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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쪽같은 선비의 기개가 느껴지는 마을-한개마을-성주

까까마까 2012. 11. 28. 15:11

 

 

 

 

 

 

대쪽같은 선비의 기개가 느껴지는 마을

-성주-

 

 

 

 

 

 

 

한개마을의 한자 이름은 대포리(大浦里)인데 ‘큰 개’ 대신 ‘한 개’라고 부르며

 

여기서 ‘개’는 포구라는 순우리말이다. 그러므로 ‘한개’란 마을 이름은

예전에 큰 개울 또는 나루가 있어서 붙인 순우리말 이름이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에 따른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입지원칙을 따르고 있다. 마을 앞으로 낙동강 지류인 ‘백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마을 뒤로 영취산(331.7m·신령스러운 독수리산)의 줄기가 마을을 감싸듯 청룡․백호로 뻗어있다. 덕분에 이 마을은 영남 제일의 길지(吉地)라고도 알려진다.

마을 중심에서 800m 떨어진 곳에 높이 약 70m의 ‘안산(案山)’이 위치하는데, 이 산은 주산에 비교해 너무 높거나 크지도 반대로 작지도 않다. 한개마을 가옥은 영취산 산자락 해발 40〜70m 범위에 남서쪽으로 마을과 집들이 향하며 남에서 북으로 차차 올라가는 전저후고(前底後顧) 모양을 하고 있다.

 



●꼬장꼬장한 선비 이야기 서린 이씨 집성촌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성산이씨인 이우(李友)가 처음 입향해 개척한 집성마을이다. 이우는 세종 때 진주목사와 경기좌도수군첨절제사 등을 지낸 인물이다. 성산이씨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때는 이우의 6대손이며 퇴계의 직계 제자인 월봉 이정현(李廷賢)이 과거에 급제한 이후다.

월봉은 과거에 급제한 후 홍문관정자에 임명됐으나 안타깝게도 그해에 26세 나이로 요절한다. 월봉에게는 외아들 수성(壽星)이 있었는데, 그가 아들을 넷 뒀고 이들이 모두 마을에 정착해 성산이씨 각 파의 시조가 됐다.

이들 후손이 씨족마을을 형성한 한개마을은 17세기 중엽인 이수성 때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한계마을에서 대과급제자 9명과 소과급제자 24명을 배출해 조선의 양반마을로서 위상을 갖춘다.

꼿꼿하고 강직한 한개마을 선비 이야기는 놀랍다.

돈재 이석문은 영조 38년(1762) 나이 50살 때 무겸(선전관청에 속한 무관)으로 봉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가 갇혀 있는 뒤주에 돌을 올려놓으라고 명령하자 그는 어명을 거절했다. 그리고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업고 들어가 육탄으로 영조에게 직언하다가 곤장을 맞고 파직될 정도로 기개를 보였다.

한주종택을 중건한 한주 이진상은 소과에 합격해 성균관 생원이 됐다. 그러나 혼탁한 세상이 되자 벼슬을 포기하고 근세 유학 3대가로 불리는 대학자로 성장한다. 중앙 정부는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유일(遺逸·학행과 덕성이 높은 재야의 선비를 천거하는 인재 등용책)로 의금부 도사(都事)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67세이던 그는 이마저도 거절했다.

이 같은 한개마을의 기질이 이어져 20세기에 들어와서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한주의 아들 이승희(건국훈장 대통령장)는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고,

이기형(건국포장), 이기정(건국훈장 애족장), 이기원(건국훈장 애족장),

이기인(건국훈장 애족장), 이기윤(대통령표창) 등이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한개마을 선비의 기개를 드높이기도 했다

 

 

 

 

 경북 성주군 - 한개마을

[제빵왕 김탁구 어린시절 촬영 장소]

 

 

 

 

 

 

 

 

문화재청 사진 자료

 

성주한개마을(중요민속자료 제255호.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1리의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입향(入鄕)하여 거주한때로부터 560여년을 내려오면서 성산이씨가 집성하여 살고있는 전통깊은 마을이다.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 9동에 이르고 있으며, 건축물의 대부분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되었으나, 전체적인 마을구성이 풍수에 따른 전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뿐만 아니라 상류주택과 서민주택의 배치 및 평면도 지역적인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문화재청 자료)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

성주 한개마을 옛 담장(등록문화재 제 261호)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대에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처음 입향하여 개척한 마을로 현재는 그 후손들이 모여 생활하고 있는 성산이씨 집성마을이다. 17세기부터 과거합격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등은 이 마을에서 배출된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양반마을로서 600여 년의 명맥을 이어왔을 뿐만 아니라 전통가옥과 그 가옥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이 옛 모습을 유지하지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한개마을의 옛 담장은 크게 외곽 담과 내곽 담으로 나눌 수 있다. 외곽담은 마을의 가옥이 대체로 경사지에 위치한 관계로 산지에 접한 담과 주택동쪽의 측면담은 높은 반면 앞뒤 주택의 영역을 구획하는 담은 낮게 되어 있다. 내곽담은 주거건물의 처마보다 낮아 담 양측의 영역을 시각적으로 차단 또는 연속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개마을 옛 담장은 장인이 아닌 마을주민들 스스로의 힘에 의해 세대를 이어 만들어지고 또 덧붙여진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과 향토적 서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마을 담장의 주류인 토석담은 전통한옥들과 잘 어우러져 자연스런 마을의 동선을 유도하면서 아름다운 마을 속에 잘 동화되어 있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 (성주군청 자료)

 

 

 

 

 

 

 

 

 

 

 

 

 

 

 

 

 

 

 

 

 

 

 

 

 

 

 

 

 

 

 

한옥 보존 마을과 돌담길, 성주 한개마을
성주 한개마을은 성산이씨가 대대로 살아온 전형적인 동성촌락이다. 조선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처음 이 곳에 이주하여 마을을 만들었다. 현재는 월봉 이정현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한옥 보존 마을이다.

 

마을 북쪽으로는 영취산(331.7m)이 좌청룡 우백호로 뻗어 있고, 서남쪽으로 백천이 흐르고 있어 영남 제일의 길지를 이루고 있다. 또한 구한말 성리학자 이진상을 비롯, 응와 이원조 등 예로부터 이름난 선비를 많이 배출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마을 내의 주택들은 문화재자료 제354호 ‘극와고택’ 등 지방지정문화재 9동을 중심으로 전통한옥 구조가 잘 남아 있다.

 

한개마을의 볼거리, 외곽담과 내곽담

한 개마을에는 특이한 담장이 있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담장은 크게 외곽담과 내곽담으로 나눌 수 있다. 외곽담은 마을의 가옥이 대체로 경사지에 위치한 관계로 산지에 접한 담과 주택동 쪽의 측면담은 높은 반면 앞뒤 주택의 영역을 구획하는 담은 낮게 되어 있다. 내곽담은 주거건물의 처마보다 낮아 담 양측의 영역을 시각적으로 차단 또는 연속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마을 담장의 주류인 토석담은 전통 한옥들과 잘 어우러져 자연스런 마을의 동선을 유도하면서 아름다운 마을 속에 잘 동화되어 있다.

 

황산마을의 벽화와 수승대 등을 한껏 맛본 후 경북 성주군 대산리 한개마을로 향한다. 한개마을은 2007년 전국에서 7번째로 지정된 중요민속자료 제255호다. 조선시대의 전통마을의 한식기와와 초가, 변형가옥 등 모두 75채의 가옥이 짜임새 있게 잘 배치됐으며,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10동의 건축물이 있을 정도로 한국의 미가 듬뿍 들어있는 곳이다.

 

 

 

 

 

 

 

 

 

 

 걷는 그 자체가 여행이되는 성주 한개마을

 

 

대구에서 회의가 있다. 몸도 피곤하지만 안내려갈 수는 없고

어자피 내려는가야하는 길이라면 즐겁게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대구 김광석거리를 갈까?..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만 김천JC를 지나 직진하고...

아~~머야머야..ㅡㅜ;;

급하게 차를 세우고 대구 김광석거리가 나를 원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그러다가 문득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블로그...

바로 비늘님 블로그에서 본 기억이 있는 성주 한개마을..

그게 그곳으로 가는거야!!

여러분!!

중부내륙고속도로에서 대구를 가려면 김천JC에서 경부고속도로 부산(대구)방향으로

갈아타셔야 합니다. ㅋㅋㅋ

성주한개마을입니다.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입향(入鄕)하여 거주한때로부터,

560여년을 내려오면서 성산이씨가 집성하여 살고있는 전통깊은 마을입니다.

한개마을에서 유명한 것은 바로 고불고불한 흙담길입니다.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지

주말인데도 정말 한가하더군요.

그래서 맘꺼 사진을 찍어봅니다.^^

조선시대의 사대부집안도 엿볼수 있는 재미도 있습니다.

이곳도 얼마전에 다녀온 하회마을의 양반네들 집처럼

정원이 장난아니게 이쁘더군요.

양반님들은 정원만 가꾸고 살았나봅니다. ㅡㅜ;;

흙과 돌로 만들어진 길!

걷는 그 자체가 여행이되는 한개마을입니다!!

사대부들의 집만 엿볼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민들의 집도 더불어서 구경할 수 있답니다.

어떻게 이렇게 양반집과 서민집이 천지차이인지..

연인 두분이 다정하게 걷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습니다!

흙돌담길의 모델이 되어주셔셔 고맙습니다.^^

조그만 언덕길을 올라서 내려보니

다시한번 감탄사가 나옵니다.

비늘님 감사해요.^^

 

 

 

 

 

 

 

여기가 한개마을에서 제법 유명한 교리댁입니다.

조선시대 영조때 사간원의 사간을 지낸 이석구가 건립한 가옥입니다.

집의 이름이 교리댁인것은 이석구의 현손인 이귀상이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럼 이제 교리댁 내부 구경을 해볼까요.

교리댁은 정면 7칸, 측면 1칸의 안채와 정면 5칸, 측면 2칸인 사랑채를

비롯하여 대문채, 중문채, 서재, 사당이 서로 떨어져서 배치된 집입니다.

저쪽에 있는 것이 사랑채인 모양입니다.

높은 담장이 양반의 위치를 얘기해준다고하던데..

정말 그런가봅니다. 무척이나 높습니다.

이제 저 솟을대문이 있는 집으로 가보야겠습니다.

이곳은 소위 대감댁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하긴 그러니 솟을대문이 있겠죠.^^

정식명칭은 북비고택입니다. 북비댁이라고도 합니다.

대문은 잠겨있고, 저같은 서민들이 다니는 쪽문이 열려있더구요.

전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ㅠ.ㅠ

들어서자마자 정원이 한눈에 정말 이쁘죠.

푸른잔디와 빨간꽃 하얀꽃 등이 어우려져 환상 그 자체입니다.

이 가옥은 조선초기 성산이씨가 한개마을에 입향할 당시의 종택이던

대초당을 조선 경종 1년(1721년)에 처사 이이신이 매입하여 오늘날의 터전을 잡은 가옥이라고 합니다.

이 가옥은 정면 6칸인 안채를 비롯하여 사랑채, 안사랑채, 사당, 북비댁 등

5채로 구성되어있고요. 북비채는 별도의 담으로 귀획되어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 본 한옥정원중에서 최고라고해도

과언이 아닐정도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더군요.

그런데 혹시나 여기들어가시게 되면 꼭

견공님을 조심하세요. 얼마나 무섭고 사나우신지...ㅡㅜ;;

내가 먹을것을 뺏은것도 아닌데말입니다.

저 문 안쪽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건 비밀입니다. 직접보시고 느끼시라고 남겨둡니다.^^

이렇게해서 걷는 그 자체가 여행이 되는 한개마을의 여행은 끝이 났습니다.

마을을 전부 돌아보는데 대략 1시간 30분정도 소용된거 같습니다.

아주 천천히 모든 것을 보고 느끼면서 걸어도 1시간 반이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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