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지 않게 하기위해 가능한 한
사진을 많이 넣었습니다.
제가 제일 잘 부르는
"UNA FURTIVA LA GRIMA".
그리고 해병대 출신 박선호가 거사 전 미리 만났다고???
첨 듣는 흥미 진진한 말이군요.
제 기억으론 당시 김재규에 대한 수사 결과 보고는
범행 동기가 분명 순간적인 범행으로 되어있었는데...
어쨌던 글을 참 재미있게 썼습니다.
고들빼기 님이나 용팔이 형님이 보시면 언짢아하시겠지만
그래도 저 나름대로 감동스러워 음악을 덧 붙여서 올립니다.
Pavarotti 보다는 더 부드러운 Jussi Björling 의 노래로 올립니다.
제일 밑에 김지하씨와 대담하는 동영상을 올렸습니다.
만일 음악이 이 동영상 대담을 보시는데 방해가 되면 밑에있는
음악을 끄시고 대담을 들으세요.
(不不通 非普通)
김지하 시인(이하 ‘김시인’)이 박근혜 후보(이하 ‘박후보’)를 열두 글자로 정리했다.
김시인은 이날 낮에 토지문학관으로 찾아 온 박후보를 만나고
지인들과 이른 저녁을 먹고 있었다.
이 열두 글자는 단순히 박후보에 대한 인물평이 아니다.
[5.16 이후 50년 세월] 전체를 매듭짓는, [인생 챕터가 넘어가는 소리]이다.
박후보와 김시인의 만남은 정치 쇼가 아니었다.
(육체적으로는 가냘프기만 한) 박후보]와 [이미 70년대에 박정희의 숙적으로 ‘밤의 대통령’이라 불리던 김지하]—이 두 거인의 정신적 교류였다. 이 글은 그 교류 순간에 관한 스케치이다.
1. 시인의 영혼에선 무슨 일이 벌어져 왔나?
해방 이후 지금까지—그것이 어떤 세월인가?
공기의 밀도가 높아지면 깡통이 우그러들고, 시간의 밀도가 증가하면 마음이 거칠어 진다.
이승만과 박정희—이 두 명의 걸출한 인물의 리더십 아래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선진국 문턱까지 치달아 온 지난 67년의 세월은
우리 문화와 사회를 뿌리부터 뒤집어 놓았다.
우리가 지불해야 되었던 대가였다.
혹은 적응 자체에 대해 반란(反亂)한, 수백만 사람들의 원(怨)과 한(恨)이 김시인의 일생을 꿰뚫고 있는 화두이다.
김시인은 위대한 문화인류학적 통찰력을 가진 큰 무당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강원도기념물 제27호)이 바로 건너다 보인다.
김시인은 하루 종일 이 산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원(怨)과 한(恨)을 들었던 것이다. 이 땅에 근대문명이 덮치고 가톨릭이 번져가고 동학이 꿈틀대기 시작한 시대 이후의 모든 충격, 분열, 고통을
쓰다듬는 진오귀굿이 진행되어 왔다.
탈춤, 마당극, 전통리듬을 부활시켰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저항한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위해, 보다 정확하게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있어야 마땅한
[얼의 얼개]를 복원하기 위해” 저항했다.
박선호가 김시인을 찾아왔다.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1천명 처형명단]의 1호가 김시인이라는 것. 김시인이 배짱 좋게 물었다.
박선호는 껄껄 웃으며 답했다.
둘째, 김재규가 김시인에 대해 각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아마도 김재규는 거사 후에 김지하를 석방시켜서
정치 파트너로 삼을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9년 김시인과 박정희 권위주의 정부는 이 같은 철천지 앙숙이었다.
2. 광명성으로 만들어진 인연
김시인이 먼발치에서 박후보를 지지하는 것조차 일종의 ‘시대적 기적’이다.
만들어내게 한 것은 더 큰 기적이다.
김시인은 크나큰 무당이다.
가까스로 달래 놓은, 그리하여 이미 김시인의 영혼에 찌꺼기가 되어
달라붙어 있는 수백만 원(怨)과 한(恨)이 길길이 날뛴다. 그로 하여금 박후보를 만나도록 결심하게 만들었다. 그는 영혼에 덕지덕지 끼어 있는 원령(怨靈) 찌꺼기들에게 한 소리 크게 꾸짖었다.
그러나 50년 세월 동안 함께 지내온 원령은 그리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시인을 물어 뜯었기 때문이다.
김시인은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와졌다.
원령 이무기를 붙들어 매는 법을 잘 안다.
그에게 흰그늘은 고(故) 지학순 주교로 나타나곤 한다.
김시인은 13일 아침, 박후보 측에 “지학순 묘지를 참배해 달라. 그 분 묘지 한 번 가는 것이 나를 백 번 만나는 것보다 중요하다”라는 메시지를 넣었다.
후보 캠프는 발칵 뒤집혔다.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김시인은 불같이 화를 냈다. (캠프 실무자들은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박후보가 김시인의 말에 무엇인가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하고 유세 일정을 전체적으로 손보라고 지시했다는 후문이다.)
3시간 30분 앞두고 확정된 것이다.
김시인의 영혼을 물어뜯던 원령 이무기는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3, 발악해도 소용없다
오후 2시가 못 되어 김시인을 토지문화관으로 모셨다.
다들 화기애애 떠들석하게 이야기했다.
표정으로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 줬다.
그러나 혼자 화장실에 다녀 올 때 그의 얼굴은 한없이 굳어 있었다.
그를 칭칭 묶고 있는 듯이 보였다.
‘시인의 모습’으로 되돌아 왔다. 또한 이 역사적 만남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진 작가와
여유있게 이야기하고 웃었다.
방 바깥 복도 한 구석에서 농담을 했다.
이 말이 방 안으로 전해져서 더 큰 웃음이 났다.
[박근혜와 만난다]라는 지독한 정신적 고문과 싸우면서 김시인은 시시각각 더 강해지고 있었다.
4. 김시인과 박후보의 교감
3시가 조금 넘어 박후보가 도착했다.
박후보가 김시인의 왼편, 김영주관장이 김시인의 오른편에 앉았다.
2~3미터 밖에 오골오골 들이찼다.
세 사람 사이에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가상의, 독립 공간이 만들어졌다.
안보, 문화, 교육, 여성과 같은 근본적인 국가 아젠다에 대해 툭툭 이야기가 진행됐다.
소탈, 솔직, 호의로 포장된 축복 속에서 한없는 활기와 에너지를 얻어 가고 있었다.
김시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또한 이런 의미였다.
이 같은 김시인의 뜻은 매초 매순간 고스란히 박후보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5.. 운명의 완성
김시인 본인은?
박후보와 대한민국을 축복함으로써 본인에 대한 축복을 완성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난 다음날에 본 환상을 이야기했다.
박후보를 축복함으로써 김시인은 두 번째와 세 번째 공을 완성했다.
친근하게 놀아 온 원령들을, 그 찌꺼기까지 몽땅 보낸다는 것을 뜻한다.
‘안녕히 보낼’ 수 없다. 원령들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일방적인, 위로부터의 근대화]에 의해 치인 자들이기 때문이다.
[안녕히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이 닦고 지나간 [근대문명의 풍요]라는 고속도로 위에 민족의 얼, 민족의 문화를 글로벌 차원에서
벋어나가게 만드는 것—이것이 바로 ‘곧 뒤를 따르겠습니다’라는 뜻이다. 50년 세월의 빛과 어둠이 재생되고 부활되고 정리되었다. 캠프의 관계자들도 이 만남의 의미를 아는 지,
시간이 지나가도 중간에 끊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날 나는 두 거인의 운명이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았다.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보았다. 수십년 동안 김시인의 화두였던 칙칙한 원령들의 찌꺼기가
바람에 흩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김영주관장은 빙긋빙긋 웃고 있을 뿐이었다.
6. 에필로그: 조져!
가슴이 먹먹한 상태에서 저녁을 먹고 헤어질 때 김시인이 차에 올라타면서 내게 한마디 툭 던진다.
차는 떠났다.
영혼치료를 받고 있는 회복기 환자인 나는 비천한 솜씨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글이 김지하-박근혜 만남에 대한 속물스런 착각과 거짓을 ‘조지’는 작은 몽둥이라도 되기를 빌 뿐이다.
만일 음악이 이 동영상 대담을 보시는데 방해가 되면 위로 올라가서 음악을 끄시고 대담을 들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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