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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 문화탐방 명성황후 생가

까까마까 2012. 9. 8. 11:48

 

 

 

 

                                                      경기도 여주 문화탐방 명성황후 생가  

 

 

 

 

 

 

 

          

명성황후 생가

 

 

 

 

 

 

 

 

 

 


명성황후(1851~1895)는 조선시대사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매우 독특한 행보를 보여준 왕비였다.

역사상 권력의 정점에 오른 왕비들은 종종 있었지만,

그들이 권력을 쥔 것은 지아비인 왕이 죽고 난 뒤, 아들이나 손자를 내세워 수렴청정하면서라던가,

아니면 명문가인 친정을 등에 업고 왕을 뒤에서 조종하는 방법을 통해서였다. 명성황후는 이전의 왕비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녀는 지아비인 고종이 국정을 의논하는 가장 가까운 상대였으며,

외국의 세력들이 고종보다도 더 예의주시했던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명문가 친정의 도움으로 왕비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왕비가 되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친정세력을 키웠다.

살아 있는 왕보다도 더 주목받으면서 사실상 왕과 권력을 나눠 가졌다고도 보이는

명성황후의 존재는 당시 망국으로 치닫는 조선의 특수상황을 고려하고 생각하여도 매우 특이하고도 경이롭다.

 

 

 

 

 

 

 


명성황후는 여흥 민씨로 여주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자영이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녀가 태어난 집안은 숙종을 두고 장희빈과 삼각관계를 겨루었던 왕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민씨가였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인현왕후의 아버지였던 민유중의 5대손이었다.

이런 가계를 통해 볼 때 명성황후 집안은 당색으로는 서인계였고

아버지 민치록이 세도정치기인 철종 때 음서로 관직에 오른 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꽤 내로라하는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민치록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지방관과 중앙의 중간관리 벼슬을 했으며

훗날 명성황후가 되는 딸아이 하나만 남긴 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8살에 아버지를 여읜 이후 명성황후는 어머니와 함께 여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감고당(6대조 민유중의 집으로 당시 민치록이 소유하고 있었다.

감고당이란 이름은 영조가 지어주었다)에서 기거하였다.

당시 서울에 집을 소유한 것을 볼 때 집안 형편은 꽤 넉넉했던 것 같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대를 이을 사내아이가 없는 집안은 이미 몰락을 예정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12촌인 민승호가 양자로 들어와 집안의 제사를 맡기는 했지만,

사실상 명성황후는 어머니와 단둘이 외로운 성장기를 보냈을 것이 분명하다.

 

 

 

 

 

 

 

 

 

 

 

 

 

 

명성황후는 어렸을 때부터 무척 총명하여 주변에 칭찬이 자자하였다.

특히 훗날 왕비 자리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친척 아주머니 민씨 부인의 마음에 퍽 들었다.

이 민씨 부인은 바로 당시 아들 고종을 앞세워 조선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의 아내, 부대부인 민씨였다.

부대부인 민씨는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간 민승호의 누나였다.

그녀는 둘째아들 고종의 왕비로 자신과 친인척관계이던 명성황후를 적극적으로 대원군에게 추천하였다.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친정이 단출한 것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왕비를 내세운 안동김씨의 외척 세도정치를 무척이나 경계하던

대원군은 가문적으로는 그다지 빠지지 않으나 주변에 힘이 될 사람은 별로 없는

명성황후를 전격적으로 왕비로 간택했다.

물론 제대로 된 왕비 간택 절차를 거쳤지만,

이 간택 절차 이전에 대원군은 이미 아비 없고 남자 형제 없는 민씨가의 외로운 처녀를 며느리로 점찍고 있었다.

몰락한 친정을 둔 왕비가 정치에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대원군은 1863년 철종 사후 1863년 12월에 즉위한 고종의 아버지다
고종의 나이가 당시 12살. 너무 어린 관계로 대원군 이하응이 섭정을 하게되며
명성황후 '민비'는 대원군의 아내의 추천으로 고종의 왕비가 된다.
우선 이 둘의 완전 성격이 상극이다.

대원군은 모두가 아시다 시피 쇄국정책즉,
호포법, 서원철폐등 많은 백성들을 위한 개혁을 하지만, 대외적으로 보수적인
반면 민비는 개혁적인 정책을 추구하게된다.

당시 고종의 아들 중 하나가 항문이 막힌 채로 태어났는데
이 때 서양의술이 들어왔던 시대기에
민비는 수술을 하자고 주장하였고
대원군은 왕자의 몸에 칼을 댈 수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왕자는 수 일 내에 죽었다.
이로 알 수 있듯 이 이들은 서로 상극하게 대립적인 정책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고로 권력투쟁이라고 하기 보다는 서로의 성향이 달랐다고 보는것이 맞을것 같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이기도 하니,

명성황후를 안 좋게 보시는 분들이라

우선 우리나라 국민들은 보통 명성황후를 비운의 황후로서

드라마, 뮤비 등에서 좋은 이미를 형성했기때문에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았다.
일본낭인들에게 살해당한 민비는 보석을 좋아해 국고를 빼돌려 보석을 모으기도 했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라는 말도 민비 때문에 나왔다고 한다.
고종이 그만큼 소극적인 왕이였기에...

 

 

 

 

 

 

 

 

부재 

 

 

        명성황후의 사진 또는 초상화가 과연 있을까, 없을까.

지금까지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것들은 많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명성황후의 생전 성격과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그의 사진과 초상화가 있을 리 없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오죽했으면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만 나타나면 여기저기서 난리일까. 1994년 작가 이수광 씨가 교과서에 실린 명성황후의 사진이 허구라는 지적을 하며 불붙은 명성황후의 어진(御眞, 실제 얼굴) 찾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25일 영국인 수집가 테리 베닛 씨가 명성황후로 추정된다는 한 장의 사진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공개했다. 1894~1895년 한국을 찾은 독일인 사진작가의 사진첩에서 'Die Ermordete Konigin(시해된 왕비)'라고 적힌 사진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연합뉴스는 속보로 이를 다뤘고 국내 다수 일간지도 이 같은 소식을 그대로 전했다.

하루가 지난 26일, 상황은 반전됐다. 그 사진이 이미 1997년 국내 서적에도 '궁녀'라는 설명으로 실린 것으로 확인됐다. 더불어 1891년에는 미국 국립박물관 보고서에, 1894년에는 영국 화보잡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에도 마찬가지 설명이 달려 있었다.

명성황후일 것이라며 뒷받침됐던 추정들은 어느새 슬그머니 잠수했다. 복장은 왕비의 것이 아니지만 머리 형식과 화장으로 봐서 왕비일 가능성이 있다든지,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던 영국의 여행가이자 작가 이사벨라 이솝이 묘사한 '날카롭고 냉정한 눈빛'이 사진에서 느껴진다는 주장들이 사라진 것이다.

(왼쪽 사진이 25일 테리 베닛 씨가 공개한 사진첩. 이 가운데 오른쪽 맨 위 사진이 명성황후로 추정됐던 사진. 하지만 이 사진은 1891년 미국 국립박물관 보고서에 '궁궐에서 시중드는 여인'으로 이미 언급이 됐던 사진이다. [사진=연합뉴스 / 한국해연구소])

(테리 베닛 씨가 공개한 사진과 유사한 사진들. 왼쪽 맨 위 사진은 1894년 7월 영국 화보잡지에'조선 왕의 시종'이라고 소개된 것. 오른쪽 맨 위 사진은 1894년 10월 독일의 화보 신문에 '궁정의 여자 가수'로 실렸던 것. 아래 사진은 1895년 화보신문으로서 가운데 여성은 '서울 궁정의 여인'으로 표현됐다.[사진=한국해연구소])

이 같은 논란과 관련해 수집가 경력 20년, 명성황후 사진 찾기에만 10년이 넘은 이돈수(미술사학자, 한국해 연구소장)씨는 색다른 해석을 제시했다. 그는 수집가로서 경험을 살려 테리 베닛 씨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1894년 '드모리스트 패밀리 매거진'(미국 뉴욕에서 발간되던 대중적 가정월간지) 11월호에 실렸던 명성황후 특집 기사를 발굴, 1990년부터 국정 중등 교과서에 쓰였던 명성황후 사진을 빼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94년 '드모리스트 패밀리 매거진'에 실린 명성황후 특집기사. [사진=한국해연구소])

 

이씨는 테리 베닛 씨가 공개한 4장이 함께 있는 사진첩은 각각의 사진을 모아 구성한 것이라고 했다. 자세히 보면 왼쪽 위와 아래 사진, 각각 '고종과 순종', '대원군' 사진은 테두리에 흰 테두리가 둘러져 있다. 사진 원판이 아니라 재촬영 후 인화한 사진이라는 것이다. 4장의 사진을 함께 찍어서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에 더해 테리 베닛 씨가 공개한 사진첩의 파란색 배경지 역시 그 당시 유행하던 재질의 종이라는 것.

(테리 베닛 씨가 공개한 사진첩 왼쪽 위·아래 사진과 동일한 사진들. 이돈수 씨가 소장한 이 원본 사진들에는 흰 테두리가 둘러져 있지 않다. 원본 사진이라는 증거다. 테리 베닛 씨의 사진 가운데 왼쪽 사진들은 재촬영 후 인화한 사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독일인 사진가가 이들 사진을 한 번에 찍은 것이 아니라는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사진=한국해연구소])

이씨는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 설명을 독일인이 써 넣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사진을 찍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 실제로 그 설명을 해 놓은 독일인에 대한 어떤 정보도 확인되고 있지 않다.

나아가 이씨는 명성황후가 형상화돼 나타나는 최초의 자료는 1894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봤다. 명성황후에 대한 서양인들이 '조선 왕조를 지배하는 배후 세력이자 당시 조선의 변혁을 좌우한 인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894년 9월10일 일본에서 발간된 석판화 이후 이를 기준으로 '흉상'이상인 '두상'을 형상화한 삽화는 '왕비'라는 제목을, '전신상'일 경우 대부분 '궁녀'라는 이름으로 소개됐다는 점이다.

(1895년 프랑스의 '일루스트라숑'(사진 맨 왼쪽)과 1895년 11월 스페인 화보신문 '라일루스라시온 에스파뇰라 이 아메리카'(사진 가운데)에 실린 명성황후 삽화. 1894년 일본에서 석판화를 통해 '흉상' 위 '두상'을 형상화한 것들은 대부분 명성황후로 소개됐다. 맨 오른쪽 사진은 까를로 로제티의 꼬레아 꼬리아니가 '궁정의 여인'으로 표현한 것. [사진=한국해연구소])

더불어 이씨가 발굴한 '드모리스트 패밀리 매거진'에는 명성황후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고 한다. 이사벨라 이솝의 설명과도 겹치는 부분이 많다.

"중간키에, 몸매는 호리호리하고 곧았다. 얼굴은 길고, 이마는 높고, 코는 길고 가늘며 귀족적이고, 입과 아래턱에는 결단력과 개성이 드러난다. 광대뼈는 튀어 나왔고, 귀는 작고, 얼굴빛은 기름진 저지 크림색을 띠었고, 눈썹은 아치 모양이고, 아몬드 형의 눈은 지적이고 예리해 보였다"

옷차림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왕비는 옷이 많아서 자주 갈아입는다. 어떤 날은 금박을 수놓은 진홍빛 능라를 입고, 어떤 날은 자주색 옷을 입는다(중략)보석류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길고 가는 손은 모양이 예쁜데, 다이아몬드로 빛난 적이 없다. 유일하게 끼는 반지는 묵직한 금가락지인데 항상 손가락 하나에 쌍으로 끼었다"

이씨는 이 같은 묘사를 고려할 때 만약 명성황후 사진이 있다면, 그는 아마 '순종비'사진과 '엄비'의 사진에 나온 의복과 머리 장식이 비슷한 것이라고 예측했다.

(순종비 사진(사진 왼쪽)과 엄비 사진. 1910년 촬영. [사진=한국해연구소])

(이돈수 소장은 명성황후의 사진 또는 초상화가 발견된다면 그의 의복(사진 오른쪽)은 이처럼 화려할 것으로 추정했다. 왼쪽 머리장식은 대례복 차림의 것. 명성황후의 머리장식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예. 사진들은 1920년 대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한국해연구소])

한편 국내 학계 가운데 이태진 서울대(역사학) 교수는 2001년 '드모리스트 패밀리 매거진'에 소개된 같은 사진을 '일본 과격분자에 의해 살해된 한국 황후'라는 설명을 단 프랑스 잡지 '뚜르 뒤 몽드(1904)'를 근거로 '명성황후'의 사진이 맞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근 테리 베닛 씨의 사진과 관련해서 그는 그 동안 명성황후로 오인됐던 사진과 비교 분석 후 말하겠다는 유보적 입장을 보였다.

이와 반대로 '한국사 새로보기'를 펴낸 신복룡 건국대(정치외교학) 교수는 명성황후의 사진과 초상화는 전무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명성황후는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목숨을 서로 노릴 정도로 증오하는 등 생명의 위험을 느끼며 심각한 노출 기피 증세를 보였고 서구 언론이 생전에 명성황후를 다룬 적도 드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명성황후의 사진 또는 초상화에 대한 최종 결론은 아직 없다. 이를 밝혀내기 위한 학계와 언론계, 수집가들의 발걸음은 앞으로도 계속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