기차 짐칸에 타게 하였고,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허허벌판 한복판에
내동댕이 치다시피 버렸다.

중앙아시아에서의 삶은 더욱 끔찍했다.
(이 이야기는 2004년 12월 16일자에 보내드린
'윤나라의 중앙아시아 여행스케치'를 참조 바람)
강제 이주 과정에서부터 정착하는 2년여에 걸쳐 죽은 사람만도
2만명이 넘었다. 토굴에서 짐승처럼 시작된 삶이었으나,
고려인들은 강인했다. 사회, 정치적으로 모든 것에 제한을
받으며 억압 속에 살면서도 중앙아시아를 쌀농사 지역으로
변화시킨 주역이 바로 고려인들인데, "고려인들은 바위에
올려놔도 풀이 난다"는 러시아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된 뒤 잘 사는 듯 했던 고려인들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우즈베키스탄 등이 각기 독립하면서
또 다시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언어의 문제등으로 인해 아버지,
할아버지가 살았던 연해주로의 재이주가 불가피하게 다시 시작되었으나
이동 수단, 정착 비용 등 숱한 난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바로 이 난제들을 풀어가며 고려인의 재이주를 돕고 있는 곳이
'동북아 평화연대'이고, 마침내 우리가 방문한 '우정마을'을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동평의 김현동 대표는 "구소련 붕괴 이후 중앙아시아의
민족주의와 경제적 위기, 언어의 문제, 정치, 사회적 불평등 문제 등이
계속 존재하는 한 고려인의 연해주 재이주는 계속될 것"이라 전망했다.

연해주의 하루는 길었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서쪽 지평선 위에 해가 발갛게 걸려 있었다.
그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답사팀은 마을을 한바퀴 둘러 보았다.
짙은 황토색 벽돌로 된 거의 같은 모양의 집들이 반듯반듯,
옹기종기, 깔끔하게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우정로, 새마을로, 아리랑로...
한글로 만들어진 길 간판도 정겨움을 더했다.
아직은 적은 수이지만, 일단 이곳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그 부지런함과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미 '안정감있는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듯했다. 2004년 중앙아시아에서 보았던
절망감이 이제는 새로운 꿈과 희망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에 대해 저절로 '감사함'이 솟구쳤다.

특히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동북아 평화연대'라는
NGO 단체를 만들고, 자신들의 일신의 안위와 행복을 뒤로 한채
이곳에 들어와 헌신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며 고려인들을 위해
이 마을을 만들고, 또 재이주와 정착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희망, 고려인의 희망, 연해주의 희망, 한민족의 희망이
이곳에서 이렇게 성큼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우정마을에서의 이틀째 날 밤,
고려인 집에서 그들과 함께 우정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홉 명의 답사팀이 둘로 나뉘어 고려인 가족이 사는 집에 민박을
하기로 한 것이다. 비닐 하우스에 들어가 함께 상추를 뜯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또 맛있게 밥을 먹으면서, 차를 마시고 설겆이며 뒷정리를 하면서
짧은 시간 동안 우린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서로의 가족 이야기, 텃밭 이야기, 하는 일 이야기,
요즘 살아가는 이야기...이야기를 나누며 얼굴은
웃고 있는데 가슴 저 깊은 곳에서는 뭔지 모를
뜨거운 무언가가 자꾸 올라왔다.

모처럼 한국에서 온 손님들에게 안방을 내주고
자신들은 거실을 택한 고려인 주인 내외분의 마음을 받아,
더는 거절 못하고 깨끗한 이불이 깔린 침대에 누웠는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실에서 주무시고 계신 분들이 그 동안의 오래고 고된 삶의 짐을 버리고
새로운 희망의 터전인 이 우정마을에서 오래도록 행복하시기를,
또 더 많은 고려인들이 꿈의 정착을 통해 더이상 '이주'의 아픔을
겪지 않게 되기를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2, 제3의
우정마을이 계속 생겨나길 바라고 또 바라며...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의 마을

 

 

 

 

 

 

 

 

 

 

 

 

 

 

빨간 벽돌집이 나란히 들어서 있는 우정마을의 모습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로 돌아온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30여

가구가 옹기종기 살고있다.
 


 

한 고려인의 집 입구 대개 이와 같이 출입문 대문 등이

제법 정리되어 있는 곳은 농경을 주로 하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이주해 온 고려인의 집이다.
 


 

아리랑로 반듯한 사각형의 우정마을을

외곽으로 감싸는 네 개의 길은 아리랑로 우정로 사랑로

평화로 로 모두 한글 이름이다.
 


 

연해주 답사기간 동안 아침지기들이 묵었던 솔빈센터.
'솔빈'은 우스리스크 지역이 발해 시대 솔빈부였다는 데에서 따온 이름으로
우정마을을 방문하는 손님들의 숙소 역할을 한다.
 

 


 

김현동(동북아평화연대 대표) 주인영

부부 2003년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오늘의 우정마을을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아침편지 사랑의 집짓기'의 노블하우스에서 시공한 동평

사무실 '그루터기' 지난해 KBS '6시 내고향' 프로의 '백년가약' 코너를

통해 류재관 대표가 직접 상주하며 지었다.

 

연해주 고려인들을 위한 소식지 '고려신문'과 자연농법에

사용될 각종 효소와 목초액.

 

 

 

 

 

한창 공부에 열중인 고려인 선생님과 러시아 학생들.
배우는 과목은 다름 아닌 한국어.

 

 

 

 


 

우정마을 한가운데에 위치한 '한-러 우정 공원'
 


 

 

솔빈센터의 텃밭에 조성된 비닐하우스

상추 깻잎 향채 등

보기만해도 먹음직한 쌈채소들이 잘 자라고 있다.
 


 

부지런한 고려인들은 텃밭을 그냥 놀리는 법이 없다
이 작물 저 작물 재배하다 보면 일손이 모자라는 법

부족한 일손은

하루 150루블(한화 6천원)의 일당으로 러시아 사람들의

손을 빌리곤 한다.


 

연해주의 완전 무공해 야생콩에 차가버섯 진액을 혼합해
집에서 직접 발효중인 청국장.

 


 

고도원님이 청국장 가루 한 숟가락을 입에 털어 넣고 있다
답사 기간 중 답사팀 모두가 청국장 가루를 먹었다 다른 여행 때와

달리 속이 불편하거나 배변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가 없었다.
 


 

고려인 가정에서의 식사

이역만리 먼 곳에서

고려인들과 이렇게 풍성한 식탁을 함께 할 수 있다니
절로 감사의 기도가 흘러 나왔다.
 


 

하루 민박을 제공해 준 고려인 유가이 이골님

가정에서 식사 후 기념촬영

우측에서부터 유가이 이골, 고가이

이밀리아 부부 류재관 조순남 부부 최동훈 실장
 

 

 

밤 10시가 넘어야 해가 지는 우정마을에

아름다운 석양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올해 2월 우즈베키스탄에서

순야센마을로 이주한 최알렉님의 농가.

 

 


최알렉님 가정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텃밭과
비닐하우스

최알렉님은 소련 시절 농업영웅 이었던 김병화 농장

출신으로 텃밭을 일구는 솜씨와 목재로 비닐하우스를 만드는

실력이 아주 뛰어나다.



올해 77세의 최알렉님의 장모님

6세때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한 후 70년만에 다시 되돌아왔다

70년의 애환이 그대로 남아있는 주름진 손을 고도원님이

어루만져 드리고 있다.
 


좌측에서부터 최알렉님의 장모, 며느리, 아들
 


아시노브까 마을에 정착한 박블라디미르님 부부

올초 우즈베키스탄에서 이주해 온 가정으로 한켠에 걸려있는 태극기에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읽을 수 있다.


아시노브까 센터에서 고려인들에게 연변 조선족
김철훈 소장(68세, 북방자연농업연구소장)이 자연농법적인
돼지사육 방법에 대해 열정적으로 강의하고 있다.


우스리스크 시내에 위치한 한민족문화학교 700여명의

학생중 20%가 고려인 한국말과 역사를 일주일에 한 차례씩

교육하고 있다.


육성촌에 있는 학교 내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고려인 전시관 '육성촌' 은 고려인 6개의 성씨가 400가구 이상 거주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강제이주 이후로 지금은 한 가구도 없다

액자 속의 여인은

몇달전 세상을 떠난 이곳의 마지막 고려인이었다.


육성촌 뒷동산에서 발견된 고려인 공동 묘지

돌에 새겨진 문자에

이들의 이름과 기록들이 아주 정확히 남아 있다.
 


러시아 한인 140주년 기념관 2층에 있는 전시관에서

만난 조 하리똔 곡세비치님(78세) 역사 교사 출신으로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 140년사를 생생히 증언해 주셨다.


러시아를 근거지로 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분들의

사진과 활약상이 전시되어 있다.


라즈돌로니에 기차역 1937년 행해진 고려인 강제 이주의

시발점으로 역사의 비극이 서려있는 곳.
 


지나간 역사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역 앞 노점에서

각종 먹거리를 판매하는 러시아 아주머니들



 

20만 고려인들이, 이 철길을 따라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애써 가꾼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
 


고려인 시인 김준의 시 '난 조선사람이다'.
읽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 했다
 

 

 

 

 

 

 

마음의 거리 600km

연해주 고려인 마을 72시간

 

 

 

 

 

 

 

 

 

■ 멀게만 느껴지는 ‘마음의 거리’

 

 

우리가 제주에 가고 부산에 가듯, 하루면 오갈 수 있는 거리.

서울에서 북쪽으로 600여 km 떨어진 러시아 땅,

연해주에‘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낯빛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

 

 

 

 

 

 

"한국말 모르오. 고려말 조금 아오.

우리는 카자흐스탄서 나고, 카자흐스탄서 자라고.

우리 낯이 고려 사람 낯이지, 속은 소련 사람이지.

우리 말 할 줄도 모르지, 들을 줄도 모르지." _

박 리나 (고려인 3세)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사람의‘머리에서 가슴’까지라는 말이 있듯 어쩌면,

우리가 멀게 느끼는 마음의 거리’보다 더 먼 거리를 떠돌며

‘백년 나그네’로 살아가는 한민족의 또 다른 이름, 고려인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노력으로 그 거리를 좁힐 수 있을까?


 

■ 70년 전, 눈물로 지나간 길을 되짚어 돌아오다

 

1937년, 연해주에 살던 18만 고려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실려

수 천 km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해야 했다.

그리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된 후, 고려인들은 기억 속 조상들의 땅을 찾아

다시 연해주로 돌아오고 있다. 현재 연해주에 살고 있는 고려인은 약 5만 여 명에 이르고,

고려인들의 재이주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나 여기 연해주에서 났어. 나서.. 두 살 때 우즈베키스탄으로 나가서 또 다시 들어왔어.

나이 먹고 슬퍼 울지. 슬퍼서... 그래도 죽기 전에 왔어."

_이순생 할머니 (고려인 2세)


 

"우리 엄마,할아버지랑 할머니랑 여기서 실어나를 때,타슈켄트로 고려인들 많이 실어갔어.

그래 거기서 고생하면서 살았지.우리 할아버지는 고생했지만,우리는 잘 살았지.

소련 다 해체되고..우즈베키스탄에서 살기 힘들어졌지.우즈베키스탄서 러시아말 하지

못 하고 우즈벡어 배워야 쓰지. 그러니 힘들지."

_주 로자 (고려인 3세)

 

 

■ 또 다른 이름의 한민족, ‘고려인’

 

강제 이주의 슬픈 역사를 뒤로 하고, 꿋꿋하게 뿌리 내린 중앙아시아에서

또 다시 민족 문제로 설 자리를 잃은 고려인들.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게 된 그들은

부모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평생 일궈온 재산을 버리고 쫓겨나듯 떠나야 했다.

70여 년 만에 다시 찾아온 조상들의 땅 연해주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연해주는 우리 조상님들, 부모님들의 땅이오."

_남 류우바 (고려인 3세)


 

"우리네 러시아 패스포트, 호적이랄까?

여권을 타도 그래도 우리들은 민족이 고려 사람이요.

그래서 고려 사람이 돼서 우리는 여기 이렇게 연해주에 다시 왔지."

_예 라리사 (고려인 3세)

 

 

서툰 한국말이 어색해 ‘한국말’은 모른다 하고, 수줍은‘고려 말’로 말하는 고려인들.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난 고려인 3~4대에겐 고려 말보다 러시아 말이 더 편하고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밥상엔 김치와 된장이 빠지지 않고 오르고,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이름과 집주소와 함께 한국 성()의 본관을 알려주며 자신들의 뿌리가 한국에 있음을 가르친다.

 

"우리네 청국장도 먹고 민들레 물도 먹고 취나물도 먹고 고사리나물도 다 먹지.

밥, 김치, 그런 거 고려 음식 다 하오."

_예 라리사 (고려인 3세)


 

"우리 할아버지는 항상 얘기 했지. 우리 해주 오가’양반이다. 어딜 댕겨도 조심히 댕겨라.

좋지 않은 일 하지 말고 점잖게 댕겨라. 양반은 점잖게 댕긴다."

_오 게오르기 (고려인 3세)

 


 

■ 조상의 땅에서 희망찾기

 

더 이상 유랑 생활을 대물림 하지 않기 위해 조상의 땅을 선택한 고려인들.

2007년 9월, 우즈베키스탄에서 재이주한 5가구,

14명의 고려인들은 우수리스크 인근의 한 시골 마을을 새 삶터로 결정했다.

없는 살림에 일하는 틈틈이 집을 수리하고 고치느라 발 뻗고 머리 둘 집 한 칸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채, 여전히 미완성 상태다. 그러나, 이곳에 정착한 지 어느덧

만 2년이 다 되어가는 고려인들은 그 시간 동안에도 누구는 아이를 낳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며 다시 삶의 희망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지 이제 몇 해야... 일곱 해 되지.

시방 러시아 나라 사람이지. 그 전에는 우즈베키스탄 나라 사람이지.

2001년에 여기 와서 패스포트 바꾸자고 했는데 못 바꿔서 이때까지 고생하다가

2005년에 바꿨지. 그래서 바꿔서 일을 아무데서나 자유롭게 하지."

_오 게오르기 (고려인 3세)


 

"처음 여기 왔을 때 놀랬어. 방에 장판도 안 깔린 맨 바닥이지. 아무 것도 없었어.

숟가락도 사고. 살면서 조금씩 조금씩 살림 사고 집도 만들었지.

여기가 우리가 살 곳이오. 몇 년 지나면 더 잘 살겠소. 이제는 일 없어.(괜찮아.)"

_주 로자 (고려인 3세)


 

"여기 처음 왔을 때는 진짜 아무 것도 없고. 얼마나 울었는지.

거기서 우리가 얼마나 오래 잘 살았는데... 가지고 있던 거 다 버려놓고 여기 왔는데

진짜 여기는 아무 것도 없었어. 생각만 해도 내가 도대체 왜 여기 와있는지 하고.

이제는 집이라도 있으니 마음에 안심이 되지."

_남 류우바 (고려인 3세

 

 

■ 동북아의 꿈, 연해주, 그리고 고려인

 

1991년 소련이 해체되기 이전까지, 즉 1937년부터 90년까지 고려인의 역사는

한민족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단절된 부분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 세월 동안에도 고려인들은 세대를 이어‘고려인’의 맥을 이어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시 조상들의 땅으로 재이주 하고 있다. 같은 민족, 같은 핏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70년의 세월 동안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온 고려인들.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유전자의 힘이란 위대한 거구나, 신기하고. 마음이 찡한 게 있는 거 같아요.

애들 눈 보고 어머님들 눈도 보고. 또 저 할머니는 강아지 내려놓으라고, 내려놔라’

이렇게 한국말로 얘기하시더라고요. 그런 거 보면‘아, 멀지 않구나, 그런 생각..."

_최지혜 (경희대 자원봉사자)

 

 

아직 끝나지 않은 고려인의 ‘디아스포라'.

좁은 한반도를 넘어 연해주에서 한민족의 명맥을 이어가는 고려인,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 수 있을까?


 

"집짓기도 중요하고 페인트 칠하는 것도 중요하고 음식 만드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고려인들 하고 감정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건물 하나만 짓는 게 아니라 그분들의 생활을 이해하고 고려인도 한국인이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끔 서로 많이 얘기하고 소통하는 게 중요할 거 같아요."

_유영빈 (경희대 자원봉사자)


 

비행기도 아니었다. 기차도 아니었다.
러시아 연해주 답사를 떠나는 답사팀이 몸을 실은 것은 커다란 '배'였다.
대한민국 강원도 속초항에서 러시아 연해주의 자루비노항까지, 17시간 동안을 밤새워
항해하는 '동춘페리'라는 여객선에 몸을 싣고, 한국과 러시아 국경을 통과하는
독특한 경험부터가 이번 답사 여행의 시작이었다.

'동북아 평화연대'라는 NGO 단체를 주축으로,
아침편지 문화재단 고도원 이사장 부부와 '아침편지 사랑의 집짓기'로
잘 알려진 노블하우스의 류재관 대표 부부, 그리고 아침지기 다섯 명, 이렇게
모두 아홉 사람이 함께 동행하여 고려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고 있는 발해의 옛 땅
연해주의 우정마을을 돌아보고 고려인들이 일구어놓은 농업 현장과 실험 농장,
샤마라 해변, 그리고 항구 도시 블라디보스톡을 돌아보는 것이
이번 러시아 답사의 주된 일정이었다.

옛 고구려보다 두 배나 넓었다는 발해의 땅,
발해의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떠난 여행은 아니었다.
안으로만 좁혀진 시선을 밖으로 돌려, 유채꽃이 지평선을 이루고
비료도 농약도 쳐지지 않은 순 자연 그대로의 콩밭이 저 멀리 끝도 보이지
않는 가능성의 땅, 깨끗한 땅, 비옥한 땅, 자연그대로의 땅...
한때는 웅대했으나 아프고도 슬픈 역사가 켜켜이 밴,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꿈과 희망이 솟구치고 있는
그 땅을 찾아 '마음의 영토'를 넓혀가는
꿈너머꿈의 여행이었다.

연해주(沿海州)...
러시아 이름같지 않아 왠지 낯설지 않은 그 곳엔 많은 것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고려인'들을 빼놓고는 연해주를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늘진 역사의 한 페이지가 여전히 가슴 아픈 모습으로 살아 숨쉬고 있었고,
그 곳의 중심에 '동북아 평화연대'가 있었다.

그동안 여러 민족들간의 전쟁등 험난했던 역사로부터 벗어나 화해와 상생,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동북아시아를 만들고, 특히 이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이 앞장서서 다른 민족, 다른 문화의 집합체인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만드는 것,
그것을 꿈으로 가지고 있는 '동북아 평화연대(이후로는 '동평'이라 지칭)'.

'동평'이 5년여에 걸쳐 만든 연해주의 고려인 정착촌인
'우정마을'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된 러시아 연해주 답사 여행에서
우리는 강제이주를 당했던 고려인들, 중국에서 넘어온 조선족들,
현지 러시아인들, 심심치 않게 마주치는 북한 동포들,
중국을 대표하는 한족들을 실제로 만나기도 하고,
수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무언가 연관이 전혀 없는 듯 하지만
너무나 큰 연결고리가 되고 있는 그들이 모여 사는 곳 연해주는
만경평야의 수십수백 곱절에 이르는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과 야생 콩밭,
그 넓은 영토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인구,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러시아 여인들과 항상 술에 취해 있는 듯한 인상의 러시아 남자들,
당장 쓰러질 듯 낡았지만 한 때는 무척이나 번성했던 곳이었음을
보여주는 위엄있고 기품있는 건물들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사실 이번 답사 여행은 몽골, 바이칼, 샹그릴라에 이은
또 하나의 특별한 아침편지 여행이 탄생될 것이라는 기대감 또한 안고
떠난 여행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여행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감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내 머릿속을 섬광처럼 지나가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이번엔 뭔가 다르다.'

그 '뭔가 다른' 느낌은 어디에서 연유했을까.
지금까지의 단순한 둘러보기 식의 답사 여행 차원을 벗어나
마치 저 멀리 꿈을 향해 가는 길에 반드시 보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누군가 때가 되어 알려주는 것 같은, 천년의 역사를
거슬러 민족 혼의 시원(始源)을 본 듯 하고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어차피 한 길을 가야 할 북한 동포까지를 포함하여 지금의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건너가야 할 미래의 징검다리가 바로 이곳
연해주에 있다는 생각, 그 '새로운 발견'이 '뭔가 다른'
느낌을 안겨준 것은 아니었을까?


" 정말 잘 왔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조금 늦었다."
고도원님이 여행 중반 혼잣말처럼 하신 이 말이 내 머리 속에
남아 아직도 작은 파도을 일으키고 있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 가장 적기라고 생각했다. 때가 되어 다녀온 듯한
연해주, 정말 잘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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