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의 초대/시와 음악이 있는 곳

[두메에 살다] 전남 화순 시골살이꾼

까까마까 2015. 1. 13. 14:47




[두메에 살다] 전남 화순 시골살이꾼

 


 


 

[두메에 살다]

전남 화순 시골살이꾼


 



 

 




        

 



안준영 기자,

[사진 신희수 기자]

직행 버스로 서울에서 화순까지 5시간,

어떻게 잠들었는지조차 모를 만큼 골아 떨어졌다.

 "화순이요"라는 버스 기사의 목소리에 또 어떻게 눈을 떴을까.

정신을 차리고 본 화순터미널은 그리 작은 터미널은 아니었다.

터미널에서 본 화순은 조용한 지방 소도시였다. 터미널 앞에서 차를 세우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택시 기사에게 "동복면 가수리 가나요?"라고 묻자

"부대 가세요?"라고 되묻는다. 그 근처에 군부대가 있기 때문에 물어봤던 것이다.

차에 탄 손님들이 궁금한지 택시 기사가 이것저것을 묻는다.
"할머니 댁에 가세요?"
"아뇨. 아는 선생님이 살고 있다고 해서요."


사실 찾아가는 곳에 누가, 무얼 하는 사람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가고 있었다.

산에 사는 사람을 수소문해 소개 받았다. 농사도 짓고, 한옥도 짓고,

죽염도 굽고 사는 사람이란다. 알려준 주소를 찾아갈 뿐이다.

 택시의 미터기는 쭉쭉 올라갔다. 서울과 화순을 오고갈 수 있을 만큼의 요금이 나왔다.

택시 기사가 "이런 곳에도 마을이 있었네요"라고 말할 정도로 산골짝에 숨은 마을이다.

 

산중에 살아도 찾아오는 사람 끊이질 않는 집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곳은 마을 가장 안쪽이었다.

차로 갈 수 있는 길의 끝에 목재를 쌓아놓은 창고가 있다.

집도 짓는 목수라고 알고 있어서 그의 집인줄 알았다.

마중 나온 집 주인 김재철씨는 얼굴이 까무잡잡한, 영락없는 농사꾼이었다.

오자마자 밥은 먹었냐며 밥상을 차려준다. 내오는 반찬들이 전부 밭에서 가꾸고,

산에서 캐온 나물이다. 밥을 다 먹기가 무섭게 집 주인은 밭으로 나갔다.

마루에 앉아서 그의 외조카인 최복일씨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는 그냥 쉬고 싶은 사람들 와서 쉬었다 가는 곳이에요."
최복일씨는 햇볕에 말려놓은 밤들을 박스에 주워 담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김재철씨가 이곳에 들어와 산 지 이십오륙 년 됐다는 것,

그 전에는 모악산, 뱀사골, 청학동에서 공부하며 지냈다.

사람 많을 때에는 사십여 명이 살았다고 도 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농사도 짓고, 목수 일도 했단다.

들으면 들을수록 무어하는 곳인지, 무어하는 사람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취재는 뒤로 접고, 최복일씨를 따라다니며 일이나 조금 거든다. 그는 왼손잡이다.

열아홉살 때에 사고로 오른팔을 잃었다. 무안에서 선박 사업도 하고,

다른 장사도 하다가 다 정리하고 외삼촌 김재철씨 집에 들어와 산 지 삼사 년쯤이다.

그와 김재철씨는 동갑이지만 부를 때에는 삼촌, 조카하고 부른다.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감도 따주고,

산에서 따온 밤이며 다래도 먹어보라고 건네준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은 세 사람인데 그들이 먹기에는 과할 만큼

밤이며 다래며 먹을 것들이 풍족하다.
"마을 어르신들이 많은 걸 언제 먹냐고 그래도

여기 찾아오는 사람이 많으니까 또 다 먹어요."
최복일씨에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산에 살아도 김재철씨를 찾아오는 손님이 많다는 것. 명심보감 성심편에 이런 말이 있다.

'가난하면 번화한 시장거리에 살아도 서로 아는 사람이 없고,

부유하면 깊은 산 중에 살아도 먼 곳에서 오는 친구가 있다.

' 김재철씨는 돈이 많은 부자라기보다는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었다.

여름철에는 국악인들이 와서 소리 공부를 하고 가기도 한다.

그 때에는 이 골짝 저 골짝에서 소리가 울려퍼진다.

김재철씨를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마을이 시끄러워도

마을 어르신들은 그러려니 할 만큼 오가는 정이 깊다.

"세상이 만만해 보였어"


일을 마친 김재철씨가 다실로 안내한다. 차를 우리는 모습,

음악 선곡을 보면 그는 예사 농사꾼이 아니다.

묻기도 전에 궁금해하는 것은 웬만큼 안다는 듯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는다.
"사람들이 내게 직업이 무어냐고 물으면, 시골살이꾼이라고 그래요."


누군가를 알고자 할 때,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로 사람을 안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다. 우리는 아는 범주 내에서만 그 사람을 안다.

실제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말한다면,

우리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김재철씨가 그렇다.

자신의 직업을 시골살이꾼이라고 소개했지만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그게 뭐냐면 시골에서 재미있는 거리 찾아서 그거 하면서 사는 겁니다.

집 짓고 싶으면 집 지고, 차 좋아하니까 차밭 가꿔서 차 만들고 그러는 겁니다.

 잘 살고, 못 살고 기준을 세우면 사회에서 보면 나는 못 사는 사람이죠.

그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사는 거, 하루하루 삶입니다."


그의 나이 쉰여덟,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때에는 서른둘셋이었다.

젊었을 적부터 산에서 농사짓고 살았으니 그에게 귀농, 귀촌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또, 지금도 크게 다를 게 없지만 그때는 젊은 사람이면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일하던 때였다.

도시에서 직장 생활 한 번 해본 적 없냐고 물었지만, 단호히 "없다"고 답한다.
        


"경쟁하는 게 싫었어요. 그런데 살면서 가끔씩 그런 일들에 부딪히면 지금도 아주 힘들어요.

한옥을 지으면서도 힘든 게 내가 나를 속이는 일이예요.

일하는 건 돈 벌려고 하는 거지만 돈을 얼마나 벌거냐 생각하면 끝이 없어요.

5원을 벌까, 10원을 벌까하면 내가 말을 못해요."
그는 모악산, 뱀사골, 청학동에서 살면서 고시 공부를 했었다.


"대학 3학년 때, 광주에서 큰 일이 있었죠.

젊었을 때는 어떤 정의감으로 민법 변호사가 되겠다고 고시를 준비했어요.

그런데 매번 되질 않았어요. 법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 한 손에 저울을,

다른 손에 칼을 들고 있잖아요. 눈을 가리고 있으니까 법은 누구에게나 똑같죠.

인정이 없어요, 법에는. 나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안 됐나 봐요."
사법고시에서 떨어지면 다시 또 일 년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막막했다.

그는 청학동에서 모든 걸 내려놓았다. 공부를 그만하고 산에서 살겠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산에서 무어하고 살겠냐고 물었다. 그는 그냥 살겠다고 답했다.

"산에서 살다보니까 세상이 만만해 보였어요.

산에서 하루만 약초 몇 가지 캐서 내다팔면 공부하면서 한 달을 살았으니까요.

방 한 칸만 한 밭 갈고, 전기세 조금 내면 못 살 게 뭐 있겠느냐 생각했어요."


그는 어느 순간 산에서 살면서,

'왜 이리 사느냐. 내 스스로라도 편안해야 되지 않겠냐' 깨달았다.
"산에는 토끼도 있고, 호랑이도 있어요.

토끼에게 호랑이는 패죽일 존재이고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예요.

큰 나무 아래에 작은 풀한테도 마찬가지죠. 큰 나무가 없으면 햇볕도 더 쬐고 잘 자랄 수 있겠죠.

그러나 그것들은 자연이란 큰 테두리에서 보면 다 있어야 할 것들이에요.

사람과의 관계도 좋고 안 좋고를 나누면 전체를 볼 수 없어요.

내 가슴이나마 편안히 부둥켜안고 가보자. 그리 마음먹으니 편해지더라고요.

내가 세상을 용서한 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용서해주더라고요."

백아산 줄기에 터를 닦다


김재철씨가 고시 공부를 그만두고 산에서 살고 있을 때,

그의 아내는 광주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주말이면 아내는 반찬거리 양손 가득 들고, 큰 아들 등에 업고

광주에서 구례를 거쳐 남편 있는 청학동까지 찾아왔다.

토요일 밤에 막차 타고 들어와서 하루 자고

일요일 첫차 타고 나가야 월요일에 출근할 수 있었다.

마침 지인이 화순에서 자연학교를 만들고 터를 잡고 있었다.

산 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가 아내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건

광주에서 조금 더 가까운 화순으로 터를 옮기는 것.

자연학교에서는 자연농법, 대안교육, 대체의학, 마음치료를 함께 공부했다.

그 당시에 비료, 농약을 쓰자고 하니 사람들에게 통할 리 없었다.

그래도 뜻을 굳히지 않았다. 일본에 가서

〈생명농법〉, 〈무위농법〉을 쓴 후쿠오카 마사노부를 찾아가

자연농법을 배웠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도 많아요.

내가 옳다는 것을 남에게 주장하면 위험한 것인데,

서울식구들 데려와서 시골사람 만들어놨어요.

문화일보에서 기자하던 사람은 나한테 와서농사꾼이 되었어요."


그를 만나 목수, 농사꾼, 중이 된 사람이 여럿이다.

그는 삼사년 전까지만 해도 십여 년 동안 전국을 다니며 절, 제각, 한옥을 지었다.

지금도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올봄부터 함께 생활하며

요리를 도맡은 김영훈씨도 그렇다.

MBC 성우 출신인 그는 산 생활을 배우려고 이곳에 와 있다.
김재철씨는 이제 집 지으러 다니는 일은 그만두고,

앞으로는 죽염만 구울 생각이라고 한다. 죽염 굽는 일은 청학동에서도 했던 일이다.

구운 소금은 죽통에 넣고 깰 때에는 쇠붙이가 닿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기계가 아니라 손수 빻는다. 손에서 피가 터질 만큼 고된 일이지만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김재철씨가 하는 일들이 그렇다. 농사도, 집 지는 일도,

죽염을 만드는 일도 다 옛날 방식이다.




"쉬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오라고 하세요"


똥도 옛날 방식으로 싼다. 변소에서 일 본 뒤 톱밥 한 바가지 뿌린다.

그것을 썩혀서 비료로 쓴다. 요즘에는 시골에 가도 아궁이에 불 떼고,

재래식 화장실 남겨놓은 집이 흔치 않다. 편리한 걸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다.

'시골도 옛날 같지 않다' 말하는 건 도시인들의 이기심일지도 모른다.

시골이라고 꼭 불편하게 살아야 한다는 법도 없다.

그럼에도 도시 사는 사람들은 시골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김재철씨 집에도 재래식 화장실만 있는 건 아니다. 정화조도 따로 있고,

실내에는 수세식 화장실도 있다. 그래도 도시에서 온 손님들 눈에는

창밖 풍경을 내다볼 수 있는 재래식 화장실이 더 멋져 보인다.

산새소리 들으며 세상 근심 놓아버리는 변소라니….

아침 식사를 마친 김재철씨는 밤을 깐다. 밥에 넣어 먹기 위해서다.

손수 기르고, 산에서 얻은 것들로 차린 밥상. 도시인들은 모른다.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를 매일 고민하면서도 정작 내 입에 들어가는 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싼다.

그냥 보내면 서운하다고 밤 몇 줌을 쥐어준다.

손에 받은 것보다 마음으로 받은 게 크고 많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세상은 만만하니까."



 


 


[일본 동북 트레킹] 산은 늘 그 자리에 변함없다


 



↑ 0001(미다가하라라고 부르는 고산 평원에는 고산 습지가 펼쳐져 있다.

약 130종의 고산식물이 살고 있다.

7월 초순부터 9월 하순까지 3000m 이상의 산악에서 볼 수 있는 큰원추리,

검정나리, 손바닥나비난초 등 고산식물의 꽃이 핀다.)


 


 


[MOUNTAIN=안준영 기자] 일본의 엔저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최근 3개월 동안 1100원 이하의 환율을 보이고 있다. 일본 여행을 하기에는 적기다.

방일 관광객 수가 가장 많았던 2007년 260만명에 이어,

2013년에 일본을 찾은 한국 관광객은 245만명으로 역대 기록 2위다.

그러나 2011년 일본 동북대지진 이후로 선호 관광지가 일본의 남부 지역으로 변화했다.

지진 이전에 일본 동북 지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수는 1만 7천명이었으나,

지진 이후로는 7천 500명으로 절반가량이 줄었다.

외국인 관광객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한국에서의 관광객이 현저히 줄었다고 한다.


일본 동북 지방의 관문은 미야기현에 소재한 센다이 공항이다.

해변에 잇닿아 있어서 지진 당시 쓰나미 피해를 입기도 했다.

활주로가 허허벌판인 것은 어디 공항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센다이 공항만 더 황량해 보이는 건 재해에 대한 기억 탓일까.


일본 동북부의 외국인 관광객이 감소한 이유는 후쿠시마 원전에 대한 인식 때문이다.

이 지역의 방사능 수치는 세계 평균 기준보다도 이하이지만,

한 번 각인된 사람들의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곳의 사람들도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진 이전처럼 잘 살고 있다고 말할 뿐이다.
        


화산 지형을 관찰할 수 있는 자오산



센다이 시내에서 약 40km 떨어진 자오산은 야마가타현과 미야기현 2개 현에 걸쳐있다.

정상 봉우리인 쿠마노다케는 야마가타현에 속하며, 그 높이는 1841m이다.

자오산은 7개의 봉우리로 연봉이다.

흔히 자오산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히는 자오연봉이다.


산이 넓은 만큼 등산코스도 다양하다. 자오산의 인기 코스는 자오산의 상징인

오카마 화구호를 볼 수 있는 갓타다케~쿠마노다케 코스이다. 오카마는 등산을 하지 않고,

유료 도로인 자오 하이라인을 이용해 쉽게 접근 할 수 있기 때문에 오카마 전망대에는

등산복 차림이 아닌 관광객도 많이 볼 수 있다.


묵었던 도갓타 온천에서 자오에코라인 도로를 이용해

다이코쿠텐 지점의 주차장에서 현지 산악가이드와 합류했다.

다이코쿠텐은 표고 1600m 지점으로 정상과 높이 차이가 크지 않다.

다이코쿠텐에서 출발해 갓타다케와 오카마를 거쳐 정상인 쿠마노다케까지는 2시간 소요된다.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초급자 코스이다.

 

하산은 정상에서 약 40분을 떨어진 지장산정역에서 케이블카를이용한다.
도갓타온천에서 자오에코라인 도로로 다이코쿠텐까지는 15분이 걸린다.

표고가 600m 정도 되는 곳에서 1000m나 더 올라온 것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 고고차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10월 초순이었지만 바람은,

한 달은 더 앞선 듯 차가웠다. 이곳은 바람을 막아줄 숲이 없다.

산성이 강한 토질 때문에 식생이 서식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등산로 부근에는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지만,

계곡 너머에는 지층의 단면을 드러내놓은 봉우리가 있다.
"이곳의 지층은 약 3만 년 전에 형성됐습니다.

오카마가 분화했을 당시에 날아온 화산암도 볼 수 있죠."


↑ 0005(고산식물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코마쿠사(우리말로 성주풀).

7~8월 꽃을 피우는데 늦게까지 남아서 등산객을 맞이한다.

작은 풀꽃이라도 뿌리는 20~30m 깊이까지 내리기 때문에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 수 있다.)
 

 

자오산은 휴화산이다.

우리나라 제주도에서도 화산 지형을 관찰할 수 있지만

사화산인 한라산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6~8월경은 고산식물이 꽃을 피우는 시기다.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미 그 시기가 지났지만, 다행히 성주풀꽃을 볼 수 있었다.

고산식물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성주풀은 일본어로는 코마쿠사라고 부른다.

한자를 우리말로 그대로 풀어 '말풀'이라고도 부른다.

그 꽃 모양의 말 머리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성주풀은 잎이 도톰하고, 꽃도 그리 크지 않다.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풀꽃이지만

그 뿌리는 20~30m 땅속까지 뻗어 있기 때문에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성주풀은 여러해살이풀로, 해마다 그 자리를 지키며 꽃을 피운다.

사람들 역시 성주풀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주변에 돌멩이로 작은 담을 쳐주었다.

 

↑ 0002(자오산 등산로에 있는 무인대피소다.)

 

갓타다케 정상 직전에는 무인 대피소가 있다.

대피소 출입문에는 "9월 27일에 온다케산이 분화했다"며

"자오산은 분화 조짐은 없으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자오레스트하우스 또는 무인대피소로 피난해달라"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무인 대피소까지 올라오면서 단층된 지층면에는 하얀 원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지진 및 화산 활동은 관측하기 위한 것이다.

산악가이드는 "온다케산 역시 위험도는 낮았지만 분화했다"며

"화산은 조짐 없이 분화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갓타다케 정상은 1759m이다. 이곳에는 신사가 있다.

1200년 전부터 자오산을 찾는 수행자들은 지금의 능선 등산로가 아닌

계곡을 따라 갓타다케의 신사까지 올라왔다.

그 이유는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다.

오카마는 화구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호수의 물이 넘쳐 흐르지는 않는다.

수행자들이 올라왔던 계곡의 물은 땅속에서 샘솟는 물이다.

호수의 물은 산성이어서 마실 수 없지만 이 용천수는 마실 수 있다고 한다.

 

↑ 0004(자오산의 상징인 오카마. 화구 호수의 빛깔이 하루에 다섯 번 바뀐다고 하여 오색 연못이라고도 한다)

 

 

오카마는 2천년 전에 생긴 평균 직경 330m, 둘레 약 1km의 칼데라 호수다.

가장 높은 화구벽은 고시키다케, 즉 오색악이라고 부른다.

호수의 빛깔이 하루에 다섯 번 바뀐다고 해서 오색 연못, 오색악이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취재 산행을 한 이틀 뒤에 오카마 호수의 물 색깔이 변화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화산 징후의 일종이었으나, 다행히 분화는 없었다.

갓타다케에는 지방 영주였던 마사무네의 일곱 번째 아들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자오산은 800년 전에 크게 분화했었고,

이후 큰 분화는 없었지만 에도 초기에도 작은 분화가 몇 차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 지역의 영주였던 마사무네의 일곱 번째 아들은

화산의 분화가 멈추길 기원하며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화산재가 날려 농사가 잘 되지 않으면 영주민들의 삶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영주의 아들이 나섰던 것이다. 지진과 화산 활동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산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갓타다케~쿠마노다케 구간은 '우마노세(말 등)'라고 불리며,

미야기현과 야마가타현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 이름대로 말 등처럼 평탄하다가 쿠마노다케를 올라갈 때에만 약간의 언덕길이다.

이 구간의 동쪽은 미야기현이며, 서쪽은 야마가타현이다.

재미난 것은 오카마가 있는 미야기현 부근에는 식생이 거의 자라지 않는 반면,

오카마에서 조금 떨어진 야마가타현에는 흙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고산식물이 자라고 있다.

넓게 펼쳐진 고원에 등산로를 기준으로 식생이 확연히 다르게 자라는 것 또한 화산의 영향이다.

 

↑ 0006(지금은 흔적만 남은 옛날 대피소.

그 옆에 새로 지은 무인 대피소가 있다.)

 

 

이 구간은 넓은 고원이기 때문에 안개 낀 날이나 눈 쌓인 겨울에는 자칫 길을 잃기 쉬운데,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정규 등산로 옆에는 나무기둥을 세웠다.

성인 남자의 키보다도 높이 세운 나무기둥인데도

겨울철에는 겨우 끝부분만 보일 만큼 눈이 쌓인다고 한다.

이 부근에는 수박만한 것부터 큰 것은 어린 아이만한 돌덩이가 듬성듬성 널려 있다.

 이것들은 오카마가 분화했을 당시에 날아온 것들이라고 한다.
쿠마노다케에서 와사산장터를 거쳐 케이블카 지장산정역으로 향한다.

와사산장터는 현재 산장은 남아 있지않고,

산장지기였던 와사 할머니를 기억하는 석상만 그 터를 지키고 있다.

와사 할머니는 쿠마노다케신사(지금의 자오산신사)에참배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물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와사산장터를 지나 지죠다케(지장보살 봉우리)을 넘어가면

케이블카 상부역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하면

약 1660m 고지에서 1330m 고지까지 내려간다.



지금도 수행자가 오르는 산, 갓산


야마가타의 옛 지명은 데와(出羽)이다.

이 지역에서는 데와3산이라고 불리는 신성한 산이 있다.

데와3산은 하구로산, 갓산, 유도노산 등이며,

지금도 흰 옷을 입고 갓을 쓴 수행자가 이 산을 찾는다.

일본의 유명한 하이쿠 시인인 마쓰오 바쇼도 데와3산을 순례했다고 전해진다.

 

↑ 0008(야마가타 지방의 데와3산 중 하나인 갓산은 신성시 여겨지며, 지금도 수행자들이 찾는 산이다. 우바가사와 입구에서 리프트를 이용해 8합목까지 올라온 뒤 산행을 시작한다.)

 

 

갓산(1984m)은 데와3산의 주봉이다.

3천m급의 산이 있는 일본에서는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보다 약간 높다.

위도상으로는 우리나라 최북단인 고성과 같으므로, 고도에 따른 식생은 한라산보다 다양하다.

 또한, 여름철에도 눈이 녹지 않을 정도로 깊을 골짜기가 있다.

갓산의 주요 산행 코스는 우바사와 주차장에서 출발해 갓산 정상을 거쳐 미다가하라로 하산한다.

5시간 정도 소요되며, 다른 등산로에 비해서 산행 시간이 짧은 편이다.

다른 코스는 들머리가 400~500고지이기 때문에 정상까지 오르는 데에만 5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이 코스는 1200고지의 우바사와 주차장을 들머리로 삼는다.

여기에서 리프트를 타고 약 1500고지인 상부역까지 올라가야 비로소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완만한 오르막으로 우바가사와다케(1670m) 정상을 오른 뒤,

능선 구간인 우시쿠비를 거쳐 갓산 정상에 닿는다. 정상에서 미다가하라 방면으로 하산한다.

이 코스는 갓산의 특별보호지구에 속해 있다.

평균 1600m 이상의 완만한 고원지대이기 때문에 산행은 쉬우면서도,

고산의 독특한 생태를 관찰할 수 있다.

 

↑ 0009(우시노쿠비('소의 목'이라는 뜻) 구간은 완만한 능선이다.

트인 전망을 즐기며 천천히 걷는다.)

 

 

척박한 토양의 자오산과 달리 갓산은 숲이 우거지고, 완만한 산세에 온화한 인상이다.

갓산페어리프트 상부역 부근부터는 키 큰 나무가 거의 없지만,

그 아래에는 너도밤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너도밤나무는 우리나라 울릉동에서 자라는 희귀식물이지만,

일본에서는 홋카이도 남부, 혼슈, 시코쿠, 규슈 등 일본 전역에 분포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우리나라의 산과 비슷한 듯 하면서 가까이들여다보면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상부역에서 우바가다케까지 30분 정도만 오르면 산행은 거의 평지를 걷는 수준으로 쉬워진다.

우바가다케에서는 동쪽으로 자오연봉이, 남동쪽 멀리로는 반다이산이 보인다.

햇살은 따사로웠는데, 우바가다케의 물웅덩이에는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산은 단풍 드는 계절을 지나서 다시 한 번 옷을 갈아입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우바가다케에서 20분 정도를 내려오면 카나우바라는 길목이다.

여기에서 갓산 정상으로 갈 수도 있고, 유도노산으로도 갈 수 있다.

유도노산은 해발 1504m로 갓산보다는 낮은 산이다.

그러나 데와3산 중에서 최종 수행지가 되는 산이다.

유도노산 신사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영지로 숭배되고 있으며,

사진 촬영마저 금지된 곳이다. 옛날의 수행자들은 미다가하라 쪽에서 올라와

갓산신사를 거쳐 마지막 수행지 유도노산으로 향했을 것이다.

카나우바에서 우시쿠비까지 약 1km의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길섶에서는갓대 잎에 반사된 햇빛이 눈부시다. 푸른 잎과 불그스름하게,

노오랗게 물든 잎들이 어우러진 고원의 풍경이 펼쳐진다.

붉은 빛깔의 이파리를 가진 나무는 나나카마도라고 부른다.

일곱 번 아궁이에 넣어도 타다 남을 정도로 단단한 나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우리말로는 마가목이다.

 

↑ 0003(일본 동북부 지방 야마가타현에 소재한 갓산은 신앙의 산이다. 한 등산자가 올라온 길을 굽어보고 있다.)

 

 

약 1700m 고지의 우시쿠비에서 정상까지는 제법 가파른 구간이다.

등산로가 정비돼 있어서 길이 험하지는 않다.

친구들끼리 온 일본의 여학생들이 등산복 차림도 아닌데 곧잘 올라간다.

정상에 닿기 직전인 1850m 고지에는 이나리신사가 있다.

제대로 된 건물을 갖춘 신사는 아니다. 예전에는 산장이 있었지만,

그 산장은 노후 돼서 자연히 철거되었다고 한다. 이나리신사를 지나치면,

 일본 에도시대 전기의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시비에 새겨진 시구를 해석하면

 

"눈의 봉우리/몇 개가 무너져서/달의 산(갓산)"이라는 뜻이다.

우리말로는 해석할 수 있으나, 그 숨은 뜻이 쉽게 알 수가 없다.

그건 현지 산악가이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갓산 정상에 있는 갓산 신사까지 올라온 일본

인들은 어김없이 참배를 하고 간다.

그들이 이 산을 오른 이유는 등산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는 길고 험한 산길 자체가 참배의 길인 것.

그 모습은 설악산 봉정암에 오르는 사람들과 같을 것이다.

미다가하라로 하산하는 길에 지팡이를 짚고, 갓을 쓴 수행자를 볼 수 있었다.

 

일본동북 지역에 풍요와 평안이 기를 바라며 산길을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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