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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의 길-다산 초당

까까마까 2013. 9. 26. 18:13

ㄴㅂㄷ

 

 

 

 

 

참다운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글이라 생각하며

늘 마음에 둔 편지내용입니다..

저도 문학을 사랑하는 한사람으로서

공감하고 있는 내용이라서 올려봅니다.

 

 

정호승 선생의 글을 올립니다.

 

 

 

 

 

 

정약용 선생의 위대함은 애민정신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을 생각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을 떠올렸다.

조선시대의 실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생활 중

‘목민심서’ 등 불후의 명저를 저술한 다산초당도 중요하지만,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 또한 그 의미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정약용 선생의 위대함은 애민정신



다산초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귤동 마을 입구에서

대나무와 두충나무가 한데 잘 어우러진 숲길을 지나

다시 소나무 산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한다.

20여 년 전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 나는 그 산길에 들어서자마자 걸음을 딱 멈추었다.

수백 년 된 굵은 소나무 뿌리가 지상으로 뻗어 나와 서로 뒤엉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장엄했다.

마치 무슨 거대한 ‘식물성 파충류’들이 이리저리 꿈틀꿈틀 산길로 기어가는 듯했다.

길 위로 툭툭 튀어나온 그 고목의 뿌리를 선뜻 밟고 올라갈 수가 없어

수백 m나 되는 그 길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200여 년 전, 정치가로서의 꿈과 좌절을 가슴에 품고 수없이 그 뿌리를 딛고

오르내렸을 다산 선생의 모습이 선연히 떠올랐다.



학문적 이상을 정치개혁과 사회변혁을 통해 이루고자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유배된 다산 선생은 지상으로 뿌리가 드러난

이 유배의 산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초당으로 가는 이 산길에 반드시 땅속으로 뻗어 나가야 할 뿌리가

굳이 지상으로 구불구불 힘차게 뻗어 나온 까닭을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라의 뿌리는 백성이고, 정치의 뿌리도 국민이며,

사랑의 뿌리 또한 서로 껴안고 하나가 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신 게 아닐까.

 

 


 


“이 길은 뿌리의 길이야.”

 

나는 그때 마음속으로 그 길을 ‘뿌리의 길’이라고 명명했다.

하늘과 구름과 별이 보이는, 지상으로 당당하게 뿌리가 뻗어 있는 그 길이

다산 선생의 애민(愛民)정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다산 선생이 그 뿌리의 길을 통해 국가든 개인이든 우리 삶의 어디에서든

근본과 본질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무언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위대한 까닭은 가난한 백성을 사랑하고

민생을 먼저 보살폈다는 데에 있고,

위정자로서의 본질을 잃지 않는 삶의 자세를 보여준 데에 있다.

원래 금은 돌밭에 버려져도 그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금이 돌밭에 버려진 자신을 돌멩이로 생각하면 그만 본질을 잃게 된다.

 다산 선생은 오랜 유배의 고통 속에서도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위정자의 본질임을 잃지 않았다.


 



백성을 사랑함이 위정자의 본질



뿌리의 길은 뿌리를 밟지 않고 오르기는 힘들다.

뿌리를 밟지 않으려고 해도 어디 발 디딜 데가 마땅치 않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뿌리를 밟고 올라갔는지 뿌리마다 수많은 상처가 나 있다.

어떤 뿌리는 상처의 껍질마저 벗겨져 반질반질하다.

뿌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에 밟힐 때마다 그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러나 뿌리는 묵묵히 아픔을 견디고 자신을 힘껏 밟고 올라가는 이들의 밑받침이 되어 준다.

이는 다산 선생의 시대적 희생과 상처를 의미하는 것으로 뿌리마다

다산 선생의 인고의 눈물이 매달려 있다.

다산 선생에게 유배라는 고통과 시련의 세월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선생이 남기신 600여 권의 저서를 통해

백성이 근본이 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적 유산을 접할 수 없을 것이다.

 

 

 

 



한 해를 보내며 다시 다산초당으로 가는 뿌리의 길을 걷는다.

힘차게 지상으로 뻗어 나와 얼키설키 얽힌 뿌리의 모습이

다산 시대의 고뇌의 무늬처럼 느껴진다.

또 세대와 계층과 지역과 이념으로 갈라진 오늘 이 시대의 난맥상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서로 얽히고설킨 뿌리의 자세에서 민초들의 이타적 사랑의 힘이 먼저 느껴지고,

각자 다른 나무에서 뻗어 나왔으나 결국 하나가 되는 합일과

상생의 힘과 가치가 먼저 느껴진다.

 


뿌리가 지상으로 솟아나오면 나무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길의 나무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뿌리를 계단처럼 힘껏 밟고 올라갔어도 살아남아 있다.

그것은 지상의 뿌리들이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함께 공동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합일의 자세와 그 정신의 힘이 그들을 살아남게 한 것이다.

함께 화합을 이룸으로써 나무의 생명을 유지하고 산길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이룬 점,

그것이 다산초당으로 가는 뿌리의 길의 의미다.

 

 

 

 

 


나무뿌리는 혼자 있으면 거칠 데 없이 뻗어 나가느라 직선이 되기 쉽지만,

함께 있으면 다른 뿌리와 어울리기 위해 자연히 곡선의 아름다움을 지닌다.

실제로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의 뿌리를 부분적으로 보면

이리저리 나눠지고 갈라져 어지러울 정도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움이 그지없다. 나는 이 아름다움처럼 우리 시대도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움을 창출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뿌리의 길의 아름다움 앞에서

합일된 정신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본다. -끝

 

 

정호승

 

 

 

 

뿌리의 길

                                                       

다산 초당을 찾아가는 길에 만난

 

뿌리의 길을 소개합니다..

여러분도 정호승님의 시처럼

 

가슴에 와 닿는 뿌리의 길을 함께 걸어보시길 바랍니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을 가다보면

 

뿌리의 길을 만나게 됩니다.

어머나 세상에... 이렇게 뿌리가 땅위에 올라와 있다니...

 

깜짝 놀라게 되는 길을 만나고

 

뿌리를 밟지 않고 걷기 힘들만큼 온통 길이 뿌리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뿌리가 계단처럼 뻗어 있습니다.

뿌리의 길을 걸으면

 

그 시대를 고뇌하던 다산의 마음이 보이는듯 하여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제멋대로 휘어지고 꺾이고

 

휘감은 뿌리의 길은 알고 있으리라.

수 많은 고뇌가 이 길에 깔려 있음을 보게되는 길이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를 읽으며 공감하고.....

뿌리의 길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 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 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흠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할 길이 되어 눕는다.

-정호승님의 詩-

 

 

 

 

 

 

 

 

 

 

 

 

 

 

 

 

 

 

 

 

 

 

 

 

 

 

 

 

 

 

 

 

 

 

 

 

 

 

 

 

 

 

 

 

 

나는 뿌리의 길을 오르며

오래전 읽었던

아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지식인이 세상에 전하려고 책을 펴내는 일은 단 한사람만이라도

그 책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해서다.

나머지 욕하는 사람들이야 신경 쓸 것 없다.

만약 내 책을 정말 알아주는 이가 있다 면,

너희들은 그가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설령 적대시하던 사 람이라도 그와 결의형제를 맺어야 한다.”

 

 

 

뿌리의 길을 걸으며

 

정호승님의 시구처럼

 

땅 위로 흐르는 눈물 덩이를 밟고 지나야 했습니다

 

 

 

 

 

 

 

 

 

 

강진 다산초당 뿌리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369

 

 다산기념관(수련원) 주차장 ~ 귤동마을 ~ 다산초당 ~ 다산 기념관 주차장

(약 2.6km, 1시간 10분 소요)

 

 

전남 강진군에 있는 다산초당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년의 유배기간중에서

11년을 머물며 후진 양성과 더불어 목민심서의 집필 등 다산 실학을 집대성한 곳입니다.

다산 기념관 주차장에서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숲길은

 

가벼운 발걸음과 깨끗한 마음으로 걸을 수 있는 길로

나무 뿌리가 이리저리 드러나 있는 길의 모습을 보고

 

정호승 시인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이름하였습니다.

 

특히 올해가 다산 선생 탄생 250주년이자

 

한국인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인물로 선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의미를 생각하며 다산초당 뿌리 길을 걷는다면

 

더욱 뜻깊은 발걸음이 될것 같습니다.

 

 

 

 

 

 

 

2010년 2월에 '삼남대로를 따라가는 정약용의 남도 유배길'을 걷기위해 

다산기념관을 찾고 약 2년 반만에 다시 이곳을 찾습니다.

 

 

 

 

 

 

입구에 참 좋은 글귀가 있어서 차분한 마음으로 읽어봅니다.

우리가 늘 바라는 기쁨이나 행복이란 것도 바로 '저'곳이 아니라 '이'곳에 있겠지요.

 

 

 

 

 

제가 오늘 걷는 이 아름다운 길에도 행복과 기쁨은 늘상 깃들어 있지만

그것을 진정한 행복으로 느끼는 것은 온전히 내 마음에 달린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나저나 요즘 제 마음속 주제가 '일상의 행복'인가 보네요.

 

 

 

 

 

참 반가운 시그널을 만났습니다.

저도 작년에 삼남대로 길 중 일부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었는데

벌써 이 리본을 나무에 거는 방법도 다 잊어버렸네요. ㅎㅎ

(삼남길 개척단 11기 활동 - 배꽃길 만들기 : http://blog.daum.net/sannasdas/13389814)

 

 

 

이곳에 오면 꼭 걸어보하야 할 길이 이 두충나무 숲길입니다.

시간이 흘러서인지 이 나무들도 키가 더 커진것 같네요.

 

 

 

걷기 열풍때문인지 이길도 다양한 이름으로 만들어져서 불리는 것 같네요.

정약용 유배길도 당연히 삼남대로 길 중 일부입니다.

 

 

 

다산 기념관에서 귤동 마을로 넘어가는 길도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다만 이렇게 깊게 땅을 파서 길을 만든 이유가 무언지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늘 궁금하네요.

 

 

 

비가 많이 오고 땅이 많이 패여서 인지 나무의 뿌리가 드러나 위태롭게 보이는데요.

여튼 오늘 걷는 길이 뿌리 길이라는 주제를 입구에서 부터 각인을 시킵니다.

 

 

 

식당과 민박집이 있는 율동 마을 입구를 지나 이제 본격적으로 다산초당 길을 오릅니다. 

땅으로 드러나 있는 뿌리들이 마치 계단 역할을 해주네요.

 

 

 

몇년전에 왔을 때 보다 숲도 더욱 무성해진 느낌입니다.

최근에 태풍때문에 나무들이 많이 쓰러져있는데

 

이곳은 숨어있는 지형인지라 피해가 없는것 같네요.

 

 

 

땅으로 이리저리 얽혀있는 뿌리의 모습에서 이 길을 따라 걸었던 옛 사람에서 부터

오랜 세월의 흔적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정호승 시인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이름했습니다.

아래 시를 읽어보니 다산 선생은 모든 길의 뿌리였다는 글귀가 가슴에 와닿습니다.

글을 읽고나니 어쩌면 슬픔이 가득 배여있는 뿌리를 밟고 지나가기가 왠지 쉽지않네요.

 

 

 

마치 뿌리의 길이라는 이름을 상징하는 듯 고목이 뿌리를 들어내고 휘어져 있습니다.

 

 

 

죽어버린 고목의 모습을 바라보니 어쩌면 이루고자하는 큰 꿈을

 

전부 펴지못한 다산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계곡 물소리도 듣고 새소리도 듣다보니 다산초당이 지척입니다.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서암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한 곳이라고 합니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이라고도 하고요.

 

 

 

 

 

다산초당은 아래 그림처럼 초가지붕이었다고 합니다.

1957년에 다산유적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을 했고요.

 

 

 

 

과거에는 없었는데 이곳을 관리하며 다산초당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다산 초당의 이야기를 설명해주시는 문화해설사 분들도 계시더군요.

 

 

 

 

 

다산초당 건물 뒤로 올라가면 정석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습니다.

이 글씨는 다산 선생이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직접 새겼다고 하는데

깔끔하고 정결한 그분의 성품을 보는 듯 하네요.

 

 

 

 

 

 

동백꽃이 마당에 떨어져 있는 계절에 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여러 차례 이곳을 찾았었지만 한번도 그 때를 맞춰서 오지는 못했습니다.

다음번에는 백련사 길을 넘어 꼭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에 오고 싶네요.

 

 

 

 

다산초당 마당에는 연못이 있고 또 연못 가운데에는 돌을 쌓아 만든 '

 

연지석가산이라 이름한 작은 산이 있습니다.

바닷가의 돌을 가져다가 쌓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가 살던 고향인

 

두물머리가 생각이 나서는 아닐까 추측해보네요.

 

 

 

연못을 지나니 송풍루라고도 불리는 동암이 나옵니다.

이곳 동암은 다산 선생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권의 책을 갖추고

 

손님을 맞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또한 목민관이 지녀야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고 하고요.

 

 

 

동암을 지나가면 백련사로 넘어가는 숲길이 나옵니다.

언제 걸어도 참 좋은 사색의 길이지요.

 

 

 

오늘은 백련사로 가지않고 다산초당만 보기로 하고 숲에서 되돌아 나오는데

천일각이 있던 자리가 전체 수리중이라 그런지 횡하더군요.

 

 

 

다산 선생은 이곳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천주교 사건으로 참형을 당한 형 정약종과 매형 이승훈,

그리고 멀리 흑산도로 유배를 떠난 형인 정약전을 그리며 암울한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이 생각을 하니 얼마전에 읽어본 김훈 작가가 쓴 '흑산'이라는 책이 생각이 납니다.

흑산은 조선후기 천주교의 박해와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를 다룬 소설이지요.

 

 

 

 

 

그래도 세상의 운명을 한탄하지 않고 이곳에서 목민심서 저술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 사회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다산 실학사상을 완성했으니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그리고 귀향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일체의 관직에는 오르지 않고

 

 75세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실학 연구에만 몰두한

 

그분의 발자취가 다시금 느껴집니다.

 

개인이나 이해집단의 권력욕보다는

국민과 국가 그리고 민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진정성 있는 선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네요.

 

 

 

 

 

 다시 왔던 길을 거슬러 되돌아 갑니다.

가끔은 인생도 길처럼 되돌아 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길이 아니기에 되돌아 갈 수는 없겠지만

다만 앞선 분이 남겨놓은 길과 뜻을 따라 작은 걸음이라도 할 수는 있겠지요.

 

 

 

 

 

흘러간 역사에 가정은 필요없겠지만 개혁군주였던 정조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다산 선생은 유배를 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그 분의 꿈이 단지 책에만 머물지 않고

세상속에 이루어져서 지금 제가 사는 세상도

 

조금은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산초당 길을 걷고나서 다산 기념관을 빠져나오려는데

몇년전 유배길 걷기를 시작한 안내판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유배길 구간이 일부 변경이 되고 새롭게 추가가 되어

1코스로 과거에 없었던 주작산 휴양림길이 생겼고

 

바다둘레길이라고 해서 2개 구간이 추가가 되었더군요.

 

 

 

하지만 당초 4코스였던 월출산 자락 기 충천길은 사라지고 없더군요.

요즘에는 국가나 지자체 등에서 만든 길은 거의 가지 않기에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가 없지만

하필이면 변경 지점이 강진군과 영암군의 경계인지라

행여 강진군과 영암군의 이해 관계에 따라 그리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뿐입니다.

늘 사람이 문제지 길이 문제는 아닐테니까요.

다산의 실학 사상도 서로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 윈-윈하는 공생을 원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다산초당에 이르는 길까지

흙길에 솟은 뿌리를 보며

나를 다잡아 보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편집과음악=씨밀래

출처=정호승,준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