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지로 보내온 질문이 있어 다른 분들의 관심사도 되리라 생각해서 공개적으로 올립니다.
이미 공개된 자료나 스크랩해온 자료는 레이어나 글자 정렬이 이미 정해져 나오기 때문에
재 편집하기는 보통 힘드는 작업이 아님을 아시는 분 들이 많기에 그런 단어를 썻습니다.
"심혈을 기울인다"는 것은 자료전체를 뒤 엎어놓고 이미지 따로, 택스트 따로 해서
얽힌 레이어를 모두 풀고 하나로 합치는 작업으로 읽기좋고 보기좋고 듣기좋은 형태로 만든 후
올린다는 뜻으로 쓴 것이니 생색내는 씻츄에이션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무대가 아주 아주 화려하고 정말 감동의 무대입니다.
1.2.부가 있는데 좀 길어서 2부는 읽는 동안 들으시고 감동의 1부를 밑에 올렸으니
2부 음악은 끄시고 본론인 1부를 시간을 가지고 느긋하게 보세요
끝까지 독일동포들의 끝없이 흘리는 눈물에 더욱 찡해서 올립니다.
중간중간에 끼워넣은 실화와 동영상으로 더욱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춘분한 무대로 꾸며놔서 좀 길어도 가치가 있어보여 올립니다.
특히 밑에는 "유희자"씨의 수기를 올렸으니 국재결혼의 속사정과 독일사회를
약간은 볼 수있는 기회라 생각되어 올립니다.
처음에 동영상을 열었을 때는 모두가 똑같은 성형쌍둥이들로 치부하고 덮으렸는데
조금 더 보니 독일 동포들의 눈물을 보고, 역사를 보고 그리고
유익하리라 생각이 들어 조금 길어도 올려보기로 했습니다.
사진영상과 글이 같은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알립니다.
▣「독일로 간 광부, 간호사들」
젊은 날의 꿈
「독일로 간 광부, 간호사들」
젊은 날의 꿈
40도를 넘나드는 막장의 지열 때문에 팬티를 수십 번을 짜고,
장화에 고인 물을 수 차례 버리기도 했다.
그것도 모자라 날카로운 톱니가 돌아가는 광산의 대형기계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도,
이들은 40년 전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오히려 인생 최대의 기회였다고 이야기한다.
이들에겐 젊은 날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3년 계약이 끝낸 광부와 간호사들은 자신의 꿈을 찾아
미국, 캐나다, 스위스 등 전 세계로 흩어졌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간 곳은 미국과 캐나다로, 한국인이라고는 유학생 서너 명이 전부였던 곳에
수 백 명의 광부, 간호사들이 정착했다. 한국인 최초로 대형 슈퍼마켓을 열고,
한국 음식점을 열고, 한인타운을 만드는 등 미주,유럽 한인 사회의 기초를 세웠다.
이민 사회의 성공 신화를 만든 주인공이 바로 독일로 간 광부, 간호사들이었던 것이다.
사업가로, 교수로, 화가로, 의사로, 자신의 꿈을 이룬 광부, 간호사들은 외국인 노동자로
독일땅을 밟아 이제는 사회의 중심으로서 자리 매김을 단단히 하고 있다.
이들이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목표를 이루기 위한 40년의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가수가 되고 싶어 독일로 간 사나이, 박종선
라인강 근처의 한 술집에서는 밤이 되면 한국 노래가 흘러나온다.
광부 출신 가수 박종선 씨의 노래 소리다. 그가 주로 부르는 음악은 올드팝과 한국의 발라드로
술집을 찾은 사람들은 종선 씨의 노래에 맞춰서 매일 밤 흥겹게 춤을 춘다.
종선 씨는 어릴 적부터 가수가 꿈이었다. 하지만 정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뼈대있는 집의 아들이었던 그는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그는 가수가 되고픈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탓에 광부로 지원했다.
그는 힘든 광산 생활을 하면서도 가수의 꿈을 접을 수 없었고,
마침내 음악에 관심이 있던 광부들을 모아 광부 밴드를 조직했다. 그리고 주말이면 함께 공연을 다녔다.
아직까지 커다란 무대에 서본 적은 없지만, 고국에서 펼치지 못했던 꿈을 독일에서 이뤘다.
작지만 매일 밤 그의 노래를 들으러 와 주는 사람들이 있어 독일에서의 생활이 행복하기만 하다.
* 독일 생활 40년을 투쟁처럼 살아온 이민자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의사의 꿈을 가지고 독일로 떠났던 이민자 씨.
하지만 그녀를 포함해 대학을 졸업한 한국 간호사들의 주 임무는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아 내거나,
100kg이 넘는 환자들의 목욕을 시키는 일이 전부였다. 독일에서 인정해 주지 않는 한국 간호사,
그래서 그녀는 독일인도 하기 힘들다는 의과 공부를 시작했다.150cm도 안 되는 작은 체구의 동양 여자가
독일 와서 의사가 되겠다고 하자 독일인들 모두 그녀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았고,
독일인들이 그러면 그럴수록 더 이를 악물었다. 엉덩이에 진물이 날 때까지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그런데 민자 씨가 일하던 병원에서 그녀를 정신병자로 몰아 독일에서 추방시키려 했다.
다른 한국 간호사들도 그녀처럼 의사공부를 한다고 할까봐 내린 조치였다.
정신병자로 몰리고, 엉덩이에 진물이 날 때까지…. 의사가 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해야했던 그녀의 독일 생활은 삶이라기 보다 오히려 투쟁 그 자체였다.
* 자유를 찾아 떠난 말괄량이, 송금희
배고픔의 설움을 모르던 부자집 소녀 송금희 씨는 항상 조국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좋은 반찬은 항상 오빠가 먼저지? 왜 자전거는 남자들만 타야 하는 걸까?"
여자이기 때문에 제약이 많았던 조국이 답답했다.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싶고, 맘껏 자전거를 타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유를 찾아 무작정 독일로 왔다.
그녀는 푸른 초원이 펼쳐진 독일의 시골마을에서 14살 연하의 남편과 알콩달콩 살고 있다.
조국의 답답함이 싫어서 독일로 떠났지만, 여전히 그녀는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고,
풍물을 연주하며 한국적인 것에 젖어 산다. 그래서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 사람처럼 느껴진다.
30년을 넘게 독일 음식을 먹은 남편을 나물반찬에 김치찌개를 즐겨먹는 토종 한국 입맛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또 그녀는 매주 한 번씩 마을의 독일 주부들에게 풍물을 가르쳐 주며 살아가고 있는데….
박사가 되기 위한 40년 간의 전쟁, 심동선10년 동안
단 한 번도 침대에 누워서 자본 적이 없는 심동선 씨.
그는 자식들을 공부시키느라 논과 밭을 다 팔아버린 아버지를 위해서 독일로 광부로 갔다.
하루 8시간 광산 근무도 모자라 밤 연장 근무까지 해가면서 열심히 돈을 모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고향의 논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노력 때문에 고향집도 형편이 나아지고, 그의 생활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선 씨는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다. 가난 때문에 채 이루지 못한 자신만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이 마흔을 넘긴 그는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남보다 두 배를 더 노력해야 했던 그는 10년 동안 침대에 누워서 자본 적도 없었고,
마침내 그는 외국인으로 독문학 박사학위를 따냈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3년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말이면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 배추 대신 양배추로 김치를 담가 먹고,
한국 노래를 들으며 향수를 달래는 것이 광부들의 유일한 낙이었다.
어쩌다가 기숙사에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흘러나오면 눈물바다가 됐다.
고국이 너무 그리워 중도에 포기한 채 한국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많았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데는 남녀가 따로 없었다. 간호사들은 향수병에 걸려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는데,
그 수가 무려 20여명에 달했다. 잘 적응한 간호사들에게도 문제가 생겼다.
뚱뚱한 독일인들을 수십 년 간 간호하느라
허리와 관절에 무리가 온 것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간호사들이 수술을 받았다.
기계 때문에 손가락 한두 개 잘려나간 것은 광부들에겐 예사 일이었고,
함께 지냈던 동료의 안타까운 죽음도 지켜봐야 했다.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한국의 교민 수는 3만여 명에 이르는데,
교민의 절반에 해당하는 1만 2천여 명의 광부,
간호사들이 독일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
3년만 일해서 고국에 돌아온다던 3천여 명의 광부,
간호사들은 왜 아직도 독일에 살고 있는 것일까?
* 사업가로 성공한 남정균
독일 장애인 아이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등하교를 시켜주는 게 남정균 씨의 하루 일과이다.
독일 카셀 지역에서 가장 큰 스쿨버스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사장이기도 한 그는
독일인들도 부러워 할 정도의 사업가로 크게 성공했다.
3년만 일하고 고국에 돌아가겠다는 정균 씨의 계획은 아직도 보류중이다.
독일에서의 사업을 두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데다 이제는 자녀 교육이 걱정이다.
독일에서 공부를 잘하는 아들과 딸이 대견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자녀들이
독일 땅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고민이 되기도 한다.
* 꿈에도 못 잊을 고국. 영원한 이방인 이원명
사업이 어려워진 아버지로 인해 갑자기 대학을 그만 두게 된 이원명 씨는
"3년만 열심히 일해 사업 밑천을 벌어서 고국에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던 게 벌써 38년 전의 일이다.
그는 가족들에게 송금하면서도 열심히 돈을 모았고, 3년 후면 그 꿈이 이뤄질 것만 같았다.
마지막 3년째 되던 해 한국 간호사를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행복한 독일 생활은 1년이 전부였다.
부인은 힘든 간호사 생활과 향수병을 앓아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금방 낳을 것 같던 아내의 병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고, 몸이 아픈 아내를 돌봐야 했던 그는
안정된 직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취직을 하게 되면 아내에게 밥과 약을 챙겨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같이 왔던 광부 친구들은 계약기간이 끝나 모두 미국과 캐나다 등으로 떠났지만 그는 갈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그에게 아내를 포기하라고 조언했지만, 그는 38년 간 아내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고 있다.
이민을 가서 성공한 친구들과는 달리 원명 씨는 정부 보조금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아내의 병은 여전히 차도가 없고, 이젠 그마저도 정신과 치료를 권고받고 있다.
* 저도 외국인 노동자였습니다.
나이팅게일 박경옥(현재 한국거주)
64년과 70년, 각각 3년과 4년씩 독일에서 일했던 박경옥 씨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한국에 일하러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40년 전 돈을 벌기 위해 독일로 떠났던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간호사로서 정년퇴직을 한 경옥 씨는 아직까지도 병원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환자들을 돌보는가 하면,
아픈 외국인 노동자의 소식을 들으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어디든지 달려간다.
아파도 돈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처지를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40년 청춘을 묻고..
▣「독일로 간 광부, 간호사들」
독일 40년 청춘을 묻고
60년대에 해외를 나간다는 것 꿈 같은 일이었다. 당시 공무원이 해외출장을 가려면
박정희 대통령의 사인이 있어야만 갈 수 있을 정도였으니, 해외에 나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설레는 일이었던 것이다.
1진 광부를 데리고 독일에 갔던 당시 노동청 직업안정국장 심강섭 씨는 광부들은 소풍가는 아이 같았다고 말했다.
모두들 마음이 들떠있어 당시 독일 대사가 "당신들은 일을 하러 가는 겁니다"라고 말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을 설레게 했던 것은 돈이었다.
당시 광부, 간호사들의 월급은 한국의 6∼7배였으며, 이는 당시 장관의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이었다.
그래서 이들에겐 독일에만 갔다오면 번듯한 집이 생기고, 수 천 평의 논과 밭을 살 수 있으며,
동생들 대학공부까지 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한마디로 이들에게 독일행은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황금과 같은 기회를 붙잡은 광부,
간호사들은 모두의 부러움을 받으며 독일로 떠났다.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견디려고 했지만, 독일생활은 눈물의 연속이었다.
* 만 마르크를 위하여… 강은자
엄마의 빚을 갚기 위해 독일로 간 강은자 씨는 돈을 많이 버는 게 최대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병원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40kg을 겨우 넘기는 가녀린 몸으로 거구의 독일 환자들을 씻기고,
말이 통하지 않아 무조건 달려가야 했다. 이렇게 힘들게 일해도 한 달에 받는 돈은 600마르크,
자신은 10마르크만 남겨두고 집으로 송금하기 위해 모으기 시작했다.
그래서 은자 씨는 야간 연장 근무를 뛰고, 주말엔 다른 병원 아르바이트 일까지 했기 때문에,
몸무게는 점점 줄어 40㎏도 채 안나갔다. 하루 3∼4시간씩만 자면서 열심히 일해 무려 만 마르크를 모았다.
독일에 간 지 불과 1년 반 만에, 천만 원이 넘는 큰돈을 모은 것이다.
하지만 목포에 사는 은자 씨 어머니는 은행의 잔고가 모자랐던 탓에 딸이 보낸 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은자 씨는 남은 계약기간 동안 남들처럼 여행을 다니고 싶어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너무 혹사시킨 탓에 간이 부었고,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 독일에 남은 마지막 한국인 광부, 정용기
63년부터 시작된 독일 광부 파견은 77년까지 총 8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독일의 광산업이 점차 쇠퇴하자, 광산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5년 전만 해도 60∼70명이던 한국인 광부가 이제는 정용기 씨 단 한 명뿐이다.
그는 마지막 광부로 77년에 독일로 건너와 현재 31년째 독일 광산에서 일하고 있다.
광산 내의 유일한 한국인인 그는 광산 내에서도 최고참에 속한다. 처음 독일에 왔을 때는 말도 통하지 않아
어려움도 많았고, 처음 해보는 광산 일에 몇 번의 죽을 고비도 넘겼다.
광산 탄차를 모는 정용기 씨는 책까지 읽는 여유를 보일 정도로 이제는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 일도 정년퇴직을 하게 되는 9월까지만 가능하다.
* 광부에서 발 관리사로 변신한 이명한
발 관리사 이명한 씨는 현재 5년째 독일 노인들의 발을 주무르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그는 광산 일을 그만둔 지 27년이나 됐지만, 아직도 막장에서의 끔찍했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명한 씨가 광산에서 일을 시작한 지 1년 반쯤 된 어느 날, 석탄을 캐던 중 천장이 무너지는 대형 사고가 발생해,
큰돌이 그의 어깨에 떨어졌다. 이 때문에 그는 갈비뼈가 부러졌고, 그 뼈가 부러지면서 폐로 들어가
생사를 오갈 정도로 큰 수술을 받았던 그는 다행히도 큰 탈 없이 잘 버텨내었다.
하지만, 명한 씨는 더 큰 문제에 직면했다. 산업재해임에도 불구하고,
광산 측에서는 보상을 해줄 수 없다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상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그는 계속해서 치료를 받았다.
치료가 거의 끝나갈 무렵 3년 계약기간도 만료가 되었는데, 독일에서는
명한 씨를 무조건 한국으로 되돌려 보내려고 했다.
고국에 돌려보내면 보상을 해 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가요무대 독일공연 제1편 독일로 간 청춘
▣「독일로 간 광부, 간호사들」제 1 부 : 독일 40년 청춘을 묻고
유희자 씨의 자서전
[유희자]슬픈사연...문화의 장벽은 높았다.
1.어린 시절
나는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오빠가 하나 아래로는 남동생이 하나 끝으로 여동생이 하나 이렇게 4 남매와
아버지 어머니 모두 여섯 식구가 한집에 살았다.
국민학교를 입학해서 부터 나는 공부를 잘 한다는 칭찬을 받았으며 졸업할 때까지 계속해서 일등만 하였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 어가서의 일이다. 나와 세살 터우리인 오빠가 그때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우리 남매를 불러 놓고 나에게는 집안이 가난하여 중학교 이상은 공부시킬 수 없다는 것과
또 오빠에게는 ꡒ너는 아들이니까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ꡓ는 말씀을 하셨다.
하루하루 힘든 노동으로 여러 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던 어머니로써는 당연한 말씀 이였겠지만
그것은 어머님의 실수였다. 어머님한테서 그런 말씀을 듣고 부터는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때 우리 집에서는 채소를 심었는데 어느 핸가는 이상 기온으로 커다란 배추가 모두 얼어서 못쓰게 된 때도 있었고
배추 농사를 지어 많은 돈을 벌기도 하였다. 그러나 채소를 심었던 땅은 우리 것이 아니 였던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는 남의 땅을 빌려 채소 농사를 지으셨지만 우리 집에서는 돈을 벌었던 것 같으며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오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는 저축한 돈을 가지고 강원도 춘천에 여관을 사서 이사를 하였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춘천으로 이사와서 부터는 날마다 하는 것 없이 놀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제사 공장에 취직을 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이 들어 나를 낳으셨다. 그래서 나는 태어나면서 부터 잘 보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공장에서도 남들처럼 일하지 못하고 물건을 나르는 구루마를 끌었으며 당연히 받는 돈도 작았다.
내가 열 일곱 살에 제사 공장에 들어가서 한해가 지난 후의 일이니까 1969년도 여름방학에 있었던 일이다.
하루는 다른 날과 같이 공장에서 누에고치를 구루마에 싫어 나르고 있었는데 낫 서른 머슴애가 와서 함께 일을 하였다.
그때 나는 나이에 비하여 숙성한 편이였는데 그는 나와 같은 크기였으며 나이도 내 또래 같았다.
그 애와 함께 하루하루 일을 하는 것이 즐거웠으며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대학생이라고 하였다.
방학 동안에 돈도 벌고 견문도 넓히려고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며
여름방학이 끝나면 자신은 공장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공장에 들어와 아무말 없이 나와 함께 일을 하다가 공장을 떠날 때가 되어
자신을 나에게 소개한 것은 그 동안 정이 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그때 나는 ꡒ대학생은 무슨 놈의 대학생이야! 대학생 같지도 않네 뭐ꡓ라고 하여
나도 웃고 그도 웃어넘기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정말로 대학생이 였으며 여름방학이 끝나자 공장에 나오지 않았다.
그와 함께 일할 때는 몰랐지만 그가 떠나고 나자 그와 함께 일할 때가 재미있었던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어린 시절 이였으니까 그 머슴에 생각은 잊어버리고 여자아이들끼리 어울려 공장일 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몇 일 전에 떠났던 머슴에가 옷을 깨끗이 갈아입고 누에고치 싫어 나르는 길목에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는 돈을 받으러 왔던 것인데 사무실과 멀리 떨어진 작업장에 나타난 것은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보고도 본숭만숭하고는 일만 했다
그가 작업복을 입고 나와 함께 일을 할 때는 그와 같이 있는 것이 즐거웠다.
그런데 그가 대학생이라니 나는 그가 얄미웠다.
나중에 그와 사귈 때 나는 그때를 ꡒ뿔다구가 났다ꡓ라고 그에게 말 한바 있다.
그때 나는 정말로 뿔다구가 났다.
그래서 본체만체 하고는 일만 하다가 퇴근 시간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다.
점심 가방을 들고 유행가를 부르며 고개를 내려오는데 나무 뒤에서 숨어 있던 머슴애가 불쑥 나타나
앞을 막고서 ꡒ나 하고 얘기 좀 하자ꡓ고 하였다. 그때 우리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에 없으나
우리들은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우리들은 점점 가까운 사이가 되어 갔다.
나는 그때 낮으로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으로는 학원에서 주산과 타자를 배우고 있었는데
하루는 시내에 나갔다가 담벼락에 붙은 ꡒ간호 보조 학원 입학생 모집 ꡓ광고를 보게 되었다.
춘천에서는 처음으로 생긴 간호 보조원 양성소였는데 졸업 후 ꡒ서독 간호원으로 갈 수 있다ꡓ 하기에
즉시 입학 원서를 내고 1970년부터 간호 보조원 양성소에 다녔다.
교육은 4개월 반의 이론과 4개월 반의 실습으로 되어 있는데 막상 졸업을 하고
집에서 독일 갈 날을 기다리고 있자니
독일 측의 요구로 최소한 1년 이상은 간호 교육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의 메디컬 센터에서 모자란 3개월간의 실습을 하여 자격을 갖췄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류파동으로 독일에서 간호원을 데려가지 않으니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제사 공장에서 간호원으로 있던 언니가 결혼을 하여 그 자리가 비계 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 왔다.
언제 갈지도 모르는 독일 간호원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던 나는 간호원으로 있는 언니가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는
공장으로 달려가 다시 간호원으로 일하겠노라 하였다.
그러나 공잘 측에서는 나의 간호 보조원 자격증을 인정하여 채용할 수는 있으나
언제 서독으로 갈지 모르니 채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아버지가 독일 간호원으로 가지 못하게 한다고 거짓말을 하여
다시 제사 공장에 간호원으로 취직을 하였다. 그리하여 제사 공장에서 하얀 가운을 입고
간호원으로 근무하였는데
눈이 어두워 구루마를 끌어야 했던 내가 간호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니 모두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함께 일했던 아이들이 나보고 ꡒ미꾸라지 용됐다ꡓ라고도 하였다.
의사가 없는 공장의 간호원 일은 편했다.
나는 매일매일 출근하여 다친 공원들에게 소독약을 발라 주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펼쳐 놓고는 공장에서 지켜야 할 위생 규정을 공부하는 척 하였다.
그러면서 실지로는 무릅위에 독일어 문법책을 펼처놓고 공부하면서 독일 가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외 개발 공사의 연락을 받고 독일로 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ꡒ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 시집보낸다ꡓ고 늘 말씀하셨다.
그때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가까이 시집보내야 자주 볼 수 있다는 말씀 이였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머나먼 외국 땅에 오게 된 것이다.
2. 이름뿐인 백의천사 독일 간호원
내가 독일에 온 때는 1974년 4월 3일이다.
처음 도착한 것은 프랑크푸르트 가까이에 있는 작은 도시의 양로원이다.
우리나라 간호원으로는 나와 다른 두 사람, 모두 3명이 처음으로 근무하는 이 양로원은 개인사업체였다.
등치 큰 서양 노인들을 돌보는 양로원 일은 힘들었고, 또 우리 세 사람을 서로 만나지 못하게 3교대 일을 시켰다.
그러니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이렇게 힘들게 일하고 있을 때 마침 베를린 대학병원의 수간호원을 만났다.
새로 오는 간호원을 데려가려고 프랑크푸르트 국제항으로 왔을 때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대학병원의 간호 과장인데 나는 우연히 만난 이 사람에게 베를린 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간호 과장에게 베를린 대학병원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제사 공장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면서 무릅위에 독일어 문법책을 몰래 펼쳐 놓고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편지는 쓸 수 있었지만 문법에는 틀린 글이다. 그렇지만은 나는 여러 통의 편지를 계속해서 보냈으며
드디어 간호과장은 나를 베를린 대학병원으로 불러 들였다.
대학병원의 기숙사에는 여러 명의 우리나라 간호원들이 있어 외롭지는 않았다.
또 양로원 일보다 훨씬 편했다. 나는 열심히 일하여 실험기간 6개월을 무사히 넘겼다.
독일에서는 6개월 간의 실험기간을 두어 그 기간 안에
고용인의 근무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해고시킬 수 있다.
실험기간을 무사히 넘기자 병원과 나와 맺은 노동계약은 끝이 없었으며,
외국인 경찰서에서도 독일에서 영주할 수 있는 거주 허가를 내 주었다.
한편으로는 독일에 와서 처음부터 병원에서 받는 월급은 한푼도 남김없이 다달이 고향으로 송금하여
어머니가 진 빗을 갚도록 했다. 어머니는 내가 독일로 오기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많은 빗을 남기셨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몰랐지만 어머니의 동생, 이모네 가정에 어려운 일이 있었고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빗을 내어 이모를 도와주셨던 것인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빚쟁이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매달 받는 월급을 한푼도 남기지 않고 송금하여 빗을 갚도록 했다.
이렇게 몇 달간 송금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해서 다달이 송금을 하여 이모 때문에 얻어 쓴 어머니의 빗을 갚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빗을 다 갚고 나서도 계속해서 매달마다 송금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매달 돈을 보내고 임기가 끝나 빈손으로 귀국하면 나는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이 문제를 않고 몇 일 동안 고민을 했지만 해답은 얻지 못한 체
매월 집으로 보내던 돈을 중단하고 저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자동차 운전을 배워 운전 면허증을 땋다. 그리고 곧바로 승용차를 샀다.
병원의 기숙사에 살았음으로 자동차는 필요치 않았던 것인데 운전을 배웠으니
그냥 사서 타고 다닌 것이다. 그보다 먼저 나는 수영도 배우고 자전차 타는 것도 배웠다.
이렇게 몇 가지를 배우다 보니 세월이 흘러 3년 임기가 끝나 가고 있었다.
그때는 이미 기한 없이 유효한 노동허가와 영주할 수 있는 거주 허가를 가지고 있었음으로 귀국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지만 남들이 3년 지나 귀국하니 나 역시 귀국하고 픈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근무하지 않는 날에는 조용한 시간에 혼자 앉아서 고생하며 성장했던 서울생활
그리고 제사 공장에서 구루마를 끌던 일과
독일의 편리한 생활과 비교해 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귀국하기 싫었다.
그때 내가 독일에서 결혼하고 영원히 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좀더 있고 싶었다.
3. 어울리지 않는 결혼
돈이 아까워 새 것은 사지 못하고 헌 자동차를 구입하였지만 갈 곳이 없다.
이방인인 내가 찾아갈 곳은 아무데도 없다.
귀국해 봐야 부모님도 안 계시고, 독일에 함께 온 아가씨들과도 헤어졌으니
세상 위에는 나 혼자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외로움에 한숨 지며 지내고 있던 1977 년도의 무더운 여름날이다.
같은 병원에 근무하던 한 아가씨가 독일 남자와 결혼식을 한다며 나를 초청하였다.
같이 근무를 하면서도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알고 지내던 아가씨가 "부모 형제 없는 외국에서의 결혼식이다.
네가 나를 축복해 주지 않으면 누가 해주겠니,
음식도 얼마 작만 하지 않았고 사람은 몇 명 초청하지 않았다"는
말과 힘께 "꼭 참석해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결혼식장에 가 보았더니 말과는 달리 음식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도 많이 와 있었다. 모두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사람들 이였다.
음식을 먹고 파티가 시작되자 결혼한 신부와 신랑이 여러 사람사이를 헤치고 나에게 찾아왔다.
신랑은 처음 보는 남자였고 신부 역시도 그저 막연히 알고 지내던 터라,
갑작스런 일에 어물어물 허고 있었는데 신부는 "너 요즈음 어떻게 지내냐?
앞으로는 자주 만나자.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가 멀찍이 서 있는 독일 남자를 불러,
내 옆에 세워 놓고서 "야! 마틴아, 너 여기 있는 희자 좀 보살펴 주거라" 라는 말을 남겨 놓고
북새통으로 사라져 갔다. 마틴은 신랑의 친구였다는 것과, 이놈의 가시나가
마틴과 나를 짝 맺어주려고 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독일 남자와 결혼하며
한 사람이라도 자신과 같은 사람이 많아야 좋을 것 같아 나를 마틴과 짝을 맺어주려 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마틴과 춤을 추었는데 파티가 끝날 때까지 마틴은 내 곁을 떠나지 않다.
파티가 끝나고 마틴은 나를 병원의 기숙사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마틴과 몇 번 만났다.
그러면서 마틴의 직업은 전자 기술자며 필하모니 합창단 단원으로 취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과
야간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낮으로는 공장의 기술자로 일하고
밤으로 배우는 과목은 자기 직업의 "전문가" 교육이다.
나와 몇 번째 만나던 어느 날 마틴은 "몇 일 동안 다른 도시에 가서 교육을 받아야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없는 동안 난로에 불 좀 때 다오"하면서 자신의 방 열쇠를 주었다.
마틴의 부탁에 따라 나는 마틴이 없는 동안 그의 집으로 가서 난로 불이 꺼지지 안토록 석탄을 너 주었다.
그리고 나서 마틴이 돌아왔지만 마틴은 열쇠를 도로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에게 열쇠를 주지 않았다. 그가 돌아 왔으니 갈 필요가 없어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마틴의 초청을 받았다. 열쇠도 받을 겸 난로불을 피워주고 화분에 물 준 고마움의 인사로 초청한 것이다.
그때 마틴은 나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었다. 유행가만 듣고 살던 내가 클래식을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처음으로 듣는 클래식 음악 이였지만 그것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때 들었던 곡의 이름은 모른다.
그렇지만 그때들은 음악의 느낌은 남아 있다.
마치 성난 파도같이 출렁거리는 마음을 잔잔한 호수처럼 가라앉히는 느낌 이였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나도 마틴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고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머슴애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제사공장에서 만난 대학생 머슴애다. 지금 우리들은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는 내 머리 속에 처음 만날 때의 모습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머슴애라고 하는 것이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3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때의 모습으로 가끔 내 머리 속에 떠오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 내 처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짖는 것 같아 편지를 보냈다.
그 머슴애가 내 애인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성장할 당시의 사정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독일에 온 후 계속되는 편지 연락으로 알았다.
그렇지만 같은 도시에 사는 머슴애와 3년 가까이 사귀며 손을 마주잡고 걸어 본 것이 고작이다.
몇 번인가 조용한 기회가 주어지자 그 애가 나를 꼭 껴안고 볼을 비벼 주었던 것이 전부다.
물론 소년 소녀였던 우리들은 서로가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도 없었고
사실 남녀간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어린 시절 이였다.
3년 가까이 사귀며 느낀 감정으로는 그 머슴애보다는 오히려
그의 부모님들이 나를 더 좋아하시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의 부모님들이 나한테 직접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어쩌다 내가 찾아가면 나를 반겨 주시는 표정으로 느꼈다.
그러니 그를 나의 애인이라고 까지 말하기에는 애매한 관계였다.
그렇더라도 나는 그에게 내 입장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고향에서 3년 가까이 독일에 온 후 3년 넘게,
도합 6년을 기다리는 머슴애한테 내가 독일에서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지 않는다면,
죄를 짖는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나를 잊어 줄 것과 다른 여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나니 내 마음은 자유스러워 진 기분이 들었다.
전에는 이놈의 머슴아가 내 마음을 동아줄로 꽁꽁 묶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잠을통을 내 몸에 채워 놓은 것 같기도 했다.
나를 잊어 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부터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 졌다.
그러자 마틴과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있는 용기도 생겼고 욕망도 꿈틀거렸다.
이때부터 우리는 전보다 더 자주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그때는 지금과 같지 않아서 편지가 오래 걸릴 때다.
내가 마틴과 가까이 지내느라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린 시절 애인 이였던 머슴애한테서 편지가 왔다.
다른 여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는 내가 보낸 편지를 받고 써 보낸 편지다.
내용은 그가 나를 뜨겁게 사랑했다는 것이 역력히 쓰여져 있었다.
아침에 편지를 받고 오후반 근무를 하는데 내 생각은 온통 그 머슴애 뿐 이였다.
그를 사귀고 나서 얼마 안 되어서의 일이다. 나는 그에게 빵이라도 한쪽 사주고 싶었다.
그때 나는 공장에서 받는 월급을 어머니께 봉투채 같다 드리며 용돈을 타서 썼다.
그에게 빵이라도 사주고 싶은 나는 어머니에게 용돈을 더 달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몹시 꾸중을 하셨다. 어머니한테 꾸중을 들은 나는 몹시 서운하였고,
그러한 사실을 종이에 적어 머슴애한테 편지로 보냈다. 그때 우리들은 자주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야간으로 학원에 다녀야 하고 그는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서로의 생각을 편지로 주고받았는데, 내가 보낸 편지를 받아 본 그는
"우리가 부모님과 같이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며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라"는 편지를 보내 왔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은 "우리가 결혼하면 부모님 곁을 떠난다"는 뜻이고
"우리 결혼하자"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내가 그의 뜻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고등학교를 나왔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사귈 때 내가 중학교밖에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하여 여러 번 이야기한바 있다.
그럴 때마다 그 머슴애는 "고등학교 공부를 하면 좋다.
그러나 중학교 공부밖에 안 했다고 그것이 삶을 방해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졸업자의 행복과 중학교 졸업자의 행복이 다르지 않다"는 말을 늘 해 왔다.
그렇더라도 내가 고등학교만 나왔더라도 그와 결혼할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마틴과 깊이 사귀고 있었으니 돌라 갈 수 없는 몸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젊었던 시절이니까 마틴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나는 어린 시절의 애인 생각은 곶 잊어버리고 살았다.
마틴이 합창단에 가는 월요일 밤과 전문가 교육받는 날 저녁으로는 가능한 나도 근무를 하였다.
그것은 마틴이 집에 잇는 날에는 나도 병원 일을 하지 않고 마틴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결혼에 대하여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그러니까 마틴과 사귀기를 1년이 지나고 나서 갑자기 나는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내가 "고향에 다녀오마" 하자 마틴이 따라 가겠다고 나섰다. 마틴은 "너는 나와 결혼할 사람이다.
나는 네가 자란 환경을 알아야 한다"며 비행기표부터 사다 놓고 따라가겠다고 야단 이였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를 데리고 고향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마틴에게 우리나라의 도덕과 예의 범절, 풍습을 자세히 이야기 해주면서 함께 갈 수 없음을 설명하였다.
내 설명을 들은 마틴은 이번에는 결혼하여 함께 가자고 대들었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는 지금 머리 속에 남아 있지 않다.
아무튼 나는 그때 몹시 고향에 가고 싶었다. 남들은 한번 혹은 두 번씩 같다 오기도 하였는데
그때까지 한번도 고향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가 불현듯 고향이 그리워 젓다. 미칠 것 같이 그리워 졌다.
고향에는 가고 싶고, 내 휴가에 맞춰 비행기표를 사다 놓고 기다리는 마틴은 데리고 갈 수 없는 나는
처음에는 결혼을 거절하였지만 나중에는 서둘렀다.
그때 마틴의 누님은 "서로가 잘 모르는 사이니까 살아본 다음 결혼하라"는 권고를 하였다.
그러한 권고는 철저한 독일식이다. 그러나 내 도덕관은
"살아보다가 맞지 않으면 헤어지고 합당하면 결혼"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권고였다.
마틴 역시도 나와의 결혼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사실 마틴은 나와의 결혼을 전제로 해서 사귀고 있었으며 그러한 마음가짐은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나를 만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동안 내가 결혼할 의사를 보이지 않자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던 것뿐인데
이제는 결혼하자고 졸라댈 구실이 생긴 것이다.
처음 나는 결혼을 반대하였다. 그것은 마틴이 싫어서가 아니다.
마틴이 싫었더라면 나는 그와 몸을 섞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왜 그러한 생각을 하였는지는 모른다. 왠지 모르지만 나는 마틴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어찌나 졸라대는지 결국 결혼을 승낙하였고 1978년 8월 18일 결혼 신고를 하였다. 그
리하여 마틴과 나는 부부가 되어 고향으로 휴가를 나갔다.
마틴의 생김새는 미남형이고 친척들의 반응은 좋았다. 그런데 남동생 하나만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남 동생은 항공사에서 미국인과 같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말끝마다 "양놈, 양놈"하고 있다.
그러니 동생을 만나는 것이 몹시 불편하였다. 집안에서는 남동생 한 사람을 빼놓고는
친척들이 모두 마틴을 좋아했지만 밖에 나가면 쑥스러웠다. 춘천은 미군을 상대로 한 양색시가 있는 곳이다.
남들이 나를 양색시로 취급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래서 어디를 가려면 마틴을 몇 발짝 앞세우고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러한 내 행동은 "몸은 섞어져서 한 몸이 되었지만,
마음으로는 합해질 수 없는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쪽의 표현이 될 것이고 마틴쪽에서는
"마틴이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희자는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갔다"라고 표현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인식하기에는 너무나 젊었던 시절 이였다.
문화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휴가를 끝내고 돌아와 우리들은 한 집 살림을 하기 시작하였다.
신혼 생활이라고 하지만 방을 새로 얻은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살림살이를 새로 장만한 것도 아니다.
마틴이 살고 있는 집에 내가 쓰던 물건을 기지고 들어가 살았다. 병원의 기숙사에 살았기 때문에
혼자 3년 넘게 살면서도 살림살이는 필요치 않았다.
그러니 살림살이라야 과일을 깎아 먹던 칼과 물을 따라 마시던 잔 몇 개가 전부다.
우리들은 이미 휴가 떠나기 전 결혼신고를 하였지만 시간이 없어 살림살이를 옮기지 못하였던 것뿐이다.
집도 전부터 마틴이 살던 집이고 이미 내가 결혼 전부터 드나들며 잠자리를 같이했던 방이다.
그러니 신혼이고 뭐고 할 기분도 아니 였다.
그저 결혼신고를 하였으니 함께 살았던 것뿐인데 이렇게 함께 살게 되자
마틴을 서로가 각자의 은행 구좌를 갖자고 제안해 왔다.
우리말에 "부부는 동심 일체"라고 했다. 부부지간에 각자가 번 돈을 따로 챙긴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결혼했느냐?"라는 말과 함께 공동구좌를 쓰자고 나는 고집을 부렸다.
그러면서 이모 때문에 얻어 쓴 빗을 갚고 나서부터 모아 두었던 돈을 남편에게 주었다.
내가 모아 두었던 돈은 독일인들이 깜짝 놀래는 목돈 이였다.
널리 알려진 대로 독일은 복지 국가다. 아프면 의사에게 처방을 받아 약방에서 약을 타 오며
병이 나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는다. 아파서 일을 못하면 처음 6주일간은 회사에서 월급을 타며
6주가 지나서부터는 질병 보험회사에서 월급과 같은 액수의 보험료를 받는다.
늙으면 연금으로 살아가고 죽으면 지병보험금으로 장의사에서 책임진다.
그러니 대다수 독일인들은 월급을 저축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내 남편 이였던 마틴 역시도 나와 결혼할 때 맨주먹 이였다.
내가 이렇게 목돈을 내놓자 깜짝 놀래며 그때부터 돈을 모으려고 절약하기 시작하였다.
앞서 말했던 "각자가 따로 은행구좌를 갖자"는 마틴의 제안은 내가 목돈을 내 놓으며
"부부는 응당 공동 구좌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대로 실행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처음 독일에 와서부터 쓰던 은행구좌는 없애 버리고 내가 받는 월급은 남편의 은행구좌로 나오게 하였다.
그것 한 가지 말고는 "우리 결혼하였으니 앞으로 어떻게 하자"라는 말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결혼 전과 같이 나는 병원의 간호원으로 3교대 근무를 하고 마틴은 아침 반 근무를 하면서
야간으로는 월요일에는 합창단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
일주일에 이틀씩 전문가 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그러면서 마틴은 가끔 가다가는
술집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4. 결국은 이혼하고 말았다.
우리들의 부부생활은 결혼 전이나 결혼 후나 달라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은행구좌를 공동으로 쓰며 한집 살림살이를 한다는 것뿐이다.
이렇게 살림살이를 하면서부터 나는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때는 젊었던 시절 이였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본 바탕이 다른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가 우리들의 장래를 어렵게 하리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결혼 후 한 집 살림을 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서의 일이다.
나는 마틴에게 독일의 고유 음식인 "튀김"(보일네테 라고 한다)을 해주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독일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마틴에게 보여주려고 했던가 보다.
그런데 만들 줄은 몰랐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간호원에게 물어 보았다. 그
는 "빵을 물에 붉힌 다음 계란과 고기를 넣고 반죽하여 후라이판에 튀긴다.
그러면 밀가루 반죽보다 맛있다"라고 알려주었다.
그가 알려준 대로 빵을 사다가 물에 붉혀 고기와 계란을 반죽하여 후라이팬에 튀겼다.
그런데 반죽이 너무나 질퍽하여 독일식으로 주먹처럼 뭉쳐지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해 먹는 빈대떡 같이 되고 말았다.
다음날 일자리에서 음식 만드는 법을 알려준 간호원한테 사실을 설명하였더니
그는 "왜 빵을 물에 붉힌 다음 짜지 않았느냐?"라고 하였다.
"네가 언제 알려주었느냐?"고 반문하였더니 "그런 것은 상식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독일인들끼리는 상식으로 통하는 문제들이 나에게는 통하지 않고 있다.
또 우리끼리는 말을 안 해도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상식이 마틴에게는 통할 수 없다.
그럼으로 우리들의 결혼 생활은 감정이 통하지 않는 메마른 생활이였다.
그렇더라도 활력이 넘치는 젊음이 있었기에 이질감에서 오는 어려움은 느끼지 못하고 살면서 첫 애를 나았다.
그리고 나는 만이 울었다.
병원에서 낳는데 아프다 고 하면 간호원들이 조용히 하라고 소리나 질렀지
어느 누구하나 손 한번 잡아 주는 이도 없으니 무서웠고 외로웠다.
내가 독일에 오기 전 올케 언니가 애를 나을 때 어머니도 계시고 이웃집 아주머니도 오셨다.
그런데 나는 이게 무슨 꼴인가 싶었다. 위로는 고사하고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는 간호원의 핀잔을 들으며
애를 나야 하는 신세가 서러웠다. 혼자서 얼마 동안 진통을 겪고 애를 나았는데 딸이다.
독일 사람들은 딸을 나면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하나도 좋지 않았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나는 귀국했을 텐데, 이제는 애까지 났으니
죽어서도 가지 못하고 독일 귀신이 되는 구나" 생각하니 서러웠다.
그리고 기다리는 머슴애한테 "나는 독일에서 살 것이니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는 편지를 보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머슴애 생각뿐이 아니고 모두가 그리웠다. 어려서의 일들, 그리고 자라면서 일어났던 일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아버지만 살아 계셨더라도 귀국을 하였을 텐데,
오래 동안 나를 가다리고 있던 머슴애 한데 다른 여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라는 편지 보냈던 것을 후회만 하다가
애를 안고 퇴원을 하였더니 마틴은 근무를 가지 않고 시장을 보아다가 손수 빵을 빚어 구워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애타게 그리워하며 먹고 싶은 것은 올케 언니가 애 났을 때 어머니가 끌이셨던 미역국이지 빵은 아니다.
마틴은 성의를 보여주려고 최선을 다하여 만들었겠지만 나는 식탁에 차려진 빵을 보고
"이게 미역국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다.
그러니 먹고 싶지도 않았고 마틴에계 고맙다는 말도 내 입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미역국이 산모에게 정말로 좋은가는 의심스럽다.
그리고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영양가로 친다면 마틴이 구워 만든 빵 보다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아기 낳고 미역국"은 나의 삶이지만 "아기 낳고 빵"은 내 삶이 아닌 남들의 이야기다.
나는 내 삶을 살지 못하고 남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마틴은 이러한 나의 어리둥절한 태도에 서운했겠지만 마틴이 구워 만든 빵은
기쁨보다는 오히려 나를 더욱 더 슬프게 만들었다.
이러한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다른 점들은 애를 기르는 데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마치 정확한 기계와 같이 일정한 시간에 우유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 채우며 애가 울던지 웃던지 방안에 너 놓고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이 대부분의 독일 사람들이 애 기르는 방법이다. 독일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것이 좋다고 독일 사람처럼 기르는 이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애를 길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애가 울면 엄마가 애한테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마틴은 독일 사람이고
대부분의 독일 사람이 하는 것처럼 애가 울어도 못 가게 하였다.
이때부터 우리들의 부부 생활은 흡사 뻐겁게 돌아가는 기름없는 기계처럼 되어 갔다.
남편에게만 쏟아 붓던 사랑이 자식한테로 흐르기 때문에 남편 쪽의 사랑이 말라붙어
뻐겁게 돌아가는 기계처럼 되었다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전연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 보다는 문화차로 인하여
감정이 오고 가지 못하고 막혀 있음이 더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낡은 기계라도 기름만 있으면 삐그적 삐그적 하면서도 돌아가듯이 어려움이 있는 가정에서도
부부간에 마음만 맞으면 잘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부부 생활은 그와 정 반대다.
마치 빈틈없이 만들어진 기계가 기름 없이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것은 뿌리가 다르면 줄기와 잎이 다른 것처럼
나와 마틴은 서로 다른 문화를 머리에 담고 있음으로 사물을 보는 각도가 다르고
해석이 다르고 그럼으로 행동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그때만 해도 젊었던 시절 이였으니까 문화 장벽을 뛰어 넘을 수 있는 활력이 있었다.
그러기에 마찰을 빚으면서도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이렇게 어렵게 살아가면서 몇 년이 지나자 드디어 마틴이 야간 학교를 졸업하고 "전문가"가 되었다.
마틴이 전문가 자격증을 얻고 부터 나는 병원에서 하루에 반나절 근무를 하였다.
우리말로 하면 "반나절 근무"지만 하루에 반나절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일주일에 20시간씩 즉 일주일에 이틀 혹은 삼일씩 하는 근무였다.
내가 월급을 작게 받는 반나절 일을 한 것은 마틴이 전문가로 전보다 많은 월급을 받아 오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 보다는 그때 두 번째 아이가 태어났음으로 집에서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틴은 전문가가 되어서도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다만 한가지뿐이다.
그 한가지란 야간학교 다닐 때보다 술집에 더 자주 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다니는 공장이 운영이 안 되어 파산할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그때부터 마틴과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결혼 전부터 시작해서 7년 동안이나 야간학교 다니던 마틴이 졸업하면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데 정작 졸업하고 나니 마틴은 주막에 가는 일이 더욱 잦아졌다.
어느 때는 술에 취해 눈가에 게질게질 술꽃을 피우며 밤늦게 비씰비씰 들어올 때도 있었다.
내가 반나절 근무만 함으로 마틴이 근무하지 않는 토요일과 일요일은 나도 근무를 않고 집에 있는 날이 많았다.
그런 날에는 남들처럼 딸들의 손을 잡고 남편과 함께 공원에 산책이라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마틴은 나의 간절한 소망과는 달리 아침부터 주막으로 간다. 그러니 소박한 나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마틴을 술집에 못 가게 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남편을 주막에 가지 못하도록 잡아 둘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가정을 지키도록 하는 방법은 내가 집을 비우는 길로 생각되었다.
남편이 근무하지 않는 날 내가 집을 비우면 남편은 어린아이를 보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자면 술집에는 가지 못할 것 같았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노동청으로 달려가 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때마침 "노인 간호학"이라는 학과가 새로 생겨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었는데 졸업 후의 취직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입학원서를 내고 나이 어린 학생들 틈에 끼어 공부를 하였다.
내가 학교에 다니자 남편은 자신이 다니는 공장이 문을 닫을 것 같다며 그러면 자신은 실업자가 될 터이니
나보고 학교를 중단하고 병원에 온종일 근무(주 40시간)을 하라고 권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남편의 권고를 무시하고 고집을 부려 학교를 다녔다.
주중에는 이론을 배우고 남편이 근무하지 않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병원에서 실습을 하였다.
내가 토요일과 일요일에 실습을 한 것은 앞서 말 한대로 남편으로 하여금 집을 비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 이였다.
원래의 학기는 3년 이였지만 나는 이미 간호원 이였음으로 2년 만에 졸업을 하였다.
내가 졸업을 하자 남편은 또다시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주막으로 출근을 하였다.
나는 마틴에게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행복이 주막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가정에 있다"는 것을 여러 치레 설명했지만
내 이야기는 남편의 귀에는 "소귀에 경 읽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남편이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면 쉬는 날 가정을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네가 원하는 대로 나는 "온종일 근무"를 할 것이니
술집에 가지 말아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을 하였다. 남편이 그러마고 하기에 나는 병원에 온종일 근무를 하였지만
남편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결혼 후 한목에 목돈을 내 놓자 남편은 돈을 모아 집을 샀으면 좋겠다는 말을 늘 해 왔었다.
혹시 집을 사면 남편의 술집 출근은 막아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헌집을 사면 수리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자면 주막에는 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기 조금 전에 남편의 고모가 죽으며 남편에게 유산을 남겨 주었다.
그리고 나서 또 다른 고모가 유산을 남겨 주었다. 마틴의 고모들이 부자는 아니 였지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유산은 마틴이 받았다.
당시 내 관심사는 마틴을 술집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유산을 얼마나 받았는가를 알려 고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내 짐작으로 그 동안 저축한 돈과 물려받은 유산으로 집 한 채는 살수 있을 것 같아 집을 사자고 하였다.
마틴은 내 요구대로 넓은 대지의 단독주택을 샀다.
남편의 친구로 이웃에 살던 사람도 우리 집과 나라니 붙은 옆집을 샀다. 이리하여 두 가정은 서로 도와 가며 집수리를 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부부 생활을 좀더 자세히 알 수 있었는데, 남편의 친구네 가정과 우리 가정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났다.
그들은 모든 것을 부부가 먼저 상의를 한 다음 합의에 의하여 일을 처리였지만,
남편인 마틴은 달랐다. 내 생각대로 헌집이라서 수리를 해야 함으로 술집에 가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은 혼자서 결정을 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너를 위하여 이토록 많은 일을 하는데 너는 나를 몰라주느냐?"라는 식이었다.
내 의사는 물어 보지도 않고 자기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다가 내 환심을 사려는 마틴의 행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뿐이 아니다. 있는 돈을 몽땅 들여 집을 사고부터는 돈에 매우 신경을 썼다.
결혼 초 마틴이 각자 은행구좌를 갖자고 할 때 부부는 공동 구좌를 가져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던 행동이 후회스러웠다.
마틴은 물건을 사올 때마다 "너를 위하여 좋은 것으로 사 왔다"라는 말을 했다.
그렇치만 내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사온 물건들은 내 물건이 아니다.
나는 누구란 말인가? 누구를 위하여 죽도록 일 만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내 것이라는 것을 자지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즉시 은행으로 가서 구좌를 냈다. 그리고 일자리에 제출하여
월급이 새로 낸 구좌로 넘어오도록 했다. 몇 일 후 내 월급이 자신의 구좌에 들어오지 않자
마틴은 내가 단독 구좌를 새로 냈다는 것을 알고 몹시 화를 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며칠 후의 일이다.
마틴이 다니던 공장에 우리나라 남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자기 집에서 생일 잔치를 한다며 우리를 초대했다.
나는 원래부터 몸치장을 안는다. 그렇더라도 남의 집 잔치에 꾀죄죄한 차림은 실례가 될 듯해서 아이들 옷부터 갈아 입히고
몸단장을 하느라고 시간이 걸렸다. 나보다 먼저 외출 준비를 끝낸 마틴은 내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이웃의 친구네 집으로 건너갔다. 내가 몸단장을 다 하고 나서 기다려도 남편이 오지 않기에 건너가 보았더니
마틴은 친구의 부인과 육아 교육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조금 기다렸다가 말이 잠시 끊어졌을 때 마틴보고 생일 집에 가자고 했더니
"중요한 이야기를 끝내야 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할 수 없이 혼자서 이이들만 데리고 갔다.
그런데 오지 않겠다던 마틴이 버쓰를 타고 금새 뒤쫓아 와서는 계속해서 맥주를 마셨다.
한국남자의 생일잔치에는 독일 남편을 가진 다른 여자도 있었는데, 잔치가 끝날 무렵이 되자 그녀의 남편이 데리러 왔다.
이 남자는 마틴과도 아는 사이였다. 이 남자가 들어오자 마자 맡틴이 이 남자에게 한다는 소리가
"너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 해야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 남자는 마틴한테 "네가 나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먼저 생각하라"고 하였다.
마틴과 이 남자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아내인 내가 모르는 일이라면 그리 중요한 일은 안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마틴은 여러 사람 앞에서 사과를 요구하였고 이 남자가 사과를 거절하자
"기분이 나쁘다"며 집에 간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아이들도 주르르 아버지를 따라 나갔다.
그러니 내가 자리에 앉아만 있을 수 없어 마틴과 아이들을 차에 싫고 집으로 몰았다.
집에까지 오는 동안 마틴은 별의별 소리를 다 하였다. "왜 천천히 달리느냐?"
"신호등이 노란 불이면 가도 되는데, 왜 서느냐?"는 등 그야말로 술 주정이다.
이렇게 술에 취한 사람이, 내가 집 앞에 차를 세우자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또 술 마시려고 맥주 집으로 갔다.
그때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독일인들 앞에서의 망신이라면 나는 잠들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분한 마음에 거실에서 앉아 기다리고 있다가 밤늦게 술에 취해 비씰비씰 들어오는 마틴한테 욕을 했다.
그러고는 내가 쓸어졌는데 마틴이 나를 일어 내키며 "미안하다"는 말을 하였다.
너무나 갑작스런 순간이라서 나는 마틴한테 얻어 맞은 것도 모르고 쓰러졌다.
마틴이 일어내키며 용서를 빌어서 내가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내가 마틴한테 했던 욕은 우리말로 직역하면 "너는 실패자다"라는 말인데
그 욕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말의 원 뜻은 "Versagen. 동작되지 않다. 거부되다"지만,
특히 남성들에게는 이 보다 더 나쁜 욕이 있을 수 없는 "허리끈 밑"의 실패를 의미하는 모욕적인 욕이다.
학식이 풍부한 사람한테 "야 이 바보야 이것도 모르냐?"고 했다면 학자는 "응 그러냐. 몰라서 미안하다" 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렇지만 좀 모자란 사람한테 그 말을 했다면 모자란 사람은 가만있지 못하고 덤벼든다.
이와 같이 내가 했던 욕은 마틴에게는 화살이 과녁에 꽂히듯 명중했던 것이며,
이성을 잃은 마틴이 나를 쥐어박은 것이다.
나는 그때 내가 마틴에게 했던 욕이 남성들에게 그렇게 강도 높은 욕이 되는 줄은 몰랐다.
그것도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 중의 하나다.
며칠 후 마틴이 술을 마시고 들어올 때 나는 또 "너는 실패자다"라고 했으며 또 얻어맞았다.
그리고 다음에 똑같은 말을 해서 또 얻어맞았다.
한번에 한대씩 도합 세 번에 걸쳐 세대의 뺨을 맞았다.
그러면서도 참았다.
그런데 조용한 시간에 생각해 보니 참는 것만이 최선의 길은 아닌 것 같았다.
마틴이 나를 때린 것은 결혼 후 14년이 지난 다음이다. 그런데 처음 그 일이 있고 부터는 툭하면 손이 올라가고 있다.
내 성격도 역시 공격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마틴이 술 마시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건만
나는 요즘들어 마틴이 술만 마시면 덤벼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공격적일까? 마틴이 어째서 포악해 졌을까? 이대로 살 수 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문제의 해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세 가지 방법이란
첫째는 내가 마틴에게 덤벼들지 않던가 마틴한테 맞으며 사는 길이고,
둘째는 내가 쌍스러운 욕을 하더라도 마틴이 참는 길이고
셋째는 이혼하는 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마틴과 함께 사는 한 내 성품이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성질이 이렇게 변한 것은 결혼 생활 14년 동안의 결과로써 고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고 매를 맞으며 살아갈 수는 없다. 내 성품이 변하지 않는다면 마틴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손찌검이 심해질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나머지 길은 이혼하는 길 밖에 없다.
그때 나는 퇴근길에 "노인 간호학"을 배울 때 심리학을 강의하던 교수와 같은 전차를 타는 경우가 있었다.
어느날 나는 그 교수에게 조언을 청했다.
그러나 교수는 나에게 이혼을 하라던가, 함께 살라는 말은 해주지 못했다. 나는 교수뿐이 아니고 평소에 알고 지내던 선배 언니들한테도
조언을 청했지만 모두 마찬가지다. 누구에게서도 만족한 조언을 듣지 못한 나는 심리학책을 뒤적이며 며칠 생각하다가
따로 셋방을 얻어 집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변호사에게 이혼신청을 해 놓고 마틴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렸다.
그때 마침 마틴은 다니던 공장이 문을 닫아 실업자가 되어 있을 때다. 내가 이혼하자는 제안을 하자
"내가 실업자가 되니 너까지 나를 버린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후 부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결정을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심리학 상식으로는 내 성질이나 마틴의 마음이 달라질 수 없다. 그렇다고 이혼이 최상의 길은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사이 재판 날이 다가와 법정에 가서 이혼 판결을 받았다.
5. 우리들의 불행은 누구의 잘못일까?
이혼하고 나서 가장 많이 생각하는 문제다. 이혼 전까지 계속해서 마틴을 원망하며 살았다.
우리들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잘못은 오직 마틴에게 있는 것 같았기에 그를 원망하며 살았던 것이다.
"혹시 나에게 잘못은 없을까? "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이혼한 다음부터의 일이니까,
우선 마틴부터 말 한다면 마틴은 잘못이 없다.
물론 마틴이 변한 것 사실이다.
처음 내가 마틴을 사귈 때 그리고 결혼하고 나서도 그가 나를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가령 내가 우리나라 사람들끼리의 모임에서
마늘(마늘을 먹으면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지만 같이 먹으면 냄새를 맡지 못한다)을 먹고
집에 들어가면 마틴은 얼른 부엌으로 들어가 생마늘을 먹고 나왔다. 어쩌다 내가 문법에 틀리는 말을 할 때도
"내가 너희 나라에 살았더라면 나는 너처럼 말을 못 할 것이다"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거의 독일 사람 같이 말을 하는데도 말을 못한다고 야단 이였다.
어느 때 팝송을 틀면 클래식 음악을 들으라고 야단 이였다. 물건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만 사 왔다.
실업자가 되고 부터는 내가 돈벌이를 하고 있는데도 돈을 못쓰게 하였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던 가정 생활이
어느덧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틴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곳 내 존재가 마틴의 마음속 한 가운데서 가장자리로 밀려났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마틴이 나를 싫어한 것은 아니다.
이혼하고 얼마 안되어서의 일이다. 서울에서 남동생이 나를 찾아왔다.
내가 마틴을 데리고 고향으로 휴가 나갔을 때 우리 가정에서 유일하게 그와 영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던 동생 이였다.
동생이 귀국한 몇 일 후 딸들로부터 외삼촌이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 마틴은
"여기까지 와 가지고 나를 안 보고 갈 수 있느냐?"라며
전화기에다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마틴과 이혼하였다.
마틴이 내 동생을 그리워 한다는 것은 곳 이혼한 나를 그리워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뿐이 아니고 아버지를 찾아간 아이들에게 "내가 실업자가 되니까, 너희들 어머니가 나를 버렸다"며
눈물을 흘리더라는 말도 들었다. 또 얼마 전에는 아이들보고 싶다고 찾아와서 "모든 가구를 갖다 버려라.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집을 다 고쳤다"라며 소리를 지르고 돌아갔다.
마틴이 나보고 집으로 돌아오라는 말은 한번도 안 했다.
그렇지만 앞에서 했던 말로 미루어 지금이라도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간다면 마틴은 나를 반겨 줄 것이다.
그러나 마틴의 자기 중심적인 생활 태도는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줄 수도 없다"라는 내 판단에 의한 것이다.
결혼 생활 14년 동안 마틴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안 했다.
그의 누이는 "어머니가 없어 마틴이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것과 "
아버지는 화실에서 일했다"는 등 여러 말을 해 주었지만
본인 자신은 단 한가지만 몇 번인가 반복해서 말했을 뿐이다.
그 반복하였던 한 가지란 일곱 살 때의 일로써
"아버지가 보고 싶어 고아원을 탈출하여 밤새도록 걸어서 아버지한테 갔더니
아버지는 당장 고아원으로 돌아가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와 같이 마틴은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이다. 그럼으로 사랑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다.
마틴에게 잘못이 있다면 사랑은 주지 못하고 받으려고만 했던 것뿐이다.
나 역시 마틴을 사랑하지 못하고 마틴으로 부터 사랑을 받으려고만 했던 것 같다.
이혼 후 "혹시 나에게 잘못은 없을까?" 를 생각하다 보니 떠오르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이혼하기 전에는 알지 못하였던 문제로 독일인들이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은
독일인끼리의 결혼 생활을 원만히 할 수 없기 때문에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이다.
그런것을 내가 미리서 알았더라면 나는 모든 것을 감수하고 살았을 것이며,
그렇게 했더라면 마틴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내 존재가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한가지는 내가 마틴과 고향으로 휴가를 갔을 때 그와 함께 다니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마틴의 입장에서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을 테지만,
마틴이 우리나라 사람이었고 내가 마틴을 사랑했다면, 진정 그를 사랑했더라면,
세상사람 모두가 나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해도,
전 인류가 나의 심장을 향하여 총뿌리를 겨눈다 해도,
내가 독일에서 했던 것처럼 나는 마틴의 손을 잡고 떳떳이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틴은 노랑머리 서양 사람이다. 내가 마틴이 싫어서 그와 같이 걷지 않으려 했던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서양 사람이라는 것 단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이것은 곳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허물어 틀릴 수 없는 문화 장벽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잘못은 없다.
별거 생활을 하면서 이혼 신청을 해 놓고서의 일이다.
나는 마틴에게 만나자고 전화를 하여 그가 늘 다니던 술집에서 만났다. 나는 그때 마틴을 달랬다.
"야, 마틴아, 너는 지금은 일자리가 없어 실업자가 되었지만 전문가 자격증이 있으니
앞으로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마라. 네가 집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나 역시 너의 재산에 대하여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
네가 나에게 돈을 주고 싶으면 주고 주기 싫으면 인줘도 된다. 우리 깨끗이 헤어지자. 돈 몇 푼 때문에
자식들이 법정에서 아빠를 위하여 증언을 할까? 엄마를 위하여 증언을 할까? 하는 괴로움을 주어서야 되겠느냐"
아무 말도 없이 내 말을 듣기만 하는 마틴은 내가 자기를 버린 것에 대하여 몹시 분통해 하는 표정 이였다.
그런데 돌아오려고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찾아와 가지고 한다는 소리가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너와 즉시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저것도 사람인가?"싶었다.
내가 먼저 마틴을 만나자고 했으며, 만나는 장소를 그의 집 근처로 정했던 것은
내가 마틴에게 미련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만약 "여보, 자식을 둘이나 가진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소,
자, 집으로 들어갑시다"라는 말을 했더라면
나는 감지덕지하고 마틴의 품에 안겨 고마움에 눈물을 흘렸을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때 마틴을 만나야 했던 것은 부모들의 잘못으로 자라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마틴이 이혼을 안 해주고 소송을 질질 끌고 나갈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그것뿐이 아니고 머릿속에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마음속 밑바닥에서는 "여보 내가 잘못했오,
집으로 들어갑시다"라는 말이 마틴의 입에서 나오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전화로 해도 될 말을 만나자고 했으며, 나자는 장소를 마틴의 집 근처로 잡았던 게 아닌가 한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너와 즉시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저것도 사람인가?"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그 말은 "여보, 미안하오, 내가 잘못했소 "라는 독일식,
아니면 마틴식의 표현 일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 기계적인, 사무적인 말만 입에서 귀로 흘러들었지 가슴과 가슴은 갈라져 있었으며,
한 침대에서 잠을 자는 우리들의 부부생활은 한 그릇에 담겨진 기름과 물처럼
겉으로는 섞어졌지만 마음은 따로따로 였던 것 같다.
나는 이러한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감정의 단절을 죽음을 향하여 흘러가는
삶과 바다를 향하여 흘러가는 강물과 비교해보고 싶다.
높은 산에서 시작된 두 줄기의 깊은 강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다가 비가 많이 오는 여름철에
물이 강둑을 넘쳐흘러 잠시 섞어졌다가
비가 작게 오는 가을철로 접어들자 물이 줄어들어 제각기 흐르는 것과 같이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라고 할까,
마틴과 나의 타고난 천성이라고 할까, 융화될 수 없는 이 두개의 개성은
활력이 넘쳐흐르는 젊은 시절 경계를 벗어나 잠시 만났던 것뿐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들의 불행은 누구의 잘못에 의한 것이 아니다. ---끝---
편집과 음악=씨밀래
출처=설대수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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