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를 고급스러운 것을 골라 잘 찍은 것을 올리려 했는데
농촌의 생활은 사진을 찍으며 여유롭게 돌아다닐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가 없어
그냥 흐린 사진으로 올립니다.
씨밀래의 농촌 화보 한국에서 우유를 이용한 역사는 약800년 전 고려 의종 때 <유우 교취 유전이성소특독구상>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약 1000년 전으로보인다. 조선 시대에도 초·중기를 비롯하여 말기 철종 때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당시의 우유는 왕실과 귀족들의 병을 고치기 위한 약용으로쓰이거나 일부 보신제로 이용된 것으로 보이며, 우유를 짜기 위한 소[乳牛(유우)]에 대한 기록은없으나 1914년의 기록에 의해 착유에 사용한것이 재래종 한우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세종은 젖소를 기르는 관서인 유우소(乳牛所)의재원을 재편성하도록 지시를 내린 일이 있으며, 철종은 송아지 사육을 위하여 젖을 짜내는일을 중지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대에는한우 가운데 젖이 많이 나는 소를 골라 하루에1.5∼3되 가량의 젖을 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 대중에게 우유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 100년간의 일이며 유용종(乳用種) 젖소가 선교사들의 자가용(自家用)으로 1마리씩들어오게 된 것이 시초였다. 젖소 품종은 1902년 일본에서 홀스타인종을 수입한 것이 맨 처음의 기록이다. 1902년 농상공부 기사로 근무하던 프랑스인 쇼트가 그 홀스타인종 20여 마리를 신촌역 부근에 우사(牛舍)를 세워 사육한 것이 낙농의 시초이다. 이후 주로 일본인에 의해사육되었으며 1910년에 452마리를 기록하였고, 1936년에는 국내에 173개소의 낙농목장이 개설되었고, 1940년에는 2304마리를 기록하였다. 1944년에는 젖소 2661마리를 기록하였으며 1945년까지 사육된 젖소의 수는 전국적으로 3500마리였는데, 그 때까지는 대부분 일본인에 의해 사육·소비되었다. 광복 직후 혼란기를 지나면서가축을 함부로 도살하는 일이 많아졌으며 6·25를 겪는 동안에 젖소의 수가 많이 줄게 되어 1954년에는 289마리를 기록하였다. 1960년대 초반기부터 정부의 낙농장려정책에 힘입어 급속한성장을 하게 되었으며, 1962년부터 낙농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그 개발과 발전에 주력하게 되었다. 1961년 이후 10년간 젖소 사육 마릿수는28배로 증가하였고 우유의 생산·소비량도 약25배로 증가하였다. 1962년부터 한국정부보유외환(KFX) 자금과 정치활동위원회(PAC) 자금등을 통해 소를 수입하였으며, 그 밖에도 캐나다 차관을 통해 수입하는 등 자연증가까지 합하여 모두 1만 3800마리에 이르렀다. 1972년에는3만 6128마리가 되어 3배 가량 늘었다. [출처] 낙농 - 농업,축산 낙농업 수렵시대 인류는 동물을 가축화하면서, 소와 염소 등의 젖을 음용하였다. 기독교의 성경, 힌두교의 베다경전, 불교의 반야경에 거론될 정도로 우유의 영양학적 우수성은 중요시되었다. 그리하여 우유는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유제품으로 발달하면서 식문화를 형성하였다.
각 농가에서 자가소비용으로 소규모로 이루어지던 낙농업은 19세기 산업화와 함께 근대적 의미의 산업으로 도약하였고, 이후 우유가공, 유통 기술과 젖소의 육종기술 등의 진보를 통해 대규모 산업으로 발달하게 된다.
태어난지 얼마안된 새끼 송아지 갓 태어난 얼룩송아지 덤으로 키우는 닭들 꼽싸리로 낑겨사는 오리들은 어느날 나가보니 어디서 날라와서 한 가족을 이루며 사는데.. 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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