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올린 자료에 뎟붙여 오늘은 수덕사와 수덕여관을 위주로 해서 올립니다.
나혜석거리를 보고나서 집에와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정말 대단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시대에 갇혀 피를 흘려야만 했던 사람.
일본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조선에서 화가로 인정받고,
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편한 인생을 얼마든지 살 수 있었을텐데,
3.1운동에 가담하고, 그 당시의 축첩제도에 대해 반대하고,
결혼으로 인한 여성의 속박을 거부했던 진취적인 한국인.
남편을 따라 유럽을 여행하고, 그곳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조선으로 돌아와 바람핀 여자, 이혼당한 여자로 매도를 당하고...
그래서 자신이 낳은 아이들앞에 설 수 없었던 한많은 여인.
결국 친구 김일엽스님을 쫓아 수덕사를 찾아가 중이 될 것을 원하지만,
만공스님에 의해 거부당하고...
수덕사밑의 수덕여관에서 고암 이응로화백에게 그림공부를 받고...
나중에는 종로주위의 절을 떠돌다가 시립병원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아야 했던 나혜석.
인터넷에서 그녀의 삶을 읽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또한 이런 고생스러운 삶을 살아야했던 그녀의 삶에 대해 무지했던 저의 지적 아둔함에 대한 책망감...
그래서 여행은 여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공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저에게는 많은 가르침을 심어주는 소중한
수원 인계동에 위치한 나혜석거리였어요...
수덕여관 6인의 순정,사랑,예술,인생 이야기
한국 최초의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은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수덕사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 부터 수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자,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1934년 이혼 후 극도로 쇠약한데다,
어린 딸과 아들이 보고 싶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일엽이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마지못해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한다.
몇 년 전 경성에서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 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같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한 나혜석은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5년 동안이나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고1인 시위 하면서 버티는 한편
붓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며 찾아오는 예술인들과 소일한다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수덕사로 김일엽스님을 찾아온다.
그 소년은 김일엽이 일본인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이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p>
팔베개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준다.
나혜석 역시 모성애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 중노릇은 못 할 거라고 생각한다.
김태신은 이 후에도 어머니 김일엽을 찾을 때마다
수덕여관에서 묵는데,
나혜석은 마치 자기자식을 대하듯 팔베개를 해주고
자신의 젖을 만지게 하는 등 모성에 굶주린일엽의 아이를 보살핀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김태신(후에 일당스님)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치는데...
나혜석과 특별한 교분이 있는 청년화가 이응로도
자주 찾아와 이들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실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이러한 연유로 김태신도 후에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유명화가가 된다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있던
청년 이응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둘도없는 선배이자 스승이어서
자주 만나려 수덕여관을 들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함께 이 산속 외진 곳에서 아예 같이 기숙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누나 같은 스승이자 선배 화가일 뿐
애정관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응로에게
파리의 환상을 심어 준다.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노는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인 다음, </p>
부인 박귀옥에게 운영을 맡기고
,6.25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하는 등….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나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1958년 드디어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 버린다.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옥이 여관을 운영하나
글자 그대로 소박떼기 청상과부가 되어 버리고 만다.
머물다 미련 없이 떠나 버린 두 사람과는 달리
박귀옥 여사는 변치 않는애정과 절개로
이국땅의 남편을 그리며 수덕여관을 지킨다.
박귀옥여사가 외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이른바“동백림사건”으로 1968년 이화백이 납치되어
형무소에 수감된다.박귀옥은 한결같은 지극정성으로
이화백의 옥바라지를 한다.출옥 후
이화백은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수리면서
그녀 곁에 잠시 동안 머무른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와 떠나 버린 남편을
병구완하는 박귀옥 여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런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 화백은 아마도 그 마음을 추슬러 여관 뒤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새겼으리라.....
그리고는 “이응로 그리다,”라는<
사인까지 남겨 놓은 뒤
“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고
말하고는 파리로 또 훌쩍 떠나버린다.
박귀옥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어느덧 팔순을 앞둔 세월까지 남편을 기다려 온다
.그러나 죽기 전에는
꼭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라 실 날 같은 희망으로 살아 왔지만,
고암은 1992년 귀국전시를
앞두고 파리에서 눈을 감고 만다.
장례식에도 가 볼 수 없는 박귀옥은 마지막 소원으로
이응로 화백의 유골이라도 돌려 받아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히고 싶어 한다.그녀는 고암이 파리로 떠날 때
그의 출세 길에 지장이 될까 봐 이혼수속을 허락해 준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이제 그녀는 고암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법적으로 남남의 처지였던 것이다.
그녀의 방에는 젊은 시절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과
고암이 남겨준 갈대꽃이 핀 강가에 홀로 서있는
오리그림이 걸려 있다.고개를 내밀고 어느 곳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꼭 자신의 처지 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2001년초 수덕여관 주인 박귀옥 여사가
92세를 일기로 돌아가신다.
그리고 이 수덕여관도 폐허와 전설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다.
이제 수덕여관과 수덕사에 얽힌
추억의 인물은 김태식 한 사람만 직지사에 생존해 있다.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고,
현재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일당스님 (김태신)
그가 바로 일제 시대 한국 최초의여자 유학생이자
당대 최고의 비구니로 칭송 받던
일엽스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공개돼 화제다.
67세에 불가에 귀의하여 80세 노인이 된
노스님이 털어 놓는 그리운 나의어머니,
그리고 파란만장 했던 삶의 이야기... “
어머니란 존재는 각박하고 외로운 이승에 내 던져진
영혼의 안식처 입니다.
나의 고독, 나의 절망,나의 기쁨, 나의 소망은
모두 어머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로 인해서 갈증을 느꼈으며,
또한 어머니로 인하여 제 삶은 충만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뿌리치는 옷자락에 엉겨 붙은
눈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일본에서 화가로 더욱 유명한 일당스님은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출간하면서,
그가 한국 비구니계의 거두 일엽스님(1896~1971)의
아들이라는 것을세상에 드러냈다.
일엽 스님이 입적한지 31년 만의 일이다.
이로써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6사람의 이야기가 생겨난다.
글/임종건..한남대 교수사진/자작나무 세상구경
작/황진이
***천년학~~~대금연주
![]()
-진묵스님 글- ![]() 하늘을 이불삼고 대지를 자리삼아 산을 베고누웠으니 달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일세 바닷물로 술을 빚어 취하도록 마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더덩실 춤을추니 내 긴 옷소매가 곤륜산에 걸릴라. ![]() |
출처=황진이
'기타 > 수덕사에 얽힌 사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덕사 선수암(善修庵)과 환희대(歡喜臺) (0) | 2014.02.05 |
---|---|
한국에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사찰 목조건축물 충남 예산 '수덕사' (0) | 2013.11.15 |
원시림 속에있는 은적사-여수돌산 (0) | 2013.04.02 |
^^ 구름,꽃,하늘,그리고 지리산 ^^ (0) | 2012.07.08 |
[스크랩] 수덕사와 ,수덕여관 (0) | 2011.12.25 |