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송춘희가 부른 대중가요 ‘수덕사의 여승’이
일엽을 소재로 한 노래라는 설이 있어
한 번 올려봅니다.
수덕사 선수암(善修庵)과
수덕사 환희대(歡喜臺)
수덕사의 부속 암자로서 1877년 비구니 귀만스님이 창건한 사찰입니다.
일엽(一葉, 1896∼1971)스님의 본명은 김원주(金元周)입니다.
그는 평안남도 용강군 삼화면 덕동리에서
아버지 김용겸 목사와 어머니 이마대 사이에 5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기독교계 학교를 다니며
자연스럽게 신학문을 접했습니다.
“덕숭산 수덕사의 지는 해는/
청춘을 불살랐던 여승들의 최후와 같이/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노을빛이/
덕숭산과 수덕사 계곡을 붉게 물들이며/
새털구름 속으로 얼굴을 가리고/
청춘을 빨갛게 불사른 채/
열반에 들어간다/
산 길 백 리 인적 없는 수덕사에 어둠이 내리면/
법당엔 하나둘 등불이 켜지고/
창호문 사이로 배어 나오던 외로운 그림자들!/
청춘을 불사르다 가신 님들의 그림자들!/
그 님들은 지금 어디로 가셨는가/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 혼까지도/
그만 다 바치고 싶다 하셨던 간절한 님들의 말씀/
오늘은 저녁 쇠북소리 되어/
길게 누운 덕숭산 그림자 속으로/
옴마니 반메훔을 부르며 울려 나간다”
일엽스님의 ‘수덕사의 석양’이란 시입니다.
가정환경은 어려웠으나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해 일찍이 서구사상을 익혔습니다.
귀국한 뒤 여성 운동을 전개하며 한국 최초의 여성주의 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했습니다.
‘일엽’이라는 아호는 춘원 이광수가 그녀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사
당시 일본의 유명한 여성문인 ‘하구치 이치요의 이름을 따 지어 준 것입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도 친구 사이로
공개적인 글을 주고받는 등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나혜석과 더불어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가수 겸 배우 윤심덕, 교육인 박인덕과는 용강에서 함께 자란 친구였습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동생의 갑작스런 죽음을 겪은 이후 일엽의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됐습니다.
어린 동생의 죽음을 접한 스님은 그 통탄의 심정을 글로 옮겼으며
이것이 한국문학상 신시(新詩)의 효시로 불리는 ‘동생의 죽음’이 됐습니다.
14세 되던 해 스님은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남은 동생들도 차례로 단명(短命)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스님이 불가(佛家)에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백성욱 박사와의 만남 이후부터입니다.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백 박사와의 만남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고리타분하게만 여겼던 불교 속에 그녀가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왔던
자유와 평등의 세계가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1928년 스님의 나이 33세 되던 해, 불문에 들어선 스님은 수행에 있어서도 남달랐습니다.
만공스님의 지도편달로 오후불식, 장좌불와는 물론 목숨을 건 구도행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몇 해가 흘러 마침내 스님은 ‘고인(古人)의 속임수에 헤매고 고뇌한 이 예로부터 그 얼마인가.
큰 웃음 한소리에 설리(雪裏)에 도화(桃花)가 만발하여
산과 들이 붉었네’라는 오도송(悟道頌)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이후 중생제도와 비구니 스님의 위상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특히 스님은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 등 숱한 저술을 통해
불교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습니다.
시대의 불의와 타협치 않고 한평생을 꿋꿋이 살았던 일엽스님은
1971년 1월 28일 세수 76세, 법랍 43세로 입적했습니다.
수덕사(修德寺)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에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 7교구 본사(本寺)입니다.
그곳에 일엽스님이 출가해 삭발했다는 견성암, 환희대(歡喜臺)가 있습니다.
한편 가수 송춘희가 부른 대중가요 ‘수덕사의 여승’이 일엽을 소재로 한 노래라는 설이 있습니다.
일엽은 출가 전 일본 명문가 집안의 한 남자를 만나 아들을 낳았지만
집안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습니다.
이당 김은호 화백의 제자였던 그의 아들, 화승(畵僧) 김태신이
14살에 처음으로 어머니 일엽을 찾아갔을 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한 말이 유명합니다.
이는 김태신의 자전 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에 기록돼 있습니다.
“다 버려야 우주화한 인간이 된다”는 그의 어록처럼
그는 아들뿐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구도(求道)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내가 객으로 보였는지 유난이도 짓어 댔다.
사찰의 쪽문이 눈에 쏙 들어옵니다.
수덕사 환희대(歡喜臺)
수덕사 부속 암자인 환희대는 비구니 스님들이 기거하며 수행 정진하는 암자로서
김일엽 스님이 주석하다가 열반하신 곳으로 1926년 창건되었습니다.
편집과음악=씨밀래
출처=솔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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