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한개마을 옛 담장
성주군 월항면 대산1리에 있는 한개마을은 2007년 12월 31일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255호로 지정된 성산이씨 집성마을로 600여 년의 명맥을 이어왔을 뿐만 아니라 전통가옥과 그 가옥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이 옛 모습을 유지하지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한개마을 전경
조선 세종대에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처음 입향하여 개척하였고 현재는 그 후손들이 모여 생활하고 있다. 17세기부터 많은 과거합격자를 배출하였으며, 북비공 돈재 이석문(1713~1773), 응와 이원조(1792~1871), 한주 이진상(1818~1885), 대계 이승희(1847~1916) 등은 이 마을에서 배출된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개마을 돌담길
'한개'라는 마을 이름은 예전에 이곳에 큰 나루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한'은 크다는 뜻이고 '개'는 개울이나 나루를 의미하는 말로 '한개'라는 이름은 곧 '큰 개울', 또는 '큰 나루'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다.
마을앞은 낙동강(洛東江) 지류(支流)인 흰내(白川)가 흐르고 전답(田畓)이 있으며 뒤쪽 배산(背山)은 해발(海拔) 300m인 영취산(靈鷲山)이다. 이 산이 펼치는 지세(地勢)는 청룡(靑龍) 백호(白虎)를 완연하게 이룩하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으로 옛날부터 영남 제일의 길지(吉地)로 꼽혀왔다. 한개마을은 결집(結集)된 자리에 위치하고 성산이씨(星山李氏) 세거지가(世居地家)들은 그 중에서도 혈(穴)이 맺힌 자리에 가기(家基)를 점정(占定)하고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 9동에 이르고 있으며, 건축물의 대부분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되었으나, 전체적인 마을구성이 풍수에 따른 전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류주택과 서민주택의 배치 및 평면도 지역적인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개마을 돌담길
▲한개마을 돌담길
마을 입구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마을 안쪽으로 안내하는 안길과, 안길에서 집집을 연결하는 샛길의 담장은 유난히 높고 출입구가 폐쇄적이라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기가 어렵다. 또 안길과 집들의 대문이 바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일가친척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지만 집집마다 나름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려는 양반선비들의 자존심과 집을 독립된 하나의 소우주로 영역화, 폐쇄화 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구불구불 3천300m나 이어지는 고샅길 담장을 쌓은 수법도 특이하다. 흙돌담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높은 비율의 황토반죽에 크기, 색깔, 모양이 제각각인 자연석을 박은 담장모습이다. 언뜻 무질서해 보일 수도 있지만, 멋스럽고 자연미가 흘러넘친다.
▲한개마을 돌담길
▲한개마을 돌담길
한개마을의 옛 담장은 크게 외곽담과 내곽담으로 나눌 수 있다. 외곽담은 마을으 아옥이 대체로 경사지에 잇어서 산지에 업한 담과 주택동 쪽의 측면담은 높은 반면 앞뒤 주택의 영역을 구획하는 담은 낮게 되어 잇다. 내곽담은 주거건물의 처마보다 낮아 담 양측의 영역을 시각적으로 차단 또는 연속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개마을 옛 담장은 장인이 아닌 마을 주민들 스스로의 힘에 의해 세대를 이어 만들어지고 덧붙여진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과 향토적 서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마을 담장의 주류인 토석담은 전통 한옥과 잘 어울어져 자연스런 마을의 동선을 유도하면서 아름다운 마을 속에 잘 동화되어 있다.
<2008. 12. 13>
성주 한개마을 교리댁(校理宅)
▲교리댁 대문
▲사랑채
▲사랑채
▲노둣돌
사랑채는 자연석(自然石)쌓기 축대에 자연석초석(自然石礎石)을 사용(使用)하였고 원주(圓柱)를 세웠는데 고주(高柱)는 방주(方柱)로 되어있다. 좌측(左側)의 대청(大廳)2간(間)은 사분합(四分閤)을 달아 폐쇄(閉鎖)와 개방(開放)을 자유(自由)롭게 하였으며 귀틀과 청판(廳板)의 마모된 상태에서 연륜(年輪)을 읽을 수 있다. 동측면(東側面) 반간(半間)에 아궁이가 설비되고 간역(簡易) 소변소(小便所), 고미다락 등이 있어 그 구성(構成)이 유별(有別)나다. 중문간(中門間)는 토장(土牆)으로 되어 있으며 중문(中門)과 사랑채 사이의 공극(空隙)에 간장(間墻)을 쌓아 내외장(內外墻)을 만든 것이 흥미롭다. 그러나 원래는 정침(正寢)의 남(南)쪽에 중문(中門)채가 있었다 하니 안채에의 출입(出入)은 서대문(西大門)에서 사랑앞마당을 지나 남중문(南中門)으로 출입(出入)하였겠다.
▲사당
▲중문
▲안채
안채는 중문(中門)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와 떨어져 독립(獨立)되어 있다. 창건시(創建時)에는 현(現) 안채앞의 터밭에 동측(東側)으로 찻간, 방헛간의 3간(間)집이 남측(南側)에는 5간(間)의 중문(中門)채가 배치(配置)되어 있었다 하니 안채의 배치형태(配置形態)는 남부지방(南部地方) 민가형(民家型)인 일자형(一字型)의 정침(正寢)을 중심(中心)으로 각(各) 개동(個棟)이 튼ㅁ자형(字形)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라 한다. 없어진 2동(棟)은 6.25때 파손되어 철거하였다 한다. 1870년경(年頃)에 가묘(家廟) 사랑채, 서재가 중수(重修)되었다 한다.
▲안채
▲안채
▲안채
안채는 정면7간(正面七間), 측면1간(側面一間), 전후퇴간형식(前後退間形式)의 5량(樑)집 몸채에 아랫채가 평면상(平面上)으로는 독립(獨立)하여 ㄱ자(字)로 접근(接近) 배치(配置)되어 있으나 ㄱ자로된 한 지붕밑에 놓여져 있다. 몸채는 중앙부(中央部)에 2간(間)의 대청(大廳)이 자리잡고 양측(兩側)에 방2간(間)씩 꾸며져 있으며 동단(東端)에 부엌이 설치(設置)된 일자형식(一字形式)의 배열(配列)로 되어 있다. 일반적(一般的)으로 ㄱ자형(字形)의 평면구성(平面構成)은 부엌이 꺾이는 부분(部分)에 놓여 있는데 이 집에서는 몸채 서단(西端)의 부엌이 없는 쪽에 아랫채가 약간 간격을 두고 한지붕밑에 배치(配置)되어 있는 점(点)이 특이(特異)하다
문화재청 사진 자료
동계 이석구(東溪 李碩九)가 영조 36년(1760)에 세운 건물로 가장 오랜 내력을 지니고 있다. 집
의 이름은 현손 이귀상이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것에서 연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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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家傳)하는 바에 따르면 1760년경(年頃)에 창건(創建)되었다 하며
창건주(創建主) 이석구(李碩九)는 영해부사(寧海府使)를 거쳐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사헌부집의(司憲府執儀) 등(等)을 역임하였다.
이 주택(住宅)은 600여평(坪)의 대지(垈地)위에 대문(大門)채, 사랑채, 서재(書齋),
중문(中門)채, 안채, 사당(祠堂) 등(等)
6동(棟)의 건물(建物)이 독립위치(獨立位置)되어 있다.
서향(西向)의 대문(大門)채를 들어가면 곧바로 사랑마당이 되고,
사랑의 좌측(左側)에는 서재(書齋)가 있고
뒤에는 사당(祠堂)이 자리잡았다.
사랑채 앞에는 노눗돌이라고도 부르는 하마석(下馬石)이 있고,
운서영월(雲西迎月)이라는 글귀가 씌어 있다.
풀이하자면 "구름은 서쪽으로 흐르고 달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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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과음악=씨밀래
출처=문화재청,따다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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